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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6 15:59

절대쌍교 -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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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쌍교 - 4권








 

              절    대    쌍    교    <제4권>


 
            어긋난 계획(計劃) 
 
 
강별학은 대노한 음성으로 호통쳐 물었다.

"철노영웅이 만약 자살한 것이 아니라면 내가 죽이기라도 했단 말이오? 흥, 만약 그를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죽였지 무엇하러 지금까지 기다렸겠오?"

유령 같은 사나이도 지지 않고 마주 받았다.

"철무쌍이 만약 자살할 마음이 있었다면 아마 지금까지 기다리지 않고 벌써 자살했을
것이오....... 그는 조금 전까지도 죽으려고 하지를 않았었는데 모든 진상이 밝혀지기 일보
직전인 지금 무엇때문에 자살하겠소!"

강별학은 안색이 점점 굳어져갔다.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철노영웅이 만약 자살한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그를 반격할 여유도 주지 않고 죽일
수 있단 말이오? 철노영웅은 이렇게 죽음으로써라도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당신은 그의 명예를 더럽힐 작정이오?"
"만약 정면에서 그를 죽이려 했다면 철노영웅은 분명히 반격할 여유가 있었을 것이오.
그러나 갑자기 엄습을 받으면......."

강별학은 큰소리로 소리치며 유령 같은 사내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러면 나 강별학이 그를 암습했단 말이오?"
"당신은 이미 철노영웅이 당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설사 암습을 한다 해도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오."
"그럼 나 강별학이 아니라면 화공자께서 암습이라도 했단 말이오?"
"암습한 사람은 철노영웅님과 매우 가까운 자임에 틀림없소. 철노영웅님은 꿈에도 그가
암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당하고 만 것이오!"

이때 갑자기 녹의 소년이 큰소리로 외치며 그 둘의 대화 속으로 끼어들었다.

"누가 감히 나의 스승님을 죽였나? 나와서 나까지 죽여 봐라!"

유령 같은 사나이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냉소를 터뜨렸다.

"너의 스승님을 죽인 자는 바로 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녹의 소년은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느냐? 산 같이 높고 바다 같이 깊은 은혜를 입은 내가 어찌
스승님을 죽일 수 있겠느냐? 너...... 너는 혹시 미친 것이 아니냐?"
"흥! 스승은 어버이와 같다고 했거늘 은혜를 보답하기는 커녕 어찌 양심과 도덕을 버리고
강별학과 내통을 한단 말이냐! 너는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려고 하자 사람들이 너를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악독하게도 너의 스승의 목에 칼을 꽂았다. 너는 아무도 본 자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내가 있다는 것을 잊었느냐?"

녹의 소년은 격하게 소리쳤다.

"너는 도대체 무얼 하는 자냐? 너는 누군데 나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려 하는 것이냐!"
"증거가 필요하단 말이겠구나?"
"그럼 증거를 내놓을 수 있단 말이냐?"
"다른 사람은 증거를 내놓을 수 없을지 몰라도 나는 증거를 내놓을 수 있다.
오호춘반관 식당에서 술에다 독을 놓아 조 총표두를 해치려 했던 자가 바로 너라는 것을
나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 말을 들은 녹의 소년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역시 큰소리로 소리쳤다.

"개나발 불지 마라! 나의 스승님이 조 총표두를 모셔 온 것은 삼상연표 사이를
화해시키려는 것이었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술에 독을 타서 조 총표두를 해치려 했겠느냐!"
"그것은 네가 강옥랑의 명령을 받고 그들이 화해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너의 스승님의 명성에 오점을 주려는 계책이었다."

녹의 소년은 안색이 하얗게 되어 더듬거렸다.

"너...... 너...... 네가 하는 말을 믿어 줄 사람이 있을 줄로 아느냐?"
"네가 그것을 부인하겠단 말이냐? 난 그날 네가 강옥랑과 그 악독한 계책을 상의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단 말이다!"
"네가 어떻게 친히 목격할 수 있었단 말이냐...... 함부로 사람을 모독하다니 나는 너를
가만히 놓아 둘 수가 없구나!"

그는 기압을 지르며 공격을 퍼부으려 하였다.
바로 그때 그 유령같은 사나이는 얼굴을 덮은 대나무 바구니를 슬쩍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를 똑똑히 보아라!"

불빛 아래 비친 그의 얼굴은 때가 끼어 더러웠고 산발한 머리는 유령의 형색이 다분히 섞여
있었다.
녹의 소년은 그 모습을 보자 공격을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뒤로 서너 발자국 물러섰다.
그는 겁에 질려 더듬거렸다.

"너...... 너......."

그 유령 같은 사나이는 또박또박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바로 그날 너와 강옥랑에게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귀신이다. 너희들은 나의 입을
막기 위해서 나를 죽였지만 나는 곱게 눈을 감을 수 없었기에 이렇게 귀신이 되어 너희들의
악독한 계책을 폭로하고 너희들의 생명을 빼앗아가고자 온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녹의 소년은 미친 듯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하였다.

"귀신이다...... 귀신이다...... 정말 귀신이 나왔다!"

순간 검광이 번쩍하며 그 녹의 소년은 대청 문에 당도하기도 전에 쓰러졌다. 한 자루의
장검이 그의 등에 박혔다.
녹의 소년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나동그라지고만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장검이 강별학의 손에서 날아간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든 눈길이 강별학에게
집중했다.
그러나 강별학은 태연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이 자는 정신착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곳을 벗어나게 한다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소. 불초로서는 그를 없애지 않을 수가 없군요."

유령 같은 사나이는 그의 말에 즉각 반격하고 나셨다.

"강별학! 너는 입을 막기 위해서 그를 죽인 것이다. 너 같이 사악한 놈은 언젠가는 천벌을
받아 죽을 것이다."

강별학은 입가에 조소를 띠우며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남에게 얼굴을 내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이 한마디는 그 유령 같은 사나이에게 큰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화무결 앞에 어찌
자신의 얼굴을 내밀 수 있단 말인가!
강별학은 여전히 태연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내 대장부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오. 당신이 말한 것들은 모두
무예계의 중대사이니 당연히 당신의 신분을 밝혀야 하지 않겠소?"

유령 같은 사나이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한 말들은 조금도 거짓이 없는 진실이오. 이 진실과 내가 얼굴을 내미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소?"

강별학은 의기양양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자기가 한 말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하면서 어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기를 꺼린단 말이오?"

소어아는 사방을 둘러 보았다. 과연 사람들의 눈동자 속엔 모두 의아심이 가득했다.
강별학은 다시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은 자신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감히 얼굴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오. 그의 목적은
분명 무예계를 혼잡하게 만들 속셈일 것임에 틀림없소."

강별학은 모든 사람의 얼굴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화무결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화공자께서는 이들의 내력을 혹 짐작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화무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되물었다.

"이들이라니오?"
"이 녀석과 그 가마를 든 일꾼은 한패일 것입니다. 불초는 내내 유심히 그를 주의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가마를 든 그 일꾼이 정말 저 녀석이 말한대로 내 아들 옥랑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의 말은 오직 대의를 위하고 조금도 개인의 사정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투였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아들의 경거망동한 행동일지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순식간에 많은 일들이 변화무상(變化無常)하게 발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강별학과 유령 같은 사나이만을 주시했을 뿐 그 가마를 드는 일꾼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강별학의 입에서 그 일꾼이 거론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화다닥 놀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일꾼 뿐만 아니라 다른 가마를 드는 일꾼들과 단씨 부녀가 타고있는 가마마저
종적을 감추었다.
소어아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두뇌가 영민함에도 경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큰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강별학이 대노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그 일꾼이 어디로 갔느냐?"

줄곧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나구가 불쑥 나서며 끼어들었다.

"단 어른께서 몸이 허약하시기 때문에 충격을 받을 것 같다고 먼저 가자고 그들에게
분부했었습니다."

나삼이 웃음띤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았다.

"뚱뚱한 사람은 확실히 충격을 감당할만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충격을 받으면 중풍에 걸릴
위험이 있지요."
"아니! 두 분께서는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셨으면서도 그 일꾼을 그냥 보냈다는 말씀입니까?
이 일이 확실하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불초도 용의자입니다."

강별학의 말은 교묘하게 진실을 가장한 것이었다.
소어아는 참다못해 큰소리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너 여우 같은 놈아, 연극을 하는 데는 정말 귀신 뺨을 칠 정도구나!"

그러나 강별학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 일꾼이 당신과 한패가 아니라고 누가 보장할 수가 있겠소? 당신들이 일부러 짜고 나
강별학을 함정에 밀어 넣을 속셈이 아니었소? 당신은 왜 그들이 가도록 가만히 놓아
두었소?"

소어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람들도 소어아 말에 대해서 적잖이 의아심을 품은 눈치였다.
소어아는 강별학이 손쉽게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한 번 느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고강한 무공보다는 지혜로운 말이 더 위력이 있었다. 또한 한마디 말이
무공의 격투보다 더욱 더 위험천만 했다.
강별학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소어아를 사지에 몰아 넣고 있었다.
사태는 급속도로 소어아에게 불리하게 되어 그는 완전히 거짓말쟁이로 몰리게 되고 말았다.
비록 강변학이 저지른 악독한 일들을 알고 있었지만 증거를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당하고 만 것이었다.
소어아는 창문을 향해 몸을 날리려 하다가 문득 멈춰서고 말았다. 화무결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별학은 뻔뻔스런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일꾼은 도망가게 할 수 있었지만 귀하께서는 아마도 도망가지 못할 것이오. 귀하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은 혹 무슨 큰 죄라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오?"

소어아는 빠져나가기 위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그러나 전혀 좋은 계책이 생각나지를
않았다.
이때 화무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친구 스스로가 얼굴을 내미는 것이 힘이 든다면 불초가 대신 수고해 줄 수도 있소."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화무결! 난 본시 당신이 매우 총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소. 그러나 이렇게 강별학에게
개처럼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보니 정녕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소?"

화무결은 그런 말을 듣고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그저 미소만 띠울 뿐이었다.

"친구가 만약 나를 화나게 할 속셈이라면 그것은 헛된 수작이오."
"흥, 화를 낼 줄 모르는 인간도 인간이오? 당신은 그것이 무슨 자랑인 줄 아시오?"
"나도 화낼 줄 모르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당신 같은 사람은 나를 화나게 할 자격이 없소."

강별학이 이때 웃음띤 얼굴로 끼어들었다.

"화공자께서는 비록 나이는 젊지만 수양이 노화순청의 경지를 이루었소. 그를 화나게
하려면......."

소어아는 큰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를 화나게 하려면 철심난을 빼앗아 오는 것 외에는 없다 그런 말씀이오?"

과연 화무결은 얼굴색이 변해 심각해졌다.

"이 일은 그녀와는 관계가 없으니 당신이 그녀의 이름을 꺼내지 마시오."
"철심난이 당신의 것도 아닌데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거요?"

무슨 영문에서인지 철심난에 대한 화무결의 태도에 소어아는 갑자기 뜨거운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화무결을 화나게 하고 싶었고, 도저히 화무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당당히 피튀기는 격투를 하고
싶었다. 설혹 격투를 하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가슴에 가득찬 울분을 터뜨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는 최근 두세 해 동안 강한 이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 피가 끓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참았다가는 가슴이 터져 살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졌던 것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껄껄 웃으며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화무결! 내가 너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겠다. 철심난에게는 오래 전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녀가 이미 그에게 마음을 바친 이상 네가 아무리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 보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설혹 네가 그녀를 억지로 처로 맞이한다 해도
그녀의 마음은 역시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순간 화무결의 쌍장이 뿜어졌고 소어아는 미친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몸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순간 소어아가 서 있던 자리의 뒤쪽 벽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구멍이 나고 말았다.
만약 조금만 늦었어도 소어아의 가슴은 난파당한 배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었다.
몸을 솟구친 소어아는 높이가 넉장은 족히 되는 천장까지 날아올랐다.
그는 손바닥으로 기둥을 잡고 있었지만 몸이 바람 속의 낙엽처럼 좌우로 흔들거렸다.
아래서 볼 땐 마치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강별학은 그것이 바로 경신술에서 가장 뛰어난 신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은 곧 떨어질 것처럼 흔들거리고 있었지만 사실은 흔들거릴 때마다 무서운 살수를
내뿜고 있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섣불리 몸을 솟구쳤다가는 곧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나 진배가 없었다.
화무결은 몸을 솟구칠 뜻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잠잠히 서서 자기의 발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너무도 태평하여 마치 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가 일격을 펼쳐 낸 후 갑자기 죽은 듯 조용해진 것을 보자 모두 의아심이
생겼다. 그러나 더욱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소어아가 왜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도망가지를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화무결이 완전히 정신통일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지도 듣지도 않는 듯 했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화무결의 눈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비록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감히 도망갈 수가 없었다.
떠들썩하던 대청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 긴장된 분위기는 더욱 더 짙어지기만 했다.
소어아는 위에서 계속 흔들거리고 있었다. 대청안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엔 그저 불안함과
어지러움을 느끼다가 나중에는 대청안의 등불이 소어아의 몸과 함께 흔들리는 것 같이
느껴졌고 심지어는 대청마저 흔들거리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뱃속의 창자가 입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화무결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강별학만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화무결은 그 모습이 마치 거세게 휘몰아치는 파도 속에 우뚝 솟아 오른 바위와도 같이
보였다. 그의 자세는 비단 듬직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무척 안정된 기분을 들게
해주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몸에서는 강렬한 살기가 스며 나오고 있어 강별학 외에는 그
누구도 근접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치 이러한 상황을 영원히 유지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움직임은 당연히 정체보다 오래 유지될 수는 없었다.
강별학도 물론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한가닥의 미소가 점점 번져나오고
있었다.
밤은 매우 깊어갔고 여름철 밤바람이 차지는 않았으나 대청에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에 눌려
절로 떨려왔다.
이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대청으로 갑자기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 들어왔다.
대청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소어아와 화무결이 어떤 동작도 취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제비는 돌연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아마도 무형의 살기를 견뎌내지 못한 것 같았다.
떨어진 제비의 그림자가 화무결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소어아의 몸이 팽이 같이 돌며 덮쳐 내려갔다. 보기엔 마치 그가 수십 개의
손발이라도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이 광경을 본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수십 개의 손발을 가진 천신이 내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화무결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허공에서 돌고 있던 소어아는 기압 소리를 내며 삽시간에 십육 초의 장(掌)과 팔 초의 발
공격을 펼쳐냈다.
그의 이 재빠른 공격은 격렬한 위세를 지니고 있었고 허초도 실초로 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단 일 초만 맞아도 도저히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입을 벌린 채 눈부시다는 감정만 느꼈을 뿐이었다.
만약 공격을 받은 사람이 화무결이 아니고 그들이었다면 그들은 막기는 커녕 어디로 피해야
좋을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화무결은 달랐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오른손을 내밀어 가볍게 저었다.
그의 이 일 초는 보기엔 공격의 초식 같지도 않았고 방위의 초식 같지도 않았다.
그의 일 초는 실로 비파를 퉁기는 듯했다. 부드러운 그의 손길엔 조금의 살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일 초가 뻗쳐나오자 소어아의 거센 공격은 완전히 무형으로
사라져갔다.
'짝! 짝' 하는 소리가 연거퍼 들려오며 소어아의 왼손은 자기의 오른손을 쳤고, 오른손은
왼손을 쳤다. 그리고 왼발은 오른발을 차고 오른발은 왼발을 차고 있었다.
그의 필살의 공세가 오히려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본 강별학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멋집니다! 아주 멋진 이화접옥이군요!"

화무결은 엷은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당신의 무공의 뛰어남은 실로 무예계의 일류 고수라 할 수 있고 또한 내력의 두터움 역시
예상밖이었소. 하지만 내력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부상 또한 더욱 더 심할 것이오."

그는 소어아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이때 대청안에 갑자기 한가닥의 거센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모든 등불이 꺼졌고 또한 수십 개의 강인한 암기가 흩뿌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암기는 강별학과 화무결을 향하고 있었다. 그 암기는 순식간에 등불을 일제히 모두
꺼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 수법과 힘이 고수의 솜씨였다.
그러나 그 암기가 강별학과 화무결을 해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가볍게 몸을 날려 재빨리
그 암기를 피했다.
대청안은 매우 혼잡스러워졌다.
이때 나구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러분들!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마시오!"

뒤따라 나삼의 음성도 들려왔다.

"그 녀석이 이 기회에 도망을 가버리면 큰일이니까 말입니다!"

이 말들은 본시 강별학이 하고 싶던 말이었다. 강별학은 감탄하며 생각을 했다.

(이 나씨 형제들은 과연 쓸만한 사람들이로구나!)

다시 나구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밖으로 나가서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막을 테니 너는 빨리 가서 불을 밝혀라!"

나삼의 음성이 뒤따라 들려왔다.

"알았어! 어서 가봐!"

곧이어 불빛이 번쩍거리더니 그는 이미 부싯돌을 밝혔다. 그리고는 재빨리 유령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흔적도 없었다.
강별학은 얼굴색이 변하며 재빨리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창밖에는 막막한 어둠
뿐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삼은 안타까움이 가득찬 표정으로 땅을 차며 소리쳤다.

"그 녀석이 참으로 빨리도 도망쳤군요. 자 빨리 쫓아갑시다!"

이때 화무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사 쫓아간다 해도 그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오."

강별학이 눈썹을 잔뜩 치켜 세우며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도망가게 이대로 놓아 두잔 말입니까?"

나삼이 끼어들었다.

"저의 형님이 아마도 그를 쫓아간 모양인데 잡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군요!"

화무결은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잡지 못할 겁니다!"

나삼은 놀라움이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왜요?"
"암암리에 암기를 퍼부은 그 사람은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졸간에
암습을 받아 그에게 시간의 여유를 주었으니 아마 그를 따라 잡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삼은 쓰디쓴 표정을 지으며 업을 열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화 공자님 앞에서도 사람을 구해 갈 수 있을 정도니 저의 형님의
실력으로는 당연히 따라 갈 수가 없겠죠."

강별학이 다시 끼어들었다.

"불초는 차라리 댁의 형님께서 그 사람을 따라 가지 못하기를 바라오. 혼자 힘으로 모험을
하면 신변에 위험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이 되오."
"마땅히 그 자를 잡아 강 대협의 더럽혀진 명성을 씻어 드려야 하는데 그를 놓쳐버린다면
큰 과오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탓하지 않고 도리어 저의 형님의
신변을 걱정해 주시니 강 대협은 진정 의기남아 이십니다."

강별학은 약간 우쭐한 기분에 느긋이 입을 놀렸다.

"옳고 그른 것은 당연히 강호에서 판가름 해줄 것입니다. 불초가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하지
않은 이상 남이 어떻게 나를 비판하든 간에 나는 추호도 그것에 관계하지 않습니다."

나삼이 또 나섰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천하에 이름을 떨친 사람은 당연히 모함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강 대협님의 명성은 해와 달 같이 밝고 눈부시니 설사 모해의 음모가 있다 해도
결코 강호에 속한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을 겁니다!"

강별학의 눈에선 빛이 번쩍거렸다. 매우 기분이 좋은 표정이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그 녀석은 절대 이대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의 목적이 나를
쓰러뜨리려는 것이니 멀지 않은 장래에 아마 또 나를 찾아올 것이오......."

화무결은 웃음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가 오면 강 대협께서는 절대로 그를 도망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강별학은 또박또박 말했다.

"그때가 오면 불초는 그가 어떻게 생긴 놈인가 보고 싶군요."
 

불빛이 꺼지자 소어아는 자기를 구하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이때 어느 사람이 그를 안더니 창문을 뚫고 나갔던 것이었다.
그 사람의 경공술은 정히 무예계에서 손꼽힐 정도였고 가볍게 몸을 몇 번 솟구치더니 이미
십여장 밖으로 가 있었다. 소어아는 희미하게 대청에서 외치는 나구의 목소리를 들었다.

"여러분들, 제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마시오."

그들은 순식간에 소란한 장원을 벗어났다.
조금 전 소어아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만약 지금 자기를 안고 있는 사람이 구해 주지
않았다면 소어아는 절대로 도망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소어아는 일생 동안 실로 적만 있고 친구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이며 왜 자기를 구했단 말인가?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구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발을 멈추지 않고 응답했다.

"음."

소어아는 그의 겨드랑 밑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소어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별로 좋은 사람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나를 구했습니까?"

그 사람은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별로 나쁘지도 않던데!"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하지만 나는 당신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어디 한 번 알아 맞춰 보시오."
"당신은 물론 남자일 테고......."
"그렇소."
"목소리를 들어 보니까 나이가 별로 많은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다고 적지도 않지."

소어아가 말했다.

"당신은 신석도장은 아닐 테고......."
"그렇소."
"당신이 만약 신석도장이라면 절대로 자신을 알아 맞춰 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오.
속세를 떠난 사람이 일부러 신비한 척 하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소어아는 그가 자신을 구해 주었는데도 오히려 심사를 슬슬 긁었다. 많은 말을 하게 하여
누구인지를 파악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옳은 말이오."

소어아는 여전히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헌원삼광이오?"
"하하, 나는 그 도박쟁이를 모르오."

소어아는 참다 못해 드디어 큰소리로 외치다시피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 사람이오, 귀신이오?"

그 사람은 여전히 웃을 뿐 별로 말이 없었다.

"당신은 평생 동안 생각을 해도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내지 못할 것이오."
"빨리 밝히지 않는다면 당신을 욕하겠소!"
"욕하시오. 나는 남의 욕을 듣는 게 취미니까."
"내가 못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당신이 정 말하지 않는다면 혈도를 점하고 묶어
놓은 후 얼굴을 똑똑히 보겠소."

그의 말은 협박에 가까왔다. 한편 그는 손을 그 사람의 요안혈에 갖다 댔다.

"내가 당신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누가 구해 달라고 했소? 비록 나를 구했지만 혹시 나를 이용하고자 해서인줄도 모르고,
나를 더욱 더 불행하게 만들런지도 모르오."
"당신은, 과연 상대하기가 매우 어렵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보아 왔지만
당신 같이 상대하기 힘든 사람은 처음이오......."

그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 한 집의 창문으로 날아 들어가 소어아를 바닥에다 내려놓았다.
방 안에는 등불이 밝혀져 있었고 소어아는 비로소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바로 그 신비한 나구였다.
나구는 웃음띤 얼굴로 소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겠지?"

소어아는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당신이었다니...... 어떻게 당신이?"
"평생 동안 생각해도 나일 것이라고 알아 맞추지는 못했을 것이오."
"조금 전 분명히 당신이 대청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이오?"
"그것은 나삼이 혼자서 두 사람의 음성으로 말한 것이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구한 자가 나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겠지."

소어아는 그제서야 희색이 돌았다.

"과연 교묘한 계책이군요. 나마저 속였으니 그들은 당연히 생각지 못하겠지요!"
"그 여우 같은 강별학을 속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오."

소어아는 유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소. 강별학을 속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오. 그러나 그를 속일 수 있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불초의 성은 나라고 하고 이름은 구라 하오."

소어아는 냉소를 터뜨렸다.

"비록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나를 속일 생각은 마시오. 당신은 필시 깊은
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는 벌써 알고 있었오. 당신들이 일부러 바보인 척 하고
이름을 감춘 것은 뭔가 음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오."

나구는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 제꼈다.

"형씨께서도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있으니 형씨께서도 무슨 놀라운 음모를 품고 있단
말이오?"

순간 소어아는 멈칫하더니 빙그레 웃었다.

"좋소. 당신은 언변도 꽤 유창하군. 내가 더 이상 당신에게 캐묻지 않으면 되지 않겠소?
그러나 당신이 누구든 간에 또한 무슨 음모를 품고 있든 간에 언젠가는 그것을 알 날이
있을 것이오."
"형씨께서는 불초가 아무런 음모를 품고있지 않다는 것을 언젠가는 알 날이 있을 것이오."

소어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또 물었다.

"나는 당신과 친척도 아니며, 알지도 못하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구했소?"
"불초는 오직 형씨께서 당하고만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 드린
것이오."

그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당신이 나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을 보고 나를 이용하기 위하여......."

나구는 껄껄 웃으며 그의 말을 도중에서 가로챘다.

"형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좋은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오."
"당신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면 이 천하에 나쁜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이오......
솔직히 털어 놓아 보시오.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구한 목적을 말입니다."
"음......."
"사람과 사람 사이란 원래부터 서로 이용하는 것 뿐이오. 당신은 나를 이용하려고 하지만
내가 당신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소?
만약 나에게 부탁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오. 절대로 당신을 탓하지 않을 테니까."
"형씨께서는 과연 호탕한 사람이오. 불초로서는 참으로 탄복할 수밖에 없소이다 그려."

그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소어아를 유심히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불초는 형씨가 오직 강별학의 가면을 벗기고자 하는 것을 알았소. 불초 또한 벌써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소어아는 그의 말을 급히 가로챘다.

"그래서 나를 구해 왔다는 말이오?"

나구는 또 다시 웃음띤 얼굴로 바꾸었다.

"형씨께서 만약 불초와 손을 잡는다면 강별학이 제아무리 교활하다 해도 아마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그는 멈칫멈칫 말을 하면서도 유심히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소어아도 그자 못지 않게 유심히 바라보았다. 결국 소어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분명히 철무쌍과 조향영을 도와주고 있으면서도 암암리에 강별학과 내통하고 또한
당신은 분명히 강별학과 내통했었는데 또 나와 손을 잡겠다하니 그것은 무엇 때문이오?"

나구는 살이 찐 아래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불초가 형씨와 손을 잡겠다는 것은 완전히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데, 형씨께서는 불초의
말을 못믿겠단 말이오?"
"좋소. 당신이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강별학의 가면을 벗기고 싶다면
나는 당신과 손을 잡겠소. 그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당신의 힘이 되어 드리겠오."

나구는 크게 기뻐했다.

"장부 일언 중천금이니 부디 약속을 지키기 바라오."
"당신과 손바닥을 맞부딪치는 것으로 맹세하고 싶지만 손이 아파서 그렇게 할 수도
없군요."

그의 말에는 다분히 농담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결코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용구매와의 재회(再會) 
 
 
그 방은 자그마한 다락방이었다.
소어아는 비로소 사방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장식이 매우 아름다웠고 두터운 양탄자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괴이하고도 진귀한 골동품들이 놓여 있었고, 벽에도 세련된 장식품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작은 칼이나 백옥으로 만들어진 작은 사람이나 말, 추악한 악마와
아름다운 선녀의 그림 등 방 안은 온통 신비함과 괴이함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구는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이 어떻습니까?"
"그것 보다도 도대체 누구의 집이길래 당신이 이렇게 함부로 들어 옵니까?"
"이곳은 바로 나의 집이오."

소어아는 깜짝 놀랐다.

"당신 집이라고? 강별학에게 들킬 것이 두렵지도 않소?"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불초의 거처는 아무도 모릅니다."
"당신은 실로 철저한 준비를 했군요. 이런 집까지 마련했으니......."

그는 다시금 사방을 살펴보더니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들 같은 두 남자가 이렇게 집을 장식하다니 참 알 수 없는 일이오."
"비록 불초 형제의 소유이긴 하지만 이 모든 장식은 우리 형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아! 그래요."

나구는 신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만약 이곳을 장식한 분을 본다면 아마 크게 흥미를 느낄 것입니다."
"어째서요?"
"절세 미녀인 까닭이오."

소어아는 껄껄 웃었다.

"미인?...... 나는 미인을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프오!"
"형씨가 비록 미색을 좋아 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 다릅니다.
그녀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형용하기 어려운 신비한 마력 같은 것을 지니고 있소.
그러니 형씨의 마음에 들지도 모르지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괜히 보고 싶어 지는군."

나구는 방울이 달린 줄을 잡아 당기며 말을 계속했다.

"형씨께서는 즉시 그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아담하게 방을 장식할 수 있는 여인이라면 분명히 남과 다른 기질이 있겠구나......."

소어아는 문득 생각이 난듯 나구에게 물었다.

"강별학은 아직도 그 낡아 빠진 집에서 살고 있습니까?"
"장소는 비록 그곳이지만 집은 전과 같이 낡아 빠진 것이 아니오."
"그는 남이 집을 가꾸어 주는 것이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모르는 말씀이오. 지금은 마음이 달라졌어요. 이번엔 화무결이 그를 위해 수리한
것입니다. 또한 화무결도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소어아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화무결이 그와 같은 사람과 어울리다니 참으로 안타깝소."
"강별학이 겉으로는 그토록 인자하고 어질게 행동하니 그 누가 사귀려 하지 않겠습니까?
화무결은 무공이 비록 고강하고 뛰어나긴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 젊고 어리석으니......."

소어아는 냉소하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화무결은 총명함을 마음 속 깊이 감추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르오.
그러나 당신이 만약 그가 젊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의
어리석음이오."

나구의 눈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형씨는 화무결과 깊게 아는 사이오?"
"이런 말을 들어 봤소? 자기가 가장 깊이 아는 자가 흔히 자기 최대의 원수라는 것을
말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갑자기 등줄기에 한기가 느껴져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한 여인이 유령 같이 그의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여인은 과연 양귀비를 무색케 할 정도의 절색이었다. 그녀는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지만 큰 눈동자 속에는 흡사 안개가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분명히 소어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소어아를 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또한 그녀의 눈동자는 애수에 젖어 있는 듯도 했고 마치 꿈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를 바라본 소어아는 멍해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놀랍게도 다름 아닌
모용구매였던 것이다.
나구는 보지 못한 듯 웃음띤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이분 몽소저(夢小姐)가 바로 이곳을 장식한 아가씨입니다."

 소어아는 의아심이 불 같이 일어났다.

"몽소저?"
"불초가 이 여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도 이 여자는 바로 이런 모습이었소.
혼자서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었지요. 나를 따라 오지 않겠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그래서 불초가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소. 꿈을 꾸고 있는 사람 같기에 그녀를 몽소저라 부르게 된
것이오."

소어아는 그녀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를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몰아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몽소저...... 꽤나 쓸만한 이름이군요."

나구는 잠시 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 아가씨를 아십니까?"
"당신이 보기엔 이 아가씨가 나를 아는 것 같소?"

나구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소어아를 향해 다시 물었다.

"물론 이 아가씨를 모르겠죠. 그런데...... 이 아가씨가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면 어떻하겠소. 나에게 이 아가씨를 주기라도 하겠단 말이오?"
"불초와 손을 잡은 이상, 불초의 물건은 바로 형씨의 물건이오. 더욱이 저희 형제는 늙고
뚱뚱하고 게으릅니다. 늙고 뚱뚱하고 게으른 것이 호색의 최대 적이라는 것을 아시오?"

소어아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당신이 그토록 호방하니 나로서는 사양할 수가 없군요."

이때 갑자기 한 차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려왔다. 한 사람이 창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름 아닌 나삼이었다.
나구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떻게 벌써 왔느냐? 그 강별학이란 녀석이 나를 의심하지는 않더냐?"

나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당연히 우리가 한 짓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지."

나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 한 명 밖에 없는 증인이 그에게 당했으니 이제는 마음을 푹 놓고 있겠구나."

소어아가 그들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었다.

"증인은 녹의 소년 말고 또 하나가 있소."

나구와 나삼이 서로 바라보더니 동시에 입을 열었다.

"또 누가 있단 말이오?"
"그의 아들 강옥랑이 있다는 것을 잊었소?"

나구가 그의 말에 응답했다.

"그러나 강옥랑이 어떻게 자기 애비의 음모를 탄로 시키겠오?"

소어아는 천천히 대답했다.

"나에겐 혹시 방법이 있을런지도 모르오."

소어아는 의자에서 내려와 두텁고도 부드러운 양탄자 위에 드러눕더니 시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잠겨 중얼거렸다.

"포근한 태양, 넓은 대초원...... 이 양탄자는 마치 초원의 잔디같이 부드럽고 포근하구나.
이 위에서 한 삼 일 동안은 잘 수 있다면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군."
"졸리다면 얼마든지 마음놓고 주무시오. 이곳에서는 절대로 형씨를 귀찮게 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

소어아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대낮인 것 같았다. 그러나 창문에 두꺼운 주렴이 덮혀 있었기
때문에 창틈으로 강한 햇살이 몇 줄기 뻗쳐 들어올 뿐 다락방 안은 어두웠다.
눈을 뜬 소어아는 휑한 방구석에서 모용구매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마치 방금 와서 앉은 것 같기도 했고 어젯밤부터 줄곧 그렇게 앉아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희미한 광선 아래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밝고 애수에 쌓인 눈, 길고 부드러운 손, 투명할
정도로 희고 고은 발...... 이 모든 것은 속세의 사람이 결코 지닐 수 없는 기이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소어아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벙어리처럼 있던 모용구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는 어디서 당신을 뵌 것 같아요. 당신을 알 것 같아요."

소어아는 깜짝 놀랐다.

"나를 안다구요?"
"네!"
"소저는 어디서 나를 봤는지 기억하겠습니까?"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 뿐이에요."


소어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저, 소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모용구매는 양손으로 머리를 휘감으며 괴로운 듯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그것을 생각하기만 하면 머리가 아파와요."
"그렇다면 생각하지 말아요."
"당......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나요?"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도 확실히 생각이 안 나는군요.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당신이 전보다 몇십 배나 더욱
아름다워졌다는 것 뿐이오."

공기 중에 가끔씩 은은한 모용구매의 체취가 풍겨왔다.
소어아는 그녀의 투명하고 고운 발을 바라보자 그날 본 그녀의 나체가 생각났다.
그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떻든 간에...... 당신은 자신의 과거를 알아야 하지 않겠소?"

모용구매가 말을 받았다.

"나의 과거를 생각나게 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한이 없겠어요."
"소저는 정말 어떤 희생이든 각오하겠습니까?"
"네."
"좋아요! 그럼 우선 옷을 다 벗으시오. 내가 방법이 있으니 말이오."

모용구매는 떨리는 음성으로 우물거렸다.

"발...... 발가벗으라고요?"
"소저는 필시 무서운 일을 당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오. 그 일이 아직도 소저의 몸에서
악마 같이 떠나려 하지 않는 까닭에 과거를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모용구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저가 과거를 기억하려면 우선 몸에 붙어 있는 악마를 쫓아 버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몸에 걸친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을 완전히 없애버려야 해요."

모용구매는 그의 말에 완전히 넋을 잃은 듯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소어아는 킬킬거리며 재미난다는 듯 계속 말했다.

"옷은 사람에게 가장 거추장스러운 물건이오. 당신이 우선 발가벗어야지만 내가 악마를
쫓아 버릴 수 있소. 매우 간단한 일이니 소저는 바로 알아들었을 것이오. 그렇죠?"
"하지만...... 하지만......."

이때 소어아의 손은 이미 그녀의 발을 쓰다듬고 있었다.

"틀림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모용구매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날카로운 빛이 번쩍거리는 단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 단검의 끝은 바로 소어아의
목구멍을 향하고 있었다.
소어아는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어물거렸다.

"왜 이러십니까? 나는 단지 소저를 도와 드리려는 것뿐인데요."
"어떤 사람이 누구를 막론하고 내 몸에 손을 대기만 하면 즉시 이 칼로 그를 죽이라고
했어요."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나씨 형제들이 당신을 건드리지 않았다 싶었지."
"지금 무어라고 했지요?"
"아니오, 아무 것도 아니오, 그 사람은 당신이 과거를 생각해내는 걸 원치 않았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오."

이 말을 듣자 모용구매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왜 나를 속이려 했을까요?"
"소저는 그를 압니까?"
"모르겠어요."
"그러나 소저는 나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소저는 왜 나를 믿지 않고 그를 믿으려 합니까?"

모용구매는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은 어느
사이엔가 양탄자 위에 떨어져 있었다.
소어아는 그녀를 잡아 당겨 포옹했다. 모용구매는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서서히 그녀의 옷을 벗겼다.
이때 갑자기 차디찬 음성이 들려왔다.

"안 돼!"

소어아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창문의 주렴 뒤에서 한가닥의 은실이 뻗어 들어와 그의 손에 감겼다. 동시에 작은
인영이 주렴으로 가린 창문 밖에서 날아 들어오더니 소어아를 향하여 덮쳐왔다.
소어아는 곤두박질을 하며 그 은실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그 길고 가는 은실은 끊어지지가
않았다.
소어아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검은빛이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도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단지 한쌍의 검은색이 많고 흰색이 적은 눈동자가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그 눈동자는 마치 귀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괴함
과 공포를 느끼게 했다.
소어아는 놀라움이 가득찬 눈빛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흑 지주가 아니오!"

흑 지주는 소어아의 외침소리를 듣자 재빨리 펼쳤던 신형을 억지로 멈추었다.

"너는 누군데 나를 안단 말이냐?"
"흑 노제, 벌써 이 형님을 잊었단 말이냐?"

흑 지주는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너로구나! 그런데 어떻게 이 모양이 됐느냐!"

소어아는 긴장을 풀며 낄낄거렸다.

"너도 진실한 얼굴로 남을 대하지 않는데 나라고 변장을 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흑 지주는 소어아를 유심히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토록 비겁한 짓을 하다가 들켰는데도 낄낄거리며 말 할 수 있다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천하에 너밖에 없을 것이다."

소어아의 얼굴에는 여전히 장난기 섞인 웃음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어째서 비겁한 일이라 할 수 있는가? 젊고 튼튼한 사내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짓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정신도 멀쩡하지 않은 사람을 가지고 어찌 그렇게 비겁한 짓을 할 수 있느냐
말이다."
"그녀를 해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도리어 그녀를 위한 것인데 뭐가 어쨌단 말이냐. 그녀가
싫은 사람에게도 이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흑 지주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소어아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일은 그리 대단스러운 것도 아닌데 뭘 그래. 마음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나쁘게만 보지만 나 같은 사람은 그렇다고 보지 않아."
"그런 개나발 같은 소리가 너의 입에서 나오는 데도 그리 싫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군."
"그 원인은 내가 전혀 미워할 만한 사람이 못되는 까닭이야."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끊고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 흑 지주가 다시 한숨 섞인 한마디를
했다.

"네가 도대체 악인인지 호인인지를 네 자신은 알고 있느냐?"
"나는 물론 나쁜 사람이라 할 수 없어. 적어도 나는 고의로 나쁜 짓을 하려고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너는......."

이때 갑자기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흑 지주의 몸이 번쩍거리더니 또다시 두터운 주렴이 덮혀 있는 창문밖으로 날아갔고, 그가
쥐고 있던 은실도 그를 따라 밖으로 날아갔다.
소어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긴장을 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 사람은 방 안의 소리를 엿듣는지 가만히 있다가 끝내는 그대로 물러갔다.
창문에 덮힌 주렴을 걷은 소어아는 이미 흑 지주를 찾을 길이 없었다.
창 밖의 햇빛은 서서히 황혼 빛을 드리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밝은 낮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소어아는 혼잣말을 했다.

"아직도 대낮인데 그 흑 지주는 전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마음대로 다닐 수 있구나.
무예계의 인물들이 그를 괴물로 취급하는 것이 역시 허위는 아니었구나!"

이때 모용구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그가 매우 이상하다고 느껴집니까?"

소어아는 밖을 이리저리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단검을 준 자가 바로 그 자인가요?"
"네!"
"그는 자주 소저를 만나러 옵니까?"
"네."
"남에게 들키는 것을 두려워 하지는 않습니까?"

모용구매는 입술을 깨물며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여기 주인인 두 분도 막연히 누군가 나타난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의
그림조차 볼 수가 없었어요. 그는 꼭 내가 혼자 있을 때만 여기를 옵니다."

소어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가 당신을 자주 찾아오고 이 부근에 있다니...... 혹시 그도 나씨 형제란 작자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단 말인가? 이들 형제는 그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하니 도대체
어떤 신분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다락 안을 두 바퀴나 돌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든 그는 모용구매가 아직도 나체로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젊은 육체는 마치 비단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고, 길고 탄력있는 양다리가 날씬하게
뻗쳐 있었으며 부드러운 그녀의 가슴이 산같이 솟구쳐 있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때의 모용구매는 매우 가냘퍼 보였지만 옷을 벗은 그녀는 사람을 질식하게
할 정도로 성숙한 매력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공기중에는 사람을 미치게 할 듯한 열력이 흘러 다녔다.
소어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서 땀이 흘러 내려왔으며 목이 타는 듯한 감을 느꼈다.
그는 참다 못해 외쳤다.

"어서 옷을 입어요!"

모용구매는 멍청히 그를 향하여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내 몸 속에 있는 악마를 쫓아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소어아는 여전히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의 몸엔 아무런 악마도 없소. 내가 소저를 속이려고 지어낸 거짓말이오."
"아닙니다. 그 악마가 제 몸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그는 지금 내 몸에서 움직이고 있어요.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창백했던 그녀의 두 뺨은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고, 눈에는 괴이한 빛이 번쩍였다.
소어아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여전히 큰소리로 외쳤다.

"쓸데없는 잠꼬대 같은 말은 하지 말고 어서 옷을 입어라. 그렇지 않는다면......."
"옷을 못입겠어요. 나는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그녀는 갑자기 소어아에게 덮쳐 양팔과 다리로 그의 몸을 감았다. 둘은 양탄자 위로
쓰러졌다.
그녀의 몸은 화산 같이 뜨거워졌고, 그녀의 혀는 거칠게 소어아의 얼굴을 핥았다. 또한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가슴이 계속 고동을 치고 있었다.

"그...... 그 악마의 움직임은 참으로 참지 못 하겠어요. 당...... 당신은 왜 나를 도와주지
않아요?"

소어아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옳은 말이야. 너의 몸엔 정말 악마가 있단다. 그 악마는 이미  너의 몸에 십 년 동안이나
숨어 있었지. 지금 드디어 움직인 것이야. 모든 여자는 그 악마를 지니고 있고 모든
남성들도 그렇지. 하지만 나는......."

소어아는 갑자기 모용구매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겨 그녀를 방바닥에 깔아 눕혔다. 그러더니
재빨리 바닥에 깔려 있는 양탄자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모용구매는 놀라움에 가득차 울부짖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당...... 당신 왜 이러죠?"

소어아는 몸을 일으키며 길게 숨을 돌렸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의 악마가 있소. 또한 자신만이 그 악마를 쫓을 수 있지요. 그것은
다른 사람이 절대로 도와줄 수 없는 것이오......."

모용구매는 큰소리로 그의 말을 막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저는 이해 못 하겠어요. 나를 제발 놓아 주세요. 어서 놓아 달란
말예요!"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그녀를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상 위에 놓여 있던 식은
엽차를 그녀의 머리에 부었다.

"기억해 두어라. 여자 아이는 함부로 옷을 벗는 것이 아니란다. 적어도 남자가 벗기는 것을
기다려야지. 다음에 또 이러면 거꾸로 매달아 놓고 엉덩이를 때리겠다!"

모용구매는 그가 부은 식은 엽차를 뒤집어 쓰자 드디어 정신을 되찾고 큰소리로 외쳤다.

"너 이 악마 같은 놈, 빨리 나를 놓아 주지 못 하겠느냐."

소어아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문을 열고는 '퉁! 퉁! 퉁!' 하고 걸어 내려갔다.
소어아는 아래층을 한 바퀴 돌았지만 그저 멍청하게 생긴 시녀를 하나 보았을 뿐이지
나구와 나삼 형제는 찾지 못했다.
그는 그 멍청한 시녀를 붙잡고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여인! 여인이다! 헛수작을 할 때는 너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좋게 대할 때는 너에게
악마라고 욕을 한다. 그것이 바로 여인이다."

소어아는 그녀의 몸을 돌리게 하여 그녀의 둥굴고도 큰 엉덩이에다 가벼운 일장을 가했다.
그런 후 그는 태연하게 걸어 나갔다.
그 멍청한 시녀는 그의 행동에 넋은 잃은 듯 그가 문을 나선 후에야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터뜨렸다.
소어아는 주방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다른 모양으로 변장했다. 그리고 나서는
의젓하게 거리로 나섰다.
그 집은 놀랍게도 성의 가장 번잡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소어아는 새옷을 사서 갈아 입은 후 술집으로 가 마음껏 마셨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띤 얼굴을 지었다.

"날은 또 저물었구나. 이젠 내가 활동할 시간이야."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소어아는 '경여당' 약국으로 들어가 한 바퀴 돌더니 한 알의 자금정을 사들고 나왔다.
약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본시 소어아는 약국에 혹시 무슨 변화라도 일어났나 하고 찾아갔었지만 약국은 보통 때와
똑 같이 조용하고 평화스럽기만 했다.
소어아는 교외로 달려 나갔다. 원래 그는 단합비의 집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많은
무예계의 인물들이 성을 나와 교외로 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뒤를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철무쌍의 빈소가 차려진 천향당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애재여명 철무쌍은 수십 년 동안 강호에서 이름을 떨친 영웅이었고 그의 보살핌을 받은
자들이나 그의 인품을 존경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영전이나 위로해 주고자
이렇게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사실 억울한 것이었지만 그 죽음의 내막에 의심을 품은 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 어쨌거나 철무쌍의 죽음은 무예계의 큰일이었기 때문에 명복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할지라도 구경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지영장은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고 그토록 큰 장원이었지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장원 대문밖에도 수많은 수레와 말이 매어져 있었다.
소어아는 재빠른 속도로 그곳을 지나갔다. 그때 그의 귀에는 한 가닥의 우렁찬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선녀의 연지마 앵도의 울음소리 같았다.

(혹시 소선녀 장청이 온 것이 아닐까?)

발걸음을 멈춘 그의 입가에는 한가닥의 미소가 번져갔다.

(이 이 년 동안 그녀는 어떻게 지내 왔을까? 아직도 옛날처럼 붉은 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종횡무진하며 채찍으로 사람들을 혼내주고 있을까?)

그는 그 깜찍하고도 흉악하고, 앙큼하고도 아름다운 소선녀를 보고 싶었다.

(그녀도 그동안 많이 자라겠지. 옛날보다 좀 철이 들었을 거야?)

그는 뜰로 들어가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아 보았다.

(그녀가 왔다면 꼭 눈에 띌 것인데 왜 아직도 그녀를 찾을 수가 없을까? 그녀 같은 사람은
십여 만 명이나 되는 사람 속에서도 한눈으로 찾아 낼 수 있을 텐데.......)

소어아는 뜰 안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소선녀는 차림새가 한덩어리의 불과 같은데, 어찌 그 눈부신 빛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앵도의 울음소리를 잘못 들은 모양이군.)

소어아는 이런 생각을 하며 실망을 금치 못했다.
 


             십대악인(十大惡人) 
 
 
철무쌍의 관(棺)은 대청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조향영은 슬픔이 가득찬 표정으로 그 옆에 서 있었고 상복을 걸치고 있는 것이 마치
철무쌍의 아들 같았다.
명복을 빌려고 찾아온 손님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무엇인가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사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철무쌍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며 슬퍼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철무쌍의 영전에 큰 절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으로
철무쌍에게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겉치레에 불과했다.
소어아는 그 광경을 보자 마음 속에서부터 서글픔이 우러나왔다.
이때 장원 밖에서 갑자기 한 차례의 소란이 일어나더니 사람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강 대협님께서도 오셨군요!"
"강 대협님께선 원래부터 인자하고 어지신 분이라 꼭 오시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뜰에 모였던 사람들은 즉시 양쪽으로 나누어져 한가운데로 길을 만들어 주었고 제각기
굽신거리며 절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도
있었다.
강별학은 심각한 표정으로 철무쌍의 영전을 향하여 곧장 걸어갔다. 그는 공손히 큰절을 세
번 한 후 슬픔에 잠긴 음성으로 엄숙히 입을 열었다.

"철노영웅님! 저는 비록 노영웅님과 맞섰지만 그것은 오직 무예계의 도의(道義)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영이나마 지금은 저의 애닯은 심정을 알아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비록 철노영웅님의 몸은 이승에서 떠났지만 영혼은 남아 저와 함께 무예계의 정의를
지켜주십시오. 제사날이 되면 저는 필히 천하 무예계의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여
철노영웅님의 영전에 명복을 빌겠습니다."

그 말은 누가 들어도 인자스럽고도 공명정대한 대협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말들이었다.
뜰에 모인 호걸들은 감탄을 발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러나 소어아만은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정말 고양이가 쥐의 죽음을 슬퍼하는 격이군. 남의 눈앞에서 인자한 척 되지 못한 소리나
하고.......)

이때 갑자기 한 사람의 냉소가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흥, 이것은 정말 고양이가 쥐의 죽음을 슬퍼하는 격으로 일부러 인자한 척하는 것이로군.
남을 죽이고 이제와서 슬퍼하는 척하다니 참으로 가소롭다."

그 음성은 매우 날카로왔고 여자의 음성임에 틀림이 없었다.
대청에 모여있던 호걸들은 얼굴색이 일제히 변하며 음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명의 흑의를 걸친 여인과 고귀한 옷차림을 하고 준수하게 생긴 소년이 걸어 들어왔다.
그 흑의 여인은 큰 밀집모자를 눈썹까지 눌러 쓰고 있었다.
많은 호걸들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추호도 두려움이 없는 듯 오히려 빛이
도사린 큰 눈동자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녀 옆에 서 있는 소년은 마치 소녀 같았고,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자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져 고개도 들지 못했다.
소어아는 첫눈에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과연 그녀가 왔구나. 아직도 옛날 성질이 그대로 남아있구나. 화가 나기만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 성질 말이다.)

이때 여러 명의 사람들이 달려나와 그 흑의 여인을 가리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넌 어디서 온 계집년이냐? 강 대협님에게 이런 실례를 범하다니."

흑의 여인도 만만치 않게 대꾸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너희들이 무슨 자격으로 참견한단 말이냐?"

이때 수염이 긴 한 명의 대한이 노여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호통쳤다.

"네 년은 이곳이 어딘줄 알고 감히 함부로 떠드느냐? 무례하구나!"

그 흑의 여인은 냉소를 지으며 여전히 차디찬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그래서 어쩔 셈이냐?"
"강 대협님은 마음이 넓어서 너 같은 어리석은 계집년을 용인하겠지만 노부는 네 년을
용서하지 못하겠다!"

그는 갑자기 한쌍의 큰 손바닥을 내밀어 그 흑의 여인을 향하여 덮쳐갔다.
그러나 흑의 연인은 여전히 냉소를 지으며 꼼짝하지 않았다. 이때 그녀의 옆에 수줍은 듯이
서 있던 소년이 갑자기 손을 내밀어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수염이 긴 대한은 그 소년이 가볍게 내민 일격에 나는 듯 튕겨져 나갔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얼굴색이 일제히 변했고, 몇몇 사람은 기압을 지르며 그 소년을 향해
덮쳐갔다.
소년은 그들이 덮쳐오는 것을 보자 재빨리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가 취한 그 신형(身形)은 마치 산악같이 튼튼했고, 내력 또한 가득 차 보였다.
가만히 서 있을 땐 마치 수줍은 소녀 같았지만, 격투가 시작되자 그는 일대명사(一代名師)
같은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대청 안의 호걸들은 그의 이러한 방어태세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 흑의 소녀는 여전히 냉소를 지었다.

"마음껏 손을 쓰시오. 뒷책임은 내가 질 테니."

그 소년은 흑의 여인의 말이 떨어지자 왼발을 앞으로 내미는 동시에 오른손을 들어 번개
같이 일장을 뿜어냈다. 맨 앞에 서있던 한 사나이가 그의 일격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때 갑자기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만, 멈추시오!"

강별학은 웃음띤 얼굴로 그 소년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는 공손히 읍을 했다.

"형씨께서는 매우 멋진 실력을 지니셨군요. 혹시 강남(江南) 고가신권(顧家神拳)의 문하생이
아니십니까?"

순간 그 소년의 얼굴은 또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선 후 수줍음이
가득찬 음성으로 모기소리만 하게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강별학은 턱밑의 수염을 한번 슬쩍 쓰다듬었다.

"만약 불초가 틀리게 보지 않았다면 형씨께서는 바로 그 옥면신권(玉面神拳)
고인옥(顧人玉)공자님이겠군요?"

소어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강별학은 정말 날카로운 안력을 가졌구나.)

이때 그 흑의 여인은 고인옥의 손을 잡아 당기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저런 놈팽이와 가깝게 지낼 필요가 없소. 빨리 갑시다!"

순간 두 가닥의 인영이 허공에 솟구쳐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검은 옷이 허공에 휘날리자 그 흑의 여인의 검은 옷 속에 얼핏 불 같이 빨간옷이 드러나
보였다.
대청에 모여있던 호걸들은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여기저기에서 소선녀가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강별학은 그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두 분께서는 제발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저의 마음을 표시할 수 있게 말이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장원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가닥의 휘파람 소리가 나자 한 마리의 붉은
색 연지마가 달려와 그들을 싣고는 나는 듯이 사라져갔다.
강별학은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름있는 집안의 제자라 신수(身手)가 과연 보통이 아니구나."

이때 한 사나이가 큰소리로 말하며 나섰다.

"설사 이름있는 집안의 제자라 해도 저렇게 오만불손해서야 되겠습니까?"

강별학은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을 받았다.

"젊은 나이에 그토록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당연히 오만하게 되기 마련인데 어찌
그들을 탓할 수 있겠오?"

말을 마친 그는 사방을 향해 읍을 했다.
대청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더욱 더 그에게 칭찬을 금치 못했다.
이 광경을 본 소어아는 구역질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한 명의 불량하게 생긴 사내가 손에 긴 대나무 만장을 들고 빠른 속도로 달려
들어왔다. 대나무에는 흰 헝겊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날듯한 글씨체로 몇 자가
적혀 있었다.

'作活着 我難受(당신이 살아있을 때 나는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作死了 我傷心(당신이 죽은 지금 나는 슬픔을 느낍니다.)'

그 글자들은 웅장함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명가의 글씨 같았다. 그러나 그 문장은
매우 조리가 없어서 어색함을 느끼게 했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그 문장을 보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만장의 위 아래에 쓰여진
사람의 이름을 보자 그들은 심장이 얼어붙은 듯하여 얼굴색마저 변했다.

'장인 어른에게(老丈人千古)'
'사위 이대취 올림'

'이대취' 이 세 글자에 마치 무슨 마력이라도 있는 듯 대청에 있는 모든 호걸들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심지어 소어아마저 깜짝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자세히 그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정말 이대취의 필적인 듯 보였다.

(이대취가 악인곡에서 나왔단 말인까? 그가 언제 거기서 나왔을까? 그가 지금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강별학은 즉시 그 불량배 같은 사내의 앞을 막아 서며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을 누가 보내드냐?"

그 불량배 같은 사내는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너무나 깜깜한 밤이었기에 그를 확실하게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거대한
몸집이었고 시체처럼 싸늘한 기운을 풍겨 온 몸이 전율해 오는 것을 느꼈을 뿐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대청에 있는 호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한 노인이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맞다. 이대취가 바로 그렇게 생겼다."

강별학도 입을 열었다.

"너에게 이 기(旗)를 가져가란 말 외에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나?"

그 불량배 같은 사내는 우물쭈물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또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장인이 비록 자기를 죽이려고 했었지만 장인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의 장인을 죽인 자는 몸을 깨끗이 씻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저는 궁금증을 참다 못하여 왜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큰 입을 벌리고 웃더니 그냥 떠나갔습니다."

강별학은 거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희어졌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불량배 같은 사람이 그의 뒤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어르신네께서도 그가 말한 뜻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어르신네께서도......."

대청에 모인 호걸들은 일제히 소동을 일으켰다.

"십대악인은 무예계에서 사라진 지 꽤 오래 되었소. 그러나 이번에 이대취가 다시
나타났으니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나타날지 모르오."
"이대취 외에 도박쟁이인 헌원삼광도 나타났으니, 설사 나머지 악인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골치를 꽤나 썩을 겁니다.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사람들이 놀라움과 두려움이 가득차 떠드는 사이 그 불량배 같은 사내는 슬그머니 빠져
나갔다. 그러나 소어아는 줄곧 그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 그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장원을 벗어나와 적지 않은 길을 걸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그 불량배 같은 사내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웃음띤 얼굴로 소어아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겨우 세 냥의 은을 사례로 받았을 뿐인데, 당신은 그것을 뺐으려고 따라온
것입니까?"
"너는 도대체 누구이며 무슨 목적으로 이대취의 이름을 팔아 그 만장을 들고 왔느냐?"

그의 말을 들은 그 불량배는 얼굴색이 갑자기 크게 변했고, 눈에서 한가닥의 날카로운 빛이
솟구쳐 나왔다. 그의 눈빛은 강별학보다 더욱 음침했고 헌원삼광보다 더욱 예리했다.
그러나 순간 그는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 빛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세 냥의 은을 주길래 그를 대신하여 깃발을 가져간 것뿐이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소어아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떻게 내가 미행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소? 분명히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는데
누구를 속이려는 것이오?"

그 불량배 같은 사내는 결국 '껄껄'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곧 다시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요? 만약 내가 무공을 지니고 있다면 벌써 강도질을
했지 무엇 때문에 얻어먹고 살아야 한단 말이오?"

소어아가 재빨리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부인한다 해도 나는 진실을 밝히게 할 수 있소!"

그는 빠른 속도로 그 불량배 같은 사내에게 달려가 일격을 뿜어냈다.
그 불량배 같은 사내는 정말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소어아의 일격을
맞자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소어아는 그가 속임수를 쓸까봐 한참이나 기다렸다. 그 사내는 여전히 땅바닥에 쓰러진 채
꼼짝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의 가슴을 만저보았다. 그의 가슴은 얼음장 같이 차가왔고
숨이 이미 끊어진 것 같았다.
소어아는 그가 이렇게 맥없이 죽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이유없이 사람을 하나 죽였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왔다. 그는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나를 탓하지 마라. 너를 죽인 이상 당연히 상을 치루어 줄테니 고히 눈을 감기 바란다."

그는 그 불량배 같은 사내의 시체를 어깨에 메고 성안으로 향하여 걸어갔다.
약 한 잔의 차가 식을 시간을 걸었을 때였다. 갑자기 목언저리가 축축해오며 지린내가
풍겼다.
소어아는 깜짝 놀라며 이상한 생각이 들어 혼잣말을 했다.

"죽은 사람이 어찌 오줌을 쌀 수가 있단 말이냐?"

그는 시체를 던져버렸다. 그 순간 죽은 듯 차디차던 시체가 신형을 돌리며 땅 위에 사뿐히
내려 서는 것이 아닌가!
그 시체는 껄껄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비록 내가 너에게 오줌 맛을 보여 주었지만 다음에 또 나를 건드린다면 똥맛을
보여줄 테다."

말을 마친 그는 허공에 곤두박질을 하더니 몇 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또다시
몸을 번쩍거리더니 이미 소어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사람의 경신술은 강별학이나 화무결에 못지 않았다.
소어아는 이미 그의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큰 골탕을 먹은 소어아는 노여움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그를 찾아서 화풀이를 할 수도 없었다.
그 사람은 경신술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공(氣功)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렇게 감쪽 같이 죽은 사람의 흉내를 낼 수 있단
말인가!
한참이나 노여움에 넋을 잃고 있던 소어아는 갑자기 껄껄 웃더니 뇌까렸다.

"그가 나에게 골탕만 먹이고 사라진 것이 다행이다. 만약 그가 나를 죽일려고 했다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만무하다. 다행히 아직까지 살아 있음을 기뻐해야지 어째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단 말이냐?"

그는 허탈한 듯 껄껄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성내는 가장 번화한 곳이어서 길가에 불빛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소어아는 또다시 옷 한 벌을 사서 갈아 입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성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그는 마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마차는 두필의 말이 끌고 있었고, 마차 또한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소어아는 그 마차를 주시 하였다.
그 마차는 큰 객잔(客棧) 앞에서 멈추었다.
깨끗한 옷을 입은 일꾼들이 객잔 안에서 급히 달려나와 마차문을 열고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섰다.
잠시 후 마차 속에서 또 두 사람이 내려 섰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매우 창백하고 몸집이 작았다. 마치 거센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러한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침착했으며 매우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은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배합으로 고상함이 깃들어
있었다.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은 비교적 몸집이 거대했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그의 눈빛에는 사람을 질식시킬 것 같은 날카로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서히 객잔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의 풍모는 조금도 꾸밈이 없으면서도 세련되고
더욱이 위풍당당했다.

(이 두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데 이토록 기세가 당당하단 말이냐.......)

그들의 자태는 실로 남이 흉내내려 해도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것이라 소어아로선 감탄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소어아의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한 그들이 무엇때문에 왔는지는 더더욱
모르는구나! 어쨌든간 이 지방에 필시 큰 일이 발생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소어아는 한참을 돌아다닌 후 자신도 모르게 나구의 집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다락으로 올라가지 않고 대청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그 두 명의 멍청이 같은 시녀들은 그가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마치 귀신이라도 본듯
먼곳으로 피해버렸다.
밤이 깊어갔다. 소어아는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하였다.
이때 다락 위에서 한 차례의 놀라움에 가득찬 외침소리가 들려오더니 나구와 나삼이 일제히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왔다.
소어아는 그들이 뛰어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도 놀랄 일이 있소?"

나구와 나삼은 그를 보자 놀라며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 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소어아를 한참이나 노려봤다.
얼마를 그렇게 하고 있다가 나구는 짐작이 가는지 웃음띤 표정으로 읍을 하며 입을 열었다.

"형씨는 참으로 뛰어난 변장술을 지니고 있군요. 천하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나삼도 웃음띤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형씨께서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희들은 정말 형씨를 몰라봤을 것입니다!"
"두 분께서는 어디에 외출을 했었습니까? 언제 돌아 왔지요?"

나구가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답했다.

"오늘 강별학은 귀한 손님이 찾아와 피로연을 차렸습니다. 저희 형제도 그곳에 손님으로
초대되어 다녀오느라 이렇게 늦었습니다."

나삼이 그의 말을 받았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들 형제는 방금 다락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소어아는 더욱이 자기가 먼저 그 말을 꺼낼 수 없었기에 그저 웃음띤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귀한 손님이라구요? 그것이 누구입니까?"

나구가 응답했다.

"그 두 사람은 무예계에 매우 명성을 떨치는 호걸들이고, 또한 모두 '구수장(九秀莊)'
모용가문의 사위들이죠. 한 분은 '남궁세가(南宮世家)'의 후세인 남궁유(南宮柳)이고, 또 한
분은 양광(兩廣) 지방 무림의 맹주(盟主)인 진검(秦劍)입니다."

나삼이 그의 말을 다시 받았다.

"이들 명문 출신 공자들은 무예계의 귀족을 자칭하고, 평상시엔 눈이 머리 위에 달린 듯
오만불손하지요. 보통 사람은 눈여겨 보지도 않는 그들이 오늘 갑자기 강별학을 찾아왔으니,
강별학으로서 어찌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즉시 두 눈을 반짝였다.

"모용가문의 사위라구요! 참으로 묘한 일이군요."

나구가 말을 이었다.

"형씨께서는 혹시 그들을 알고 있습니까?"

소어아가 입을 열었다.

"아니오. 하지만 방금 그들을 본 것 같습니다...... 그들은 혹시 한 명은 얼굴이 창백하고
옷차림이 매우 고상하며, 또다른 한 명은 의기양양한 태도에 날카로운 눈빛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나구가 웃음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들입니다!"

나삼도 끼어들었다.

"비단 그 두 사람 뿐만 아니라 모용가문의 다른 여섯 명의 사위들도 며칠 내로 이곳에 온다
합니다."

소어아는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다 모이는지 두 분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듣자니 모용가문의 막내 소저가 실종됐다고 합니다. 그 소저가 화무결과 함께 다닌 적이
있다기에 소식을 알아보려고 찾아온 것이라 하더군요."

소어아는 그제서야 껄껄 웃었다.

"틀림없군요. 나는 벌써부터 그들이 그 일 때문에 찾아온 것이라 알고 있었습니다."

나구가 그에게 물었다.

"혹시 그 소저를 알고 있습니까?"

소어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본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구가 그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다그쳐 물었다.

"형씨께서는 그 소저의 행방을 알고 있습니까?"

소어아는 전혀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정색을 했다.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소? 두 분은 내가 남의 집의 아가씨를 숨기기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나구는 자기의 실언을 사과하려는지 손바닥을 몇 번 비볐다.

"불초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다만......."

나삼이 눈치를 살피다가 그의 말을 받았다.

"다만 십 팔 구세의 아가씨가 왜 실종됐으며, 어째서 남에게 숨겨졌나 의심할 뿐입니다.
더욱이 모용가문의 아가씨들은 모두 뛰어난 무공과 훌륭한 지혜를 지니고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겁니다."
"혹시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갔을런지도 모르고, 또한 누군가에게 정조를
빼앗겼는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이렇게 말한 소어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깔깔
거리며 말을 이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군요!"

나삼과 나구는 서로 마주보더니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희 형제는 뭐가 재미있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한참 웃던 소어아는 웃음을 그치고 입을 열었다.

"천천히 알게 될 것이오."

이때 나구가 웃음띤 얼굴로 다락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형씨께서는 어디에 갔다 오셨습니까?"
"나는 매우 많은 재미있는 일들을 보았고, 또한 많은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그는 자기가 그 불량배 같은 사내에게 당한 일을 이야기를 했다. 그는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고 도리어 매우 재미있게 그 얘기를 했다.
나구와 나심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엔 흥겨운 듯 웃었지만 점점 얼굴색이 변해갔다.
소어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들은 서로 바라보며 살며시 눈짓을 하더니 나구가 먼저
말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습디까?"
"그는 불량배의 표본이었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불량배 말입니다. 하지만
누구를 막론하고 유심히 살펴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것이 바로 무서운 점입니다.
남의 주의를 끌지않는 사람은 나쁜 일을 하기가 매우 쉬우니 말이오."

나구와 나삼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갑자기 나구가 방으로 들어갔다.
소어아는 한 차례의 서랍을 여는 소리를 들었고 이어서 종이 펼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나구가 방에서 걸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색이 바랜 종이 한장이 들려 있었다.
이 종이는 비단 노랗게 변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낡아서 귀퉁이가 닳아버리고 없었다.
나구는 그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듯 조심스럽게 받쳐들고 나왔다.
그는 상 위에다 그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친 다음 소어아의 시선을 몸으로 막았다.
소어아는 그의 행동을 보자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 종이는 설사 땅에 떨어진다 해도 찢어질 리가 없고, 또 뺏는 사람도 없을 텐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이오?"

나구가 정색을 했다.

"이 종이는 오래 되어 곧 헤어질 것 같지만 무예계 인물들이 매우 간절히 얻고 싶어하는
물건입니다. 이 물건을 뺏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보물지도가 아니오? 만약 그것이 보물지도라면 나는 별로 볼
생각이 없소."

나구는 웃음띤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골탕먹이려는 보물지도는 확실히 적지 않습니다. 만장의 보물지도 중에도 아마 한
장의 진짜가 없을 겁니다. 형씨께서도 혹시 보물지도로 골탕을 먹은 적이 있습니까?"

나삼이 그의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지도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어아가 그의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당신이 그 종이를 가지고 나온 것은 나에게 보여줄 목적이 아니였소? 그런데 왜 나의 눈을
가로 막는 것이요?"
"저희 형제는 이 그림을 보물 같이 여겨왔지만 형씨를 남이라 생각하지 않기에 이것을
내놓은 것입니다. 다만...... 다만 형씨께서는 이 그림을 본 후 절대로 남에게 비밀을
누설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소어아는 그의 말을 듣자 더욱 더 호기심이 갔지만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두 분이 만약 나를 믿지 못 하신다면 나는 그 그림를 보지않겠습니다."

나삼이 겸연쩍은 듯 낄낄 웃었다.

"저희 형제가 형씨를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그럼 우선 그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이 무엇인지 먼저 나에게 얘기해 주시오, 그리고 난 후
볼 것인지 보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합시다."

나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이 그림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은 십대악인의 모습입니다."

소어아는 크게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음띤 얼굴을 했다.

"비록 십대악인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뭐가 볼 게 있다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한단 말입니까?"

나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형씨께서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그 십대악인은 제각기 귀신도 놀랄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고, 그들의 악독한 짓에 피해를 본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나삼이 그의 말을 이었다.

"그들은 종적이 일정치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제각기 변장술에 능숙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들에게 해침을 당하고도 그들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수를 하려고 해도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할지 몰랐죠......."

소어아가 웃음띤 얼굴로 그의 말을 중도에서 잘랐다.

"이제 알겠오. 무예계의 사람들이 이 그림을 빼앗고자 하는 이유는 진짜 얼굴을 알기
위해서 이군요?"

나삼이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소어아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들과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두 분은 왜 나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려는 것이오?"

나구의 입가에 신비한 웃음이 떠올랐다.

"형씨께서는 정말 그들과 아무런 원한이 없단 말이오?"

소어아는 눈을 굴리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은 그 불량배 같은 사나이도 십대악인 중의 한 명이란 말이오?"

나구는 그의 말에는 응답하지 않고 몸을 비켜서 그림이 소어아의 눈에 드러나게 했다.
노란색으로 바랜 종이 위엔 많은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매우 인상이 뚜렷했고
마치 산 사람들 같아 보였다.
그 중 한 명은 백설 같이 흰옷을 걸치고 있었고 얼굴도 매우 창백한 것이 다름아닌 혈수
두살이었다.
두살 옆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고 있는 자가 있었는데 물론 소리장도 소미타(笑裏藏刀
小彌陀) 합합아(哈哈兒)였다. 그 다음은 얼굴에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사인불배명(迷死人不賠命) 소미미였고 손에 사람의 머리통을 들고 있으며 쓰디쓴 표정을
짓고 있는 자는 불흘인두(不吃人頭) 이대취였다.
또 한 사람은 안개 속에 파묻혀 형체가 불분명했는데, 반인반귀(半人半鬼) 음구유(陰九幽)를
나타낸 것 같았다. 그 옆으로 있는 자는 몸뚱아리 하나에 두 개의 머리가 달려 있었는데,
왼쪽의 머리는 소녀였고 오른쪽의 머리는 미남자였다. 그는 당연히 불남불녀(不男不女)
도교교(屠嬌嬌)였다.
그는 그 그림이 실제의 얼굴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표정까지 똑같은 것을 보고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비록 낡은 옷을 걸치고는 있었지만 패기가 충전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악도귀
헌원삼광도 볼 수가 있었다. 그 옆에는 얼굴에 잔뜩 수염이 나있고 살기가 가득찬 표정에
굶주린 늑대와 같은 눈빛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손에 길고 큰 칼을 쥐고 있었고
칼 끝은 붉은 피가 물들어 있었다.
소어아는 일부러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이 흉악하게 생긴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구가 곧 그의 말에 응답했다.

"그는 광사 철전입니다."

나삼은 웃음띤 얼굴로 그의 말을 이었다.

"이자는 생김새가 비록 흉악하지만 사실 십대악인 중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이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절대로 사람을 해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만약 남이 그를 건드리면 어떻게 됩니까?"

나삼이 그의 말에 또 응답했다.

"건드린 자 뿐만 아니라 건드린 자의 가족을 완전히 몰살하기 전엔 절대로 손을 떼지
않습니다."

소어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사람을 선량한 사람이라 한다면 나는 성인축에 들겠는 걸!"

껄껄 웃고 있었지만 그는 마음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철심난을 생각하고 있었다.
철심난이 생각나자 갑자기 그의 가슴엔 한 차례의 통증이 일어났다. 그는 급히 입을 열어
자기의 생각을 쫓으려 했다.

 "이 두 사람은 누구요?"

그 두 사람은 쌍둥이였다. 그들은 모두 피골이 상접했고 이마가 튀어나왔으며, 한 사람은
손에 주판을 들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장부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벼락부자
같았지만 생김새는 마치 지옥에서 금방 도망나온 악귀 같았다.
나구는 웃음띤 얼굴로 설명했다.

"이들 형제는 쌍둥이일 뿐만 아니라 단 한시도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십대악인은 사실은 열 한 사람 입니다. 그 원인은 무예계에서 이들 형제를 한 사람으로
취급했던 까닭이지요."

나삼도 웃음띤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았다.

"이들 형제의 성은 사마(司馬)이고 칭호는 한 명은 변명점변의이고, 또다른 한 명은
녕사불흘휴(寧死不吃休 : 죽어도 손해 볼 수 없다)라 합니다. 이들의 칭호만 듣고도 어떤
사람인가를 아시겠지요?"

나구가 다시금 말을 받았다.

"십대악인은 비록 무예계에 널리 이름을 떨쳤지만 대부분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 형제는 한 나라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갑부입니다."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한 명은 이득을 보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또 한 명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니 당연히 부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쩐지 그들의 손에 주판과 장부가 쥐어져있다
했지요."

나삼은 그림 위의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성격은 그들 형제와는 전혀 반대입니다. 이자는 남을 해치는 것이
취미이고, 그저 상대에게 골탕만 먹일 수 있다면 그 자신의 이득은 추호도 따지지
않습니다."

나구가 웃음띤 얼굴로 나삼의 말을 받았다.

"심지어 어떤 땐 그 자신도 많은 손해를 볼 뿐만 아니라 골탕을 먹는 적도 있죠. 그러나
그는 일이 그 지경이 되어도 그저 남이 약올라 하기만 하면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말 이상한 괴벽을 갖고 있는 사람이군요. 그는......."

소어아는 갑자기 놀라움에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죽은 흉내를 낸 불량배입니다!"

종이에 그려져있는 사람들은 어떤 자는 앉아 있었고 어떤 자는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만은 유독 그림의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으로는 발가락 사이를
파고 있었고 오른손은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림 위의 다른 사람들은 이름을 널리 떨친 사람들다운 패기가 도사리고 있었지만, 오직 이
자만은 조금의 패기도 없어 보였고 오히려 비웃음이 도사린 얼굴이 시정잡배의 표정이었다.
소어아의 말을 들은 나구는 눈을 빛내며 즉각 반응했다.

"틀림없습니까?"
"틀림없이 이자입니다. 비록 변장을 하고 있었지만 이 표정, 이 웃음...... 절대로
틀림없습니다."
"불초는 형씨의 이야기를 듣자 필시 그 불량배 같은 사람이 이자일 것이라
알아차렸습니다."
"그의 이름이 뭔지 알고 있습니까?"
"그자의 성은 백(白)가고 자신에게 백개심(白開心)이란 이름을 지었습니다."

나삼이 그의 말을 받았다.

"무예계에서도 그에게 칭호를 주었지요. 손인불이기(損人不利己 : 자신의 이득을 보지 않고
남에게 골탕을 먹인다) 백개심이라고 말입니다."

소어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더없이 적당한 이름이군요. 남의 이름을 내걸고 만장을 들고 온 것이나, 죽은 시늉을 하고
사람을 속인 것이나 남을 골탕먹였을 뿐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 말입니다."

나구가 그의 말을 받았다.

"강호에는 각양각색의 잡종들이 많이 있지만 이득을 얻지 않고 남을 해치는 자는 아마 그자
뿐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희 형제는......."

소어아는 갑자기 나구의 말을 가로챘다.

"두 분께서는 제 말을 듣자마자 즉시 그를 생각해낸 것으로 보아 혹시 그와 매우 친한
사이가 아닙니까?"

나구는 자기의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저희 형제는 비록 잘나지는 못 했지만, 그런 사람과 어울릴 만큼 못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보기에 두 분은 십대악인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과도 매우 친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분이 어째서 그들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고, 또한 이 그림이 두 분의
손에 들어왔습니까?"

이 말을 들은 나구는 얼굴색이 크게 변했지만 나삼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형씨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의 형제는 십대악인과 뼈에 사무친 원한이
있습니다. 저희들의 부모님이 바로 그 놈들의 손에 죽었지요."

이말은 실로 소어아에게 의외였다. 그는 정말 놀랐다.

"네!...... 그러셨습니까."
"우리 형제는 복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찾아다니다가 이 그림을
구했고, 그들의 성격까지도 알아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분은 왜 이 그림을 공개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십대악인에게 원한이
있으니 필히 그들을 찾아내 죽이려 할텐데 말입니다. 두 분은 어째서 그들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입니까?"

나구는 음침한 웃음을 지었다.

"형씨께서는 기쁨이 있을때 남에게 나누어 줍니까?"
"그것이 무슨 말이오?"
"우리 형제가 복수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는지 아시오?
우리는 매일 같이 꿈속에서조차 원수를 죽이는 생각을 하며 그 기쁨을 맛보고 있지요.
그런데 어찌 다른 사람들 손에 그들이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소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나구는 조심스럽게 그 그림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다시 백개심을 만나게 되면 제발 죽이지 말고 저희들에게 넘겨주십시오."

나삼이 그의 말을 이어 받았다.

"만약 그의 행방을 알아내 주신다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소어아의 눈에서는 날카로운 빛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백개심을 두 분에게 넘겨주는 대신 두 분은 강옥랑을 나에게 양보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은 그의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게 말입니다."
"하하, 그야 물론이죠."
"애비가 손님을 초대하면 아들이 당연히 나오기 마련이니 필시 그를 봤겠군요?"

나구가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그의 말에 응답했다.

"그 점이 좀 수상했었습니다. 오늘 강옥랑은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껄껄 웃었다.

"그놈이 얼굴조차 내밀지 못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남궁유 같은 인물이 찾아갔는데도 그의
애비가 그에게 사귀라고 하지 않았단 말씀이군요?"

나구는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아마도 그놈이 그때 너무 놀라 앓아누운 모양입니다."

소어아는 다락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기가 죽인 사람이 자기 앞에 다시 나타나면 그 누구라도 놀라서 정신착란증에 걸릴
겁니다."

그의 말 속에는 당연히 다른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나구 형제는 그 말이 다락에 있는 소녀와 관계 있다고는 생각지를 못했다.
다만 소어아가 다락을 바라보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웃음띤 얼굴을 했다.

"밤이 깊었으니 형씨께서도 졸리시겠군요?"
"그래요. 한잠 자야 되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껄껄 웃으며 밖을 향하여 걸어 나갔다.


 
           백개심(白開心)의 농간(弄奸) 
 
 
나구 형제는 소어아가 밖을 향하는 것을 보자 당황하여 입을 열었다.

"형씨, 형씨께서는 오늘밤 여기서 주무시지 않겠습니까?"

소어아는 문 앞에 당도하여 뒤로 돌아서며 싱긋 웃었다.

"그 위엔 거미가 있어 잠이 잘 오지 않을 것 같군요. 그러니 내일 오지요. 만약 강옥랑의
소식을 들으면 저에게 연락해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말을 마치자 성큼성큼 걸어나가버렸다.
나구는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미? 거미...... 네가 보기엔 저 녀석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나삼이 그의 말에 응답했다.

"좌우지간 매우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못하다가는 그를 이용하기는 커녕 도리어
우리가 이용만 당하고 말지도 모르니까요."
"저 녀석이 설혹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두 나쁜 생각만 하고 있다 할지라도 설마
우리보다 더 하겠느냐?"
"하하, 천하에 악인이 많다 하지만 과연 우리를 따를 수 있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이오?"

밤은 점점 깊어 갔다.
길거리는 사람의 종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한적했고 소어아는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한참을 돌아다닌 그는 다시 나구 형제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등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확인한 후 지붕 위로 몸을 솟구쳐 올라가더니 어둠침침한 곳에 몸을 숨겼다.
하늘에는 달빛이 영롱했고 별빛이 반짝거리고 있었으며, 대지는 더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지붕 위에 숨어 있는 소어아는 다락의 창문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락의 창문은 반쯤 열려있었고 그 사이로 넋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용구매의 모습이
보였다.
차를 두어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 돌연 옷자락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흑의인이 소어아가 숨어 있는 이층집 지붕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그리고는 그도 지붕
위에 몸을 눕히고 모용구매가 있는 다락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소어아는 속으로 웃었다.

(과연 내 예측대로 왔구나!)

그는 조용히 엎드려 뭔가를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 모용구매를 바라볼 뿐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평상시에는 그토록 예리하던 눈빛이 지금은 마치 안개가 덮힌 듯 애수에 젖은 눈동자
같았다. 별빛 아래 그의 모습은 더없이 쓸쓸하게만 보였다.
이때 소어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토록 별빛 찬란한 밤에 너는 무얼하러 여기 왔느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 지주는 이미 그의 앞에 우뚝 서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여기 있을 사람이 나 밖에 또 누가 있느냐?"

흑 지주의 눈빛이 칼날 같이 날카로와졌다. 한참 동안 소어아를 노려보던 그는 맥이 풀린
듯 입을 열었다.

"또 너로구나!"
"너와 그녀 사이는 다섯 장에 불과한데 왜 달려가서 만나지 않느냐?"
"난...... 나는 그녀 때문에 온 것이 아니야!"

그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음성은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늦은 야밤을 무릅쓰고 왔느냐?"
"물론 그 나씨 형제 때문이지."
"그래?"
"그들 형제는 신분이 확실치 않을 뿐만 아니라 행동 또한 수상했어. 내가 십 개월 이상이나
그들의 뒤를 밟은 것은 그들의 비밀을 캐내려는 것이야!"

소어아는 그의 말에 관심이 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그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
"흑 지주가 남의 일에 참견을 잘한다는 것은 이미 천하에 알려진 사실이 아니냐?"
"저 나구 형제의 일이 네가 참견할 정도의 가치가 있단 말이지?"
"그들 형제의 목적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말한다면 너는 아마 놀라 까무러칠 걸."
"그래?"
"그들 형제는 강호의 흑백양도를 막론하고 선량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를 해치려고
하고 있어. 그들은 천하 무예계의 인물들이 서로 혈투를 벌이게 하는 것이 목적이야.
그래야만 그들이 그 틈을 타서 이익을 볼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만 해도 그들에게 당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그래!"
"너는 이 개월 전 발해방과 황해방 사이에 크나큰 싸움이 벌어졌던 일을 알고 있느냐?
일 개월 전 노산방과 쾌도문의 격투는?
피비린내 나는 대혈전은 모두 그들 형제가 일으킨 것이다."
"너는 왜 그들을 없애지 않았지?"
"우선 증거를 내놓을 수가 없었고, 또 사실 그들이 해친 자들도 결코 좋은 놈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냥 지켜보기만 할 뿐이야."
"너는 그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처음에 나는 그들이 십대악인이 아닌가 했어. 하지만 나중엔......."

흑 지주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나중엔 어떻게 됐단 말이냐?"

소어아는 다그쳐 물었다.
흑 지주는 그의 재촉을 받자 그제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십대악인을 상세히 조사한 후에야 십대악인 중엔 그들 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
"그렇다면 확실히 너는 저 소녀를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겠구나?"

흑 지주는 한참이나 망서리더니 우물거렸다.

"완전히...... 관련이 없다고 할 수도 없지!"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느냐?"
"몰라. 나는 다만 그녀가 불쌍한 소녀라는 것을 알 뿐이다. 악당들의 손에 빠져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보호하겠단 말인가?"
"......."
"그렇다면 왜 그녀를 구해내지 않지?"

빛이 도사렸던 흑 지주의 눈은 이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암담해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태연한 척하고 한바탕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만약 그녀를 구해낸다면 데리고 다니기라도 하란 말인가?"
"그녀가 따라다니는 것이 뭐가 나쁘냐?"

흑 지주는 이 말을 듣자 침울하게 말했다.

"너는 내가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나는 일정한 거처도 없고, 한 끼니를 먹고
나면 또 한 끼니를 어디서 먹어야 될지도 모르는 팔자야. 비록 오늘밤은 살고 있지만
내일은 햇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죽고 나서도 어디에 파묻힐지조차 몰라.
그런 내가 어떻게 그녀를 데리고 다닐 수 있단 말이냐?"
"그러나 너의 실력으로 편안히 살 수도 있잖아?"
"나는 이미 이러한 생활을 선택했으니 이대로 지낼 수밖에 없어. 지금은 심지어 고치려해도
고칠 수가 없구나...... 설사 내 자신이 이런 생활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해도 이젠 다른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울부짖는 음성으로 원망스러운 듯 말했다.

"이런 내가 어찌 그녀와 함께 지낼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네가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가 너를 좋아한다면 설사 생활이 좀 고생스럽다
하더라도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 되겠느냐!"

소어아의 이런 말을 듣자 흑 지주는 처량한 눈빛을 하며 스스로에게 타이르듯 말을 했다.

"누가 저 여인을 좋아한다고 했느냐? 나 같은 사람은 아무도 좋아할 자격이 없다! 설사......."

소어아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넌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왜 마음 속 깊이 감춘단 말인가?"

흑 지주는 그의 시선을 바라볼 용기가 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나불대지 마라."
"나는 이제껏 네가 냉혈동물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이제야 비로소 네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구나!"

흑 지주는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어린 나이에 네가 뭐 안다고 떠드느냐? 입 닥쳐라."
"왜 그렇게 화를 내지? 너의 진심을 좀 말했다 해서 그렇게 역정을 낼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

흑 지주는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더니 껄껄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 당겼다.

"며칠 전, 친구를 한 명 새로 사귀었는데 그는 오늘밤 나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시간이 됐으니 같이 가보는 것이 어떻겠나?"
"좋다! 너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아마 매우 재미있는 녀석일 것이다."

두 사람은 허공에다 몸을 솟구쳐 지붕 위에서 내려오더니 달려가기 시작했다.
소어아는 흑 지주의 뒤를 바싹 쫓아 한참을 달렸다.
흑 지주는 고개를 돌리며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동안 무공이 상당히 발전했구나."
"너도 칭찬하는 말을 다 할줄 아는구나."

흑 지주는 그의 비웃음에 대꾸하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

"이번에 사귄 그 친구는 문학적으로나 무공으로나 일가를 이루고 있다. 너도 아마 그를
만나면 좋아하게 될 거야."
"그래? 이름이 꽤 알려진 인물인 모양이지?"
"그의 성은 고가고 이름은 월언이라 한다. 비록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유명한 사람들보다
몇십 배 몇백 배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지."

그들이 말을 주고 받는 동안 이미 성을 벗어났다. 얼마를 더 달려가자 앞으로 울창한
수풀이 드러났다. 그 수풀 속에 희미한 불빛이 얼핏 보였으며 가까이 다가간 소어아는 그
불빛이 황폐되어 버린 사당에서 흘러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 당도한 그들은 향긋한 고기향내를 맡을 수가 있었다.
소어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너의 친구는 비단 문학과 무술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요리도 잘하는 모양이다."
"강호를 방랑하는 사람들이 가끔 배불리 먹는 것 외에 또 무슨 낙이 있겠나?"

그들은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사당의 마당 한 가운데는 한 뭉치의 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위에 큰 냄비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고기향기는 바로 그 냄비 속에서 풍겨나오는 것이었고, 냄비 옆에는 그릇과 젓가락들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으며 술도 놓여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은 보이지를 않았다.
흑 지주는 사방을 두루 둘러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고아우!... 고아우! 친구를 하나 소개해 주겠다. 빨리 나와 인사를 나누어라!"

소어아는 그의 말을 듣자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보아하니 이 자는 형님을 하고 싶어하는 성질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구나.)

흑 지주가 한참을 외쳤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사당밖으로 나가 고월언을 한참이나 찾아 헤맸다. 그러나 한참 후 그는 사당 안으로
다시 들어오며 미안한 듯한 얼굴로 소어아에게 말을 던졌다.

"고아우는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라서 한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는 성질이 아니야. 아마
어디 놀러나간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먹고 보자꾸나!"

소어아는 벌써부터 젓가락을 들고 있었으며 그의 말을 듣자 웃음띤 얼굴로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오랜만에 내 맘에 드는 말을 했구나!"

그는 흑 지주와 함께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더니 바로 젓가락을 놓아버렸다.
흑 지주는 코까지 두건을 걷어올리고 이미 십여 토막의 고기를 먹고 그릇에 담긴 술을 따라
마셨다.
그는 그제서야 소어아가 고기를 먹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웃으며 말했다.

"고기가 연하고 맛도 좋은데 왜 먹지 않는 거지?"

소어아는 씹고있던 고기를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이 고기는 먹을 것이 못 돼!"

이 말을 들은 흑 지주는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급히 물었다.

"어째서 먹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냐?"
"너는 이 고기가 무슨 고기인줄 아느냐?"
"무슨 고기냐? 사람의 고기라도 된단 말이냐?"
"그렇다. 바로 사람의 고기다!"

이 말을 들은 흑 지주는 놀라운 비명을 지르며 입에 들었던 고기를 재빨리 내뱉었다.

"뭐라고 했지?"
"내 말은 이 고기가 사람의 고기라는 말이다. 절대로 틀리지 않을 거다!"
"네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세 살 때부터 사람의 고기를 맛보았으니 그 맛을 모를 리가 없지!"

흑 지주는 또 한 번 놀랐다.

"네가 세 살 때부터 사람의 고기를 먹었단 말이냐?"
"솔직히 말해 주지. 나는 악인곡에서 자랐어.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사람의 고기라는 것을
알 수 있지. 만약 이 고기가 금방 죽은 사람의 몸에서 잘라낸 것이 아니라면 내가 내 코를
먹겠다!"

이렇게 말한 소어아는 흑 지주가 먹었던 고기들을 모두 토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흑 지주는 토하기는 커녕 도리어 껄껄 웃었다.

"그렇다면 이 고기를 삶은 자는 이대취 아닌가?"
"혹시 그럴지도 모르지."
"응! 그래! 고월(古月)을 합하면 호(胡)자가 되고...... 고월언(古月言)은 호설(胡說 : 개나발)이
되겠구나! 그는 벌써부터 나에게 자기가 개나발을 불고 있다고 가르쳐 주었는데,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 점을 발견했구나!"
"구역질이 나지 않느냐?"
"이미 먹은 이상 구역질이 난다고 토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그래도 웃음이 나오나?"
"이대취와 같은 사람을 친구로 사귄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야. 좋든 나쁘든 그래도 그는
강호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그와 같은 인물도 드물지 않느냐?"

소어아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녀석은 정말 호탕하구나. 절대로 구역질나게 연극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호설 선생은 이대취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이대취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냐?"
"또하나 그럴만한 사람이 있다. 이대취를 흉내내어 너로 하여금 사람의 고기를 먹게하고
오직 토하는 것을 볼 목적으로 말이다. 그는 너를 골탕 먹이고 흥겨움을 느끼려는
것이지......."

소어아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다시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너를 토하게 할 목적 외에 또다른 음모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이때 흑 지주는 재빨리 코까지 올렸던 두건을 내리며 차디찬 음성으로 외쳤다.

"밖에 계신 친구! 이곳까지 왔는데 왜 들어오지 않는 것이오?"

소어아의 귀도 밝았지만 흑 지주 귀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사당 밖에서 이미 한 인영(人影)이 날아 들어왔다.
번쩍거리는 불빛이 그 사람의 날씬한 몸매를 비추었다. 그 사람은 불 같이 빨간 옷을
걸치고 있었고, 날카로운 빛이 반짝거리는 두 눈에는 살기가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소선녀였다.
깊은 밤, 소선녀가 이토록 황막한 사당을 찾아오자 소어아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흑 지주는 젊은 여자가 달려들어올 것이라곤 생각지 못한 듯 너무나 깜짝 놀라 넋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장검을 번쩍거리더니 검끝으로 냄비를 젖혀 올려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고기가 땅바닥에 흩어지며 그 속에서 금비녀가 하나 나타났다.
그 비녀를 본 소선녀는 즉시 놀라움의 비명을 터뜨렸다.
그러자 사당 밖에서 또 한 인영(人影)이 황급히 날아 들어왔다. 그는 다름아닌
고인옥이었다.
소선녀는 그의 품으로 달려 들어가 울부짖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완아의 금비녀가...... 완아의 금비녀가 냄비 속에 있다."

고인옥은 큰 눈을 부릅뜨고 소어아를 노려보며 사나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 너도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

소어아는 그들이 자기를 알아 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태연하게 웃음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나도 당신들과 똑같이 생겼는데 왜 사람이라 할 수가 없소?"
"저 냄비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소어아는 계집애 같이 수줍음을 타는 고인옥이 이토록 흉악하게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가 극도로 화가 나 있는 것으로 보아 다만 살해된 자가 그들과 매우 친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그들이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또 어떻게 냄비 속에 금비녀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가득한 의아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보기엔 저 냄비 속에 뭐가 들었을 것 같소?"

고인옥은 이 말을 듣자 얼굴색이 빨갛게 타올랐으며 전혀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갑자기 한 가닥의 음성이 들려왔다.

"세상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기 종류가 매우 많은데 두 분께서는 왜 하필이면 사람의 고기를
즐깁니까? 동류끼리 이렇게 잡아 먹으면 두 분이 짐승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음성은 분명히 사람을 욕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더러운 말을 쓰지 않고 매우 평온한 감이
깃들어 있어 마치 다정한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두 사람이 천천히 사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눈에는 비록 노여움이 가득찼으나 표정은 여전히 태연한 것이 바로 그 남궁유와
진검이었다.
소어아는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비록 나보고 사람을 먹는다고 탓하지만 어떻게 내가 이곳에서 사람 고기를 먹고 있는 것을
알았소? 혹시 누구에게 밀고를 받은 것이 아니오?"

진검이 그의 말에 응답하기도 전에 소선녀가 이미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당연히 밀고한 자가 있었지! 이런 하늘이 용서치 못할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 그 누가
너희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이냐!"

남궁유가 뒤를 이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완아 같은 총명하고 귀여운 소녀를 이렇게 하다니 참으로 유감이오."

일이 이쯤 되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평온한 음성으로 말할 수가 있었다.
소선녀는 더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런 놈들과 무슨 말이 더 필요 하겠습니까?......."

남궁유가 그녀를 말리며 차분히 말했다.

"일이 이쯤 되었는데 두 분께서는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소어아가 대답했다.

"일이 이쯤되었으니 말하는 것과 안하는 것이 별 차이가 없겠군요."

이때 흑 지주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사나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불초는 아직도 할 말이 있소이다......."

갑자기 진검의 눈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그러더니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댁은 혹시 흑 지주가 아닙니까?"

흑 지주는 급히 응답했다.

"바로 내가 흑 지주요."

진검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강호의 소문은 결코 믿을 것이 못되는군요. 흑 지주가 당신 같은 인물일줄이야
미처 몰랐소."
"강호의 소문도 비록 믿을 것이 못되지만 밀고자의 말은 더욱 믿을 것이 못됩니다.
내 말을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만약 친히 고기를 삶은 자라면 어떻게 냄비 속에
금비녀가 들어있는 것을 모르고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진검과 남궁유는 서로 잠시 바라보더니 먼저 남궁유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댁의 말씀은 다른 사람이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라는 뜻입니까?"
"당연히 그렇소!"

남궁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씀이군요."

이때 소선녀가 발을 굴리며 끼어들었다.

"남궁 오빠! 설사 오빠는 이 자들을 놓아준다 해도 저는 이 자들을 놓아줄 수가 없어요.
그 밀고한 자가 정말로 이들이 사람을 죽이고 고기를 삶은 것을 보고 알려줬을 가능성이
없단 말입니까?"

남궁유는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응답했다.

"당연히 그럴 가능성도 있지."

소선녀가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완아를 이렇게 했으니 구매(九妹)도  당연히......  당연히......."

그녀의 음성은 갑자기 신음소리로 변했고 더이상 말을 잇지도 못했다.
진검은 날카로운 눈으로 소어아와 흑 지주를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이 일은 비로 석연찮은 점이 없지는 않으나 두 분이 무죄란 증거를 내놓지 못한다면
우리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소."

흑 지주는 그의 말에 냉소를 터뜨렸다.

"흥! 귀하의 말씀은 참으로 겸손하군요. 우리를 데려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귀하께서도 우리에게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소선녀가 또 노여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이 금비녀가 증거가 아니란 말인가? 너희들이 이래도 잡아뗄 속셈이냐?"

흑 지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찰나 소어아가 껄껄 웃으며 불쑥
끼어들었다.

"내가 언제 잡아 뗀 적이 있느냐?"

일검을 뿜어내려던 소선녀는 그의 말을 듣자 멈칫하며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럼 네가 시인하겠단 말이지?"
"사람 고기를 먹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흑 지주는 소어아의 말을 듣자 마치 말채찍에라도 일격을 맞은 듯 깜짝 놀라며 소어아에게
외쳤다.

"넌 지금 뭐라고 했지?"

소어아는 그의 말에는 대꾸도 않은 채 웃음띤 얼굴로 소선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저가 말한 그 구매란 소저는 눈이 크고 얼굴이 창백하며 나이는 약 십팔구 세 되는 녹색
옷을 걸친 소녀가 아니오?"

이 말을 들은 소선녀는 떨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했다.

"네...... 네...... 네가 그녀를 어떻게 했지?"

소어아는 깔깔 웃었다.

"하하! 내가 그녀를 어떻게 했는지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 말을 들은 흑 지주는 크게 당황했다.

"네 녀석이 미쳤느냐? 함부로 거짓말을 지껄이니 말이다."
"그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이지?"

소어아는 도리어 흑 지주를 나무랐다.
남궁유와 진검이 아무리 침착한 사람들이라 해도 이 말을 듣고는 얼굴색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선녀는 더욱 팔짝 팔짝 뛰며 슬픔이 가득 찬 음성으로 대들 듯 말했다.

"오빠들도 들었죠...... 그 자신도 시인했어요!"

그녀는 울부짖으면서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독사 같은 일검이 뿜어 나왔다.
그녀의 옆에 있던 고인옥은 더욱 대노하여 대갈일성을 치면서 삼 초의 권법을 악랄하게
뿜어냈다.
그 삼 초의 권법과 일 초의 검법은 모두 소어아의 급소를 향하고 있었다.
검은 번개 같았고 권(拳)은 우뢰 같았다.
소어아는 실로 절대절명의 위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목숨이 경각지간에 달린
순간이었다.
 


             소어아의 계책(計策) 
 
 
만약 이 년 전이었다면 소어아는 결코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소어아는 옛날의 소어아가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소선녀가 뻗어낸 일검이 한가닥의 거센 힘에 말려, 고인옥을 향해 뿜어졌다.
고인옥은 깜짝 놀라 권초를 재빨리 거두며 후퇴했지만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이미
옷자락이 검에 스쳐 찢겨지고 말았다.
소어아는 권풍으로 마치 이화궁의 이화접목과 같이 상대방의 공격 방향을 바꾸어버린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엄밀히 이화접목과는 차이점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식별하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고인옥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외쳤다.

"이화접목? 너는 이화궁의 문하생인가?"

소어아는 그들의 말에는 응답하지 않고 흑 지주의 몸 뒤로 숨으며 껄껄 웃었다.

"나는 비록 고기는 먹었지만 주범이 아닌데 왜 나만 못살게 구는 것이냐?"

고인옥과 소선녀는 그가 선기를 차지하고도 공격을 계속 하지 않고 도리어 숨어드는 것을
보자 의아심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극도로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그 까닭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이 펴낸 초식은 더욱 악독해졌다. 그러나 이번에 그들에게 공격을 당한 자는
흑지주였다.
흑 지주는 억울하고도 분했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변명할 수도 없었고 또 변명할
여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들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검빛이 번쩍거리며 권영이 휘날렸고 소선녀와 고인옥이 십여 초를 뿜어냈다.
그러나 흑 지주도 물러서지 않고 삼장을 반격했다.
소어아는 여전히 흑 지주의 뒤에 숨어서 흑 지주가 소선녀와 고인옥의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웃음띤 얼굴로 말하곤 했다.

"맞다. 그렇게 해야지. 그들과 싸우는 것이 무서울 게 뭐가 있단 말이냐?"

그의 말은 오히려 흑 지주는 더욱 대노하게 했고 흑 지주는 눈을 굴리며 소어아를 쏘아
보았다. 하지만 소어아는 마치 그림자처럼 그의 몸에 찰싹 붙어 박수를 치며 계속 부화를
돋굴 뿐이었다.

"멋지다! 그 일권은 과연 보통이 아니로구나. 고가신권은 과연 명불허전이다. 이봐! 흑
지주야 내가 보기엔 네가 지겠는데?"

소선녀와 고인옥은 너무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소어아에게
선기를 빼앗기기 까지 했었다.
그러나 십여 초를 겨룬 지금 그들은 완전히 정신을 가다듬었고 공격도 자유자재로 가할
수가 있었다.
고인옥은 비록 권법이 고강했지만 강호경험이 적었고, 반대로 소선녀는 남에게 시비거는
것이 취미었기에 유연하게 모든 상황에 대처했다. 그녀는 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러
신속하고도 악독한 초식을 뿜어내며 고인옥의 권법 중에 빈틈을 보충했고, 고인옥의 착실한
초식은 그녀의 검법 중에 거세지 못 한 점을 보충했다.
그들은 모두 무예계의 정종 무학을 익혀왔던 까닭에 따로 손발을 맞춰 본 적이 없었지만
협공의 배합이 잘 되었다.
흑 지주도 무예계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지만 공력은 그의 특기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절묘하게 공격에 흑 지주는 점점 감당해내기 어려운 감을 느꼈다.
더군다나 소어아는, 겉으로는 그를 도와 주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암암리에 그를 골탕먹여
더욱 더 힘이 빠지게 만들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궁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과연 인옥은 천생이 무공을 연마할 소질을 지니고 있군."

진검도 입을 열었다.

"그러나 청매도 그에 못지 않게 뛰어납니다. 오히려 그보다 한수 위인 듯합니다."

남궁유가 그의 말을 다시 받았다.

"그것은 자네가 잘못 본 것이네! 인옥은 가정교육이 매우 엄격했던 까닭에 이같은 싸움을
할 기회가 없었네. 그래서 약하게 보이는 것뿐이라네.
만약 그를 강호에서 이 삼 년 동안만 경력을 쌓게 한다면 그의 명성은 청매보다 더욱
알려질 것이네."
"형님께서는 사람을 보는 눈이 각별하니 그 말씀이 옳겠지요. 형님의 지명을 받는 인물은
즉시 이름을 떨치게 되곤 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주의해야 할 자는 흑 지주가 아니고 저 얼굴이 누런 소년이라네.
저자는 예삿 인물이 아닐세. 내가 틀리게 보지 않았다면 필시 유명한 인물이 변장한 것
같네."

이 남궁 공자의 사람을 보는 눈은 강남 무예계에서 백여 년이나 이름을 날린 가문의
후세다웠다.
그들이 이렇게 말을 주고 받고 있는 동안 싸움의 승부는 이미 확실하게 판명되어 갔다.
흑 지주는 신법으로 보아 소선녀와 고인옥이 제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쉽사리 이기지
못할 상대였다. 그러나 소어아가 줄곧 흑 지주의 몸 뒤에 붙여 다니면서 그의 정신을
흐트러 놓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뛰어난 신법을 완전히 펼쳐내지를 못했다.
흑 지주는 점점 곤경에 처했다.
소어아는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야! 당당한 흑 지주가 오늘 어린 아이들에게 패배의 고배를 마셔야 되나 보군!"

사실 소선녀와 고인옥도 무예계에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이었고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소어아는 흑 지주를 화나게 하려 한 것이었다.
흑 지주는 성질이 매우 거칠었기 때문에 그의 목적을 알면서도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몸은 노여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미친 놈아,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냐?"

소어아는 뒤에서 살며시 말했다.

"도망가면 되지 않겠나?"

이 말을 듣는 흑 지주는 더욱 대노하여 노여움이 외쳤다.

"개나발 불지 마라! 나 흑 지주가 삼십육계를 칠 인물로 밖에 보이지 않느냐?"
"흑 지주가 무예계에 이름을 떨친 것은 원래 괴이한 신법 때문이 아니냐? 그런데 너는 왜
그 특기를 쓰지 않고 상대와 힘과 힘의 결투를 한단 말이냐?
내가 보기엔 도리어 네가 미친 것 같구나!"

흑 지주는 여전히 더러운 욕을 내뱉고 있었지만 어쩐지 소어아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소어아와 말을 주고받는데 정신이 팔려 하마터면 일검을 맞을 뻔
하기도 했다.
소어아는 여전히 빈정거렸다.

"넌 이곳에서 도망하면 무예계의 인물들이 너를 비웃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만약
네가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면 도리어 너에게 감탄할 것이다."

흑 지주는 이 말을 듣자 잠시 동안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결단을 내린 듯 힘주어 소리쳤다.

"좋다!"

그의 '좋다'란 말이 떨어지자 소어아는 그의 몸 뒤에서 달려나와 단옥분금(斷玉分金)이란
일초를 쌍장 좌우로 나누며 뿜어냈다.
순간적으로 소어아의 공격을 받은 고인옥과 소선녀는 미처 생각지 못한 의외의 공격에 뒤로
서너 걸음 밀려 나갔다.
바로 이때 흑 지주의 옷소매 속에서 한줄기의 은빛 찬란한 실이 뻗어나와 사당 밖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늙은 나무가지에 감겼다.
동시에 그의 몸도 그것을 따라 날아갔다.
소어아도 이미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라 함께 날아갈 수가 있었다.
흑 지주는 고목 위에 가볍게 올라서더니 한줄기의 찬란한 은실을 다른 나무로 뻗쳐내며
동시에 다시 몸을 날렸다.
그들은 순식간에 수십 장 밖으로 달아났고 다시금 몸을 번쩍거리더니 어느새 어둠침침한
밤하늘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다만 멀리서 메아리처럼 소어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이 만약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내일 밤 삼경쯤 그곳에 다시 찾아오거라!"

흑 지주는 쉬지 않고 몸을 날리다가 성벽 아래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멈추어 섰다.
소어아는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냈다.

"아! 흑 지주, 참으로 훌륭하구나. 과연 번개 같은 속도였어. 그 은실의 경공은 천하무쌍이군
그래. 마치 구름 위를 나르는 것 같았어!"

그러나 흑 지주는 얼굴을 울그락불그락하며 대노했다.

"흥! 아무리 아첨을 한다 해도 나는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그래? 사실 나는 네 화를 풀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었는데."
"잔소리 말고 내 물음에 대답이나 해라.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한 짓이 아닌데 왜 그 죄를
뒤집어 썼지? 나마저 끌고 들어가서 말이다. 또 왜 너는 같이 맞서지는 못할망정 뒤에
숨어서 오히려 나를 골탕먹이고 힘을 빼놓았느냔 말이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더욱 분노가 일어난 듯 음성을 높였다.

"그것은 어쨌든 좋다. 너는 왜 나를 이렇게 도망하게 했지? 나의 명예가 훼손되게 말이다."

소어아는 흑 지주가 화가나서 펄펄 뛰는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야."

흑 지주는 갑자기 그의 멱살을 잡으며 살기가 가득찬 표정을 지었다.

"뭐라구? 당장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너를 죽여버리고 말테다."

그러나 소어아는 히죽이 웃었다.

"야! 이 멍청아, 아직도 모르고 있느냐? 나는 너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야."

그의 이러한 말을 들은 흑 지주는 순간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골탕먹이기 위해서였다구?"
"너 흑 지주는 이미 무예계에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이대취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고 소문이 나면 앞으로 무예계를 돌아다니다가
어려워질게야."

이 말을 들은 흑 지주는 대노했다.

"이런 사악한 자식, 너는 왜 나의 명성을 더럽혔느냐?"
"그래야만 너를 이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너무 억울하다고만 생각지 말아라.
사실 그래도 나는 네가 쓸만하다고 생각했기에 너를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흑 지주는 사나운 음성으로 외쳤다.

"이렇게 나의 명성을 더럽혔으니 지금 내가 너를 죽일 터인데 네가 어찌 나를 이용할 수가
있단 말이냐?"
"만약 멍청한 사람이 이렇게 당한다면 당연히 나를 원수처럼 여기고 이를 부드득 갈며
죽이려 하겠지. 그러나 내가 아는 흑 지주는 이처럼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면
오히려 호탕하고 쾌활해지지."

흑 지주는 기가막힌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이 도대체 무슨 목적에서인지 어디 한 번 말해 보아라."
"보통 때 같으면 남궁유와 진검 같은 오만불손한 사람들이 결코 나를 만나 줄 리가 만무해.
그러나 내일밤 삼경에는 어김없이 그 자리에 나올 것이다."
"질질 끌지 말고 할 말을 어서 해라."
"우선 내 말을 잘 들어. 그 호설이란 작자가 사람을 죽여 너에게 먹게 하고는 남에게
밀고한 목적이 뭐겠나?"
"당연히 나를 골탕먹이고 즐기려는 수작이겠지."
"그렇게 전문적으로 남에게 화만 안겨 주는 작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되지?"

흑 지주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놈이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당장 요절을 내버리겠다."
"남에게 골탕을 먹이는 사람이 그 호설이란 작자만 있는 것은 아니야. 그 호설이란
작자보다 더 악독하고 앙큼한 놈도 있지. 너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상대할 작정이냐?"
"잡히기만 하면 갈기 갈기 찢어 죽이겠다."
"찢어 죽이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 값싼 대가야. 그를 죽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너는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냐?"

소어아는 또박또박 그러나 확신에 차서 말했다.

"강별학!"

흑 지주는 그의 말을 듣자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뭐? 강 대협이 어찌 그런 일을 한단 말이냐?"

소어아는 그를 유심히 바라 보며 심각한 음성으로 말을 건냈다.

"내 말을 믿지 못 하겠단 말이냐?"
"네 녀석이 이토록 앙큼하고 교활한데 이 세상에서 누가 너를 믿을 수 있단 말이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나 흑 지주가 왜 하필이면 너를 믿는지 모르겠다."

소어아는 흑 지주의 말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는 과연 보통 사람과 다르구나! 난 벌써부터 네가 내 말을 믿어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흑 지주의 얼굴에 한가닥의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너를 믿는다. 넌 비록 나쁜 녀석이긴 하지만 위선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 네 눈은 정말 정확하구나. 가장 나쁜 사람은 바로 위선자다. 그러나 이 세상엔
위선자가 너무 많아. 강별학은 그 중에서도 둘째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위선자이지!"
"그러면 이제 너는 어떻게 그와 상대하겠다는 것인지 말해보아라."

소어아의 눈에서 빛이 번쩍이며 입을 열었다.

"눈에는 눈, 코에는 코, 이에는 이, 나는 그가 흔히 쓰고 있는 방법으로 그를 상대할
작정이다. 그가 남에게 화를 안겨 준 만큼 나도 그에게 화를 안겨줄 작정이야!"
"무슨 방법으로 그에게 화를 안겨 줄 것인지 얘기해 보아라."

소어아는 찬찬히 그를 바라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나구 형제의 다락방에 있는 아가씨가 누구인지 아느냐?"

흑 지주는 모용구매의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침울해졌다.

"내가 벌써 이야기하지 않았나! 모른다고 말이다."

소어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얘기를 똑똑히 들어라! 그녀는 바로 모용 집안의 아홉째 소저이다!"

이 말을 듣자 흑 지주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뭐라고? 모용구매라고?"
"그렇다. 남궁유와 진검 그리고 소선녀 등이 찾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인 것이다.
그들이 만약 누군가가 그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면 반드시 혈전을 벌이지
않겠느냐?"

흑 지주의 눈에서 갑자기 빛이 반짝였다. 이미 소어아의 생각을 파악한 것 같았다.

"그러면 너는 그것을 강별학에게 덮어 씌울 작정이란 말이지?"
"그렇지. 그렇게 해서 누명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억울한 것인지 맛을 보여줄 작정이다."
"하지만 강별학 같이 지모가 있는 사람이 과연 너에게 당할까?"
"그 강별학이란 작자는 비록 여우 같이 교활하지만 네가 나를 도와만 준다면 내게 그가
걸려들게 할 방법이 있다."
"네가 나를 이미 여기까지 끌고 들어왔는데 설사 네가 밉다고 해서 너를 도와 주지 않을 수
있느냐?"

결국 그것은 승낙의 말이었다. 소어아는 매우 기뻤다.

"그렇다. 네가 만약 당하고 있는 억울함을 씻고 싶다면 내 계획대로 행동해라! 하지만
안심해도 된다. 이 일은 절대로 너의 양심에 가책을 받을 그런 일이 아니니 말이다."

그는 갑자기 흑 지주를 끌고 허공에 몸을 솟구치며 한마디를 더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행동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은 박쥐같이 성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흑 지주는 부지런히 달리면서도 무슨 생각에 곰곰이 잠겨있는 듯 하더니 돌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호설이란 놈이 나에게 화를 안겨줘서 무슨 이익을 봤는지 모르겠는
걸?"

소어아는 흑 지주를 바라보며 웃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한 그 호설이란 놈은 아마 백개심일 것이다. 그는 '손인불이기'란 칭호를 받고
있는데, 그저 남이 골탕먹는 것을 보는 것이 그의 취미란다."

흑 지주는 이 말을 듣자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이 세상에 그런 괴상한 취미를 가진 작자도 있단 말이냐?"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 그는 모용집안의 사위들이 모용구매를 찾으러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완아란 소저를 잡아와 삶아 놓은 것은 모용집안의 사위들로 하여금
모용구매가 이미 남의 배 속에 들어가 있다고 믿게 하려는 수작이지.
그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저지른 짓일거다."
"하지만 나는......."
"처음에는 자기가 이대취로 변장하려 했겠지. 그런 와중에 너를 알게 되자 너마저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야.
모용집안 사람들을 골탕 먹였을 뿐 아니라 너까지도 골탕을 먹였으니 그 계획의 치밀함이
과연 십대악인답다. 굉장한 놈이야."

흑 지주는 이 말을 듣자 이를 갈듯 말했다.

"그토록 나쁜 놈을 칭찬하고 있다니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만약 그의 그런 묘한 계획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내 계획을 세울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세상에는 백개심이란 작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너같은 사람이 있으니...... 너희들이
서로 머리를 쓰는 바람에 당한 놈은 나 흑 지주뿐이군!"
"하하, 오늘밤 내가 없었다면 너의 입장은 아마 더 비참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은
너에게 백 개의 입이 있다 해도 변명할 수 없었던 것이니 말이다."
"어쨌든 간에 부인했어야 옳지 않았겠나?"
"그렇다고 나는 자인하지도 않았어. 내가 언제 모용구매를 먹었다고 했느냐? 단지 그녀를
어떻게 했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
그리 대수롭지도 않은 일인데 뭘 두려워 하느냐?"

흑 지주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박장대소
했다.

"맞다! 그 당시 너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은 먹었다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교묘한 것이 바로 그것이야."

말을 주고 받는 동안 그들은 구양 형제의 집에 도착했다. 거리의 등불은 모두 이미 꺼져
있었고 다만 다락방 속에서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모용구매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잠든 것 같았다.
소어아가 입을 열었다.

"저 소녀는 너의 말을 가장 잘 듣는다. 네가 칼을 가지고 있으라 하자 그녀는 그렇게 했고,
자신에게 손을 대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자 정말 그렇게 했다.
그러니 네가 그녀에게 쪽지 한 장을 써 달라고 그래라."

흑 지주는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쪽지를 쓰게 하라는 것이냐?"
"네가 이렇게 쓰라고 해. '만약 제 생명을 구하고 싶으면 은 팔십만 냥을 약속된 장소에
갖다 놓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는 남의 배 속에 들어갈 것입니다.
부디 그들의 말을 따라 주십시오!' 알아 들었느냐?"
"뭐? 팔십만 냥이나?"
"팔십만 냥이란 돈은 비록 적지 않지만 남궁유와 진검 같은 집안에서는 그리 대수로운 것도
아니야. 다른 사람은 하루 안으로 그 많은 은을 준비할 수 없지만 그들은 아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해 주리라 생각하느냐?"
"오늘밤 그 일로 그들은 반드시 우리가 완아를 죽여 자기들을 위협한 것이라 생각할거야.
일이 우연히 이렇게 됐으니 그들에게는 의심할 여지도 없겠지."

그는 말을 잠시 중단하더니 웃음띤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쪽지는 틀림없는 모용구의 필적이니...... 그리고 문제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꼭
적어야 한다. 필히 팔십만 냥의 은이어야 되고 금이나 보물 같은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이다."

흑 지주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드디어 한숨을 내쉬며 결정을 내렸다.

"좋다...... 그런데 왜 꼭 은이어야 되는지 모르겠구나!"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야."
"편지를 전한 후 또 무슨 할 일이 있느냐?"
"그저 편지만 전하고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발생하기를 고대하면 돼!"
"그때 가서 정말 은을 받아 갈 작정이냐?"
"은을 받으러 갈 자는 바로 내가 골탕먹일 상대야!"
"그런데...... 진검과 남궁유가 네가 없는 것을 보고 의심하지는 않을까?"
"진검과 남궁유가 내가 누군인지 어떻게 안단 말이냐?
그들은 단지 나의 이 노란 얼굴을 보았을 뿐이야. 또한 나의 그 일 초의 무공을 보고 나를
이화궁의 제자가 변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야.
하지만 그 진짜 이화궁의 제자는 지금 바로 강별학과 같이 있으니 얘기가 재미있게 됐지."

흑 지주는 잠시 동안 생각해 보더니 드디어 결정을 내린 듯 말했다.

"너의 일거일동은 모두 뜻을 품고 있구나. 만약 너 같은 놈이 세상에 몇 명만 더 있다면
다른 사람은 마음놓고 살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껄껄 웃었다.

"하지만 마음놓아도 된다. 나 같은 놈은 이 세상에 둘도 없으니 말이다."

날이 무렵 경여당의 대리주인은 소어아에게 침대 위에서 끌려 내려왔고, 삼소저에게 편지
한 장을 전해 주러갔다.
날이 밝았을 때 소어아는 이미 약방의 종업원 모습으로 돌아 갔고, 경여당 뒤뜰에 있는
그의 방에서 잠에 빠졌다.
얼마 후 삼소저가 그를 찾아 왔다.
이번에는 창문을 통해서 그를 부르지 않고 직접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잠에 골아 떨어져 있는 소어아를 끌어 내리면서 기쁨과 원망이
엇갈리는 음성으로 발을 구르듯 말했다.

"이틀 동안 어디 갔었어요? 내가 얼마나 걱정 했다고요."

소어아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정말로 나를 걱정했다면 나를 좀 도와 주시오."

삼소저는 그윽한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하라는 일을 내가 언제 복종하지 않은 적이 있어요?"
"그러나 이번 일은 조금도 남에게 누설해서는 안되오."
"나를 믿지 못한단 말예요?"

소어아는 즉시 웃음띤 얼굴로 표정을 바꾸었다.

"난 당신을 믿소.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소. 당신은 혹 이 이틀 동안 강옥랑을
봤소?"
"못봤는데요."

소어아는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매우 중대한 일이니 자세히 생각해 보시오. 강별학의 주위에 강옥랑이 변장한 사람이
없는가 말이오."

삼소저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절대로 그럴 가능성이 없어요. 이 이틀동안 강옥랑은 절대로 이곳에 있지 않았어요."

소어아는 그제서야 숨을 돌리며 가벼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마음을 놓았소. 여자들의 직감은 정확하고 틀리는 법이 드무니 당신이 이토록
확신할 수 있는 이상 강옥랑은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오."

삼소저는 또다시 그윽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를 이곳까지 부른 것은 다만 그것을 물어보기 위해서 입니까?"
"그것은 당신이 그와 큰 관련이 있기 때문이오."

이러한 소어아의 말을 들은 삼소저는 못마땅한 듯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씀을 삼가하십시요. 내가 그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예요?"

소어아는 정색을 했다.

"당신 집안의 표은을 바로 그가 강탈한 것임을 알고 있소!"
"정말이에요?"
"그가 이 이틀 동안 갑자기 사라진 것은 나를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바로 강탈한 표은을 옮기기 위해서 일 것이오. 내가 알고 있는 비밀이 의외로 많다고
생각한 까닭이지요."

삼소저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그들은 왜 그렇게 당신을 두려워합니까?"
"엄격히 말한다면 그들도 지금까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소."

삼소저는 또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당신이 누구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소어아는 그녀가 말을 계속할까 봐 급히 가로챘다.

"내 생각대로 그가 이곳에 있지 않다면 계획이 일단 성공했다고 볼 수 있소.
당신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가 만약 다시 돌아오면 즉시 나에게 알려주시오."
"당신은 도대체 무슨 계획을 세웠습니까? 왜 그가 이곳에 있지 않아야 됩니까?"

소어아는 그녀의 손을 쥐어 잡고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당신도 차차 알게 될 것이오. 다만 지금은 내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여자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부드러운 말일 것이다.
과연 삼소저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윽한 음성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 당신은 나에게 다른 하실 말씀은 없어요?"
"오늘밤 자정 때 당신집 뒷문밖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이 말을 들은 삼소저의 눈에서 즉시 기쁜 빛이 솟아 나왔다. 떨리는 음성으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오늘밤...... 뒷문에서 말입니까?"
"그렇소. 부디 잊지 않기를 바라오. 제발 제 시간에 나와주시오."

삼소저의 웃음은 매우 아름다웠다.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설사 하늘이 두 조각 난다해도 꼭 시간을 맞추어 나가겠어요."

그녀의 눈동자 속엔 낭만적이며 아름다운 환상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밤의 약속은 실로 꿈 많은 소녀에게 신비하고도 달콤한 것이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욱 그녀들을 흥분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소어아는 성내를 왔다갔다하며 돌아다니다가 성의 동쪽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작고
초라한 식당앞에 도착하자 비로소 들어가 식사를 했다.
그 식당 이름은 사향관(思鄕관)이었다.
그 안으로 들어간 소어아는 한 그릇의 국수와 네 개의 계란을 먹었다.
그 식당의 주인은 삼 년 이상이나 목욕을 하지 않는 것 같이 지저분했다.
소어아는 그를 불러 문방사우와 칠팔십장의 종이를 사오라고 했다.
그는 종이 위에다 주먹만한 큰 글자를 내려 쓰기 시작했다.

"개심이란 친구! 오늘밤 술시에 성의 동쪽에 위치한 사향관이란 식당에서 이씨란 친구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설사 가고 싶지 않아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칠팔 십장을 썼다. 그리고 그는 불량배 같은 두 명의 사내를 구하여 그 종이를
성 안의 눈에 띠는 곳에 붙이라고 분부했다.
식당의 주인장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든지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손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봐도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소어아는 그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알아야 할 사람은 당연히 알고, 몰라야 할 사람은 당연히 모르는 일이오."

주인은 머리를 긁으며 계면쩍어 했다.

"누가 알아야 할 사람입니까?"

그러나 소어아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의미 모를 미소를 남긴 채 그 식당을
나왔다.
식당에서 나온 소어아는 옷가게를 찾아가 한 벌의 중고품인 검은 옷을 산 후 잡화상에 가서
석고와 묵과 쇠가죽으로 된 주머니를 샀다.
그리고 난 후 그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객관에 투숙했다.
거울있는 방을 찾아 들어간 그는 옷을 훌렁 벗어 던진 채 마음껏 잠을 잤다.
그가 다시금 깨어났을 때는 날이 이미 저물 무렵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소어아는 거울을 바라보며 여자 같이 한참이나 화장을 했다. 그리고는 낮에
산 검은 옷을 몸에 걸쳤다.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은 소어아였다는 흔적은 눈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고 이대취와
똑같았다.
한참이나 찬찬히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본 소어아는 매우 만족한 듯 껄껄 웃으며 뇌까렸다.

"비록 완전히 똑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밤인데다가 그 백개심이란 작자가 필시 이십여년
동안이나 이대취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 충분히 그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본래부터 키가 작지 않았고 또한 이년 동안 단련을 기울여 왔으므로 사지가 잘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비단 변장한 그의 얼굴이 이대취와 매우 닮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몸집도 그 웅장한 체격을 지닌 이대취와 별 차이가 없었다.
설사 매일 같이 이대취와 만난 사람이라 해도 주의하지 않는다면 알아차리지 못 할
정도였다.
그는 벗어 놓은 옷을 한 뭉치로 꾸려 이불 속에 집어 넣고 밖에서 보기에는 침대 위에
여전히 사람이 누워있는 것 같이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후 그는 왼손으로 편지 한 장을 썼다. 그 편지는 강별학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편지 봉투에다 이런 말을 덧붙였다.

"강별학께서 친히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보아서는 안됩니다."

소어아는 그 편지를 품에 넣고 웃음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강옥랑이 오늘밤 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강별학이 설사 여우라 해도 이 편지를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설사 편지 내용을 믿지 않는다해도 삼경이 되면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알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하고 찾아갈 것이다!"

그는 흥분이 가득찬 웃음을 지으며 창문으로 해서 밖으로 빠져나갔다.
소어아가 다시 사향관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저녁 식사시간이었지만 사향관 안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그 주인장마저 어디론가
해방을 감추었고, 단지 한 명의 손님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사람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 쓴 모자 위에 진주가 하나 박혀 있는 것이 마치 큰
갑부인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불량배 같았고 마치 남에게 잡힐까봐 두려워하는 도둑처럼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소어아는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껄껄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네 녀석이 과연 와 주었구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 했는데 너는 여전히 이씨란 친구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시간을 맞추어 왔구나!"

그는 사향관이 떠나갈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대취의 옆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이대취의 표정과 태도를 모방하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누구냐? 나는 너를 모르겠다!"
"나를 속일 셈이냐? 네가 비록 옷은 사람답게 입었다만 그 비적같이 생긴 모습은 여전히
나타나 있다."

그 사람은 비로소 껄껄 웃으며 반가와했다.

"네놈 같이 사람고기만 먹는 녀석이 오랫만에 이 형님을 만났는데 좀 겸손하면 배라도
아프단 말인가?"

소어아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상 위에는 젓가락과 술잔 등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는 한 사라의 불고기가
놓여져 있었다.
그 불고기를 본 소어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네 녀석은 정말 형편없이 가난한가 보구나! 우리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초라하게
차렸으니 말이다. 빨리 주인장을 불러 오너라. 오늘밤 마음껏 먹고 마셔야 하지 않겠나!"
"그는 올 수가 없어."
"왜? 그가 어디에 있는데?"

백개심은 웃음띤 얼굴로 불고기를 가리켰다.

"바로 이 사라 속에 있다."

그 말을 들은 소어아는 속으로는 깜짝 놀랐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고 껄껄
웃었다.

"하하! 네 놈은 아직도 이 형님의 애호(愛好)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러나 그 주인장은 몇 년이나 목욕을 하지 않았던 것 같던데 고기가 썩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이 씻은 후 요리한 것이니 안심하고 먹어 두어라!"

그는 소어아에게 가득히 술 한 잔을 따라 부었다.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술을 따르는 그를 바라보았다.

"네 녀석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하구나!"

소어아는 하는 수없이 한 토막의 고기를 집어 먹었다. 그러나 입 안에 넣고 두어 번을 씹은
그는 즉시 그 고기를 뱉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더니 대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이것이 무슨 놈의 사람고기냐? 네 녀석이 감히 내 입을 속이려 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백개심은 껄껄 웃는 한편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냈다.

"네 놈의 입은 그래도 쓸만하구나. 이 고기가 즉시 사람고기가 아니란 것을 알아챘으니
말이다. 그러나 네 놈도 생각해 보아라. 내가 미쳤다고 사람을 죽여가면서 너에게 요리를
해준단 말이냐?"

물론 그는 이 방법으로 자기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이대취인지 여부를 가리고자 한
것이었다.
이 점을 알아 차린 소어아는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뜨고 대노한 표정을 나타냈다.

"왜? 나에게 효도하면 누가 너를 잡아먹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 주인장은 비록 더럽기는 했지만 매우 튼튼해서 내가 벌써부터 요리를 할려고 찍어 놓고
있었는데 너는 그를 어디에다 숨겼느냐?"
"그놈은 아마 지금쯤 고향에 도착했을 것이다. 지금 이 점포의 주인은 나라네.
하하, 그 바보 같은 녀석은 내가 준 은색을 칠한 납을 받고 매우 기뻐하며 이 점포를 내게
양도했지. 내가 자기에게 당한 줄 알고 말이야."

소어아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 초라한 식당은 너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데, 너는 왜 그를 완전히 망하게 속이고 또한
노부로 하여금 그의 맛좋은 고기를 놓치게 했느냐 말이다!
너의 그 이득을 상관하지 않고 남을 골탕먹이는 나쁜 버릇을 아직도 고치지 못 했구나!"
"그것은 나의 타고난 성격인 까닭에 고칠 수 없지만 너는 그 사람 고기를 먹는 나쁜 버릇을
왜 고칠 수 없단 말이냐? 그나저나 오랫동안 악인곡에 숨어 있다가 뭣하러 갑자기 밖으로
나왔느냐?"

소어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대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너는 우선 내 물음에 대답해라. 네가 내 이름으로 철무쌍 그 늙은이에게 깃발을 보내고
또한 내 이름으로 남의 집 시녀를 삶아 먹은 것은 도대체 무슨 목적이냐?"

백개심은 흠칫하며 놀랐다.

"네가 어떻게 그것을 다 알았지?"
"흥! 나를 속이려면 너는 아직 몇 년을 더 배워야 하느니라."
"그 녀석들이 할 일 없이 빌빌 대는 것이 보기에 하도 안타까워 일부러 그들에게 할 일을
마련해 준 것뿐이다. 또 사람의 고기를 삶아 가지고 먹을 사람을 초청한 후, 그들에게
밀고한 것은 그들 양쪽으로 하여금 큰 결투를 벌리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래야지만 내가 기쁨을 느끼니 말이다. 네 녀석도 솔직히 말해 보아라. 내가 치룬 이번
계획이 치밀하지 않았느냐?"
"흥! 다만 그 진가란 놈과 남궁이란 놈들이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들은 나이도
어리지 않은데 어째서 정체도 모르는 사람의 밀고를 함부로 믿는단 말이냐?
만약 내가 그들이었다면 우선 그 밀고자를 잡아 놓고 다른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물어 보겠다."
"그래서 편지를 써 보냈지. 무엇하러 내 자신이 직접갈 필요가 있단 말이냐?"
"누가 보낸 지도 모르는 편지를 그들이 함부로 믿어 줄 수 있겠느냐?"
"설사 믿지 않는다고 할 망정 그래도 확인하러 가지는 않겠어?"

소어아는 무릎을 탁 쳤다. 이대취가 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바로 그것이다. 내가 바로 너에게 그 말을 듣고 싶었단다......."

백개심은 눈알을 굴렸다.

"너는 또 무슨 못된 계획을 짜고 있느냐? 설마 나를 골탕먹일 계획은 아니겠지?"
"쓸데없는 생각은 말아라! 네가 비록 나의 이름을 남용했지만 나는 너에게 벌을 줄 생각은
없다. 그저 네가 다시 한 번 진씨란 놈과 남궁이란 놈에게 편지를 띄워 준다면 말이다!
너의 첫번째 편지가 그럴듯 하게 됐으니 그들은 당연히 너의 두번째 편지도 믿을 것이다."
"어떠한 내용의 편지를 띄우라는 말이냐?"
"당연히 남을 골탕먹이는 편지지!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써 줄 리 만무하지 않는가?"
"남에게 골탕먹이는 일이라면 무조건 할 수 있지! 그런데 네가 골탕을 먹이고자 하는
상대는 누구냐?"
"잔말말고 그들보고 오늘밤 삼경 때 단합비의 장원 뒷뜰에 있는 손님방으로 가보라고 해라!
그곳에 그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물건이 있다고 말이다.
다만 꼭 오늘밤 삼경이라야 된다고 말해라. 너무 일러도 아니 되고 늦어도 아니 된다고
말이다. 골탕먹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너도 차차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그 편지를 쓰지 못하겠다면?"

소어아는 냉소를 터뜨렸다.

"쓸 것이라 믿는다. 너는 남에게 골탕을 먹일 수 있는 일을 보고도 하지 못한다면 잠도
못이루는 사실을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더군다나 네가 그 편지를 쓰지 않는다면 쓰게 할
방법이 따로 있단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강별학에게 주고자 하는 편지를 품에서 꺼내면서 재빨리 일장을
뿜어 장풍으로 등불을 껐다.
백개심은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무엇을 하려는 속셈이냐?"
 


             여인(女人)의 마음 
 
 
소어아는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를 잡으려는 놈들이 왔으니 빨리 도망갈 준비를 하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창문 밖에서는 달빛을 받은 칼날빛이 번쩍거리며 한 사람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이씨란 놈과 백씨란 놈은 들어라! 너희들은 하늘이 용서할 수 없는 많은 죄를 지었으니
도망갈 생각을 버리고 어서 나와서 죽음을 받아라!"

어둠에 잠긴 밤하늘 속에서 많은 인영(人影)이 번쩍거리는 것으로 보아 사향관 식당은 물샐
틈없이 완전히 포위된 것이 틀림없었다.
이때 또다른 사람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취! 듣자니 당신은 이미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선한 사람이 되고자 무척이나 노력했다
하더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서 나와 자수를 하시오. 나는 내 명망으로 절대로
당신의 생명을 해치지 않을 것을 보증하겠소."

백개심은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이상하다! 이 놈들이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소어아는 속삭이듯 작은 음성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지금 그 인자하고도 어진 것처럼 말하는 자는 필시 강별학일 것이다."
"그런 것 같다!"
"그가 위치한 쪽으로 뚫고 나가자!"

백개심은 또다시 놀랐다.

"무공이 가장 뛰어난 그가 있는 쪽으로 뚫고 나가자고? 너 혹시 미친 것은 아니겠지?"
"나도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이니 걱정 말고 따라 오너라?"

이때 밖에서 또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이 정히 우리의 충고를 듣지 않겠다면 우리가 들어가겠다."

사실 밖에 있는 이들은 십대악인에 대하여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집안으로
달려 들어오지는 못했다.
이때 소어아가 불쑥 몸을 일으키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대취가 나갈 터이니 기다려라!"

그는 의자를 들어 동쪽에 있는 창 밖으로 던지는 한편 몸은 서쪽에 있는 창문을 향하여
솟구쳐나갔다.
의자가 날아가자 동쪽 문 밖에서는 한차례의 소란이 일어나며 몇 자루의 칼이 빛을
뿜어냈다. 그들의 칼은 일제히 의자에 적중했다.
한편 창문 밖으로 뚫고 나간 소어아에게도 두 자루의 칼이 격해 왔다.
소어아는 크게 기압을 지르면서 발을 날려 왼쪽에서 날아오는 한 자루의 칼을 가볍게
걷어차는 동시에 오른쪽에 있는 사람의 머리 위로 날아가며 그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그 사람은 비명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그가 행한 이 일 초의 원앙 쌍비각은 원래 그리 뛰어난 무공의 초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초식을 약간 변화시킨 것으로도 두 명의 고수를 가볍게 물리친 것이었다.
그가 지하궁궐에서 얻은 무공비급은 천하 각문 각파 무공의 정밀함을 모두 갖춘 것이었다.
그것을 연마한 자는 어느 문파의 초식을 막론하고 모두 그것을 신기할 정도로 응용할 수
있었다. 또한 상대방은 그가 뿜어 낸 초식이 어느 문파의 무공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씨란 놈은 과연 보통이 아니니 여러분들은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퍽'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뒤따라 한 차례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말을 하던 자가 백개심에게 일격을 맞은 모양이었다.
소어아는 북파의 원앙 쌍비각으로 두 사람을 쓰러뜨린 다음 즉시 남파의 충천포란 일 초를
뿜어내 한 명의 대한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이때 갑자기 눈앞에 날카로운 검빛이 번쩍거리더니 신속하고도 악독한 일검이 그에게
덮쳐왔다.

"이대취! 너의 무공이 비록 매우 깊고 웅후하지만 오늘은 이곳에서 살아 나갈 생각을 하지
말아라!"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이미 전광석화와 같이 여덟 검을 뿜어냈다. 더욱이 그 검식은
매초마다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소어아는 바라보지 않고도 이 자가 강별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어아는 공격해 들어오는 여덟 검을 피할 뿐 반격하지는 않고 다만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너의 아들과 표은의 행방을 알고 싶지 않느냐?"

순간 강별학은 검세를 늦추며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어왔다.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소어아는 편지를 강별학의 검끝에다 끼워주며 한마디를 던졌다.

"이 편지나 보고 말해라."

강별학은 어찌해야 좋을지 잠시 갈림길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가 잠시 정신이 흐트러진
사이에 소어아는 이미 그의 옆을 빠져 달려나갔다.
백개심도 기압소리를 지르며 그를 따라갔다.
강별학은 두 눈을 빤히 뜨고도 그들이 도망가게끔 놓아 둔 셈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달려 왔을 땐 소어아와 백개심은 이미 사라지고 종적을 감춘 후였다.
 
소어아와 백개심은 무성한 수풀 속으로 달려 들어가서야 발을 멈추었다.
백개심은 소어아를 노려보며 차디찬 웃음을 띠운 얼굴로 물었다.

"그 놈들이 어떻게 우리의 행방을 알았을까?"
"당연히 밀고한 자가 있겠지!"
"밀고한 자는 아마 네 자신일 것이다."
"만약 밀고한 자가 나라면 내가 무엇하러 너를 도망 나오게끔 도와 주었겠느냐?"

백개심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너 말고 또 누가 우리가 만나는 장소를 알고 있지?"
"다른 사람들도 장님은 아닐 텐데 내가 붙인 종이 위에 그토록 큰 글자를 보지 못한단
말이냐?"

백개심은 여전히 냉소를 터뜨렸다.

"네가 쓴 그 말들을 누가 해독할 수 있단 말이냐?"
"당연히 해독할 사람이 있지!"

백개심의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그것이 누구냐? 혹시 우리의 옛친구들 중에 이 성 안에 당도한 사람이 있단 말이냐?"

소어아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드디어 입술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주지. 성안에 나구와 나심이란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를 못살게 굴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네. 그들은 우리의 일에 대해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지."
"그 놈들은 어떻게 생겼는데?"
"뚱뚱하고 키가 크며, 똑같이 생긴 쌍둥이야!"
"삐쩍 마른 쌍둥이는 알지만 뚱뚱한  쌍둥이는  모르겠는데......."
"넌 그들을 모르지만 그들은 너를 알고 있지."
"그들이 밀고할 것을 알면서도 너는 왜 그 종이를 부쳤지?"

백개심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대취로 변장한 소어아는 여전히 태연했다.

"내가 그렇게 한 목적은 바로 그들로 하여금 밀고하게 하려는 것이였지. 그래야지만 그
편지를 강별학에게 전해 줄 수 있거든.
만약 다른 방법으로 편지를 전해 준다면 그는 그 편지를 중요시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이대취가 친히 그에게 전해 준 것이니 그 무게가 당연히 다르겠지!"
"어떻게 강별학이 꼭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지?"
"그는 대협객 흉내를 내고 있어. 그런데 십대악인이 성 안에 있다는 것을 듣고도 어찌
상관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하지만 그가 오게 되더라도 필시 우리를 놓아줄 것임을 나는 아울러 자신할 수 있었지."

백개심은 한참이나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결국 한숨을 길게 쉬며 입을 열었다.

"네가 모든 것을 그렇게 치밀하게 계산했으니 아마 진짜 이대취도 너보다는 못 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멈칫함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즉시 껄껄 웃었다.

"무슨 놈이 진짜 이대취란 말이냐? 그렇다면 내가 가짜란 말인가?"
"하하! 이대취의 모습과 태도를 똑같이 흉내내서 심지어 나마저 탄복하게 만드는구나.
네가 내 앞에서 죽는 것을 보고 싶진 않지만, 애석하게도 너는 이미 내 앞에서 죽어야 할
몸이야!"
"어째서 내가 네 앞에서 죽어야 한단 말이냐?"

백개심은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마신 술은 이미 나의 독문(獨門)인 수정단장산(水晶斷腸散)을 넣은 것이다.
원래 너는 반 시간 정도를 더 살 수 있었는데 조금전 한바탕 날뛰었으니 아마 이젠 죽을
때가 됐을 걸!"

소어아는 대노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네 놈은 참으로 지독한 악당이로구나! 네 놈은 그 목숨을 부지할 것으로 아느냐?"

그는 백개심에게 덮쳐 가려 했으나 몸을 솟구치자마자 '쿵' 하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얼굴색이 점점 창백해졌으며 배 속을 칼로 도려내는 듯 하여 배를 움켜쥐고 뒹굴었다.

"난...... 난...... 난 이제 죽겠구나......."

백개심은 좋아 죽겠다는 듯 손발을 흔들며 껄껄 웃었다.

"이젠 십대악인이 결코 상대하기 쉬운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겠지."
"그러나...... 그러나...... 너는 어떻게 내가...... 내가 이대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
나의 변장술에 뭐 잘못된 점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좋아, 내가 솔직히 말해 주지. 네가 영문도 모르고 죽은 귀신이 되지 않게 말이다."

소어아는 신음을 발했다.

"제발 부탁이니 어서 말해 봐라."
"넌 이대취의 일거일동을 그토록 똑같이 흉내내는 것을 보니 필시 너는 그를 알겠구나.
그렇지?"

소어아는 아픔을 참지 못하여 온몸을 벌벌 떨며 대답했다.

"그...... 그래......."
"너는 그에게 나에 관한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
"없...... 없어."
"그것은 나와 그가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그는 내 이름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그런 그가 어찌 나를 친구로 생각하여 한 상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단 말이냐?"

그는 껄껄 웃으며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너는 십대악인이 모두 악인이기 때문에 서로 통하는 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친구라
했겠지만 십대악인 중에서도 서로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겠지. 바로 그 한 가지 실책이 너의 생명을 잃는 치명적인 타격이 된 거야!"
"너는 애초부터 내가 이대취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너는 왜......."
"흠, 어르신네가 줄곧 모르는 척한 것은 다만 너의 목적을 알고 싶었던 것이야. 또 너와
장난을 치고 싶기도 했지.
이제 그 장난에 어르신네가 지쳤으니 너를 죽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
"비록 오늘 네 손에서 목숨을 잃지만 너도 한 가지의 일을......."

그는 음성이 점점 작아졌고 거의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백개심은 그의 마지막 하는 말에 관심을 느낀 듯 다그쳐 물었다.

"무슨 일이냐? 어서 말해 보아라!"

소어아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방울방울 솟아났다.

"너...... 너......."

그는 있는 힘을 다했지만 음성이 여전히 모기 울음소리 같았다.
백개심은 참다 못하여 그에게 다가서 고개를 숙이며 크게 소리쳤다.

"크게 말해라! 어르신네께서 듣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자 소어아는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네가 밥통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신속한 속도로 백개심의 몸에 있는 십여 곳의 혈도를 점했다.
백개심은 외침소리에 놀라 멈칫하는 순간 이미 땅바닥에 쓰러졌다.
소어아는 재빨리 땅바닥에서 일어나 호탕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비록 여우 같이 교활하고 영악하지만 나에게 걸린 이상 피할 수는 없지.
이제 어르신네가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았겠지?"

쓰러진 백개심은 두 눈을 부릅뜨고 소어아를 노려보았다. 그는 실로 이 세상에
십대악인보다 더욱 영악하고 교활한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이제껏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소어아는 웃는 얼굴로 다가섰다.

"비록 그 술 속에 독이 있는지의 여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십대악인을 상대할 때는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그 술을 삼키지는 않고 혓바닥 밑에 감추고
있다가 고기를 뱉을 때 함께 뱉았던 것이야!"

백개심은 놀라움이 가득찬 표정으로 말했다.

"내...... 내가 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흥, 사람을 속이는 실력은 어르신네가 다섯 살 때부터 터득했어. 비단 작은 한 잔의 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큰 오리알을 입에다 감춘다해도 너는 발견할 수 없어!"

백개심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넋이 빠진 표정을 했다.

"너...... 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하하, 너도 이젠 어르신네를 무서워하는 모양이구나. 사실 어르신네는 누가 봐도
무서워하는 존재이지. 네가 만약 어르신네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면 얌전하게 나를 위하여
일을 끝내라. 그러면 혹시 너에게 말해 줄지도 모르니까."

백개심은 이 귀신보다 더욱 무서운 자가 자기를 죽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크게
기쁜 나머지 금새 굽신거렸다.

"네 네, 소인은 즉시 편지를 쓰도록 하죠."
"이제야 '어르신네'에서 '소인'으로 변했구나. 하하하...... 그러나 난 좀 조치를 취해놔야
되겠다."

그는 조금 전부터 한 뭉치의 진흙을 쥐고 있었다. 그는 백개심의 입을 벌려 힘껏 그 진흙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백개심은 한 덩이의 진득하고 축축하며 구린내도 곁들어 있는 물체가 목구멍을 통해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떠듬떠듬 물었다.

"이것은...... 이것은 무엇이오?"
"너에게 너의 독문인 수정단장산이 있는 것처럼 나도 내 독문인 '흑살최명환'이 있다."

순간 백개심의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흑살최명환이라고요? 난...... 나는 한번도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당연히 들은 적이 없겠지. 그것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요즘에 와서
완성한 약이야. 그 독을 고칠 수 있는 약초는 없어. 복용 일곱 시간 후엔 온몸이 검게
변하고 또 반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썩기 시작하다가 끝내는 검고 구린내가 나는 물로
변하여 죽고 마는 것이지."

그가 아무렇게나 줏어대는 말들은 마치 정말인 것 같았다.
이 말을 들은 백개심의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뚝뚝 떨어졌다.

"물론 나만은 그 독문의 해독약을 지니고 있지!"
"당신과 나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제발 부탁하겠소. 그 해독약을......."

소어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채며 나무라듯 말했다.

"일곱 시간내로 내가 말한 대로 일을 하고는 이곳에 와서 기다려라. 내가 너를 다시 살리러
올 테니까."

그는 백개심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러나 백개심은 여전히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마치 일어날 힘도 없는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여전히 두려워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 당신이 약속을 잊지는 않겠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가서 편지를 써라! 시간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백개심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 재빠른 동작으로 땅바닥에서 일어나 꼬리에 불이 붙은
짐승처럼 나는 듯 사라졌다.
멀리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어아는 껄껄 웃었다.

"모든 사람이 무서워하는 십대악인도 쉽게 속임수에 넘어가는구나."

 
자정이 되기 바로 직전에 소어아는 다시 그 다락방으로 갔다.
그러나 나구와 나삼은 그의 예측대로 그곳에 있지 않았다.
모용구매는 양탄자 위에 앉아 있었는데, 흙으로 만든 장난감 아이를 안은 채 낮은 음성으로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귀여운 아기야, 어서 잠을 자라. 창 밖엔 날이 이미 어두워졌고 작은 새들도 벌써 집으로
돌아갔다. 까마귀도 휴식을 취한단다......."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그녀의 노래를 이었다.

"날이 밝고 태양이 나오면 또다른 꽃이 향기롭고, 새가 울 날이......."

모용구매는 노랫소리를 그치고 한참이나 망연히 소어아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벌써 잊었나요...... 내가 바로 어젯밤 당신에게 어떻게 악마를 제거할 수 있나를 가르쳐 준
사람이오."
"아, 당신이로군요. 그런데 왜 당신 모습이 달라졌죠?"

소어아는 일부러 살며시 말했다.

"나는 당신 몸 속에 있는 악마가 나를 알아차릴까봐 일부러 이렇게 변장한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남에게 나를 보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모용구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 악마는 매우 매우 무서운 존재이니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죠. 안 되고
말고요."
"당신은 알 것입니다. 당신은 총명한 소녀이니까 말입니다."

모용구매는 흰 이를 드러내며 방긋이 웃었다.

"내가 정말 총명합니까?"

애수에 잠긴 듯한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이러한 미소가 나타나자 마치 음산한 날씨에
햇빛이 갑작스레 비치는 것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소어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더 이상 그녀를 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나는 당신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소. 그곳에서 아주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만날 것이오. 그 분은 당신 몸 속에 있는 악마를 내쫓아 줄 것이오."

무슨 영문인지 모용구매는 그의 말을 매우 잘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밖으로
걸어 나가려 했다.
두세 발자국을 걸어가던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갑자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되죠?"
"훗날 당신은 아마도 나를 만나기가 매우 힘들 것이오."

모용구매는 이 말을 듣자 즉각 걸음을 멈추었다.

"만약 훗날 당신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나는 그곳으로 떠나가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을 듣자 소어아는 당황해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조급히 말했다.

"만약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악마가 사라진다면 당신 자신도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당신 곁에서 다정하게 당신을 보살펴 줄 것입니다."

모용구매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악마가 내 몸 속에 있게 하겠어요."

소어아는 그녀의 이같은 말을 듣게 되자 알 수 없는 울고 싶은 충동이 울컥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즉시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그런 감상을 털어버리려고 하며
모용구매를 타일렀다.

"바보 같이 무슨 말을 하고 있소. 당신은 평생 동안 이렇게 살고 싶단 말이오?"

모용구매는 찬찬히 그를 뜯어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이대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요. 더군다나 당신이 매일처럼 내곁에 있어 준다면
당신도 역시 내 마음 속에 있는 악마를 쫓아낼 수 있죠? 그렇죠?"
"당신이 이렇게 말을 듣지 않고서야 내가 어찌 매일같이 당신을 찾아오겠소?"

모용구매는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가는 것을 꼭 원한다면 당신의 말에 따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소어아는 끝내 참지 못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당신이 내가 오늘밤 한 말들을 기억한다면, 훗날 나는 다시 당신을 찾아가겠소......."

 
소어아와 모용구매가 단합비의 장원 뒷문에 도착했을 땐 삼소저가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밤은 매우 추웠다. 그러나 그녀는 얇고 부드러운 분홍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는 허리를 졸라매며 밥을 굶을 수도 있는데 추위 정도야 견딜 수
없겠는가!
그녀는 자꾸 가슴이 울렁거리며 떨려옴을 느꼈다.
비록 날씨가 추워 몸은 벌벌 떨고 있었지만 가슴 저 깊은 곳에서는 따뜻하고 포근한 것이
올라와 삼소저를 감싸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난생 처음으로 남자와 가진 약속이었다.
멀리서부터 소어아를 발견한 그녀는 기쁨이 가득찬 마음을 안고 소어아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소어아 앞에 가까이 당도한 그녀는 소어아 뒤에 또 한 사람이 따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너무나 기쁜 나머지 터져버릴 것 같던 마음은 차츰차츰 사라져갔다. 그녀는 입술을
힘껏 깨물며 입을 열었다.

"당신...... 당신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니었군요?"

소어아는 정말 그녀의 마음을 몰라서인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낄낄거리며 삼소저를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혼자 온다고 했었소?"

삼소저는 그제서야 비로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외쳤다.

"당신...... 당신은 누구요?"
"방금 나를 알아봤는데 지금은 왜 나를 몰라 본단 말이오?"

삼소저는 그의 음성을 듣고 조금 마음이 놓였지만 여전히 의심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조금 전에 나는 다만 느낌으로...... 느낌으로 당신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의 얼굴은......."

소어아는 음성을 낮추었다.

"나는 한 가지 일을 비밀리에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변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러니 당신은 절대로 남에게 이 비밀을 탄로시켜서는 안 되오. 이 비밀은 오직 당신 혼자
만이 알고 있으니 말이오."

그는 비밀리에 처리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소녀들은 사랑하는 남자의 비밀을 캐물어 보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삼소저의 얼굴에는 다시 화색이 돌았다.

(이이는 나를 진심으로 대해 주는 것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나에게만 가르쳐 준단 말인가!)

그녀도 음성을 낮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마세요. 절대로 남에겐 비밀을 알리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일은 아직도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조금 필요하오."

삼소저는 다그쳐 물었다.

"제가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없겠어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까 하기도 했었는데...... 만약 당신이 협조해 준다면 다른 사람보다
몇십 배 몇백 배나 좋지요."
"내가 벌써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일이라면 어떠한 것을 막론하고 모두 들어준다고
말입니다."

소어아는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 일은 별로 힘든 것은 아니오. 다만 이 사람을 당신이 데리고 있다가 삼경이 될
무렵 그를 강별학의 방으로 살며시 데려다가 은밀한 곳에 숨겨 놓으면 됩니다."

삼소저는 조금도 망서리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그런 일은 제가 능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은 추호도 하실 필요 없어요."

그러나 소어아는 여전히 정색을 하고 신중을 기했다.

"하지만 두 가지의 일을 꼭 기억해야 하오. 첫째는 절대로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되고, 둘째는
꼭 삼경이 될 때 이 사람을 숨겨 놓아야 합니다. 너무 일러서도 아니 되고 더욱이 늦어서도
안 됩니다."
"걱정마세요. 절대로 당신의 일을 망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소어아의 뒤에 서 있는 모용구매를 주시했다.


 
             강별학의 수난(受難) 
 
 
모용구매는 전신이 검은 옷으로 가리워져 있었고 심지어 머리마저 덮혀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그녀를 주시하던 삼소저도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드디어 참지 못하여 입을 열었다.

"이 분은 누구입니까?"

삼소저의 물음에 우물쭈물 하던 소어아가 결국 대답했다.

"이 아가씨는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매우 큰 관련이 있으니, 장차 알게 될 것이오."

그는 모용구매를 삼소저에게 넘겨 주며 독촉했다.

"빨리 가시오."

모용구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자 했지만 소어아가 이미 발길을
돌렸기에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러한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삼소저는 얼굴에 한가닥 의심하는 듯한 빛이 스쳤으나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모용구매에게 말을 던졌다.

"나를 따라와요!"
 

일찌감치 사당에 도착한 소어아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주위에다 몇
가지의 장치를 했다.
그리고는 은신하기 가장 좋은 곳을 찾아 자신의 몸을 숨겼다.
그곳은 사당의 모든 구석을 환하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들킬 염려도 없는
곳이었다.
소어아는 자기의 계책을 처음부터 다시금 검토했다.

(검진과 남궁유는 모용구매의 쪽지를 받고 반드시 올 것이다. 강별학도 역시 편지를
보았으니 안 올 수가 없을 것이고.
진검 등 그들은 팔십만 냥의 은을 휴대하고 있을 테고 강별학 쪽의 사람들은 표은을 찾고자
할 테니 그들이 이곳에서 만나면 반드시 흥미진진한 장면들이 벌어질 것이다!
서로 조급하게 굴 것이니 한마디만 잘못하면 싸우게 되겠지. 설사 그들이 서로 끝까지
싸움을 하지 않는다해도 삼소저가 모용구매를 강별학의 방에 데려다 놓는다면,
모용집안의 인물들이 백개심의 밀고를 듣고 그녀를 찾아낼 테니, 그때 가서는 절대
강별학을 가만 놓아 두지 않을 것이다.)

소어아의 이 계책은 실로 일거양득일 뿐만 아니라 일거다득의 묘안이 숨겨져 있었다.
첫째, 강별학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쓰라림을 맛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이었다.
둘째, 소선녀 고인옥 등 어젯밤 그를 골탕먹인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뤄줄 수가 있었다.
셋째, 결국 모용구매를 자기 집안의 사람에게 돌려 주게 되면 설사 정신이 회복되지 않는다
해도 떠돌아 다니며 놀림을 당하지는 않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소어아로서도 걱정거리 한 가지를 덜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네째, 강별학이 이번 계책에 넘어간다면 설사 목숨을 건진다 해도 거동을 얼마쯤은 삼가할
것이고, 또한 백개심 등 사람들도 함부로 일을 저지르지는 못하게 될 것이었다.
다섯째, 단씨네의 표은을 되찾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것은 친절을 베풀어 주는 단씨 부녀에 대한 보답이 되는 셈이었다.
여섯째, 애재여명이란 칭호를 받고 있던 노영웅 철무쌍도 이 계책으로 인하여 억울함을
씻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 불쌍한 노인을 편안히 잠들게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이었다.
소어아는 생각을 거듭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의 계책이 추호의 빈틈도 없다고
느껴졌고, 강별학이 제아무리 영악하다 해도 아마 이토록 교묘한 계책을 세우지는 못 할
것이라고 느껴졌다.
강별학, 진검, 남궁유, 백개심, 나구, 나삼 등 이 계책과 관련있는 사람들은 모두 상대하기
힘든 영악한 존재들이었지만, 그에게 이용을 당하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 자기의 계책을 미리 알 수 있는 자는 절대로 없을 것이라 자부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 띤 얼굴로 뇌까리기까지 했다.

"누가 감히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이 아니라 말할 수 있나! 누가 감히 내가
천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봐, 나를 따라 오라니까!"

삼소저는 다시금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나 모용구매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그저
소어아가 가버린 방향을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삼소저는 일부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몸집은 모용구매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모용구매의 시선을 막을 수가 있었다.

"당...... 당신은 왜 나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죠?"
"그는 떠나간 지 이미 오래되었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는 것이냐?"

모용구매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더니 갑자기 웃음을 띠웠다.

"옳은 말이에요. 그는 이미 갔지요. 하지만 그는 언젠가 반드시 나를 찾아올 거예요."
"그는 너를 속이고 있는 거야. 너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으로 너희들의 사이는 이미 끝난
것이란다."
"그가 절대로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그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달빛이 그녀의 미소를 띠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맑고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미래의 행복이 가득차 있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실로 더없이 아름다웠다.
삼소저도 여자였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멍해졌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너...... 네가 어떻게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나?"
"그분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은 오직 내 마음깊이 파묻혀있는 악마를 내쫓기
위해서입니다. 그 악마가 내몸에서 떠난다면 그는 다시금 나를 찾아올 것입니다."
"너의 마음 속에 악마가 파묻혀 있다고?"

모용구매는 애절한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 악마가 내 마음 속에 파묻혀 있기에 나는 과거의 일들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삼소저는 그녀의 아름답고도 순정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는 과거를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만약 네가 제 정신이었다면 그분이
너를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냐?"
"그도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너의 정신만 회복되면 그는...... 즉시 너를 찾아온단 말이지?"

삼소저의 음성은 질투로 인하여 떨리고 있었다.
모용구매는 여전히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틀림없이 저를 찾으러 올 것입니다."
"그는...... 그는 또다른 말은 하지 않았느냐?"

모용구매의 안개가 가득찬 눈에서 갑자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또 있어요. 그는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영리하고 아름다운 소녀라고도 했어요. 그리고
내가 그의 말을 잘 듣는다면 영원히 내곁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요.
나는 당연히 그의 말을 잘 듣겠어요."

삼소저는 그녀의 이러한 말에 갑자기 울부짖는 음성으로 부정하듯 말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모용구매는 그녀의 외침소리에 놀라 겁난 눈동자로 그녀를 살폈다.

"왜요?"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야. 너는 조금도 영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예쁘지 못하고
단지 일개의 추한 미친 여자밖에 지나지 않다. 그 분이 절대로 너를 좋아할 리가 없어!"

모용구매는 멍하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끝내는 눈물로 두 뺨을 적셨다.

"나를 속이려는 것이지...... 나를 속인 것 뿐이지......."

삼소저의 선량한 눈에는 놀랍게도 흉악한 빛이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큰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각해 보아라. 그와 같은 분이 어찌 너 같은 미친 계집을 좋아할 리가 있겠느냐? 이것은
결코 꾸며대는 말이 아니란다!"

모용구매는 더 이상 참다 못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야. 나는 결코 미친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네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럼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 살고 있었느냐?"
"나는...... 나는......."

아무리 애써 생각해봐도 모용구매는 머리만 쪼개질 듯 아파왔고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있는 기력을 다하여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던 그녀는 드디어 통곡하면서 말을 이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나에게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나는 모르겠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그러나 애걸하며 괴로워하는 모용구매에게 삼소저는 냉소를 터뜨렸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미친 사람이란 말이냐?"

이 말에 모용구매는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미쳤다. 나는 미쳤단 말이다...... 그분이 나를 좋아할 리가 없다. 좋아할 리가 없단
말이야......."

이렇게 외친 그녀는 통곡을 하며 마구 달려가기 시작했다.
삼소저는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본 후에야 비로소 숨을 돌리며 허탈한 듯
내뱉았다.

"가라! 멀리 멀리 가라! 그 분이 영원히 너를 찾을 수 없게 말이다......."

그녀의 입가에서는 한가닥의 잔혹한 승리의 미소가 넘쳐 흘렀다.
평상시에는 그토록 선량했던 여인이 한 남자를 사랑하고 독차지 하기 위해 이같이 잔혹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었고 절대로 그녀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영리한 소어아도 역시 이런 변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 세상에 질투하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그는 여자의 마음이 갈대와 같다는 말을 잊었던 것이었고, 여자의 약속은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이 지켜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한 남자로서 만약 불행하게도 그 점을 잊는다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했다. 운이 매우 좋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어아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교외였기 때문에 야경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멀리서 은은히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어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 쪽에서 먼저 왔을까? 양쪽 모두가 조급하겠지만 강별학은 비교적 침착하게 처신할
테니 아마도 진검 쪽이 먼저 온 모양이다.)

당나귀의 울음소리와 마차 수레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과연 내 생각대로 진검 그들이구나. 하지만 그들이 당나귀가 끄는 수레로 은을 운반할
줄이야.......)

그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진검과 남궁유 같은 집안의 공자는 설사 수레로 은을 운반한다 해도 말로 수레를 끌 것이지
절대로 당나귀로 끌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소어아는 비록 허황된 장난꾸러기였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매우 치밀했기 때문에 약간의
이상한 것도 그냥 지나치지를 않았다.
그가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난 것도 결코 남보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오직
조심하는 사람만이 오래 살 수 있다는 이치를 어릴 때부터 익히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마차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진검과 남궁유 쪽도 아니었고, 강별학은 더욱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그들은
상복차림의 산발을 한 육칠 명의 촌여자들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지 이 무슨 엉뚱한 일이란 말인가? 이토록 깊은 밤에 이
촌여자들은 잠도 자지 않고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단 말인가?)

그 촌여자들은 사당에 들어서자 일제히 땅바닥에 꿇어앉아 방성대곡을 했고, 왼쪽에 있던
부인은 큰절을 하며 곡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영감! 불쌍한 내 영감! 당신의 영혼이 계신다면 말 좀 해 보십시오. 나는 당신 집안의
핏줄을 이어 주려고 십여 년 동안을 과부로 늙으며 고생끝에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의 해침을 받을 줄이야...... 나보고 앞으로 무엇을 믿고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이 부인의 연령은 사십 세 안팎이었고 비록 상복 차림을 하고는 있었지만 깔끔한 용모였다.
부인의 뒤에는 한 젊은 아낙이 그 부인의 등을 쓰다듬으며 울먹였다.

"작은 어머님! 제발 고정하셔요. 몸을 생각해서라도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엔 가산을 모두 뺐기고 말 것입니다.
작은 어머님이 뭐하러 남에게 좋은 일을 해줍니까?"

이때 오른쪽에 꿇어앉아 있던 부인이 지지 않으려는 듯 즉시 울음을 터뜨렸다.

"영감! 당신의 영혼이 계시다면 저 천한 년의 입을 찢어 주십시오. 비록 내가 난 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집안을 이어받을 핏줄인데 어찌 내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저 천한 것이 오직 우리의 가산이 탐이 나 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것입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그 부인은 나이가 조금 위인 것 같았고 얼굴이 못 생긴 편이었으며 또 보기 민망할 정도로
야위었다.
그녀가 이렇게 울고 불고하자 그의 옆에서도 역시 한 젊은 부인이 그녀를 따라 울었다.

"큰 어머님, 제발 몸을 생각해서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도 눈이 있으니
절대로 저 악독한 작은 어머님에게 가산을 빼앗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어아는 이 몇 마디를 듣자 사태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 이 두 부인은 한 남편을 섬긴 부인과 첩이었다. 그녀들의 남편은 일찍이 세상을
하직했고 아들을 하나 남겼는데 그는 첩의 자식이었다.
아들이 죽기 전에 첩은 아들의 귀중함을 믿고 자주 본부인을 괴롭혀 왔다.
그러나 그 아들이 갑자기 죽고 말자 본부인은 오랫동안 당한 울분을 참지 못해 첩을
내쫓으려 했고 첩은 본부인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고 우기며 도리어 본부인을 내쫓으려
했다. 그들은 집안 싸움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이토록 깊은 밤에 조상의 사당을 찾아온
것이었다.
소어아는 이렇게 일이 전개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당황해서 귓 속이
윙윙거렸고 그저 그녀들을 쫓아내고자 하는 마음만이 간절했다.
비록 낡아 빠진 사당이었지만 역시 그 부인들의 소유였으니 그가 어떻게 그녀들을 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만약 그가 나서 있을 때 강별학 등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친다면
그의 계책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될 위험이 있었다.
그가 마음 속으로 푸념을 하며 부인네들을 원망하고 있을 때, 얼굴을 가린 대여섯 명의
흑의인영이 소리없이 사당 입구에 나란히 나타났다.

(음! 드디어 나타나셨군. 강별학 네 놈도 역시 별 수 없는 놈이로구나!)

그러나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는 부인들은 아직도 울며 불며 서로 욕을 하고 있었다.
그 흑의인들이 그녀들 뒤에 다가와 섰지만 전혀 입을 열지는 않았다.
처음에 그 본부인과 첩은 저승에 있는 남편을 이용하여 빗대어 상대를 욕했었는데, 지금은
열이 오른 듯 서로 직접 욕들을 퍼부었다.
본부인이 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우같은 년! 네 년만 없었으면 내 남편이 벌써 돌아가셨을 리가 만무하다. 네 자식이 죽은
것이야 말로 천벌인데, 네 년이 감히 그 죄를 내게 뒤집어 씌우려 하다니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첩도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 추악하기 짝이 없는 년아! 물을 떠다 얼굴을 비춰 본 뒤에나 남을 질투할 일이지......
너야 말로 내 남편을 죽인 진범이야!"

본부인의 음성 속엔 노기가 등등했다.

"누가 네 남편이야? 그 분은 분명히 내 남편인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 분을 남편이라
부르느냐? 이 망할 년아!"
"흥! 너야말로 진짜 집안을 망칠 년이다. 자식 하나도 못 낳은 주제에 무슨 큰소리냐? 내가
아니었던들 남편 묘소에 향불을 피울 사람조차도 없을 뻔하지 않았느냐!"

첩의 치욕적인 욕설을 듣자 흥분한 본부인은 치를 떨며 첩의 뺨을 후려쳤다.
따귀를 얻어맞은 첩은 상기된 얼굴로 외치다시피 말했다.

"좋다. 이제 감히 손까지 올라오다니 너 죽고 나 죽자!"

그녀는 덤벼들어 본부인의 머리채를 잡아 당겼다. 양쪽으로 갈라 서있던 젊은 부인들은 이
광경을 보자 급히 싸움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은 서로 치고 받게 되었고 심지어 당사자들보다 더욱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정말 가관이었다.
여러 명의 아낙네들은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을 휘어잡으며 뒹굴기 시작했다. 싸움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그 아낙네들은 흑의인들이 서 있는 곳까지 밀려갔다.
이때 갑자기 쉭! 쉭! 쉭!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싸움을 하고 있던 아낙네들의 몸에서 수십
개의 암기가 솟구쳐 나왔다.
그 암기들은 실로 악독하고 빨랐다.
흑의인들은 이미 완전히 암기에 덮여 있었고, 전혀 피할 가망이 없어 보였다.
 
사실 소어아는 벌써부터 뭔가 수상한 점을 발견했었다.
그것은 그 아낙네들이 비록 산발을 했고 얼굴의 피부도 곱지 않았지만, 열 손가락이 매우
희고 곱다는 점이었다.

(모용집안의 아가씨들은 과연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구나! 강별학! 네가 오늘 제대로
걸렸구나!)

그러나 흑의인들은 그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들은 일제히 허공에 몸을 솟구쳤다가는 검을 뽑아 들고 곤두박질하며 그 아낙네들을
향하여 공격을 뿜어냈다.
그렇다고 그 아낙네들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제각기 신형을 날려 흑의인의
공격을 피했다. 그녀들의 손에도 어느새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이때 흑의인 중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갑자기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감히 내 앞에서 조잡한 간계를 부리다니...... 그 따위 재주로 나를 속이는 것은 어림도
없다. 흥! 이 사당은 이미 멸족을 당한 집안의 것이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살아서 이곳을 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소어아는 이 광경을 보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강별학은 과연 여우 같이 교활한 놈이구나! 무슨 일을 하든지 사전에 치밀한 조사를 하고
계획을 세우니 말이다.)

이때 그 본부인이 냉소를 지으며 흑의인에게 물었다.

"시침을 떼지 말아라! 우리가 뭣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네가 모른단 말이냐?"

그녀의 이런 질문은 사실 대답하기가 그리 어려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흑의인은 극히 치밀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더욱이 이 일은 막대한 표은과 강옥랑의 생사와도 관련이 있는 까닭에 그는 섣불리
응답하기가 곤란했다.
상대방이 왜 왔는지를 알고 있다고 응답하면 자신이 그 표은을 강탈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만약 상대방이 그를 떠보는 것에 지나지 않다면 결국 계책에 말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본부인과 첩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첩이란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그 편지 때문에 온 것이 아니오?"

흑의인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냉소를 터뜨렸다.

"만약 그 편지가 아니었다면 내가 뭣 때문에 깊은 밤에 이곳까지 왔소?"

여전히 첩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은이 꼭 필요하겠군요!"
"비단 은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사람도 필요하오!"

본부인은 얼굴 색이 크게 변하며 대노했다.

"은을 가진 후에도 사람을 필요로 한단 말이오?"
"한 가지도 놓칠 수 없소!"

그 첩으로 변장한 여인도 대노한 음성으로 맞섰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그렇게 건방진 것이오!"

흑의인은 그녀의 말에 싸늘하게 응답했다.

"손에 쥐고 있는 검을 믿고 하는 말이오."

이렇게 되자 쌍방은 모두 자기들이 찾고 있는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해가
더욱 더 깊어 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흑의인은 표은과 강옥랑을 모두 중요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되찾겠다고 했고, 그 아낙네들은 그가 은을 가진 후에도 모용구매를 되돌려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쌍방은 점점 화가 치밀었다.
한편 소어아는 자신의 계책에 도취되어 흐뭇함을 금치 못했고 그들이 빨리 싸움을
시작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때 첩으로 변장한 여인과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다시금 눈짓을 교환했다.

"당신은 결코 은과 사람 중 단 한 가지도 가질 생각을 마시오. 그 원인은 우리는 전혀 은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사람은...... 당신이 만약 사람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당신의 생명을
앗아가겠어!"

흑의인은 독한 눈빛으로 아낙네들을 쏘아 보았다.

"벌써 말했지만 은과 사람 중 단 한 가지도 빠져서는 안 된다. 자, 우선 은을 가지고
오너라!"

그는 뒤에 있는 부하들에게 살며시 손짓을 했다.
앞에 있던 두 명이 갑자기 일격을 뿜어냈다. 칼빛이 번쩍거리자 마차를 끌던 당나귀가
그들이 뿜어낸 일격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뒤에 있던 두 흑의인이 재빨리 수레에 놓여있는 관들 중 하나를 끌어 당겨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화라락'하는 소리와 함께 관에서 많은 은이 쏟아져 나왔다.
비록 밤이었지만 그 많은 은은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우두머리인 그 흑의인도 엄청나게 많은 은을 보자 기쁜 듯 껄껄 웃어댔다.

"벌써 말했지만 나를 속이기엔 너희들이 아직 어리다."

은을 본 그는 살기가 더욱 짙어져 갔다. 그 은이 바로 표은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흑의인은 다시 살며시 손짓을 했다. 흑의 대한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들며 공격을 퍼부으려
했다.
바로 이때 돌연 또다시 '쉭! 쉭!  쉭!'하고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소리가 연거푸 들려오며
은을 담은 관 속에서 수심 가닥의 거무스름한 빛이 흑의인들을 향하여 솟구쳐 나왔다.
관 속에 은이 담겨져 있으리라는 것도 예측하기가 힘든 일이었는데, 그 속에 다른 장치가
있을 줄이야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하였다.
흑의 대한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우두머리인 흑의인은 보다 먼 곳에 서 있었고 임기응변 또한 매우 신속했기에, 검빛을
휘날리며 암기들을 모두 막아냈다.
그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부하가 모두 죽음을 당한 것을 보자 눈빛 속에
놀라움과 살기가 가득찼다. 그는 대갈일성했다.

"이 악독한 것들이 감히......."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당신 같이 악독한 자를 상대할 때는 당연히 이런 악독한 방법을 써야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당신을 이길 수 있단 말이냐!"

그녀는 다른 아낙네들과 합세하여 흑의인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좁혔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흑의인의 뒤에서 '꽝'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관이 산산조각이 나더니 그 속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사나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너는 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그 흑의인은 홀로 중앙에 포위되었지만, 두려운 기세는 조금도 없었다.

"너희들이 이토록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지를 미처 몰랐다. 아마 내가 너희들을 너무 무시한
모양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다."

그 관에서 나타난 사람은 몸매가 곱고 얼굴이 면사로 가리워진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그녀의 얼굴엔 비록 면사가 가리워져 있었지만 소어아는 첫눈에 그녀가 바로 소선녀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성질이 매우 급했기 때문에 일을 그르칠까 봐 관 속에 숨어있게 한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동안 막혔던 숨이 탁 트이자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흑의인의 등을 향하여
일검을 뿜어내며 외쳤다.

"잔소리 말고 어서 목숨을 바쳐라!"

그 흑의인은 등에 눈이라도 달린 듯 돌아보지도 않은 채 뒤로 일 검을 뿜어냈다.
그 충격으로 소선녀는 검이 손에서 벗어날 뻔했다.
소선녀는 손에 불에 덴 듯한 통증을 느꼈고, 그제서야 비로소 흑의인이 자기의 평생 처음
만난 강적임을 알아차리고 놀라고도 화가 치밀어 큰소리로 외쳤다.

"네 놈은 죽음을 앞두고도 감히 반항을 하겠단 말이냐?"

흑의인은 뿜어낸 일검의 기세를 이용하여 재빨리 벽쪽으로 물러섰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가 누군지 어디 사방을 바라보아라!"

그의 이러한 말이 떨어지자 아낙네들을 즉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이때 사당밖에는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흑의인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 손에는 모두
화살이 쥐어져 있었다.
여인들은 모두 아연실색함을 금치 못했다.
흑의인의 냉소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 이 사당밖에는 백사십 장의 철태궁(鐵胎弓)이 놓여 있고, 또한 매 한 장의 궁마다
삼백 석의 침이 들어 있다. 내가 셋을 셀 동안 만약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지 않는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너희들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백사십 장의 철태강궁(鐵胎强弓)이 한꺼번에 발사된다면 설사 무예계의 제일 가는
절정고수라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아낙네들도 당연히 자기쪽에서 설사 한두 사람이 뚫고 나갈 수 있다해도 나머지
사람들은 필히 당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그녀들은 한자리에 모여 소곤대며 의논을 했다.
소선녀와 그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금방이라도 뚫고 나가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그녀들의 손목을 굳게 잡는 바람에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이윽고 옆에서 그녀들이 의논하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흑의인이 유유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이때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깐! 은과 사람을 모두 당신에게 주겠소!"
"그럼 우선 사람을......."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당밖에서 돌연 한 차례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며 몇
명의 흑의인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은과 사람을 모두 주겠다는 말을 들은 소어아는 그들이 계속
협상해 나간다면 필시 자기의 계책을 망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준비해둔 돌멩이들을
궁수들에게 퍼부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엄밀하게 설치된 궁수들의 포진이 삽시간에 혼란을 일으키며 흩어져 버렸다.
사정이 급변하자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그 틈을 놓칠세라 급히 외쳤다.

"삼매, 칠매, 어서 돌격해 나가자꾸나!"

외침소리와 함께 그녀는 한 자루의 단검으로 흑의인을 향하여 일격을 뿜어냈다.
그녀는 단검으로 한 줄기의 검빛을 휘날리며 삽시간에 강별학을 향해 십여 초의 공격을
퍼부었다. 그녀는 비록 여자의 몸이었지만 뿜어낸 검법은 악독하고도 거센 것이었다.
무예계에서는 여자고수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여자는 모두 힘이 연약한 까닭에 암기와
경공으로 이름을 떨칠 뿐이지 검과 내력은 천생의 소질로 인하여 남자보다 비교적
뒤떨어졌다.
또 몇몇 검법으로 이름을 날린 여자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교묘한 변화에 능숙하지
이처럼 거친 힘과 악독한 초식을 동시에 지닌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첩으로 변장한 그 여인은 비단 검법이 악독할 뿐만 아니라 매초마다 상대와 함께
죽을 결심을 각오하고 있는 듯했다.
곁에 서 있는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은 그저 검을 가슴팍에 비스듬히 빗겨들고 있을
뿐이지 전혀 협공할 기세가 없었다.
여자와 남자가 격투할 때는 손해보는 쪽이 아무래도 여자였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설사
협공을 한다해도 무예계에서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첩으로 변장한 여자는 자기의 신분을 생각하는 듯 협공을 전혀 바라는 눈치가
아니었고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자 역시 눈을 번뜩이고 서 있을 뿐 참견하지를 않았다.
이 얼마나 패기가 가득찬 여자들인가!
흑의인은 이 광경을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 여겨졌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움이 커갔다.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젊은 부인들로 변장한 시녀 같은 여인들도 암기를 퍼붓는
수법이 보통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녀들이 손을 번쩍 들기만 하면 밖에서는 즉시 몇
가닥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선녀는 벌써부터 밖으로 달려나가 이리저리 몸을 날리고 있었다.
백여 명의 흑의 대한 중 이미 사오십 명이 땅바닥에 쓰러졌고 나머지 대한들은 자신을
방어하기에도 바빴다.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소어아는 기뻐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강별학에게 여러
번이나 당한 분노를 오늘에야 비로소 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첩으로 변장한 그 여인의 검은 점점 신속해졌고 초식 또한 악독해졌다. 그녀는 매초마다
흑의인의 급소를 노렸다. 이번에 그녀는 흑의인의 목구멍을 향하여 일검을 퍼부었다.
남이 보기엔 흑의인이 패배를 앞두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흑의인은 실로 매우 영악한 성격의 소유자라 생각에 잠겨 있었던 까닭에, 지금까지
자신을 방어할 뿐이었지 정신을 쏟아 격투하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그는 생각을 끝내자 갑자기 우렁찬 음성으로 껄껄 웃으며 평범한 일검을 뿜어냈다.
그러나 그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상대방이 뿜어낸 가벼운 일검이 천여 근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이 느꼈다. 그녀는 검이 당도하기도 전에 이미 웅혼한 힘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초식을 변경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맞부딪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검법은 비록 악독하고 강인했지만 내력은 여전히 그 흑의인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은 다급한 목소리로 급히 말했다.

"그와 힘의 대결을 하지 말아요!"

그녀는 협공 따위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태가 너무나 긴박했기에 하는 수없이 장검을
휘날리며 치열한 격전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불꽃이 사방으로 튕겼다.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과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동시에 흑의인과 일격을 맞부딪쳤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쥐고 있던 장검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이 혈전을 주시해 온 소어아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 계집들이 자기들의 특기를 쓰지 않고 도리어 남과 힘의 대결을 하니 정말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과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흑의인의 힘에 밀려 약 이 장이나 물러서
거의 벽에 부딪칠 뻔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수를 범한 그녀들은 여전히 당황하지 않고 손에
한 줌의 암기를 쥐어 들었다.
모용가문 아가씨들의 경신술과 암기는 무예계에서 벌써부터 알려진 것이었고, 흑의인이
만약 승리하고 싶은 생각에서 계속 공격을 퍼부어 온다면 아마 성한 몸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흑의인은 자신의 일격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보자 즉시 공격을 멈추더니 우렁찬 음성으로
말을 걸어왔다.

"오늘 밤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이대로 떠나겠소."

그는 서서히 뒤로 후퇴해 갔다.
그가 취한 이 행동은 심지어 소어아에게도 의외의 일이었다.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과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흑의인은 분명
이기고 있는데 어째서 오히려 간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첩으로 변장한 여인이 큰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애를 쓰며 우리를 괴롭혔는데 왜 갑자기 간다는 것이오?"
"지금까지는 소저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그랬오. 만약 떠난다면 후일에 어디가서 소저들을
찾는단 말이오."

첩으로 변장한 여인이 다그쳐 물었다.

"지금은?"
"모용가문의 소저들은 무예계에 이름을 떨쳐왔을 뿐만 아니라 가산(家産)도 있으니 비록
오늘은 내가 원하는 물건을 얻어 갈 수가 없을 망정 훗날 소저들의 댁을 찾아가서 얻으면
되지 않겠소?"

첩으로 변장한 여인의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흥! 당신은 이미 우리의 신분을 알았단 말이오?"
"모용가문에 둘째 소저의 검법은 악독하고도 강인함이 천하에 알려진 사실이오. 만약 내가
그래도 소저들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눈뜬 장님이오!"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그의 말을 듣자 갑자기 머리 위에서 한 주먹의 머리카락을 뽑아들며
얼굴을 가린 가면을 벗어 던졌다. 한 장의 백설 같이 희고 고운 얼굴이 가면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살기가 등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우리의 신분을 알았지만 우리는 당신의 신분을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 훗날에 다시
당신을 찾을 길이 없지 않소? 그러니 우리는 당신을 보내 줄 수가 없소?"

이때 갑자기 한가닥의 음성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는 이제 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소선녀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지금 사당의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뒤를 돌아 본 흑의인이 그녀를 보자 갑자기 미친 듯이 껄껄 웃었다.

"만약 내가 여길 빠져 나갈 자신이 없었으면 방금 그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오."

모용쌍은 큰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달아나나 두고 봅시다!"

이 모용가문의 둘째 소저는 과연 다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조금 전에 분명히 패배를 당하고도 조금도 흑의인을 두려워 하지 않고 다시 검을 휘날리며
다가갔다.
그때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모용쌍은 자기를 막은 사람이 동생인 것을 보자 대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삼매, 너는 저 자를 놓아 줄 속셈이냐? 너는 구매를 찾고 싶지 않단 말이냐?"

모용가문의 삼소저는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자는 이미 독 안의 쥐와 같은데 서둘 필요가 없지 않아요?"

모용산은 매우 총명한 여인이었기에 모용가문에서 재질이 가장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있었다. 그래서 모용쌍은 성질이 비록 급했지만 평상시엔 모용산의 말을 매우 잘
귀기울여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못마땅한 듯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무엇을 기다리란 말이냐?"
"제가 보기엔 이 일에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에요."
"곡절은 무슨 곡절이냐?"
"이 자는 우리를 이곳까지 불러 냈으니 당연히 우리가 누구란 것을 알아야 할 텐데, 어째서
지금에야 비로소 우리의 신분을 알았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 점이 이상하지 않아요?"

모용쌍은 멈칫하더니 여전히 발을 굴렀다.

"그것이 뭐가 수상하단 말이냐? 그가 연극이라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보증하겠나?"

소선녀도 끼어들었다.

"옳은 말이요. 우선 이 놈을 잡아 놓고 봅시다."

흑의인이 이때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아가씨들께서 잠시 고정하시고 불초의 말을 조금 들어 주십시오. 소저들과 나는 아마도
남의 간계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와르르'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천장을 바친 기둥
위에서 향로 하나가 흰 포목을 펼치며 떨어졌다.
그 흰 포목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강별학! 너는 많은 악독한 일을 저질렀기에 이젠 변명할 여지가 없다."

주먹만한 붓글씨로 쓰여 있는 그 글자는 비록 밤이었지만 확실하게 볼 수가 있었다.
이것들을 본 모용집안의 소저들과 소선녀는 모두 깜짝 놀랐다.
모용쌍은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을 발했다.

"당...... 당신이 강별학이오?"

흑의인의 눈에 놀라움과 당황함이 나타났다. 그는 역시 자기가 남의 계교에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대가 누구인줄도 모르게 말이다.

(이 계략을 세운 놈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당하게 할 수 있을 정도니 참으로 무서운
지혜를 가진 놈이로구나! 이토록 무서운 자가 암암리에 나를 노리고 있으니 설사 오늘은
내가 이곳을 빠져 나간다 해도 앞으로 편히 살 생각을 말아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그는 등뼈가 오싹해옴을 느꼈다.
그는 매우 영악한 사람이라 남이 한 가지 일을 생각해 낼 때 그는 열 가지 일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점이 도리어 그에게 화를 안겨 주었다.
그것은 그가 생각에 잠겨 있기 때문에 대답을 종종 잊기 때문이다.
모용쌍은 그가 응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냉소를 터뜨렸다.

"당당한 강남 대협께서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이야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흑의인이 응답을 하기도 전에 또다시 한 차례 '와르르' 하는 소리가 들려 오며 향로 하나가
또다시 천정에 위치한 기둥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그 향로도 흰 포목에 매달려 있었다.
거기에도 주먹 만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강별학! 네가 숨긴 사람을 이미 찾아냈으니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그 흰 포목은 물론 소어아가 미리 장치했던 것이었다.
그는 모용산의 말이 점점 이상해져가는 것을 듣자 그대로 나가다간 자기의 걸작이
망쳐질까봐 재빨리 그 장치를 가동시켰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시간을 연장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는 진검 등 사람들이 강별학의 방에서 모용구매를 찾아내 이곳까지 데려 오기만 하면
강별학은 설사 백 개의 입이 달렸다고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라 아울러 생각했다.
그의 계략은 정히 만무일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꿈에도 그 일이 뒤틀리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의외(意外)의 사태(事態) 
 
 
포목이 떨어지자 심지어 모용산마저 약간의 품고 있던 의심을 버렸다.
소선녀와 모용쌍은 더욱 얼굴에 살기를 띠우며 당장이라도 강별학을 죽일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흑의인은 여전히 자기가 강별학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죽은 듯이 잠잠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상대방 손에 들려 있는
장검을 주시하고 있었다.
만약 예사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필시 큰소리로 열띤 변명을 했겠지만 그는 결코 변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남보다 뛰어나서 그렇게 태연한 것이 아니라 설사 자기가 변명한다
해도 믿어 줄 사람이 없음을 알고 있는 까닭에 해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자신 역시 치밀한 계획으로 많은 사람을 곤경에 몰아 넣고 그들로 하여금 변명을 하지
못하도록 했었던 까닭에 자신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또한 그는 변명하려 해도 어디서부터 해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지금 그들의 관계는 실로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이 세상에서 소어아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관계를 확실히 해명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변명은 더욱 불가능했다.
그가 여전히 응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모용쌍은 두 눈을 부릅뜨며 모용산에게 눈길을 돌려
물었다.

"삼매! 너는 지금도 할 말이 있느냐?"
"우선 저 자를 반항 못하게 잡고 보아요."

소선녀는 그녀의 이런 말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재빨리
손에 쥐고 있던 장검으로 일격을 뿜어냈다.
그녀의 검법은 신속하고 날카로운 반면 모용쌍의 검법은 악독하고 거셌다.
모용산의 검법은 비록 소선녀보다 신속하지도 못했고 모용쌍보다 악독하지도 못했지만
눈만은 매우 날카로왔고 정신 또한 맑았기에 뿜어낸 매 일 검마다 깨끗하여 상대방이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이들 세 사람의 장검은 모두 만만치 않았다. 그녀들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왔고 또한
같이 무공과 검법을 연마했던 까닭에 초식의 배합은 물셀 틈 없었다.
이렇게 되자 흑의인의 무공이 비록 고강하고 뛰어났지만 과히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들의 공세를 몇 초 막던 그는 갑자기 검법을 격렬하게 변경했다.
그것은 그가 진격으로 후퇴한 작전이었다. 쉽게 말해서 그녀들로 하여금 공세를 조금
늦추게 하고 도망가려는 방법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격투의 경력이 많아 그가 갑자기 검법을 변경하는 것을 보자 이미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되자 그는 자승자박(自繩自縛)에 삐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가 도망가려 하자
그녀들이 더욱 그가 비밀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소선녀와 모용쌍은 점점 목숨을
걸고 그에게 덮쳐갔기 때문이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흑의인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솟아나 흑두건을 적셨다!
그는 그제서야 비로소 천하에 이름을 떨친 모용가문의 자매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모용자매의 진실한 장점은 검법이 아니고 암기와 경공에 있었다. 다만 그녀들이
아직까지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가 도망갈까봐 방어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뿜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휙'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모용산산은 이미 '분화불유'라는 일 초로 흑의인의 얼굴을
향해 덮쳐갔다. 그러나 그는 검빛이 그칠 줄 모르게 현란했기 때문에 허초인지 실초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의 이 초식은 적을 상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으며 다만 상대방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소선녀와 모용쌍에게 좋은 공격의 기회를 만들어 주어 그를
붙잡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흑의인은 재빨리 이 초식을 피해냈으며 동시에 검을 위로 뻗쳐냈다. 과연 그는 역시
고강한 고수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소선녀와 모용쌍은 마치 그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검을 서로 엇갈리며 허공에
무지개빛을 발하였다. 그녀들은 좌우로 나누어 검을 뿜어냈던 것이다.
그녀들이 사용한 이 초식들은 별로 신기하고 교묘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 개의 검이 배합된
지금 실로 더없이 거센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리하여 그녀들은 흑의인의 사방을 완전히 봉쇄하였다. 그는 죽음을 앞둔 일보직전의
하루살이 같았다.
그러나 흑의인은 모용산의 일격을 막은 후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장검을 버렸다. 그리고는
번개를 잡을 듯한 속도로 몸을 솟구쳐 모용산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 일 초의 변화는 실로 위험천만한 것이었고 아울러 완전무결에 가까운 교묘함도 곁들어
있었다. 그와 같은 사람 외에는 생각해낼 수 없는 초식이었다. 심지어 소어아마저 갈채를
터뜨릴 뻔하였다.
모용산산은 그가 검을 버리고 자신의 손목을 낚아챌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 하고, 그녀가
그 점을 발견했을 땐 이미 손목이 그에게 잡혀 있었으며, 그의 몸은 또한 자신의 품안으로
달려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흑의인은 곧 남은 한쪽 손으로 그녀의 목을 살며시 누르며 사나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이 계집애의 생명을 살리고 싶으냐?"

이때 흑의인의 등은 완전히 소선녀와 모용쌍의 공격권 내로 들어와 있었다. 언제라도 그의
등에다 쥐고 있는 장검을 꽂을 수 있었다.
그렇건만 모용산의 생명이 그의 손아귀에 쥐여있는 지금 그녀들은 그저 장검으로 흑의인을
겨누고 있을 뿐 감히 섣부른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다.
그녀들이 검을 움직이기만 하면 모용산산은 즉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흑의인도 감히 경거망동을 하지는 못했다.
모용쌍은 이때 안타까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빨리 내 동생을 놓아 주어라! 그렇지 않는다면 이 검이 심장에 박힐 것이다!"

흑의인은 그녀의 이러한 말을 듣고도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냉소만을 터뜨렸다.

"너희들이 이 검을 거두지 않으면 내가 먼저 이 계집을 죽이겠다."
"당신이 먼저 놓아요. 그러면 우리도 당신을 놓아 주겠소!

소선녀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쏘아부쳤다.
흑의인은 소선녀의 이러한 말을 듣자 껄껄 웃으며 눈알을 부라렸다.

"여인이 선(先)이고 남자는 후(後)하란 것이 이 세상의 예의이고 도리이니 너희들이 먼저
검을 거두어라!"

이번에는 모용쌍이 나섰다.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단 말이오?"
"나 역시 너희들을 믿을 수 없다!"

쌍방은 모두 경거망동들을 하지 못했고, 또한 섣불리 놓아 주지도 못했기에 잠시 동안 서로
버티게 되었다.
소선녀와 모용쌍은 모두 다급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너무 조급한 나머지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모용산산은 추호의 다급함이나 초조한 감을 찾아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목소리조차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언니, 절대로 검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 자는 나에게 해된 짓을 할 용기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흑의인은 여유만만했다.

"참는데는 나도 남보다 뛰어난 소질을 지니고 있으니 이대로 버티어 간다해도 나에게는
무방하오."

소선녀는 점점 크게 화가 돋았다.

"당신은 도대체 언제까지 버틸 작정이오?"
"당신들이 나를 놓아줄 때까지 버틸 작정이오."

이렇게 되자 소선녀는 너무나도 조급한 나머지 몸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바보 같은 계집!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조급해 하냔 말이다. 때가 되면 도울 사람이
어련히 오지 않을까봐.......)

바로 이때 먼 곳에서 세 인영이 나는 듯이 다가왔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당 안까지
당도했다. 그들은 바로 남궁유, 진검 그리고 고인옥이었다!
소어아, 모용자매 그리고 소선녀는 모두 크게 기뻐했다.
반면 그 흑의인은 모용산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놀라거나 당황해 하지는
않았다. 진검이 온 이상 더욱 모용산을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저 자기가 모용산을 잡고 동안은 도망갈 궁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진검은 자기 처가 남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을 보자 얼굴색이 크게 변했고, 고인옥은
강호경력이 가장 적었기에 이 광경을 보자 더욱이 멈칫하며 놀랐다.
소선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고인옥에게 말을 던졌다.

"이 바보 같은 사람아! 빨리 가서 도와주지 않고 왜 그렇게 멍청하게 서있는 거야?"

흑의인이 이 말을 듣자 재빨리 큰소리로 외쳤다.

"누가 가까이 접근하기만 하면 내가 이 여인을 없애버리겠다!"

진검이 제일 당황했다.

"이...... 이것이 어떻게 된 영문이오? 서로 좋게 타협을 하십시다."
"이 일은 사실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이쯤 되어버렸으니 설사 내가 해명을
한다해도 당신들은 믿어 주지 않을 것이오. 모든 말은 내가 이 사당을 나간 후에 하기로
합시다!"

모용쌍은 진검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절대로 저 자를 놓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저 자는 매우 교활한 자니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돼요!"

이때 남궁유는 포목 위에 쓰인 글자를 발견하고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흑의인을 향해
말했다.

"각하께서는 정말 강 대협입니까?"

흑의인은 그저 '흥!'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선녀가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대협은 무슨 놈의 말라비틀어질 대협이오? 이 자가 바로 강별학입니다!"

모용산이 초조한 음성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제 걱정 마시고 구매를 찾으셔요."

남궁유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듯 말을 했다.

"우리들이 조금 전에 강 대협의 거처를 찾아 봤지만......."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즉시 어딘가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만약 강별학의
거처에서 모용구매를 찾았다면 절대로 이토록 겸손하게 그를 '대협'이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모용산산도 매우 조급하게 알고 싶은 듯 다그쳐 물었다.

"구매가 그곳에 없단 말이지요?"

모용산의 물음에 진검은 그녀에게 소리쳤다.

"구매만 걱정하지 말고 우선 당신 자신의...... 자신의......."

남궁유가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구매는 강 대협의 거처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모두 어떤 자에게 놀림을
받았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깜짝 놀랐다. 그는 하마터면 숨어있던 곳에서 뛰쳐 나올 뻔했다.

(도대체 이 일이 어찌된 것일까? 모용구매가 어째서 그곳에 없단 말인가? 혹시 이 녀석들이
집을 잘못 찾은 것이 아닐까?)

그가 이렇게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다시 진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이 방금 화무결 화공자와 철심난 철 소저도 만나봤는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구매는
오래 전에 실종된 것이지 절대로 강 대협과는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궁유가 그의 말을 이어 받았다.

"화공자께서 또한 이 일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다고 하며 우리에게 여간
조심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주었지요. 그리고 만약 철 소자의 병세가 완전히 완쾌되기만
했다면 당장이라도 와보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용쌍은 맥이 풀린 듯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소선녀가 한마디 중얼거렸다.

"설마 철심난도 강별학과 한편이 되어 우리를 속이지는 않겠지!"

모용산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벌써부터 이 일은 어떤 곡절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 강
대협께서 정말 그 은이 탐났다면 구태여 자신이 이곳까지 올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설사 그 자신이 이곳에 왔다해도 우리를 몰라볼 리가 만무하지 않겠어요? 더구나 그는
구매를 숨기려면 다른 곳도 많은데 무엇하러 자신의 거처에 숨긴단 말입니까?"

이 문제점들은 사실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남궁유와 진검이
강별학의 거처에서 모용구매를 찾아냈다면 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진검이 발을 굴렀다.

"당신은 벌써부터 의심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왜 강 대협과 싸움을 벌렸던 것이오?"

그는 흑의인이 놓아줄 기세가 없는 것을 보고 당연히 자기 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모용쌍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가...... 강 대협께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우리가 어떻게 오해란 것을 알겠어요?"

침묵만 지키던 흑의인은 그제서야 껄껄 웃으며 말을 꺼냈다.

"조금 전에 설사 불초가 해명한다해도 소저께서 불초의 말을 믿어 줄 수 있었단 말이오?"

모용산산은 눈알을 굴리며 갑자기 흑의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귀하가 정말 강별학 강 대협입니까?"

이 한마디가 떨어지자 다른 사람들은 다시금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때 흑의인은 모용산의 목을 누르고 있던 손을 천천히 걷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오해가 풀렸으니 불초가 강별학이든 아니든 그 결과는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흑두건을 벗으려 하지 않았다.
진검은 이때 모용산의 옆까지 다가서서 작은 음성으로 살며시 물었다.

"여보 당신은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소?"

모용산산은 웃음띤 얼굴로 남편의 손을 잡는 한편 두 눈은 유심히 흑의인을 지켜 보았다.

"저희들이 강 대협님인줄 모르고 이렇게 많은 강 대협님의 부하를 죽였으니 참으로 백 번
죽어 마땅합니다. 오직 강 대협님의 처벌을 바랄 뿐이에요."

그녀는 일부러 '강 대협'이란 세 글자를 매우 힘주어 불렀고 또한 연거퍼 세 번이나 그것을
강조해서 말했다.
그러나 흑의인은 여전히 부인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쌍방이 싸움을 하게 되면 자연히 부상당하는 자도 있고 사망한 자도 있기 마련인데 어찌
부인을 탓하겠습니까? 오직 암암리에 우리에게 골탕을 먹인 자를 정말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갑자기 소어아가 숨어있는 곳으로 돌려졌다. 곧이어 다른 사람들의
눈길도 일제히 그의 시선을 따라 그곳으로 향했다.
모용쌍이 먼저 큰소리로 외쳤다.

"옳은 말씀이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살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소선녀도 원한이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그런 자가 나에게 잡힌다면 나는 먼저 그의 팔 다리를 분질러 놓고 그에게 왜 이렇게
악독한 계책을 꾸몄는가를 물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흑의인은 웬일인지 냉소만을 터뜨렸다.

"소저에게 그런 수고를 끼쳐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불초 자신부터 그를 놓아줄 수 없으니
말이오."

그들은 말을 주고받으며 소어아의 은신처를 완전히 포위했다.
이렇게 많은 절정의 고수들이 한 사람을 포위했으니 제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라해도
그 포위망을 뚫고 나갈 생각은 버려야 할 판이었다.
소어아의 손바닥은 식은 땀으로 미끈거렸다. 그는 자신이 그들에게 잡히는 날엔 필시
사지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스스로 파 놓은 구덩이에 자기가 빠지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는 이 경각에 백여 가지의 방법을 강구해 보았다. 그러나 이 포위망을 뚫고 나갈 방법은
없었다.
이때 흑의인의 냉소가 들려왔다.

"일이 이쯤 됐는데도 귀하께서는 나오지 않을 작정이오?"

모용쌍이 질세라 한마디를 거들었다.

"댁은 벌써부터 그놈이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일찍 말하지 않았소?"

흑의인이 그제서야 해명을 했다.

"그것은 이곳에서 날아온 암기가 불초의 부하를 상하는 것을 보자 부인들이 미리 설치한
매복인줄 알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오."

소어아는 속으로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네 놈의 눈알은 정말 개눈 같이 밝구나!)

그는 생각나는 대로 욕을 뱉어내기는 했지만 이번에 자신이 이곳에서 빠져 나가는 것은
하늘에 올라가는 것보다 더욱 어려울 것 같았다.
이때 흑의인의 차디찬 음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친구께서 그래도 나오지 않는다면 불초가 활을 쏘라고 명령하겠소."

모용쌍은 이때 갑자기 옆에 서 있던 흑의 대한의 손에서 화살을 뺏아들고 큰소리로
소리쳤다.

"모용집안의 활솜씨를 맛보아라!"

소어아는 전에 모용쌍의 침실을 구경했을 때 그녀가 이미 활에 대하여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는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죽든 살든 간에 갈 때까지 가 보자는 속셈이었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여인의 깔깔 거리는 웃음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호호호! 이곳은 참으로 번잡하군요. 혹시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발생했단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사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산발을 하고 바보 같이 깔깔 웃으며 유령처럼 서 있는 여인은 모용구매가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모용구매는 도대체 어디 갔었단 말이냐? 어째서 또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단 말이냐?)

이렇게 생각한 소어아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해 하면서 그 여문을 몰랐다.
심지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을 정도였다.
모용자매는 모용구매를 보자 놀랍고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한편 일제히 입을 열었다.

"구매! 너를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들은 재빨리 모용구매에게 달려가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언니들의 울음섞인 목소리와 반가운 행동과는 달리 모용구매는 망연히 그녀들을
바라보며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깔깔거리며 웃기만 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나는 당신들을 모르겠는데요?"

모용쌍이 이 말을 듣자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구매! 너...... 너는 이 언니도 몰라보겠단 말이야?"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모용산산도 눈물이 가득찬 얼굴로 안타까운 듯 입을 열었다.

"구매! 너는 어쩌다가 이 모양으로 되었단 말이냐?"

모용구매는 그저 망연히 그녀를 바라볼 뿐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고인옥은 드디어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구매! 나는 알겠느냐?"

소선녀도 발을 굴렀다.

"구매는 자기의 언니들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하물며 당신을 어떻게 알아본단 말예요?"

소선녀의 이러한 말을 듣고 고인옥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땅바닥에 떨어졌다.
진검과 남궁유의 얼굴에도 비통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이때 남궁유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구매는 아마 어떤 큰 자극을 받고 이렇게 된 모양이니, 집으로 데려가서 안정시키고
한동안 요양시킨다면 차차 나을 것입니다."

모용쌍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누가 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누구냔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소선녀도 울음이 복받쳤다.

"구매는 죽은 소어아가 돌연 부활한 것을 보고 너무도 놀란 나머지 이 모양이 된 거예요.
사실 소어아는 죽지 않았고 일부러 구매를 놀려 주려는 것이었는데."
모용쌍은 큰소리로 외쳤다.

"소어아가 누구냐?"
"소어아는...... 성은 강씨고 나이는 비록 많지 않지만 머리 속은 온통 나쁜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고, 남을...... 남을 골탕 먹이는 것이 취미인 사람이에요."

모용쌍은 소선녀의 말을 듣고 크게 대노했다.

"지금 그 놈이 어디 있느냐?"
"지금쯤은 아마 죽었을 겁니다."

순간 모용쌍은 멈칫했다.

"너는 방금 그가 죽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제와서 그가 죽었다니 도대체 그는 살아있느냐?
아니면 죽었느냐?"
"처음에는 죽지 않았었지만 그 후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죽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소선녀는 말을 잠시 중단하고 무언가 석연찮은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놈은 귀신도 놀라는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사람이 분명 그가 죽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타나곤 했으니, 그의 시체를 확인하기 전에는 누구도 감히 그가 죽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요!"

이때 흑의인이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었다.

"그 놈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소선녀가 그의 말을 재빨리 받으며 쳐다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아시죠?"
"최근에 와서 내가 그를 본 적이 있으니까요."

모용쌍은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 당신은 알고 있소?"
"내가 보기엔 그는 지금쯤 바로 이......."

그는 마치 숨어있는 사람이 바로 소어아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말했다.
순간 소어아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러나 흑의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모용구매의 입에서 탄성이 발해졌다.

"소어아!...... 소어아! 기억나는 것 같아요!"

그녀가 무언가 기억을 되찾는 기미가 보이자 모든 사람들이 다시금 놀라면서도 기쁜 표정을
지었다. 모용쌍이 다시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 너는 모든 것을 완전히 생각해낼 수 있느냐?"

모용구매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당신은 둘째 언니군요."

모용쌍은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모용산산도 너무 기뻐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구매, 구매...... 하늘이 너를 불쌍하게 여긴 까닭에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한 모양이구나."

모용구매가 활짝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셋째 언니...... 제가 다시 언니를 뵐 수 있다니 이것이 꿈이에요? 아니면 생시에요?"

그러나 이 한 말을 던진 그녀는 두 눈썹 밑에 애수가 서리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들 자매가 서로 웃고 울며 한데 뭉친 것을 남몰래 지켜보던 소어아도 눈시울이
붉어져오는 것을 느꼈다.
모용구매는 본시 그의 원수였고 또한 제 정신을 되찾은 지금, 그의 계획이 산산조각 났을
뿐만 아니라 모용자매가 그를 찾아 복수할 것을 방비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웬일인지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뿌듯한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그가 이런 마음을 느꼈던 것은 자신마저 자기를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따뜻한 피를 가진 인간이라고 보아야 했다.
이때 그 흑의인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희비가 교차되는 현상 속으로 끼어들었다.

"그 강소어란 작자가 모용자매의 동생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무예계의 인물은 누구라도
그를 가만 놓아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가지 않은 것은 바로 소어아를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모용가문의 아가씨들이 기쁨 때문에 그 일을 잊을까봐 다시금
일깨우려는 속셈이었다.
과연 모용쌍이 눈물을 거두면서 원한이 서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 그 놈이 지금 어디에 있는 지를 알기만 하면 당장 잡아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어요."
"내가 보기에는 그 녀석이 지금쯤 아마 바로......."

흑의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모용구매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사실 이번 일은 소어아만 탓할 수는 없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당연히 소어아였고, 그 다음은 바로 소선녀였다.
그녀는 참다 못해 다급하게 물었다.

"그 놈을 탓하지 않고 누구를 탓한단 말이냐? 너는 그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지니고 있지
않느냐?"

모용구매의 입가에 처량한 미소가 번져 나왔다.

"나는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보고 그 당시는 매우 놀라고 심지어 정신마저 조금
이상해졌지만, 얼마 안 되어 점점 맑은 정신을 되찾았어요."

모용쌍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그렇게 일찍 정신을 되찾았으면 왜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단 말이냐?"
"그건 다른 한 사람이 해를 가했기 때문이에요."
"그놈이 누군데?"
"바로 강별학이에요."

그녀가 원한에 서린 듯 이렇게 내뱉자 소어아마저 어리둥절해졌다.

(강별학이 왜 그녀에게 해를 가했을까? 만약 강별학이 그녀에게 해를 가했다면 그녀가 맑은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벌써 도망가야 했을 텐데 왜 지금까지 이곳에 남아있단 말이냐?
혹시 그가 죽고 싶어서 환장이라도 했단 말인가?)

소어아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모용구매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 놈은 제가 맑은 정신을 되찾은 것을 보고 다시 미혼약으로 저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저의...... 저의 정조를 빼앗으려 했어요. 오직 그도 모용가문의 사위가 되기 위해서 말예요!
그는 매일같이 저를 괴롭혀 왔는데 조금 전에야 비로소 저에게 도망갈 기회가 생겨 이렇게
빠져나온 거예요."

그들은 조금 전만 하더라도 강별학이 억울함을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친히
모용구매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었으니 당연히 믿지 않을 리가 만무했다.
이리하여 모용쌍은 노여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흑의인을 향해 소리쳤다.

"강별학! 네 이 흉악하고도 악당 같은 놈아! 우리가 하마터면 너의 속임수에 넘어갈 뻔
했구나!"

남궁유도 웬만하면 큰소리를 안 냈는데 이번에는 크게 노해 있었다.

"원래 구매가 스스로 도망 나왔구나! 어쩐지 우리가 조금 전에 강별학의 거처를 뒤졌을 때
찾지 못했지. 다행히 하느님의 도움으로 구매를 이곳으로 보냈으니 이것은 정히 하늘의
뜻이다!"

그의 이러한 외침 속에 그들은 흑의인을 완전히 포위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소아아는 정히 놀랍고도 기뻤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일이 이렇게 확대될 줄이야! 모용구매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소어아가 설사 천하에서 제일가는 총명한 사람이라 해도 이것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를
것이다.
이때 모용쌍이 큰소리로 호통쳤다.

"강별학! 네 놈은 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그러나 그 흑의인은 또다시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한 걸음 나섰다.

"내가 언제 강별학이라고 했소?"

그리고는 얼굴을 가린 흑두건을 벗었다. 순간 모든 시선이 일제히 그의 얼굴로 집중됐다.
그러나 덥수룩하게 수염이 자란 흑의인의 얼굴은 과연 강별학이 아니었다.
남궁유 등 사람들은 모두 강별학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강별학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그들은 얼이 빠진 듯 망연자실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모용쌍이 물었다. 모용산산도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어왔다.

"만약 당신이 강별학이 아니라면 진짜 강별학은 어디에 있단 말이오?"
"흥! 강별학은 바로 이곳에 있소!"

그 흑의인은 갑자기 소어아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하여 달려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강별학! 네 놈이 그래도 나오지 않겠느냐?"

이러한 외침소리와 함께 그는 번개 같이 신속한 일격을 뿜어냈다!
 


           의외(意外) 속의 의외(意外) 
 
 
소어아는 그 흑의인의 번개 같은 일장이 덮쳐오자 다시금 놀랐다. 그러나 당황함 속에서도
재빨리 일장을 뿜어내어 막으며 큰소리로 소리쳤다.

"네 놈이야 말로 강별학이 변장한 놈인데 감히 누구를 속이려드느냐?"

그 흑의인도 그와 똑같은 말로 외쳤다.

"네 놈이야 말로 정말 강별학이 변장한 놈인데 누구를 속이려는 것이냐?"

그러자 소어아는 대노하여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네 놈이 강별학이 아니면 누구냐?"

역시 흑의인도 똑같이 받았다.

"네 놈이 강별학이 아니면 누구냐?"

소어아는 눈을 굴리며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내고는 급히 큰소리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강별학! 이 악당 같은 놈아! 개만도 못하게 자기의 조상을 모독하다니. 너는 정말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다."

그는 강별학이 이름있는 사람이기에 필시 자신을 욕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일부러
이렇게 욕설을 뿜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흑의인도 똑같은 욕설을 퍼부었다.

"강별학! 이 악당 같은 놈아, 개만도 못하게 자신의 조상을 모독하다니. 너는 정말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다."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껄껄 웃었다. 자기의 계획대로 들어맞아 가기 때문이다.

"내가 설사 네 놈의 본색을 드러나게 할 수는 없을 망정 네 놈 스스로가 네 자신을 욕하는
것을 들으니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처럼 시원하구나! 하하하하...... 참으로
웃기는구나.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욕하는 추잡한 인간도 있으니 말이다."

그 흑의인도 그와 같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설사......."

그 역시 소어아가 한 말을 한 마디도 빠짐없이 되풀이했다.
이렇게 서로 욕설을 퍼붓는 그들은 보기엔 둘다다 강별학이 아닌 것 같았지만 분명히 그들
중 한 명은 강별학일 거라는 확신을 남궁유 등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누가 진짜 강별학인지 그들로서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때 모용산이 입을 열었다.

"강별학의 무공은 강남 무예계의 제일인자라 하는데 틀림없는 말이겠죠?"

모용쌍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 이들 중 무공이 더 뛰어난 자가 필시 강별학일 것이다."

그녀들은 다시금 입씨름이 한창인 흑의인과 소어아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매우
유심히 그들이 행하는 무공을 바라보았다.
권과 발을 휘날리고 있는 그들은 비단 공력이 매우 깊었을 뿐만 아니라 초식 또한 극히
괴이하고 치밀했으며 변화 또한 엄청났다.
모두 절정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소어아는 그녀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그러다가
상대방에게 당할까봐 실행할 수도 없었다.
흑의인도 당연히 그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동안 격투만 할 뿐 여전히 승부의 판가름을 내지는 못했다.
그저 한 차례의 '와지끈, 우지직......' 하는 소리가 연거퍼 들려왔을 뿐이었다.
무슨 물건이든지 그저 그들의 권풍에 스치기만 하면 즉시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그들의 권풍을 이겨낼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들은 계속 싸움을 하면서 사당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점차적으로 사당에서 멀어져갔다.
그들은 둘 다 남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남궁유 등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고 점점 멀어져가는 것은 그들이 암묵(暗默)적으로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들의 초식은 여전히 거센 것이었지만 사실은 둘 다 더 이상 결투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듯 제각기 뒤로 곤두박질하며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더니 즉시 몸들을 감추었다.
그 흑의인은 도망하면서도 자신의 체면을 차리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강별학! 오늘은 비록 너를 놓아주겠지만, 훗날에 다시 내 손에 걸리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소어아도 도망가는 한편 큰소리로 말했다.

"강별학! 그것은 바로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이다."

두 사람의 달아나는 신법은 모두 번개를 방불할 만큼 신속했다.
모용쌍 등 사람들이 쫓아왔을 때 그들은 이미 십여 장 달려나가 있었고 또 그들이 양쪽으로
갈라서 도망치기 때문에 더욱이 누구를 쫓아야 할지 몰랐다.
바로 이때 수풀 속에서 갑자기 한 인영이 달려나와 소어아의 길을 막았다. 그는 소어아를
가리키며 괴상한 웃음을 지었다.

"이 놈이 바로 강별학이다. 이 놈이 진짜 강별학이란 말이다."

그의 얼굴을 본 소어아는 놀라는 한편 대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놈이 미쳤느냐?"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손인불이기'이란 칭호를 받고 있는 백개심이었던 것이다.
백개심은 그의 앞을 막아 서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미치기는 누가 미쳤다는 것이냐? 네 놈 강별학이 정말 미친 모양이구나."
"네 녀석은 살고 싶지 않느냐? 네 놈은 해독약도 필요없단 말이지?"
"흥! 누가 누구의 생명을 살린단 말이지? 네 놈이 나에게 골탕을 먹였으니 당연히 나도
너에게 골탕을 먹여주어야 이치에 맞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한 그는 갑자기 뒤로 곤두박질을 하면서 다시금 수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어느덧 모용자매 일행이 사방을 포위하며 소어아를 에워쌌다.
이때 모용쌍이 대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강별학! 만약 이번에 또다시 너를 놓친다면 내 성을 갈겠다."

소어아는 발을 구르며 안타까와 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누가 강별학이란 말이오? 공연히 생사람 잡지 마시오. 만약 내가 강별학이라면 즉시
날벼락을 맞고 죽겠소."

모용산이 눈썹을 치켜 세우며 으르렁댔다.

"당신이 강별학이 아니라면 왜 달아나는 것이죠?"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멈칫했다. 이 말은 그를 더 이상 변명하지 못하게 했다.
모용쌍은 그가 응답하지 않자 즉시 소리쳤다.

"그렇다! 네 놈이 만약 강별학이 아니라면 왜 우리에게 얼굴을 내밀어 보이지 않는다는
거냐?"

그녀들은 흑의인에게 당한 경험이 있기에 입으로는 말하고 있었지만 손에 쥐고 있던
장검으로 연거퍼 공격을 뿜어냈다. 그녀들의 공격은 대우 악독하고도 거셌다.
소어아가 빈정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당당한 사내 대장부인데 어찌 너희 여자들에게 얼굴을 함부로 만지게 한단 말이냐?
옛말에 남자의 얼굴 위에 황금이 있고 여자의 손에는 똥물이 있다는데, 내 얼굴에 어찌
똥물을 묻힐 수 있단 말이냐?"

그는 다급한 나머지 나오는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그가 이렇게 말한 목적은 다만
그녀들의 부화를 돋구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래야지만 자신에게 도망갈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연 모용쌍이 대노하며 노여움이 가득찬 표정으로 응수했다.

"닥쳐라! 네 놈이 감히 누구 손에 똥물이 있다는 것이냐? 아마 네 놈의 얼굴에는 똥벌레가
기어다니는 모양이구나!"

소선녀도 이런 욕설을 퍼붓는데는 빠지지 않았다.

"네 놈이 그저 내 손에 걸리기만 해라. 당장 변소 안으로 집어넣어 줄 테니까."

그러나 소어아의 얼굴엔 다시 장난끼가 가득찬 웃음기가 어렸다.

"설사 변소 안으로 빠져들어갈 망정 너희 여자들에게 얼굴을 만지게 할 수는 없어."

이때서야 그들은 그의 목적을 알아차렸다. 그녀들은 더 이상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고인옥만은 매우 순진한 사람이었기에 여전히 그의 목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참다
못해 입을 열었다.

"나는 여자가 아니니 나에게 조사를 받지 않겠습니까?"
"원래 당신은 여자가 아니었군요. 난 또 당신이 저 여인들의 여동생인줄 알고
착각했잖아요?"

소어아도 이렇게 말은 했으나 자기 말이 우스웠던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입가에 웃음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쫙'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의 상의 앞가슴
쪽이 찢어져 나갔다. 만약 그의 무공이 많이 진보되지 않았었다면 아마 그는 창자가 튀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태연하게 계속 지껄였다. 상대방을 미칠 지경으로 화나게 해야지만
자기가 살아나갈 희망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는 이미 목숨을 걸었기에 추호도 두려움이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옛말이 있지 않은가!)

이때 그는 진검과 남궁유가 격투 속으로 끼어들지 않고 그저 옆에서 자기가 도망 못하게
지켜보고만 있는 것을 알고는 다시금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무예계의 인물들은 모두 모용가문의 사위를 부러워하고 여복이 많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곰보나 코찡찡이에게 장가가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라 생각하오."

모용쌍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 말을 듣자 참지 못하여 냉소를 터뜨렸다.

"우리 모용자매가 곰보나 코찡찡이보다 못생겼단 말이냐?"
"모용집안 아가씨들의 아름다움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인데 내가 어찌 감히 못생겼다고
말하겠소! 하지만 모용집안의 사위는 뭡니까? 여편네가 암탉 같이 울고 불고 하며 남과
싸움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보고만 있으면서도 감히 한마디도 못하니 말입니다.
그토록 여편네를 무서워한다면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이오?
만약 내가 모용집안의 사위였다면 벌써 자살을 했어도 몇 번은 했을 것이오."

그가 이렇게 매우 재미있다는 듯 약을 올리는 동안, 그의 어깨에 또다시 일검이 가해졌다.
비록 그 일검이 뼈를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검날이 스쳐 지나가자 역시 긴 상처가
나타났고 붉은 피가 어깨를 완전히 적셨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진검이 냉소를 터뜨렸다.

"난 처음부터 너에게 협공하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네가 정 그토록 원한다면 소원을
들어주지."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재빠르게 삼 검을 뿜어냈다. 그의 그 삼 검은 매우 거세고도
맹렬했다. 그것은 바로 모용자매의 부족한 점을 보충한 것이었다.
소어아가 약을 올리고자 했던 계책은 상대방을 화나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또다른 한 명의 강적을 자기에게 공격하도록 만들었으니 참으로 그의 실책은 컸다.
그는 처음부터 이들을 당해내기는 어렵겠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막상 이들이 합세하여
공격하자 더욱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속으로만 발을 동동 굴렸을 뿐이지 입은 쉬지 않고 부화를 돋구는 말을 지껄여 댔다.

"남궁유! 너는 왜 한몫을 끼지 않느냐? 혹시 너의 무공이 너무나도 저속하여 내놓을만한
것이 못 되어서 그러냐? 너는 오직 네 여편네의 힘을 믿고 무예계를 돌아다니는 모양이지?"

이 말을 들은 남궁유의 얼굴색은 자연 크게 변했고, 노여움으로 음성조차 떨려왔다.

"복결, 부사...... 시풍, 대중...... 환조......."

그가 혈도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세 자루의 검이 그가 부른 위치를
향하여 덮쳐왔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소어아는 '환조혈'에 또다시 일검을 맞았다. 검붉은 피가 그의
상처에서 흘러나왔다.
남궁유는 비록 몸이 허약해 남과 격투할 수는 없었지만, 무예계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남궁세가'의 어린애라도 남보다 뛰어난 견식을 지니고 있는데 하물며 역대독자인
남궁유였으니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더욱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불러낸 혈도들은 자연히 소어아가 피하기 힘든 곳들이었다.
소어아는 크게 당황했다.
심지어 약을 올리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이때 남궁유가 혈도 이름을 다시 불렀다.

"영문, 중부...... 음시, 양구...... 승부!"

"쉭! 쉭!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삼 검이 뻗쳐나갔다. 또다시 소어아의 '성부혈'이 일 검을
맞았다.

(흥, 네가 부르는 대로 내가 미리 방어하면 되지 않겠나?)

소어아는 이렇게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남궁유가 부르는 위치를 분명히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피하지 못했다.
옛말에 당사자보다 방관자가 더욱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장기나 바둑을 둘
때 훈수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흔히 제 삼자의 훈수로 승부에 판가름이 나곤 하는
까닭이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도 그러는데 하물며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리.
남궁유는 남과 격투할 수는 없었지만 견식과 보는 눈은 그 어떤 절정고수 못지 않게
정확했다.
그는 소어아가 뿜어내고자 하는 초식을 환히 알 수 있었으니 그가 불러낸 위치는 당연히
소어아의 허점이었다.
이때 남궁유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유문, 통곡...... 부사, 귀래, 용천!"

그 '용천혈'은 발바닥 밑에 위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러한 부름을 들은 소어아는
멈칫했다.

(네 놈들의 검이 설마 내 발 밑을 적중할 수 있단 말이냐?)

이때 모용산의 검이 그의 '부사' '귀래'의 양혈을 향해 지쳐 들어왔다.
본시에 그는 그 검을 피할 수 있었지만 다른 검들이 그의 피할 길을 막았다.
그는 다급한 나머지 정확하게 판단해 보지도 않고 재빨리 검을 쥔 모용산의 손목을
걷어찼다.
이리하여 그는 모용산의 공세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틈을 이용하여 모용쌍의
검이 덮쳐왔고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그의 '용천혈'에 적중했다.
소어아는 두터운 가죽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 검은 그에게 별로 큰 상처를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신이 오싹함을 느꼈고 또한 어느 결에 식은 땀이 흘러 나왔는지
목욕이라도 한듯 온 몸이 축축했다.
남궁유는 여전히 차분한 음성으로 계속 혈도의 이름을 불러갔다.

"신당, 심유...... 위중, 음곡...... 결선!"

소어아는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 '결선혈'을 방비했다. 그렇건만 등이 서늘해지면서
'회양혈'에 또다시 일검을 맞았다.
그는 비록 협공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어떠한 고수가 그를 협공한 것보다 더욱 더
무서운 위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쯤 되자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며 거의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끝장인가 보구나.......)

그가 살려는 생각을 막 포기하려는 순간 갑자기 먼 곳에서 모용구매의 비명소리와
외침소리가 아울러 들려왔다.

"사람 살려...... 강별학! 네 이 악당 같은 놈아...... 셋째 언니...... 둘째 언니...... 나 좀
살려주어요......."

외침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모용산산은 그 음성을 듣자 즉시 당황한 빛이 얼굴에 확연히 드러났다.

"큰일났다! 우리가 구매를 홀로 사당에 놓아 두었군요."

모용쌍도 발을 구르며 안타까와 했다.

"구매가 왜 따라오지 않았단 말이냐?"

소선녀도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강별학이 그쪽에 있나 보군요."

고인옥도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정말 강별학이 아니군요!"

제각기 한마디씩 던진 그들은 곧 모용구매의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단지 남궁유만이 남았다.
그는 갑작스레 소어아에게 읍을 하며 공손히 한마디 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소어아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번졌다.

"천하의 공처가 중에서 당신이 아마 일일자일 것이오. 당신 같은 사람은 정말 어떤
여자와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궁유는 조금도 화나지 않은 듯 엷은 미소까지 지어가며 말을 받았다.

"귀하께서는 참으로 훌륭한 무공을 지니고 있군요. 마치 각문각파의 장점을 모아 새로운
자신의 무학을 창작한 것 같이 말입니다. 다만 초식을 뿜어낼 때 아직까지 미숙한 점이
있어서 가끔 허점이 생깁니다. 그것은 아마도 귀하께서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느라고
무학방면에는 정신을 기울이지 못한 탓 같습니다.
후일 그 점만 고친다면 설사 내가 옆에서 공격한다 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오."

소어아는 그의 겸손한 교훈을 듣자 갑자기 멈칫하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오?"

남궁유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귀하께서 강별학이 아닌 까닭이오. 강별학이 초식을 뿜어낼 땐 절대로 귀하 같이
서툴지는 않을 터이니 말입니다!"

소어아는 대노했다.

"당신이 벌써 그 점을 알아차렸으면 왜 일찍 말하지 않았소?"
"불초는 이미 그 점을 알고 있었소. 그러나 귀하의 정체를 알고 싶은 욕망에서 말하지
않았던 것이오. 지금 구매가 또다시 강별학에게 납치 당했으니 당연히 그 욕망을 희생할
수밖에 없죠."

그는 다시금 읍을 한 후 신법을 펼치더니 나는 듯이 모용쌍 등의 사람들을 쫓아갔다.
남궁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소어아는 여전히 그가 한 말을 되풀이 생각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고 느껴졌다.

(......아마도 귀하께선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느라고 무학방면에는 정신을 기울이지 못 한
듯.......)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이 말은 정확히 내 단점을 지적했구나. 보아하니 무림세가의 후예라 과연 남보다
뛰어난 안력을 지니고 있다. 너무 그들을 얕봐선 안 되겠다."

한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남궁유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는 천천히 앞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빨리 손인불이기 백개심을 찾아서 복수하려는 생각이 꿀떡 같이
일어났다.
이렇게 걷는 동안 그는 갑자기 백개심의 행동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데 머물렀다.
백개심은 어째서 갑자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 심지어 해독약도 필요없다고 하니
말이다!...... 또 모용구매는 어떻게 된 것일까? 왜 갑작스레 내 편을 들어 주었을까?
그녀는 정말 강별학에게 납치당했을까?)

이렇게 생각하던 그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찾지 못 했는데 그녀는 어째서 나타났을까. 매우 이상스럽게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내편을 들어주었단 말이냐? 그녀가 만약 제정신을
차렸다면 나를 죽이기도 바빴을 텐데 어째서 나를 도와주었단 말이냐?)

소어아는 생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모든 잡념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때 그는 온 몸에 입은 상처가 욱신욱신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는 숲속으로 가서 한
그루의 큰 나무를 찾아 그 아래서 휴식을 좀 취하기로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약물로 자라왔기에 몸은 실로 물샘과도 같았다. 때문에 이 정도 상처쯤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상처에서 비록 질식할 정도의 통증이 느껴와도 별로 걱정은 안
되었다.
별들은 점점 사라져갔고 동쪽 하늘이 차츰 밝아왔다. 숲속에서는 새들의 노래소리가 즐겁게
들려왔고, 대지에는 한가닥의 형용하기조차 어려운 평화스러움과 조용함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소어아는 두 눈을 감으며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정말 남의 일에 너무 많이 참견했나 보구나! 하지만 밥만 먹고 아무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는가? 더군다나 그 일들은 모두 나에게 찾아온 것이니 설사 피하려고 한들
피할 길이 없지 않는가 말이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있었지만 사실 태어날 때부터 얌전하게 살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저 삼사 일 동안만 할 일없이 지낸다면 즉시 못 견딜 정도로 전신이
쑤시곤 했다.
조용하고도 평화스러운 이 숲속에서 그는 차츰 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오랫만에 포근히
잠을 자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휴식을 취할 운명이 아닌지 갑자기 한 사람의 외침소리가 그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소어아...... 소어아......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소어아는 재빨리 땅바닥에서 일어났고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또 나에게 무슨 일이 찾아 왔구나......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굴까? 내가 숲속에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때 그 사람의 외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소어아! 나는 당신이 이 숲속에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어서 나오셔요. 당신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해드려야 해요...... 왜 아직도 나오지 않는 거지요?"

이 음성의 주인공은 모용구매 같았다.
소어아는 크게 기뻤다. 그는 만면에 희색이 가득찼다.

(만약 정말 모용구매라면 참으로 잘 온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를 찾으러 갈
참이었잖은가!)

그는 기댔던 나무 위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이때 산발한 채 아침 안개를 받으며 구름을 타고 내려온 여신 같이 살며시 찾아온 여인은
틀림 없는 모용구매였다.
소어아는 나무 위에서 내려와 그녀 앞으로 뛰쳐 나왔다.

"이봐!"

모용구매는 두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으며 매우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이 또 나를 놀라게 하여 기절시키려는 모양이지요?"

소어아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잠시 동안 보지 못 했더니 소저는 더욱 아름다워진 것 같소."

모용구매는 더욱 애교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동안 못 보았더니 당신도 역시 더욱 준수해진 것 같아요."
"하하! 모용구매도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또한 애교를 부릴 줄 알다니 참으로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군요."
"여인이라면 모두 애교를 부릴 줄 압니다. 다만 여자들은 상대를 봐서 애교를 부릴
뿐이지요."
"소저는 이제 나를 죽이고 싶지 않습니까?"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다는 말을 못들었어요?"

소어아의 입에서는 이름 모를 한숨이 새어나왔다.

"옳은 말씀이오. 여자에겐 사랑도 쉽게 변하는 것인데 하물며 원한은 더욱 쉽게 잊을 수
있겠죠."

모용구매는 큰 눈을 깜박거리더니 다시 웃음띤 얼굴을 했다.

"여자를 사랑해 보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여인의 마음을 깊이 알 수 없는 거예요. 당신도
혹시 사랑의 상처라도 입은 적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여자들에게 가장 상처를 많이 입은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지요."

모용구매는 여전히 웃었다.

"누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나요? 혹시...... 혹시 그 철 소저가 아닙니까?"

'철 소저'란 세 글자를 들은 소아아의 가슴은 칼로 비벼파듯 아픔을 느꼈다.
그는 큰소리로 그녀의 말에 부정이라도 해야 시원할 것 같았다.

"아니오!"
"그렇다면 누구죠?"

소어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바로 모용구매요."

갑자기 모용구매는 미친 사람처럼 깔깔 웃었다.

"내가 언제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나요?"

소어아의 눈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그는 입을 쫑긋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은 모용구매가 아니오!"

모용구매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모용구매가 아니라면 누구요? 당신은 혹시 미친 것이 아니오? 나마저 몰라보니
말예요."

소어아는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한참이나 뜯어보더니 드디어 껄껄 호탕스러운
웃음을 웃었다.

"나는 절대로 당신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틀림없는 당신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라는 말씀이지요?"

소어아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아 쥐며 기쁨이 가득찬 목소리로 목메인 듯 외쳤다.

"도교교...... 도 고모이죠! 그렇죠?"

그 '모용구매'란 여인은 두 눈을 부릅뜨고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더니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참으로 총명하구나. 너에게 들키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 천하에서 내 변장술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너밖에 없을 것이다."
"저도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속으로 '이 모용구매는 진짜 모용구매가 아닌데,
그러면 누가 이토록 똑같이 변장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나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나라고 짐작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 고모가 정말 이곳에 왔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 고모가 악인곡에서 나올 줄이야 저는 꿈 속에서도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이 소리를 들은 도교교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더니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하에 미처 생각지 못하는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소어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도 고모도 한숨 쉴 때가 있다니...... 정말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고모는 무엇 때문에
악인곡에서 나왔으며 또한 어떻게 저의 일을 알고 모용구매로 변장하여 저를 구했습니까?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그 영문을 모르겠군요."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도 많아 단숨에 모두 물어보았다.
도교교는 표정을 달리하며 말했다.

"네가 연거퍼 나에게 이토록 많이 물어보니 나보고 어떻게 대답하라는 것이냐?"

소어아는 차분히 물었다.

"고모는 악인곡을 떠난 지 얼마나 되셨어요?"
"아마...... 아마 반 년은 넘었을 것이다."
"근 이 년 동안 저의 행방을 아는 자는 거의 없다고 할 수도 있는데, 고모님은 어떻게 저의
일을 알고 또한 어째서 모용구매로 변장하셨지요?"
"악인곡에서 나온 후 너의 걸작을 몇 가지 들었지만 확실한 너의 행방은 찾을 길이 없었지.
수소문도 해봤지만 여전히 너의 행방을 알 길이 막연했었어."

소어아는 매우 의기양양한 듯 눈을 깜박거렸다.

"물론 알 까닭이 없겠죠. 제가 만약 숨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이 세상에서 저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너를 찾으려고 그렇게 애를 써봤지만 결국에는 못 찾았지. 그런데 며칠 전 우연히 너를
만났지."
"저와 만났다고요? 왜 저는 모르고 있었죠?"
"비단 너와 만났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너와 얘기도 나누어 보았는데!"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참으로 이상하군요...... 저와 말까지 했다니......."

도교교는 깔깔거렸다.

"너는 무척이나 흉악해졌더군. 두 눈을 부릅뜨고 마치 나를 잡아먹을 듯 했지. 나는 정말
너의 그 흉악한 눈초리가 무서워서 너를 가까이 하지 못하고 멀리 도망갔단다."

그녀의 이야기 속엔 다분히 과장된 말도 있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다.
그러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알았어요! 도 고모가 바로 그...... 그......."
"내가 바로 나구 형제 집에서 일하는 그 멍청한 시녀였단다."
"참으로 탄복했습니다. 그토록 똑같이 변장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정말 그 멍청한
시녀가 고모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도교교는 소어아가 하는 것처럼 눈을 깜박거리더니 그의 음성을 흉내내며 말했다.

"당연히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 내가 만약 숨으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찾아낼 수 있단 말이냐!"

소어아는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

"훌륭합니다. 다행히 고모가 저로 변장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저로 변장했다면 아마 저도
누가 진짜 강소어인지 분간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한참이나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정색을 했다.

"하지만 그날까지 고모는 저를 만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
"고모가 점이라도 치신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은 이상 제가 나구의 집에 갈 것이라 미리
알 수 없었잖아요. 안 그래요?"
"나는 신이 아닌데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겠니?"
"그러면 고모가 어째서 그 멍청한 시녀로 변장하고 그곳에서 저를 기다렸습니까?"
"나는 너를 기다리기 위해서 그곳에 숨어있었던 것이 아니야."
"저를 기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왜 그곳에 숨어있었단 말입니까?"

도교교의 눈 속에서 갑자기 한가닥의 흉악한 빛이 솟구쳐 나왔다.

"나구 형제 때문에 내가 그곳에 숨은 것이다."

소어아는 그제서야 깨달은 듯 흥미가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이제 알았어요. 고모는 그들 형제와 원한이 있죠?"
"그 속의 비밀을 너는 알지 못한다!"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단 말입니까?"
"내가 이번에 악인곡에서 나온 것은 한편으로는 너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른 두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어."
"그들이 바로 고모님이 찾고자 하는 사람들입니까?"

도교교는 그의 말에 응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십 년 전 십대악인 중 다섯 명이 악인곡으로 쫓겨들어왔지. 그때 상황은 매우 위급하고
다급했기에 그들은 많은 중요한 물건들을 휴대할 겨를이 없었어!"

소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고모와 숙부 두 백부 몇 분들은 오랫동안 강호를 휩쓸고 다녔기 때문에
당연히 얻은 물건도 많았겠지요. 또한 고모와 아저씨들이 갖고 있는 물건들은 당연히 매우
진귀한 것들이었겠구요!"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그 물건들을 버리기가 매우 아까웠지.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휴대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악인곡까지 운반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누구에게 그 부탁을 했습니까?"
"너도 알다시피 우리들은 강호에서 친구라고는 전혀 없었다. 다만 십대악인에 속하는
사람들만이 겨우 조금 통하는 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도교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오직 남은 다섯 사람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그 광사 철전은
화가 나면 심지어 자기의 생명도 생각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부탁할 수가
없었지. 그리고 손인불이기 백개심은 비단 믿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대취와 뼈에
사무친 원한을 지니고 있으니 더욱 그에게 부탁할 수 없었어."
"만약 악도귀 헌원삼광에게 부탁하면 그는 도박하여 완전히 잃을까봐 더욱 안 되었겠군요!"

도교교는 참다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그 악도귀는 비록 평생 동안 도박으로 지내왔고 자신이 누구보다도 도박에
명수라고 자부했지만 여전히 자주 바지까지 잃곤 했단다."
"옛말에 도박을 취미로 삼아 자주하면 신선이라도 잃는다 했는데 하물며 그는 도귀에
불과했으니 말입니다."
"그 당시 우리는 그 물건들을 '미사인불배명' 소미미에게 운반을 부탁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우리가 그녀를 찾아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지만 끝내는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야."

소어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땅바닥 속에 숨어 들어갔는데 당연히 찾지 못했겠지.)

그는 이 말을 해야 좋을지 안 해야 좋을지 망설이다가 끝내는 하지 않았다.
이때 도교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거듭한 우리들은 결국 구양 형제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그 구양 형제가 바로 '병명전편이'와 '영사불흘휴'란 칭호가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렇다. 그들은 매우 구두쇠인 까닭에 그 물건들을 그들에게 부탁하면 절대로 잃어버릴
우려는 없었지."
"제가 보기엔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이 더욱 믿을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합니다.
그들 형제는 죽어도 이득을 얻겠다는 칭호까지 갖고 있으니, 고모와 아저씨들이 그 물건을
그들에게 부탁한 것이 양을 호랑이 입에 갖다 준 격밖에 되지 않았겠는 걸요?"
"그 당시 우리도 그점을 생각 못한 건 아니었지만 구양 형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이득을 상관하지 않고 살인을 일삼는 혈수(血手) 두살인 까닭에 절대로 감히 그 물건들을
삼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그들 형제는 혈수 두살이 이미 악인곡으로 쫓겨
들어갔으니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움없이 정말 그 물건들을 삼켰던
것이야."
"그들 형제는 창자가 터져 나올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단 말이오? 감히 고모나 아저씨들의
물건을 삼켰으니 말입니다."

도교교의 말 속엔 원한이 가득히 서려 있었다.

"악인곡에서 이십 년 동안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여전히 물건을 보내오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는 죽지 않는 한 언제든 복수해야겠다고 맹세했지."
"그러기 때문에 고모가 악인곡에서 나오자 마자 그들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군요?"
"그렇다."
"그 구양 형제가 혹시 나구 형제와 무슨 관련이라도 있습니까?"

도교교는 또박또박 끊어가며 힘주어 말했다.

"나구 형제가 바로 구양 형제야!"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어쩐지 그들의 수단이 악독하다 했죠! 저는 벌써부터 그들의 정체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그들의 생김새가 구양 형제와는 조금도 닮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된
것이죠?"
"이십 년 동안 그들은 일부러 자신들을 부운 듯이 뚱뚱하게 키웠단다.
그들은 원래 젓가락 만큼이나 말랐었어. 그러나 지금은 뚱뚱하게 키운 까닭에 심지어
얼굴의 생김새마저 달라졌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말이다. 그들 형제는 정말 누구보다도
영악하며 가장 훌륭한 변장술을 생각해낸 것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자연적으로 불어난 살로 변장한 것은 어떤 변장술보다 더욱 훌륭할
거예요. 그들이 그러한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었으니 과히 천재라 아니 할 수 없군요."
"나는 구양 형제를 찾다 못찾아서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나구형제가 근래에 와서 해낸
일들을 듣게 됐어. 나는 곧 그들을 의심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곳을 찾아왔지.
첫눈에 그들을 알아본 나머지 그들이 옛날 피골이 상접했던 구양 형제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단다."
"고모는 그래도 의심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고 더욱 확실하게 조사하기 위하여......."

도교교가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중간에서 가로챘다.

"그 시녀를 단칼에 죽여버리고 그 시녀로 변장했지."
"고모 같은 총명한 사람이 멍청한 시녀로 변장하니 당연히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없겠죠."
"그 동안 나는 그들이 바로 구양 형제란 것을 알아냈어. 다만 즉시 그들의 정체를 파헤치면
그들이 달아날까봐 경거망동을 못한 것이야. 더군다나 설사 그들을 잡을 수 있다해도 그
물건들을 숨긴 장소를 말하지 않을까봐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야."
"그래서 고모는 그 물건들이 숨긴 장소를 알 때까지 복수에 불타는 마음을 억지로 참는단
말씀이에요?"
"만약 내가 인내력이 강하지 않고 줄곧 지금까지 참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너는 이미
지옥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다른 점은 제쳐놓고라도 고모가 그 멍청한 시녀로
변장하지 않았던들 어떻게 모용구매와 접촉할 수 있었으며, 또한 어떻게 그토록 흡사하게
변장할 수 있었겠어요!"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띠웠다.

"처음엔 그 정신착란을 일으킨 소녀가 모용구매라는 것을 알지 못했어. 그러나 의아심은
있었지. 그래서 할 일 없을 때마다 심심풀이로 그녀의 인피가면을 만들었단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금 같은 짧은 시간 안에 변장도구도 지니지 않은 내가 어떻게 그녀로
변장할 수 있었겠느냐!"

소어아는 눈알을 굴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냉소를 터뜨렸다.

"고모가 이 가면을 만든 것은 심심풀이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뭣 때문에 이 인피가면을 만들었다는 말이냐?"
"고모는 필요할 때가 되면 그녀를 없애고 그녀의 모습으로 변장하려고 하였죠. 그렇게 되면
그 나구 형제가 더욱 고모를 의심하지 않는 한편 고모가 조사하고자 하는 일이 더욱 쉽게
이루어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과연 네 녀석의 머리는 비상하구나. 내 마음 속의 일들을 완전히 파헤치고 말았으니
말이다."


 
           괴인(怪人) 동 선생의 출현 
 
 
"고모의 그 계획이 비록 치밀했지만 뜻밖에 제가 모용구매를 데려가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고, 그 가면 또한 고모에게 여전히 가치를 잃었죠. 그러므로 고모는 폐물
이용격으로 심심풀이로 저를 살려준 것에 불과하죠!"
"네 녀석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내가 성의껏 너를 구해준 것이 오직 폐물 이용이며
심심풀이로 밖에 생각 되지 않느냐?"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을 할 뿐 그녀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도교교는 그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자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발견할 때부터 너에게 온갖 정신을 다 기울였어. 그 원인은 네가 구양 형제와
함께 있는 것이 필시 무슨 꿍꿍이속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던 까닭이지.
어제 새벽, 너와 흑 지주가 모용구매에게 편지를 쓰라는 말도 나는 엿들었단다."

그녀는 애교가 가득찬 웃음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밖에서 지켜주지 않았다면 아마 너희들은 벌써 구양 형제에게 들켰을 것이다."

소어아는 깜짝 놀랐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한 체하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설사 그들에게 들켰다 해도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공연히 도와줬나 보구나!"
"고모는 그 편지에 관한 내용을 들었기에 제가 사당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도교교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나는 백개심을 만난 적이 있단다."

그 말에 소어아는 다시 놀랐다.

"백개심! 고모는 언제 어디서 그와 만났어요?"
"네가 진흙으로 무슨 놈의 '흑살최명단'인가 하는 것을 만들었을 때 나는 이미 그곳에
있다."

소어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다. 고모가 그 근처에 숨어있는데 제가 왜 고모를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너의 지금 실력으로는 나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지.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백개심과
마주보고 있었던 까닭에 손짓으로 그보고 외치고 떠들라고 했지! 너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또한 그 당시 너는 자신의 실력에 도취되어 있었으니 어찌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었겠나!"
"어떠한 상황아래서도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나 보군요."

소어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불현듯 무엇이 생겨난 듯 중얼거렸다.

"어쩐지 방금 백개심이 저보고 해독약을 달라지 않는다 했지요.
그는 벌써부터 고모에게 그것이 진흙에 불과하다는 것을 들었군요. 제가 그에게 진흙을
독약이라고 먹였으니 그는 당연히 저에게 골탕을 먹이려 했겠죠. 화풀이를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만약 이 우연한 일들이 이토록 정확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늘이 너의 제삿날이 되었을
것이다."

소어아는 정색을 했다.

"그 일들이 보기엔 매우 우연한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가 인과응보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더없이 합리적이지요."
"오직 골탕을 먹은 자는 강별학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골탕을 먹이려면 당연히 그와 같은 사람을 골탕먹이는 것이 가장 재미있죠.
만약 성실한 사람을 골탕먹일 것이면 차라리 집에서 발닦고 낮잠이나 자는 편이 낫습니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있던 도교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나쁜 사람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은 정히 좋은 사람에게 골탕먹이는
것보다 재미있겠지! 더군다나 그런 자들에게 골탕을 먹인다 해도 그는 자신이 재수없다고
생각할 뿐이지 절대로 떠들며 다니지는 못할 테니까. 누군가 설혹 네가 그에게 골탕을 먹여
주었다는 말을 듣는다 해도 오히려 너에게 탄복할 뿐이지 결코 복수할 사람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소어아의 입가엔 기쁜 웃음꽃이 활짝 핀듯 했다.

"그러므로 고모도 저와 같이 그저 나쁜 사람에게만 골탕을 먹여주고 좋은 사람에게는 그냥
놓아 두세요. 비단 남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은 흥겨움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복수를 당할까봐 숨어 살 필요도 없으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입니까?"

이 한마디는 도교교를 추켜주는 말이기도 했지만 따끔한 충고이기도 했다.
소어아는 계면쩍은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고모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악인곡에서 나왔습니까? 저는 여전히 알 수가
없군요."

도교교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에 미처 생각지 못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이 똑같은 말을 그녀는 두 번이나 계속 했고, 또한 할 때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듯
했다.
소어아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급히 물었다.

"혹시 '악인곡' 무슨 예측할 수 없는 큰 사고가 발생한 게 아녜요?"
"누가 아니래!"

그녀의 말은 거의 체념에 가까웠다.
소어아의 얼굴색이 크게 변하며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 사고가 고모로 하여금 악인곡에서 나오게 했으니 필시 매우 엄청난 것이겠군요?"

"정말 매우 엄청난 사고였지."

소어아는 조급한 마음에 견딜 수 없어 다그쳐 물었다.

"도대체 무슨 사고예요?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도교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그......."

이때 갑자기 쉭'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고 따라서 한 인영이 나무가지 위에서 뛰어
내려오며 큰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이 이곳에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얼마나 찾았다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흑 지주였다.
소어아는 놀라운 표정이었으나 웃으며 말했다.

"너로구나. 왜 이제야 왔느냐? 조금 전에 참으로 많은 재미있는 일들이 발생했었는데 너는
하나라도 구경했니?"
"하마터면 영영 너희들과 만나지 못할 뻔했다."

소어아는 그제서야 비로소 그의 반짝거리던 비단옷이 진흙으로 범벅이 되고 머리도
헝크러진 것을 보았다.

"너는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느냐?"

흑 지주는 원망스러운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네가 나보고 전하라는 그 놈의 편지가 아니었으면 무엇 때문에 이 꼴이 되었겠느냐?"
"그 편지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느냐?"
"내가 편지를 가지고 남궁유의 집에 막 도착했을 때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어. 그래서 나는
살며시 집 안으로 들어가 편지를 책상 위에다 놓았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어아는 벌써 안타까움이 가득찬 표정으로 발을 굴렸다.

"너는 무엇 때문에 집 안까지 들어갔느냐? 그저 편지만 집 안에 던져 놓으면 되지
않았겠니? 그들이 데리고 다니던 시녀가 이미 남에게 잡아 먹혔는데 자신의 거처를 아무나
드나들도록 소홀히 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어?"

흑 지주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번져 나왔다.

"내가 너무 경솔한 탓으로 그 점을 미리 깨닫지 못했다. 내가 편지를 책상 위에다 놓자마자
갑자기 한가닥의 긴 채찍이 나에게 휘날려 왔고 내 손에 쥐어 있던 편지를 빼앗아 갔다네!
그래서 나는 나의 경솔함을 깨닫고 급히 도망가려고 작정했지. 그러나 벌써 창문과
대문앞은 사람들로 가로 막혀 있었지."
"그들이 집을 비워 놓은 것은 바로 너로 하여금 방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생각해 봐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남궁유와 모용쌍이 사는 방을 남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놔
둔단 말이냐?"

흑 지주는 소어아의 탓하는 소리에 크게 노했다.

"나는 평생동안 떳떳이 살아왔는데 그런 교활한 계책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냐?"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너는 성인군자라서 그런 속임수를 알 까닭이 없지."

흑 지주는 그제야 비로소 화가 가라앉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당시 나는 크게 당황한 나머지 그냥 뚫고 나가려 했지. 그러나 사방의 창문과 대문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었어. 특히 암기를 퍼붓는 수법은 더욱
절묘해서 비단 뚫고나갈 수 없음은 물론 심지어 그들 손에 잡히기 일보직전이 되었다네."
"그들이 그 편지를 본 이상 당연히 너를 놓아줄 리 만무하지! 그런데 그들은 너의 정체를
알고 싶은 까닭에 너에게 중상을 입히지는 않았겠지."
"나도 그들이 그저 내 정체를 알려고 할 뿐이지 나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어.
그들의 암기는 나의 치명적인 위치에 가해 지지는 않았어.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그들
손아귀에 들어갔을 거야."
"모용가문의 암기는 정말 소문대로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나 보구나....... 그런데 너는
그들의 포위망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으니 그들보다 실력이 더욱 더 뛰어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흑 지주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만일 나 혼자의 힘이었더라면 도망 나온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너를 도와 주기라도 했단 말이냐?"
"내가 그들에게 잡히기 바로 일보 직전에 갑자기 한 사람이 날듯이 집안으로 들어왔지.
고인옥의 가전(家傳) 신권(神拳)도 무예계에서는 매우 알려진 것이고 나 자신의 무공 또한
뛰어 났는데, 그 사람이 그저 옷소매를 가볍게 흔들했을 뿐인데 고인옥은 벌써 나가
자빠졌지."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군데 그토록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단 말이냐?"
"그처럼 뛰어난 무공을 난 평생 본 적이 없어. 심지어 꿈에서도 그토록 무서운 무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네가 그토록 탄복하는 걸 보니 정말 무서운 무공을 지니고 있나보구나!"
"그 사람은 그저 옷소매를 가볍게 몇 번 흔들거렸지. 그러자 암기들이 도리어 뿜어낸
사람들을 향하여 덮쳐 갔어. 그들이 뿜어낼 때보다 더욱 거센 힘을 지니고 말이다.
그들은 모두 깜짝 놀라서 자기들의 암기를 피하기에 바빴지. 바로 그때 그 사람은 나를
겨드랑이 밑에다 끼고 밖으로 나는 듯이 솟구쳐 갔어."

그렇게 말한 그는 부끄러웠던지 쓰디쓴 미소를 짓다가 말을 이었다.

"그의 겨드랑 밑에서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지. 그때 그는 가볍게 몸을 솟구쳤는데 벌써
칠팔장 밖으로 날아갔다네.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 같았어."
"너는 점점 더 신기하게 얘기를 해 나가는구나. 이 세상에서 그토록 뛰어난 경신술을 지닌
자가 어디 있단 말이야?"

흑 지주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의 너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할 테지만 심지어 친히 목격한 나까지도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어. 너 자세히 생각해 보아라. 만약 그 사람이 놀라울 정도의 뛰어난 무공을 지니지
못했다면 어찌 나를 겨드랑이 밑에다 낄 수 있단 말인가?"
"옳은 말이야! 너를 겨드랑이 밑에 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정히 없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그는 분명히 그렇게 했는 걸."
"지금 너는 그래도 그가 누군지를 모른다고 하겠니?"

듣고 있던 도교교가 갑갑한 듯 드디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지요?"

흑 지주가 응답했다.

"그 사람의 몸집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굉장한 힘을 지니고 있었어. 나는 그에게 차 한 잔
식을 시간 밖에 끼어다니지 않았는데 온 몸이 마비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어."

도교교는 그 사람의 몸집이 별로 크지 않다는 말을 듣고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소어아가 계속 다그쳐 물었다.

"그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나?"
"그의 얼굴에는 흉칙한 청색의 구리가면이 가려 있었고, 두 눈은 형용하기 조차 어려운
음산한 빛이 도사리고 있었어. 심지어 배짱이 두둑하다고 자부한 나도 그의 얼굴을 단 한
번 바라보고는 더이상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어. 등뼈가 오싹해지고 소름이 꽉 끼쳐 두
손은 식은 땀으로 축축해졌지."

소어아는 그의 눈빛 속에서 아직도 놀라움과 공포에 질려있다는 걸 발견하였다. 자신도
등줄기가 오싹함을 느꼈고, 심지어 간담이 서늘해져옴을 느꼈다.
도교교가 다시금 참다 못하여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나를 껴안은 채 동산 위로 달려 올라가 한 그루의 매우 큰 나무 위로 몸을 올리더니
그제서야 나를 벌어진 나무가지에 놓았지. 그때 나의 온몸은 완전히 마비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고, 또한 감히 움직이지도 못 했어. 그저 조금만 움직이면 떨어질까봐 말이다."

소어아가 물었다.

"그는 그때 어디에 있었느냐?"
"그 자신도 나무가지에 앉아 차디찬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한마디 말도 없고
말이다. 그가 앉은 가지는 매우 연약한 것이라 간난 아기가 그 위에 앉는다 해도 부러질
정도였는데 그는 매우 편안한 것 같이 보였어."
"그는 정말 괴상한 사람이구나...... 무공이 너무 뛰어난 사람은 모두 괴상한 성격에다 괴상한
버릇을 지니고 있나보지!"

도교교가 그의 말에 찬성하지 않는지 불쑥 끼어들었다.

"아마 그는 당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당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나도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남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없어서 정말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더군."

도교교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또 고생을 했겠는데요."
"그래요. 그는 한동안 기다리더니 내가 아무말도 할 기미가 없자 갑자기 나의 두 곳의
혈도를 점한 후 나를 나무 위에 놓아 둔 채 어디론가 사라졌지요."

이렇게 말한 그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도교교를 바라보았다.

"모용소저께서는 정신이 회복됐습니까?"

도교교는 깔깔댔다.

"정신이 회복됐냐고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요?"

이 한마디를 던진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려 날듯이 달아났다.
이러한 광경을 본 흑 지주는 깜짝 놀랐다.

"모용소저! 잠깐만 기다리시오. 가지 말아요."

그러나 도교교는 멈추지 않았고 벌써 멀리로 사라져갔다.
흑 지주는 달아나는 도교교를 뒤쫓아 가려했다.
그러나 소어아가 재빨리 그를 잡으며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게 놓아 주어라."

흑 지주는 의아한 눈동자로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어째서...... 어째서......."
"그녀를 걱정하지 말고 우선 네가 당한 일이나 계속 이야기해 보아라."

흑 지주의 머리 속에는 의아한 생각이 가득찼다.
한참이나 넋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더니 결국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때 바람은 점점 세게 불어 몸은 좌우로 흔들거리고 나무가지도 마치 끊어지려는 듯
흔들렸지. 하지만 나는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으니 간은 정말 콩알만하게 되었다네."
"그는 너의 생명을 구했는데 왜 다시금 너를 괴롭히려고 했을까?"
"차라리 그가 나를 구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때 같이 비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게야.
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나는 놀랍고 당황한 한편 분노도 느꼈지. 심지어 그의 살결을 씹어
먹고 싶은 충동까지 느껴졌어. 그러나 그의 그 귀신도 놀랄 무공을 생각하니 평생이 다가도
아마 복수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나무 위에서 내려왔지?"

흑 지주는 그 당시를 생각하는지 쓰디쓴 고소가 입가에 잠깐 번졌다.

"내가 어떻게 복수를 할까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나 내 마음을 환히
본듯 갑자기 나에게 물어왔어. '너는 복수하고 싶은가?' 하고."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환히 볼 수 있다. 비록 네가 입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눈으로 이미 모든 것을 완전히 털어 놓았으니 말이다.'

"그가 나의 마음을 알았으니 나는 더욱 더 악독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 보았지. 그리고
속으로 설사 네가 나를 나무 아래로 밀어 버린다 해도 이렇게 나무 위에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하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는 밀기는 커녕 도리어 '나는 너의 생명을 구
해주었는데 너는 어떻게 은혜를 갚을까 생각하지는 않고 미리 복수할 궁리만 하느냐' 하는
것이었어."
"참으로 묘한 사람이구나!"
"그 당시 나는 그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지. 원한은 비록 갚아야 했었지만 은혜도 아니 갚을
수는 없었지. 나 흑 지주가 어찌 은혜를 잊고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오직 그의 무공이 그토록 뛰어났으니 비단 복수를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은혜를
갚으려 해도 어떻게 갚아야할지 막연했어.
어떤 때는 은혜를 갚는 것이 원한을 갚는 것 보다 더욱 어려웠으니 말이다."
"너의 그러한 생각이 아마 또 그 사람에게 들켰을 것이다."
"과연 그는 또 다시 내마음 속을 훤히 읽는 듯이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너는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좋을지 걱정하고 있느냐?' 하고 물었어.
나는 그저 콧방귀를 뀌며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않았지. 그때 그는 또 다시 입을 열었어.
'너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편지를 전해줄 수 있는데 나를 위해서도 편지를 전해 줄 수
있겠는가?'
나는 결국 참다 못해 그에게 물었지.
 '그저 내가 당신을 대신하여 편지를 전해 주기만 하면 은혜를 갚는 것이오?'
그는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편지를 한 장 꺼내어 나보고......
'누구에게 전해 주라는 것인지 네가 어디 한 번 맞혀 보아라.'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지. 그러자 그는 나보고 그 편지를 화무결에게 전하라고 하더군."


소어아는 눈에서 빛이 번쩍거리며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이 점점 재미있게 벌어져 나가는데? 그와 화무결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지?
왜 너보고 편지를 전하라는 것이지. 그가 분명히 직접 화무결에게 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혹시 그는 화무결과 만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르지."
"설사 그가 화무결과 만나고 싶지 않다해도 그의 그렇게 뛰어난 경신술로 아무도 모르게
화무결의 침대 위에 편지를 갖다 놓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흑 지주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소어아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히 매우 간단한 일이라도 그저 네가 생각하기만 하면 즉시 복잡하게 변해 버리는구나.
원래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 너의 해설을 듣고 도리어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그 일의 내막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을 것이네......."

흑 지주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혹시 그는 내가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일부러 나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준
것이 아닌가?......."

소어아도 잠시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그와 같은 괴상한 사람은 확실히 그런 괴상한 생각을 해낼지도
모르지. 너는 비록 남에게 은혜를 빚지고 싶지 않겠지만 그 역시 남에게 은혜를 빚놓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바로 그럴 것이다. 나는 남에게 빚지고 싶지 않고 또한 남에게 빚을 놓고 싶지도 않아.
서로 빚지는 것이 없어야지만 꺼리낌 없이 마음대로 살 수 있으니 말이야. 만약 누가
나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무척 노력한다는 것을 내가 안다면 나 역시 무척이나 괴로움을
느낄 테니까."
"그렇다면 너희들은 똑같은 이상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나 보다. 어쩐지 그가 너를 구했다
했지....... 그런데 그 편지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너는 보았느냐?"

갑자기 흑 지주는 노여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외쳤다.

"너는 나 흑 지주를 남의 편지나 함부로 엿보는 사람으로 봤단 말이냐?
그가 나의 혈도를 풀어 준 후 나는 즉시 그 편지를 화무결에게 갖다 주었지. 심지어 편지
봉투 위에 무어라고 적혀 있는 지도 보지 않고 말이다."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장난하듯 말을 받았다.

"너는 과연 군자답구나. 그러나 화무결이 그 편지를 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내가 이렇게 조급히 너를 찾으려는 원인은 바로 화무결이 그 편지를 본 후 매우 이상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흑 지주의 말이 매우 진지해졌다.
소어아는 즉시 다그쳐 물었다.

"그가 무어라고 말했느냐?"
"그는 '내가 강별학과 사귄 지는 비록 얼마 안 됐지만 이미 서로 매우 깊게 아는데 어찌
소문을 듣고 그를 악인이라고 취급하겠습니까? 그 선배님은 너무나도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하고 말했어."
"뭐? 그렇다면 그 괴인이 전한 편지가 강별학과 관련이 있단 말이지? 듣자 하니 화무결로
하여금 강별학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으라는 것 같구나."
"바로 그거야!"

소어아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그 괴인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왜 강별학을 도와 주려는 것이지?"
"화무결이 그러한 말을 하자 나는 즉시 '그 선배님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어 보려 했어.
하지만 화무결은 이미 먼저 나에게 물었지. '댁은 그 선배님을 친히 봤으니 참으로
영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겠군. 그 분은 얼굴에
혹시 청동 가면을 쓰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화무결도 그를 만난 적이 없었나 보구나."
"그런 모양이야."
"화무결은 그를 만난 적도 없는데 어찌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이지?"
"본시엔 나도 매우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나중에야 비로소 화무결이 강호에 발을 들여 놓기
전에 이화궁주가 그에게 당부하기를, 훗날에 만약 동 선생이란 사람을 만나면 절대로 그의
말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또한 그 동 선생이란 분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모두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더군."
"그 괴인은 동 선생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구나. 참으로 그의 사람됨과 똑같은 괴상한
이름이로구나!"
"이화궁주가 또 말하기를, 그 동 선생이란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기인(奇人)이라
하고 무공은 더욱 천하 제일이라 했다는군. 심지어 이화궁주 자신마저 자기가 그 동 선생에
비하면 아득히 떨어져 있다고 했단 말이야."

소어아의 얼굴색이 또 크게 변하며 놀라운 음성으로 물었다.

"이화궁주 같이 오만불손한 사람도 그런 말을 할 줄 안단 말인가? 만약 이화궁주마저
그에게 탄복했다면 그 동 선생이란 작자의 무공은 확실히 무서울 정도로 뛰어나겠군."

흑 지주는 한숨을 쉬어가며 말했다.

"그러므로 그 동 선생이란 작자가 강별학을 도와주고 있는 이상, 네가 강별학을 이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소어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얼굴을 달리 하며 자기의
추리를 내세웠다.

"내가 보기엔 그 동 선생이란 작자가 필시 강별학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만약 그가 친히 도울 생각이 있었다면 절대로 화무결에게 그러한 편지를 띄우지는 않았을
터이고, 더욱 너보고 갖다 주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화무결은 그 동 선생의 말을 완전히 들었으니 필시 끝까지 강별학을 도와줄지도
몰라. 그와 같은 인물이 강별학을 도와주고 있는 이상 너는 골치를 꽤나 썩힐 것이다."

그렇건만 소어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리 대수롭지도 않아."

흑 지주는 두 눈을 부릅뜨고 한참이나 소어아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한마디를 던졌다.

"잘 있거라."

그의 이러한 말을 들은 소어아는 급히 놀라며 물었다.

"어디로 갈 작정이냐?"
"비록 은혜는 갚았지만 원한은 아직 갚지 않았다."

이 말이 떨어지자 소어아는 더욱 놀라서 물었다.

"너는 그 동 선생을 찾아서 복수할 셈이냐?"
"왜? 그러면 안 되나?"
"하지만...... 하지만 그의 무공이......."
"그의 무공이 나보다 뛰어나기에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여 복수도 못한단 말이지? 흑 지주가
약한 자에게만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약한 사람인줄 알았는가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는 분명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잖느냐?"

흑 지주는 큰소리로 외쳤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다. 기껏해야 목숨 하나 잃을 뿐이지! 누구도 나 흑
지주를 함부로 나무 위에 매달 수는 없다. 적어도 나는 그를 편안히 지내게 하지는 않겠어!"
하고 외치면서 그의 몸은 이미 먼 곳으로 사라져갔다.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그의 등 뒤에 쏘아 보냈다.

"이 녀석의 성질이 정말 개똥보다 더럽고 바위보다 더욱 단단한 고집불통이구나...... 하지만
그 녀석의 귀여운 점이 바로 그런 점 아닌가?"

지금 소어아에겐 또 다른 세 가지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첫째, 진짜 모용구매는 어디 갔단 말이냐?"
 둘째, 악인곡에서 도대체 무슨 엄청난 일이 발생했단 말인가?
 셋째, 동 선생이란 작자는 누구이며, 강별학과 무슨 관련이 있고, 또한 왜 강별학을 착한
사람이라고 말했을까?

이때 날은 이미 완전히 밝아 있었다.
소어아는 얼굴에 쓴 가면을 벗었다. 대낮에 그는 이대취의 얼굴로 남과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수풀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 문제들은 정말 그를 골치 아프게 했다. 그는 천하 제일의 총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실로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쓰디쓴 미소가 번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누가 만약 천하 제일의 총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아마 그는 바로 천하 제일의 멍청한
놈일 것이다."

큰 길에는 행인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런데 십중팔구는 모두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또한
그들 모두가 무예계의 인물들인 것 같았으며, 어떤 사람은 심지어 팔목에다 검은 헝겊을
메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흥분한 빛들이 가득차 있었고 입으로는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어아는 그들이 바로 어제 천향당에 가서 상을 치룬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팔목에 검은 헝겊을 메고 있는 것은 철무쌍의 죽음을 슬퍼하는 뜻에서인 것 같았다.

(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왜 모두 얼굴에 기쁨이 가득차 있을까? 저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이때 갑자기 기이하고도 장식이 화려한 포장마차 한 대가 나는 듯이 달려와, 별안간
소어아의 옆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마차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조급함이 가득찬 음성으로
외쳤다.

"빨리 올라타!"

햇볕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의 용모는 매우 밝고 아름다웠지만 피부는 보기에 극히 거칠었다. 그녀는 바로
모용구매로 변장한 도교교였다.
제아무리 뛰어난 변장술이라도 변장한 후의 피부는 여전히 거칠게 보였다. 다만 웬만큼
주의해서는 발견할 수 없었을 뿐이다.
소어아는 재빨리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마차 안의 장식은 더욱 화려했고, 방석은 두텁고 부드러웠으며 컸다.
소어아는 참지 못하여 말을 꺼냈다.

"고모는 정말 방법도 많군요. 어디서 이 마차를 얻었죠?"

도교교는 그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도리어 반문했다.

"내가 한참이나 너를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왔느냐? 그 흑 지주란 녀석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했느냐?"
"우리는 동 선생이란 자에 관해서 토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모는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도교교는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뭐라고? 그 녀석을 구한 자가 바로 동 선생이란 말이냐?"
"고모도 그를 알고 있습니까?"

도교교는 멈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즉시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그런 이름을 들었다."

소어아는 그녀가 필시 무슨 사연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만 도교교가
하기 싫은 얘기는 그 누구도 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계곡(溪谷)의 무술 시합 
 
 
소어아는 도교교가 동 선생을 이야기할 때 말을 더듬자 속이 시원치 않았으나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큰 마차도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면서 바로 그 강호 친구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참을 수가 없어 다시 물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이리 바삐 몰려가는 거지요."
"재미보러 가는 거지."

소어아는 웃음 섞인 말로 다시 물었다.

"재미있는 것을 보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지요. 어떤 재미있는 일이지요?"
"천하에서 무공이 가장 뛰어난 문파의 제자와, 강호에서 지위가 가장 높고 힘이 센 집단이
싸우니 재미있는 일이 아니냐?"

소어아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화무결과 모용가의 사람들이 아니오?"

도교교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바로 그렇다."
"강별학의 일 때문이 아닌지요?"
"그 일이 아니면 또 무슨 일이겠느냐?"

그녀는 한바탕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나서야 말을 계속했다.

"남궁유와 진검이 강별학을 찾아서 싸우려고 들었는데 화무결이 계속 강별학이 깨끗하다고
보증을 하자, 무술로 옳고 그른 것을 가릴 수밖에 없다고 결정한 모양이야. 강호 사람은
이화궁의 사람도 좋고 무림세가의 사람도 좋지만 화를 내게 되면 모두 마차를 끄는
사람이나 가마를 드는 사람과 같이 유일하게 일을 해결하는 방법은 싸움이야!"

소어아는 눈에서 빛을 냈다.

"그렇다면 이번 싸움은 정말 재미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 일은 오늘 새벽에야 일어났는데
어째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알고 왔지요?"
"이것은 필시 강별학이 사람을 시켜서 그들에게 통지 했을 거야. 그는 자신이 화무결의
도움이 있으니 반드시 이길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알리기 위해 자연히 많은 사람의
구경꾼이 필요 했겠지."
"그렇지요, 모용가가 비록 강하더라도 화무결에 비하면 약간의 손색이 있지요......
그렇다면 세상에는 정말 화무결을 상대할 사람이 없을까요?"
"오직 너 뿐이지."

소어아는 도교교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나......."

이런 문제를 그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이때 그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즉시 화제를 바꾸었다.

"고모와 하던 말이 흑 지주에 의해 중단되었었는데, 악인곡에서 도대체 무슨 큰 일이
벌어졌었지요?"

도교교의 입에서 또다시 예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너는 곡에 만춘류가 있다는 것을 알지?"
"내가 왜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 그는 매일 나를 약물에 담구어서 난 머리가 돌
정도였는데요. 그 결과 지금 나는 사람을 때릴 재주는 없어도 맞는 재주는 있지요.
바로 그가 나를 훈련시킨 결과입니다."
"너는 만춘류의 집에 있는 사람 중에 약상자라 하는 사람을 아니?"

소어아는 놀랐으나 안색을 바꾸지는 않았다.

"물론 알지요. 그는 나보다 더 많은 약을 먹었지요. 만춘류가 새로 구해온 약을 꼭 그가
먼저 먹어 보았으니까요."

도교교는 눈동자만 움직여 그를 바라보면서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말했다.

"십 개월 전에 만춘류와 그 약상자가 실종됐어."

소어아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담담히 웃고난 뒤 말했다.

"그게 무슨 큰 문제라도 되나요? 왜 그 말을 하며 긴장하지요?"
"너는 그 약상자가 누구인줄을 아느냐?"

소어아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색을 하며 시치미를 뗐다.

"누군데?"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니? 옛날 강호에 검을 휘두르면 십 장밖에서도 검풍을 느끼게 할
수 있고, 또 수염과 머리를 다 잘라도 아무런 느낌을 느낄 수 없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지요. 그는 연남천 같은데 그렇지요?"

도교교의 입에서 다시 탄식 소리가 새어나왔다.

"연남천 외에 누가 있겠니?"
"그러나 그는 벌써 죽은 게 아니에요?"
"그는 죽지 않았어! 그가 바로 그 약상자야."

소어아는 일부러 놀란 듯 물었다.

"약상자가 바로 천하에서 검법이 가장 날쌘 사람이라니, 정말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인데요.
그러나 검법이 그토록 뛰어났다면 어찌 그런 모양이 되었을까요?"
"이것도 너 때문이지. 우리는 그의 손에서 너를 구하기 위해 부득이 그를 상하게 한 거야."

그녀는 아주 영리하게 말을 했다. 소어아가 만춘류에게서 이 일의 비밀을 듣지 못했다면
정말로 그녀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그는 몰래 탄식을 하면서 혼자 생각했다.

(연남천은 비록 나의 은인이고 또한 대협이라 하더라도 나와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당신들이 비록 악인이라도 이 몇 년 사이에 이미 나와 많은 정이 들었는데 내가 어찌 그를
위해서 너희들에게 복수를 하겠는가. 왜 나를 속이려 하지!)

엄격히 말해서 소어아는 아주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는 피가 끓고 감정이
풍부하고 표면에는 강직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매우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만 하면 그를 불덩어리에 집어 넣었다. 그는 좋아할 것이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비록 자기가 속았고 피해를 봐도 그는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를 화나게 하면 그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우는 성미였다. 그는 자기가
매우 냉정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충동을 느끼면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자기가 매우 똑똑하다고 생각했지만, 때때로는 누구보다도 바보스럽다고 느꼈다.
바로 이런 성질 때문에 그의 일생은 다채로운 일생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느 영웅도 모두 의지를 중시하지 않고 감정을 내세워 왔던 것이다.
소어아는 속으로 탄식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띠웠다.

"나를 위해서라고요? 그와 내가 무슨 관계이지요?"
"이 일을 이야기하면 길어지니 천천히 하기로 하자. 다만 네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너
때문에 연남천과 싸우게 되었고, 연남천이 가버렸으니 우리는 이 악인곡에도 계속 머물 수
없게 되었어."
"왜요?"
"악인곡은 비록 강호인에게는 금지로 취급되고 있으나, 연남천이 다시 들어 올려고 하면
천하에 또 누가 그를 막겠느냐?
그는 옛날에도 한 번 속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드시 더욱 조심할 것이다."

그녀의 교활스러운 눈에 공포의 빛이 번쩍였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힘없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가 이번에 다시 오게 되면 우리 같은 악인은 귀신이 되어 버릴 것이야......."
"고모가 생각하기엔...... 그의 무술이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고 생각해요?"
"그의 무술은 비록 아직은 다 회복되지 않았겠지만 그러나 그 만춘류가 반드시 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약초를 연구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를 악인곡에서 데리고
나갔겠니!"
"그렇겠군요. 무공은 필시 얼마 동안은 회복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그는 벌써
그들에게 복수하러 갔을 거예요. 그러나 만춘류는 그를 데리고 달아났으니 필시 그를
치료할 자신이 있었을 걸요."
"그의 상처가 언제 완쾌 될런지는 모르지. 어쩌면 삼 년이나 오년을 기다려야 하고 어쩌면
팔 년이나 십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지. 난 다만 시간이 갈수록 좋다고 생각해."
"그러나 지금쯤 이미 치료를 끝냈는지도 모르지 않아요?"

도교교는 몸을 흔들면서 그를 바라보더니 불쑥 말을 던졌다.

"너는 그가 빨리 쾌유되기를 바란단 말이지!"
"그렇게 희망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요."

도교교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생각하더니 다시 탄식을 발하며 말했다.

"그렇지, 어쩌면 그가 벌써 회복되었는지도 모르지. 또 이미 우리를 찾고 있을지도......."

눈길을 창 밖으로 돌린 그녀는 다시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마차가 빨리 달려 갈수록 채찍의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빨리 그 용호의 혈투를 보고
싶은 것 같았다.
소어아는 창 밖으로 눈을 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연남천이 지금 어디에 갔을까? 우리는 정말로 그가 보고 싶은데......."

삼면이 둘러싸인 능선 밑에 하나의 작은 계곡이 있었고 능선 위에는 남녀 노소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심지어는 나무 위에도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마차는 계곡 입구에서 멈추어 섰다.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기에 저 얌전한 서생 차림이 이화궁의 사람이란 말인가? 그가 그토록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고는 믿기 힘든데."
"들리는 말에는 지금 강호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으며, 심지어는 강 대협도 그에게
매우 탄복하였다는 데 이 말이 정말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네가 믿지 못하면 한 번 시험해보지 그래."

그 사람은 혀를 내밀면서 웃음 속에 농섞인 말투로 말했다.

"나는 살아서 우리 마누라를 봐야겠어."

또 한 사람의 탄식 소리도 들려온다.

"그는 나이가 젊고 무술도 천하 제일 고수이며 사람도 그렇게 잘생겼으니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거야."

또 하나의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이것은 마치 천지교자란 넉자가 그를 표현하기 위하여 생긴 말처럼 느껴지는 걸.
나도 그와 같은 날이 돌아오면 만족하겠어."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부러움의 소리가 들리므로 소어아는 매우 듣기 언짢았다.
도교교가 그를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너는 이 말을 듣기가 마음 속으로는 매우 거북하겠지?"

소어아는 눈을 크게 뜨면서 언짢은 표정을 했다.

"내가 속이 거북하다고요? 난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그는 확실히 천지교자이지. 하느님은 마치 좋은 것으로만 모두 그의 몸에 모아놓은 것
같애. 그렇지?"

소어아가 짖궂게 그녀에게 이상한 얼굴을 하면서 그녀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냈다.

"그렇지?"
"그가 설사 천지교자라지만 우리 소어아도 그보다 못하지는 않지. 미래의 강호는 너희 두
사람의 천하가 될 것이야."

소어아는 돌면 마차 문을 열고 밖을 보며 말했다.

"나는 구경을 해야겠는데 고모는?"
"너나 가 봐라. 나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그러나...... 너는 나를 위해서 한 가지 일을
해야돼."
"무슨 일이오?"
"방법을 생각해서 그 구양 형...... 나구 형제를 이 마차로 데리고 올 수 있겠니?"
"이 마차에 태울 수만 있다면 온 능선의 사람을 모두 이 마차로 데려올 수도 있어요."

마차에서 내린 소어아는 큰 걸음으로 걸어갔다.
마부를 바라보니 그 마부도 수염을 매만지면서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소어아는 사람 틈에 끼어들어가 능선 위로 올라갔다.
능선 주위에는 수많은 나무가 있었는데 그 위에 올라 앉으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무 위에는 이미 먼저 온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소어아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돌연 고개를 저으면서 탄식을 했다.

"정말 이상한데.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독사의 동굴 위에 앉다니.
만약에 엉덩이를 독사가 물기라도 하면 어찌 하려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무 위에 있던 사람들이 뛰어 내리면서 혼잡을 이루며
우왕좌왕했다.
많은 사람들은 탄식을 하던 그가 이미 나무 위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깨끗이 그의
탄식에 속은 셈이다.
이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어이 친구, 너는 이 나무가 뱀의 동굴이라 하면서 왜 올라가는 것이지?"

그러자 소어아는 웃으면서 답했다.

"뭐? 내가 방금 그런 말을 했던가?"

그 사람들이 다시 입을 모았다.

"네가 분명히 말을 했잖아?"
"난 다만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독사의 동굴에 앉는다고 했지, 이 나무가 독사의
동굴이라고는 하지를 않았오. 여러분들이 잘못 들으셨겠지요?"

그 사람들은 놀라움과 분노를 나타냈다. 소어아는 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강남 대협과 모용집의 아가씨들이 여기에서 일을 하는데 떠들어대는 사람은 죽고 싶은
거야."

그 사람들은 서로 바라보면서 우러나는 분통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무 위로 다시 기어 올라갔고 올라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은 자기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였다.
소어아는 나무 위에서 계곡 안팎의 광경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는 그 자리가 너무 좋다고 생각하여 몰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좋은 위치를 얻으려면 수단이 없어선 안 되지......."

계곡 내의 빈터에서 하나의 마차가 멈추어 섰다. 그 마차를 타고 온 화무결은 한가롭게
창문에 기댄 채 마침 마차 속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강별학이 그의 옆에 앉아서 계속 사방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조금도 '대협'의 오만함은
보이지 않았다.
강남 대협의 다정한 태도와 겸손한 생활은 바로 강호 사람들이 가장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가 여전히 다른 많은 대협들보다 더욱 가깝게 지낼 수 있다고 느꼈다.
소어아는 쳐다보면서 욕을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소어아는 나구 형제를 발견했다. 이 두 사람은 크고 뚱뚱한데다 다른 사람들 머리 하나는
더 크게 보였다.
그러나 모용집안의 사람들은 하나도 오지를 않았다.
사방의 강호 친구들은 이미 그들이 너무 오만하다고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화무결은 조금도 애태우지 않고 얼굴은 더욱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타고 온 마차
속을 들여다 볼 때마다 그의 예리한 두 눈은 부드럽게 변했다.
소어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마차 속의 사람이 누구일까? 화무결은 정말 철심난과 다정한 사이이며 그녀를 이 자리에도
데려왔단 말인가?)

사람들이 소동을 벌리는 가운데 열두 명의 검은 옷을 입고 찬란한 허리띠를 맨 덩치 큰
사나이들이 세 개의 가마를 들고 들어왔다.
또한 더불어 따르고 있었고 그 작은 가마에는 예쁜 세 사람의 계집애가 타고 있었다.
그녀들이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자 사람들은 가려워도 어디를 긁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듯한 태도를 짓곤 했다.
가마가 정지하자 세 명의 계집애들이 내렸다. 그들이 큰 가마앞으로 다가가 휘장을 젖히자
세 명의 절세가인이 걸어 나왔다.
세 사람은 바로 모용쌍 모용산과 소선녀 장청이었다.
그들은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화장도 했으며 마치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는 귀족 집안의
아가씨와 같았다. 절대로 사람을 죽이는 여호걸 강호 고수 같지는 않았다.
능선 위에서 관전을 기다리던 강호 친구들은 대부분이 모용구매 자매의 이름을 들어봤지만,
그녀들을 본 사람은 매우 적은 숫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눈앞이 밝아지면서 열 사람 중에 아홉 사람은 넋을 잃고 있는 것 같았다.
소어아도 얌전하게 뒤에서 따라가는 아가씨가 바로 옛날 초원을 달리면서 사람을 죽이던
소선녀라고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성숙하고 얌전했다.
소선녀는 오늘 만큼은 각별히 치장을 잘 차렸다. 그녀는 긴 신을 벗고 구슬신을 신었으며,
바지를 벗고 치마를 입었으니, 걸어갈 때에도 옛날처럼 그렇게 급하지 않았다.
깨끗한 얼굴에 약간의 화장까지 했다.

소어아는 몰래 엷은 미소를 띠웠다.

(저러면 좋지. 저래야 여자 같군...... 그러나 그녀는 평일에는 싸움차림을 하고, 정말 싸울땐
또 이런 모양을 했는데 무엇 때문일까? 혹시 화무결의 넋이라도 잃게 하여 싸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아닐까?)

화무결의 눈은 과연 마차 속에서 경계를 하는 것보다 놀라움에 차 있다고 하는 것이
적합했다.
모용산인 연보산은 제일 앞에 걸어가면서 웃음띤 얼굴로 화무결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들이 한발 늦게 와서 공자를 기다리게 한 것을 용서하시오."

그녀가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하는데 화무결이 어찌 여자 앞에서 실례를 할까. 그래서 즉각
길게 인사를 한 뒤 역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여러분들께서 늦게 온 것이 아니라 제가 너무 일찍 온 것 같소."

모용산이 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멋있는 공자님도 계시니 자연히 일찍 나와서 구경을 해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들은 일이 좀 바빠서 공자와 같이 구경을 못 했오이다."
"부인께서는 너무 겸손하시오. 제가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공자께서야말로 정말 겸손하고 다정하오. 어느 집의 아가씨가 복이 많아서 공자를
시중드릴 수 있겠소?"

두 사람은 웃으면서 말을 하니 마치 정말 봄나들이 나온 명문규수와 공자 같이 조금도
불쾌함을 찾을 수가 없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것이 잘못 전해진 것은 아닐까? 그들의 모양으로 보아선 싸울 것 같지 않은데!)

화무결이 또 말했다.

"남궁 공자와 진 공자도 곧 오시게 되겠지요?"
"그들은 집에 볼 일이 있어서 모두 돌아갔소!"

화무결은 잠깐 놀라운 빛을 보였다가 말했다.

"그들 두 사람이 오지 않으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죠?"
"이 일은 다만 우리 자매와 공자간의 일이오!"

모용쌍이 따라 말참견을 하였다.

"모용가의 일은 남의 간섭을 받지 않아요."

화무결은 다시 놀랐다.

"그러나...... 부인들은 너무......."

모용쌍이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우리 자매가 비록 그들의 처이긴 해도 그러나 처의 일들은 때때로 남편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수가 있소. 우리 모용자매가 어찌 마누라의 일에 간섭을 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겠소?"

이번에는 모용산이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공자께서도 남편의 일에 참견하는 마누라를 좋아하지는 않으시겠죠?"

이 자매는 너 한마디 나 한마디 식으로 말해왔다.
 화무결은 넋을 잃고 아무 소리도 못했고 소어아는 몰래 웃으면서 혼자 생각했다.

(모용가의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면 정말 복이야. 분명 남궁유와 진검은 화무결과 싸우는
것을 피하고 있는데도 그녀들에 의해 그들의 이름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오히려 다정한
남편으로 취급하게 되니 말이다.)

남궁유와 진검의 신분으로는 남과 싸움을 피해서는 안 됐다. 그러나 그들이 화무결과
싸우면 필시 패하고야 말 일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가장 총명한 방법으로 오지 않았다.
그들이 자기의 마누라들을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은 필시 그녀들의 무술이 자신이 있는 것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어아는 이런 추측을 했다.

(이 영리한 모용자매는 무슨 묘책이 있을지?)

강별학은 참고 있다가 그제서야 미소를 띠우면서 말을 걸어왔다.

"남궁 공자와 진 대협이 오지 않았으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을 보겠오?"

모용쌍의 눈이 그의 쪽으로 돌려졌다. 그러더니 얼굴의 웃음을 서서히 감추면서 말했다.

"왜 해결을 못한다는 거요?"

화무결은 기침소리를 낸 후 쓴웃음을 띠웠다.

"제가 어찌 부인들과 싸우겠소?"

소선녀가 큰소리를 치면서 끼어들었다.

"당신이 왜 우리와 싸우지를 못한다는 거요? 왜 우리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모용산이 말했다.

"공자께서 우리와 싸우기 싫다면 다시는 우리와 강별학의 일에 참견을 마시오.
강별학은 이미 어린애가 아닌데 자기의 일을 처리 못하겠소?"

그녀의 얼굴은 비록 웃고 있었다 해도 그 말투는 매우 날카로웠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웃으면서 강별학이 필시 이 말을 그냥 넘기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강별학은 움직이지도 않고 미소를 띠우면서 말했다.

"강호의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오. 저는 평생에 사람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소.
더군다나 부인들은 잘못 판단하시고 오해하신 거요."

모용쌍이 화를 내며 큰소리로 외쳤다.

"강별학, 당신 들으시오. 첫째, 이것은 절대로 오해가 아니고, 둘째, 당신은 우리를 다칠
수도 없을 것이오. 당신은 싸울 준비나 하시오!"
"이 오해는 짧은 시간 동안에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알게 될 지도
모르오. 지금 제가 어찌 부인들에게 손을 쓰겠오? 부인께서 나를 죽인다 해도 나는 손을
아니 쓸 것이오."

이 말은 아주 극적으로 유효적절한 말이었다. 군중들은 이미 참을 수 없어서 환호성을
올렸다.
소어아도 몰래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천하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데엔 그 누구도 강별학보다는 못 할 것이다. 더욱이 이런
장소에서 그의 재주를 보이다니."

모용쌍이 분을 참지 못 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분명히 화공자가 당신을 못죽이게 할 것으로 알고 지금 이런 말을 하는데......."

강별학은 담담한 여유를 보였다.

"제가 만약 혼자서 일을 처리 못하면 지금 이곳에 오지를 않았을 것이오."

소선녀가 싸늘하게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구해 달라고 부탁을 할 땐 난처해야 할 텐데 당신은 입이 살아서 말을 상당히 잘하니 얼굴
두꺼운 정도는 보기가 드물 정도군."

강별학이 크게 한바탕 웃어제꼈다.

"다행히 강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내가 청원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돌연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치면서 그들의 험악한 분위기 속에 끼어들었다.

"최소한도 강 대협은 절대로 집으로 달아나서 마누라더러 싸우라고 하지는 않겠지!"

소어아는 자세히 보았다. 이 외침은 바로 그 이름이 나구(羅九)인 구양정이었다.
그러나 모용자매는 외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녀들은 듣지 못한 척하면서 마음 속으론 강별학과 이야기를 계속해야할까 망설였다.
쌍방의 수단이 비슷하니 더 이상 말싸움만으로 끌 수도 없었다.
화무결은 시종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듣고만 있었다. 말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때에는 그는 절대로 말을 꺼내지 않는 성미였다.
소선녀는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말싸움만 하면 흑백을 가릴 수도 없으니 싸워 봅시다. 내가 먼저 화공자와 싸우는
게 어떻겠소?"

화무결은 그녀를 아래 위로 훑어 본 후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과 나와 싸움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소?"

소선녀는 눈을 치뜨면서 외쳤다.

"왜 못해요? 우리가 전에는 친구였지만 지금은 틀려요!"

화무결은 여전히 미소를 띠울 뿐 말을 하지 않았다.
모용산이 다시 끼어들었다.

"화공자는 필시 여자와는 싸우지 않으려는 속셈이군요?"
"제가 만약 실수를 하여서 부인들이 화장을 못하게 하는 것도 죄인데, 어찌 부인들과
싸우겠소?"
"그럼 공자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소?"

화무결은 침울하게 모습을 바꾸었다.

"제가 보기엔 이 일은 해결할 수 있을 것도 같소. 강형의 인품은 강호에서 다 알고 있소.
부인......."

모용쌍이 큰소리로 화무결의 말을 막으며 외쳤다.

"이 일은 꼭 해결을 해야겠소. 공자께서 다른 수가 없으시다면 저에게 하나가 있는데."
"어떤 것이오?"
"우리들이 세 가지의 일을 말해서 공자께서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다시 강별학을 찾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공자께서 할 수 없다면 강별학의 일에 상관마시오."

여기까지 들은 소어아는 드디어 깨달았다. 진검과 남궁유가 오지않고 모용자매를 보낸 것은
다분히 화무결에게 손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세 가지의 일을 가지고 화무결을 난처하게 만드려는 계산이었다. 다만 화무결이
유혹에 넘어가면 이번 싸움은 패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화무결도 바보가 아니라서 약간 침착하게 생각한 뒤 웃으면서 말했다.

"부인께서 세 가지의 일을 말한 뒤 제가 대답하지 못 한다면?......."

모용산이 웃었다.

"우리가 어찌 공자가 하기 어려운 일을 말하겠소?"

소선녀가 또 큰소리로 외치며 끼어들었다.

"이 세 가지의 일을 말한 후 당신이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해 보겠오. 이렇게 되면
공평하겠죠?"
"부인께서 만약에 저보고 자수를 놓게 하면 저는 절대로 못하오."

모용산산이 말을 받았다.

"이 세 가지의 일은 남녀 누구나 모두 할 수 있을 것이오. 난 다만 공자의 무공과 지혜를
시험해보려는 것뿐이에요."

모용쌍이 따라서 말했다.

"이 세 가지의 일을 공자께서 하지 못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공자의 지혜와 무공은
우리보다 못하다는 거요. 그럼 공자께서는 다시는 우리의 일에 참견하지를 않겠죠.
그렇습니까?"

화무결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 그렇다면 저는 강호에서 물러나고 다시는 아무 일도 참견하지 않겠소."

소어아는 이미 모용자매가 세 가지의 일 즉 이상한 일을 들고 나오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몰래 웃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화무결아, 화무결, 네가 대답을 하면 속는 것이다.)

군중들은 모두 수근댔다.

"시합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모용자매는 다른 수단을 쓸 모양이지?"

또 다른 사람의 말이다.

"모용 아가씨가 만약에 화공자더러 땅을 개처럼 기어 다니게 하면 화공자의 신분으로 어찌
그런 일을 하겠어? 그렇게 되면 지는거지."

그러나 어느 사람이 반박한다.

"모용가도 강호에 이름이 퍼져 있으니 그런 일들은 하지 않을 거야."

화무결이 비록 말을 가볍게 하기는 했지만 퇴출강호(退出江湖) 네 글자의 비중은 너무 컸다.
그는 지금 명성이 점점 크게 퍼져가고 있었으며 금후 수십 년의 강호 생애는 필시 화려할
텐데 오늘 지게 되면 그의 명성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한 자세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긴장했고 모용자매는 조용히 상의를 했다.
모용쌍이 드디어 결정을 본듯 돌아서며 말했다.

"공자께서 '금계독립(金鷄獨立)'의 자세로 서서 남이 밀어도 넘어지지 않는다면 공자가 이긴
셈이오."
"그러나 부인께선 몇 사람으로 밀 작정이오?"

모용쌍이 눈동자를 굴리면서 말했다.

"약 이백 명으로 합시다."

화무결은 잠시 동안 깊이 생각한 뒤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이 말이 나오자 군중들은 모두 놀랐다. 이백 명의 사람이 합하면 그 힘은 상당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금계독립'의 자세로 서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 간에 한쪽 다리의 힘으로 이백 명의 힘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머리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다.
화무결은 머리가 돈 사람도 아닌데 어찌 손쉽게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이때 소어아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다만 조금만 머리를 쓰면 당해낼 수 있다. 등을 벽에 대면 이백 사람이 아니라 이백만
사람이라도 밀지 못할 것이다.)

소어아는 화무결이 이런 점을 생각했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화무결은 산쪽으로 가지않고 빈터에 서서 한 다리를 들고 미소를 띠우면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셋까지 세면 시작하시오."

모용자매는 서로 눈치를 교환했다. 그녀들의 눈길에서 기쁜 빛이 나타났다.

"좋소."

계곡 내외의 몇 백 명의 사람들은 모두 화무결이 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탄식을 하기도 했다.
화무결은 아무 의지하는 것도 없이 빈터에 서있는 것이 이백 사람이 아니라 다만 두
사람으로도 그를 밀 수 있을 것 같이 보였다.
화무결의 무공으로 말하면 백 명의 사나이도 그의 상대가 못됐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무런
기교도 사용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남이 백 근의 힘으로 밀면 상대방은 백 근의 힘으로 막아야하는 것이다.
화무결이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가 숫자를 헤아리는 동안 한쪽 발이 땅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견고한 돌땅이
그의 발 밑에서 진흙과 같이 힘을 못썼다.
모용산이 마음 속으로 놀라면서 입을 열었다.

"화공자는 이미 준비 되었는데 너희들은 무엇을 기다리지?"

가마를 들던 열 여덟 사나이들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그들이 이미 합의가 돼 있었는지
달리면서 둘째 사람의 손이 첫째 사람의 어깨에 잡고 셋째 사람의 손이 두번째 사람의
어깨에 잡는 식으로 힘을 모았다. 열 여덟 명은 발걸음을 더욱 빨리하면서 화무결 쪽으로
달려 갔다.
이렇게 미는 힘은 비단 여덟 사람의 힘을 합한 것일 뿐더러 그들의 달리는 힘이 더해지는
것이다.
화무결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힘을 그대로 받았다.


 
             화무결의 기지(機智) 
 
 
한 발이 아니고 두 다리로 힘껏 서있는다 해도 그것은 당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군중들은 그가 필시 패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열 여덟 사나이가 힘을 합하여 밀었으나 화무결은 넘어지지도 않았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의 몸은 더욱 땅속으로 묻혀갔다.
열 여덟 명의 사나이들이 용을 쓰면 쓸수록 그의 몸은 더욱 땅 속으로 박혀들어 갔다.
열 여덟 명 사나이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화무결의 다리는 거의 두 자나 땅 속에 묻혔다. 그의 다리가 비록 강철로 만들어졌다 해도
돌 속으로 박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런 힘도 쓰지 않은 것 같았으며 마치
모래 위에 서있는 것 같기도 했다.
군중들은 모두 마법을 보는 것처럼 넋을 잃었다.
소어아도 역시 넋을 잃고 말았다.
화무결이 사용하는 방법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탄복을 시키기에 충분했다.
만약 화무결이 등을 산에 기댔다면 모용자매가 트집을 잡지는 않았겠지만 사방의 관중들은
크게 실망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화무결의 사람됨을 보는 눈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열 여덟 명의 사나이는 돌연 땅에 쓰러지면서 몸 속의 힘이 모두 빠져버린 듯 일어나지도
못했다.
화무결은 이미 이화접옥의 무술로 교묘하게 그들의 힘을 방향을 돌려 밑으로 처지게 했다.
그들은 화무결을 밀고 있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땅을 밀고 있었던 것이다.
군중들은 그것의 오묘함을 몰랐다. 그러나 모르면 모를수록 화무결의 무술에 대해서 더욱
탄복했다. 우뢰와 같은 갈채가 곳곳에서 터졌다.
모용구매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러나 화무결은 미소를 띠면서 입을 열었다.

"작은 재주라 부끄럽소?"

모용산산은 나오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웃어 보였다.

"공자의 무공은 과연 불가사의하군요. 우리는 탄복했소."

소선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첫번째의 일은 당신이 성공했다치고 이젠 두번째의 일이 기다리고 있소."

화무결은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땅에서 뽑았다.
군중들의 갈채 소리는 한참 후에야 사라졌다. 그러나 마차 속에서는 여전히 박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소어아의 가슴은 아파왔다.
그 역시 비록 화무결의 무공에 대해서 탄복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박수소리는 그의 가슴을 찢어놓는 듯 했다.
화무결이 다시 말했다.

"그 두번째의 일은 무엇이오? 부인께서는 분부를 하시지요."

모용산산은 눈동자를 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경성에 점심을 파는 집이 있는데 소소주라고 하오. 공자께선 알고 계신지요? 그
소소주에서 만든 팔보반, 천충고는 정말 맛이 좋은 음식들이오."

이때 그녀가 돌연 소소주의 음식 종류를 말하자 군중들은 그녀의 뜻을 몰라 모두 다
이상하게 여겼다.
화무결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나에게는 두 사람의 친구가 있지요. 그들 모두가 이 두 가지 음식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을 들었오."

소어아는 자연히 그가 말하는 친구가 누구와 누구인지를 알고, 철심난이 그와 같이
팔보반을 먹는 모양을 생각하니 극도로 화가 치밀었다.
모용산이 조용히 애교있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음식을 좋아하고 있으며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는데 공자께서 좀
구해줄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했다. 화무결더러 점심을 구해오라 하다니? 이것이 바로
그녀들이 화무결에게 하라는 두번째의 일일까? 이 일은 너무 도리에 맞지 않았고 또 너무
쉬운 일이 아닌까?
화무결도 마음 속으로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종래에 거절을
하지 못해온 그였다. 그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결국 웃으면서 답했다.

"제가 만약에 부인들을 그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영광이겠오!"

모용산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음식은 따뜻할 때 먹어야 하오."

화무결이 한참 생각한 뒤에 그녀들에게 말했다.

"제가 사 가지고 올 때는 필시 더운 것일 거요."

모용산이 더욱 달콤하게 웃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두 발을 땅에 닿게 하지 않고 다녀올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이 나오자 군중들은 난점이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두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안경성에 갔다 올 수 있단 말인가!
안경성은 비록 멀지는 않아도 결코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화무결의 경공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한 번에 그토록 나를 수는 없었다.
군중들은 화무결이 가볍게 응답하는 것을 보자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일은 또 하나의 계교였다. 그러나 화무결이 하지 못하고 모용산이 하게 된다면 화무결의
사람됨으로써 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화무결이 돌연 신발을 벗고 웃으며 말했다.

"나의 양발이 땅에 닿는가 그렇지 않는가의 여부는 이 버선으로 알 수가 있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이미 연기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는 마차를 타지 않고 말도 타지도 않았지만 두 개의 나무가지를 양손에 나누어 들고
왼손의 가지로 땅을 접하면서 이미 석장 밖으로 날았다. 다시 오른손의 가지로 접하니
사람은 이미 여섯장 밖으로 날라갔다. 멀리서 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잠깐만 기다리시오. 제가 즉각 올 테니."

그는 한 손으로 한기회수의 경공으로 절정의 무술을 전개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경공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잠깐의 시간으로 수십 리를 왔다
갔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중들은 모두 수근거리며 화무결이 한 손으로 견딜 수 있는지 의문을 나타내기도 했다.
모용자매의 얼굴은 벌써 웃음을 볼 수 없었다. 이미 긴장에 싸여 있었다.
의논이 분분하던 중에 시간은 무척 빨리 지나간 것 같이 느껴졌다.
잠시 후 멀리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더니 화무결이 이미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입에는
물건이 물려 있었던 것이다.
한쌍의 버선은 여전히 흙이 묻지 않은 채 깨끗한 그대로였다.
군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면서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화공자는 과연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안경성을 갔다왔구나."

환호성 속에 화무결은 몸을 뒤짚으며 벗었던 신발을 신었다. 곧이어 물건을 모용산의
앞으로 내밀며 빙그레 웃었다.

"제가 명령대로 가지고 왔으니 부인께서는 식기 전에 잡수시지요."

모용산이 억지 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공자, 고맙소!"

그녀는 포장을 뜯었다. 그 속에는 과연 뜨거운 팔보반과 천충고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잡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이 달고 향기로운 천충고가 그녀의 입속에서는 매우 썼다.
화무결이 사용한 것은 영리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그가 비록 영리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끝내는 탄복을 했다.
그는 첫번째의 방법으로 그의 놀라운 내력을 나타냈고, 두번째의 방법으로 그의 경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가 만약에 이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군중들은 비단 칭찬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를 욕했을 것이다.
소어아는 억지로 쓴웃음을 지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 때때로 사람의 머리는 영리하지 말아야 돼. 이 모용자매는 너무 영리해서 남을
놀려볼까 하였으나 결국 손해 보는 측은 그들 자신이야.)

그는 비록 모용자매를 이야기하지만 그 자신도 그렇다고 느꼈다.
모용산산은 억지로 천충고를 먹었지만 정말 그렇게 맛있던 음식이 이렇게 먹기 어려울지는
몰랐다.
화무결은 안색이 변하지 않고 있다가 그녀가 다 먹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럼 세번째의 일은?"

성미가 급한 소선녀는 참을 수가 없어서 큰소리로 외쳤다.

"하나의 집이 있는데 문은 닫혀 있어요. 당신은 몸을 위 아래로 문에 부딪치지 않고 또
다른 물건으로도 부딪치지 말고 들어갈 수 있겠오?"

이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더 어려운 일이라도 화무결은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소어아는 몰래 웃으면서 중얼댔다.

"이 세번째의 일은 두번째의 일보다 더 어려운데. 어떻게 손을 문에 대지 않고 문을 열 수
있단 말인가?"

화무결이 한참 동안 침울하게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여기에는 집이 없는데 이 마차는......."

모용쌍이 말을 받았다.

"마차도 좋아요. 당신의 손이 마차의 문을 건드리지 않고 마차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당신이 이긴 것으로 하겠어요."

화무결은 눈길을 모용산 쪽으로 돌리면서 다짐하듯 물었다.

"정말 그렇소?"

모용산이 가만히 계산을 하는 듯 해보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마차와 집은 한 가지에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화무결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갔다.

"내가 이 일을 해내면 부인은 다른 의견이 없겠죠?"

모용산산은 결정한 듯 말했다.

"공자께서 일을 할 수 있으면 우리들은 물러가겠소."
"정 그렇다면 부인께선 보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마차쪽으로 향했다.
소어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자식이 격산타우(隔山打牛)의 벽공장력으로 마차 문을 열려는 것일까?)

화무결이 마차 앞으로 다가오더니 돌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鐵) 아가씨, 문을 여시오!"

마차 속에서 곧이어 은방울 같은 웃음을 웃으면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네 그러지요."

군중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겼다. 그리고는 드디어 크게 웃었다. 소어아까지도 참지 못하여
웃어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은방울 같은 목소리가 누구인지 알자마자 더 이상
웃지를 못했다.
모용자매는 화무결이 마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화무결은 마차 속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부인들의 규칙을 위반하지는 않았소. 이미 마차 속에 들어왔으니 부인께서는 내가
승리한 것으로 하겠지요?"

모용자매는 넋을 잃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군중들은 모두 웃어버렸다.
화무결이 사용한 방법은 모용자매보다도 또 소어아보다도 더욱 영리했다.
그가 이러한 방법을 마지막으로 사용하자 군중들은 비록 그를 경멸도 실망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의 기지에 대해 탄복하는 한편 환호성을 올리기도 했다.

"화공자는 당연히 이겼으니 그 누구도 할 말이 없지!"

모용자매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용쌍은 다시 모용산을 바라보았다.
모용산산은 억지 웃음을 지을 뿐 아무 방법도 없는 듯 보였다.
그녀가 발을 딛으면서 가마에 올라 타자 모용쌍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소선녀는 강별학을 바라본 후 한마디를 던졌다.

"당신은 만족하지 마시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릴 테니."

강별학은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선녀도 고개를 돌렸다. 열 여덟 명의 사나이는 세 채의 큰 가마와 작은 가마를 들고
급히 산곡을 빠져나갔다.
강별학이 그제서야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화형(花兄)의 기지와 무술은 과연 둘도 없으니 제가 정말 탄복을 했오!"

군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화무결은 손을 들어 인사를 하면서 마차에 올랐다.
소어아는 마차를 바라보면서 마차 속의 철심난을 생각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파왔다.
한참 후 그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내가 왜 그녀 때문에 이렇게 가슴이 아파해야 하나? 이건 확실히 이상한데?"

철심난이 그의 곁에 있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남과 함께 다니게 되자
그는 그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 되었다.
그 자신도 철심난이 어찌 이렇게 중요하게 여겨지는지 이상스러웠다.
그는 전에 절대로 그녀가 자기를 이토록 가슴 아프게 할 줄은 몰랐다.
그는 마치 자기가 바보인 것으로 느꼈고 미친 것 같이도 생각했다.
그는 세상에 자기와 같은 병신이 있는 줄 몰랐다. 병신도 가지가지지만.
병신 같은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가 얻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애를 태운다. 그러나 막상 얻고
나서는 그 즐거움을 모른다. 그러다가 잃어버릴 때는 다시 후회하는 게 통상이었다.
이것도 세상 사람들의 통곡이 쾌락보다 많은 원인인가!
소어아는 한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돌연 사람들 틈에서 두 명의 키가 크고 뚱뚱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제서야 그는 도교교의 일이 생각났다.
그는 나무에서 내려와 나구(羅九) 구양정의 어깨를 가만히 쳤다.
구양정이 고개를 돌리다가 안색이 변해버렸다.
그는 수시로 남을 조심스럽게 방비해왔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항상 긴장된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소어아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당신은 항상 이렇게 긴장하는 데도 마르지 않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군."

구양정이 그를 알아본 후에야 쓴웃음을 지었다.

"미인도 없고 하니 자연히 매일 먹기만 하지. 그렇게 되면 살만 찌는 것도 당연하지 않소?"

소어아는 눈길을 돌리며 웃고 나서 말했다.

"두 분이 벌써부터 내가 그 아가씨를 데려간 줄 알고 있었군."

구양정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신 외에 그녀가 누구를 따라 가겠소?"

구양정도 따라 웃었다.

"그 계집에게도 흥미가 있어서 그녀를 데리고 갔는 줄 아는 데요."

그러나 두 사람은 이번에는 계산을 잘못했다. 더욱이 그 계집애가 도교교인지 모르고 그
계집애도 소어아가 데리고 간줄 알았다.
소어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좋지. 두 개는 하나보다 좋고."

구양정은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렇소. 당신 말이 맞소. 그 말을 모든 사람들이 기억해야 하오."

세 사람은 계곡을 걸어 나와 어느덧 도교교의 마차 앞까지 다다랐다.
소어아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가시오. 다음에 다시 봅시다."

구양정이 뜻있는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형씨께서는 다시 여인을 만나러 가시는 것이 아니오?"
"혹시......."

그는 유의 무의간에 마차쪽으로 가면서 다시 말했다.

"두 분은 왜 안가시오?"

구양정이 눈동자를 굴리면서 다시금 웃었다.

"우리는 할 일이 없으니 형씨와 이야기를 하고 싶소!"

소어아는 일부러 애타는 듯한 표정을 보이며 대답했다.

"난 다른 곳으로 가야하오. 두 분......."

구양당이 큰소리로 말을 받았다.

"딴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구양정이 마차로 달려와서 문을 열었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박수를 쳤다.

"나의 예상이 과연 맞군. 가인(佳人)이 여기에 있었어."

구양정은 음탕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옛말에 복숭아를 줬으면 자두라도 받으라 했소. 형씨는 나의 복숭아를 먹었으니 자두라도
내어 놓으시오."

형제 두 사람은 모두 마차에 올랐다.
구양정이 웃으면서 말했다.

"형씨도 올라 오시오."

구양당도 따라 웃었다.

"우리 형제는 두들겨 팬다 해도 가지 않을 거요."

소어아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내심 웃고 있었다.

(죽어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오늘은 필시 큰 손해를 볼 것이다.)

그는 못 이기는 척하며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마차에 올랐다. 타자마자 탄식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금 당신들을 피할 걸 그랬어. 내가 왜 인사를 했지...... 아 너무 재미에
빠져서 그랬나?"

마차가 서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양 형제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교교는 고개를 숙이고 마치 부끄러운 것 같이 몸을 꼬았다.
구양정은 다시 크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하루 사이인데 아가씨가 어찌 이렇게 더 예뻐졌지?"

구양당도 한마디 거들었다.

"비가 오고나면 꽃이 더욱 예뻐지지. 이런 도리도 모르나!"

도교교는 시종 수줍은 듯이 앉아 있었다.
소어아도 도교교가 어떻게 손을 쓸지 궁금해하며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었다.
마차는 갈수록 속도를 더해가며 인적을 빠져나가서 황야의 너른 교외를 달리고 있었다.
구양정은 얼굴을 찌뿌리며 조급한 기색을 나타냈다.

"형씨의 보금자리는 어찌 이토록 멀지?"

소어아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두를 먹고 싶으면 좀 참아야지."

이번에는 구양당이 끼어들었다.

"그건 그렇지만......."

이때 도교교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애교있게 웃었다.

"다만 그 자두는 맛이 이상해서 당신들은 잘 먹지 못할 거예요."

구양 형제는 동시에 놀라면서 무엇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러나 구양정이 곧 껄껄 웃었다.

"아가씨는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잘하게 되었지?"

도교교는 이제까지 부끄러워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맹랑하게 말을 받았다.

"벌써부터죠. 이미 이십 년이 되었어요."

구양 형제의 안색이 변했고 은근히 차문을 힐끔 바라보며 뛰어내릴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소어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도 고모는 어찌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졌지. 일을 그르칠 텐데.......)

이때 '푸'하는 소리가 나면서 마차 좌석 밑에서 돌연 네 개의 손이 뻗쳐 나왔다.
구양 형제는 꿈 속에서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좁은 마차 안이라 앞에 있는 사람이
돌연 달려든다 해도 방비하기가 어려운데 엉덩이 밑에서 손이 뻗혀 나오다니!
그들의 양팔은 이미 네 개의 손에 잡혔고 그 손은 굵은 쇠줄로 조이듯 둘을 꼼짝 못하게
해버렸다.
구양정이 극도로 놀라서 떨리는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형...... 형씨 당신이...... 어찌 이렇게?"

소어아도 놀라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나에게 묻지 마시오."

구양정은 도교교를 바라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이건 아가씨의 행위요?"

도교교는 살살대며 말했다.

"내가 아니면 누구냐?"

그녀는 누가 말을 물어오면 '예' 혹은 '아니오'라는 대답을 하지않고 오히려 반문하는
버릇이 있었다.
구양 형제는 말투를 듣자 얼굴에 혈색이 조금도 남지 않을 만큼 창백해졌다.
구양당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지금도 나를 모른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야."
"나...... 우리 형제가 어찌 아가씨를 알겠소?"
"나를 모른다면 왜 그토록 무서워하지?"

구양정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무서워? 누가 누구를 무서워해......."

구양당도 껄껄 웃으면서 농을 걸기 시작했다.

"우리 형제는 아가씨가 장난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소!"

도교교는 탄식을 했다.

"구양정, 구양당, 시치미를 떼봐야 소용없어."

구양정은 정말로 시치미를 뗐다.

"구양정이 누구요?......."

구양당 역시 딱 잡아뗐다.

"우리가 듣기론 그들이 바싹 마른 사람이던데...... 하하...... 하하......."

그는 크게 웃고 싶었다. 그러나 긴장으로 얼굴의 근육이 딱딱해져서 크게 웃을 수가 없었다.
도교교는 싸늘하게 그들을 바라보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구양당은 몇 번인가를 건성으로 웃고난 후 구양정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구양정인가?"

구양정이 대꾸했다.

"내가 만약에 구양정이면 너는 구양당이겠지."
"알고보니 우리가 구양정, 구양당이군...... 하하 재미있어."
"마른 사람이 이렇게 뚱뚱하게 되어 버릴 수도 있나? 원참!"

도교교는 싸늘하게 쏘아 붙였다.

"뚱뚱해지는 약이라도 먹은 모양이지."
"그렇소. 우리 형제는 정말 그런 약을 먹었을 거요. 하하."

도교교는 싸늘한 눈빛을 내며 말했다.

"지금은 때가 됐어. 너희들이 약을 토할 시기가 말이야."
"이거...... 하하 하하!"

구양당이 구양정의 말을 받았다.

"그거...... 하하 하하."

이것을 본 소어아는 그들이 무슨 나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이때 돌연 마차 좌석 밑에서 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구양 형제는 이십 년 동안 하얗게 늙었고 뚱뚱하게 되기도 했지만 '하하하'고 웃는 법도
배웠군. 그들을 내 제자로 삼는 게 어때?"

심술궂은 목소리가 다시 뒤를 이었다.

"정말 저 놈들을 제자로 삼게 되면 내 바지까지 빼앗기고 엉덩이를 드러낸 채 길거리로
나앉게 될 것이오. 하하."

형제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 구양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두 분 형님을 엉덩이로 누르게 됐군요. 정말 죄송스럽소."

백개심이 자리 밑에서 그의 독특한 웃음을 지어가며 말했다.

"그건 상관없어! 도 누님은 이 속을 내 집 침대보다 잘 꾸며 놓았지. 술도 있고 고기도
있으니......."

합합아도 다시 따라 웃으면서 말했다.

"다만 너희들의 큰 엉덩이가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니 구역질이 나서 먹지
못할 뿐이야."

구양당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두 분이 손을 놓지 않으면 저희가 일어 설 수가 없고 일어서지를 못하면 두 분이 밑에서
불편하게 있어야만 하니...... 도 누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도교교가 재미있다는 듯 말을 받았다.

"간단하지? 너희들이 먹은 약을 토하면 손을 놓을 것이야."

백개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면 죽던가."

합합아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하, 그거 좋은 생각인데."

구양정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도 누님께서 맡긴 물건은 벌써부터 악인곡에 갖다 줄 생각이었는데, 다만......."

도교교는 싸늘하게 비웃으며 말했다.

"다만 물건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그렇지?"

구양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도 누님의 말이 틀림이 없소. 당신들이 입곡한 이듬해에 그 물건들을 몽땅 남에게
빼앗겼소. 우리는 누님을 노하게 할까봐 그래서...... 그래서......."

구양당이 말끝을 이어 받았다.

"그래서 피해다니며 나타나지를 못했소."

도교교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심지어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누가 빼앗아 갔지?"

구양정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노중달이오."

구양당도 옆에서 거들었다.

바로 그 남천 대협이라는 사람이오. 바로 두살 형님이 처음 강호에 들어섰을 때 팔을
자르려고 했던 그 자식이지요."

도교교가 갑자기 깔깔 웃었다.

"합형, 이놈들의 거짓말이 재미있지 않소?"

합합아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과연 그렇군. 우리가 노중달에게 묻지 못할 것을 알고는......."

백개심이 히히 하며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일은 증명하기가 어렵지."

구양정이 큰소리로 외치다시피 말했다.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진실이오."

구양당의 언성이 높아졌다.

"만약에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으면 하늘이 나를 죽일 것이고 그리고 다음 세대는 돼지로
태어날 것이오."

도교교는 고개를 돌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합합아와 백개심 두 사람도 잠잠했다.
구양 형제는 번갈아 한마디씩 입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변명을 했지만 도교교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는 듯 창 밖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돌연 마차가 멈추더니 창 밖에서 한 사람이 얼굴을 안으로 들이 밀었다.
그 얼굴은 매우 얼음처럼 싸늘하고 투명해 보였다.
구양 형제는 그 얼굴을 보자 마치 머리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져 온 몸을 벌벌 떨었다.
구양정이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알고보니...... 두살 형님도 여기네 계셨군요!"
 


             다시 모인 사람들 
 
 
구양 형제는 조금 전까지도 열심히 변명을 했었으나 두살의 얼굴을 보자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소어아는 혈수 두살을 보자 웬지 모르게 친밀한 느낌이 들고 반가와 인사를 올렸다.

"두 대숙, 안녕하셨습니까?"
"음, 잘 있었는가?"

소어아를 바라보는 그 순간만은 그의 눈길 속에도 부드러움이 담뿍 담겨 있었다. 그러나
눈길을 구양 형제의 몸으로 옮겼을 때는 살기가 철철 넘쳐 몸이 오싹할 정도로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탁'하는 소리가 나며 쇠뭉치와 같은 것이 마차의 창문 위에 걸쳐졌다. 바로 혈수 두살의
손이었다.
그는 마차 문을 연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구양당의 얼굴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이십여 차례나 주먹질을 하고 나서야 그는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날 알아 보겠지?"

구양당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웃음을 억지로 지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동...... 동생이 어찌 두 형님을 몰라 보겠소?"

두살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알아본다는 말이지!"

두살은 구양 형제의 오른쪽 무릎의 독비혈을 짚고는 구양정을 몇대 후려쳤다. 그리고는
마차에서 내리면서 무서운 소리로 외쳤다.

"내려와!"
"동...... 동생의 다리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데 어찌 내려 가겠소?"
"다리를 쓰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내려 와야지."

구양 형제는 서로 바라본 후 얌전히 기어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교교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뜨렸다.

"역시 두 노대는 수단이 좋군. 구양 형제가 꼼짝하지 못하고 쥐가 고양이를 본 것 처럼
벌벌 기니 말이야."

합합아가 마차 밑에서 나오며 끼어들었다.

"흉악하고 교활한 사람일수록 내가 상대할 방법이 있지."

마차는 황야의 한 저택에 멈추어져 있었다. 마차를 몰던 사람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합합아는 소어아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어왔다.

"하하, 그간 얼마나 많은 여자를 유혹하고 죽게 했지?"

소어아는 웃으며 대꾸했다.

"아직 삼백 명도 못되요."

합합아는 그의 어깨를 치며 크게 웃었다.

"아직 멀었군. 금후에는 더욱 노력을 해!"
"더 유혹을 계속하면 나도 죽고 말 게요?"

소어아는 말을 하면서 돌연 다리를 뻗어 뒤에 걸어 오던 백개심을 걸어 넘어뜨렸다.
백개심은 곧 벌떡 일어나면서 안색도 변하지 않은 채 그 독특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결코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구나."
"아직도 멀었으니 더 두고 보시지."

백개심은 머리를 매만지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되면 난 견딜 수가 없는데. 더 하다간 나의 목숨을 앗아가겠는 걸!"

그들은 모두 황야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낡은 대청 위엔 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무엇인가가
끓고 있었다.
한 사람이 불가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조금 전에 마차를 몰고 왔던 사람 같았다.
인피가면을 했는지 이렇게 더운 날씨에 불가에 앉아 있는데도 이마에 한 방울의 땀도
보이질 않았다.
사람들은 들어 오면서도 마치 그를 보지 못한 척 했다.
도교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어아야, 빨리 이 대숙을 만나 보고 싶지 않느냐? 요 몇 년 사이에 그는 매일 같이 너를
생각했었지. 어쩌면 그는 너의 살을 먹고 싶어서 그러는지도 몰라."

소어아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한 번 인사도 못갔으니 이 대숙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합합아가 끼어들었다.

"그건 몰라도 적어도 오늘 만큼은 화가 나있지...... 하하 도교교가 그에게는 마차를 몰게
하고 백씨는 마차에 앉게 했으니 그는 가슴 속이 터질 것만 같았을 거야."

소어아는 걸어 가면서 한바탕 웃었다.

"이 대숙, 정말 화를 내지 마세요. 사람이 화를 내면 고기가 쉬어요."

이대취는 참을 수 없었던지 웃기 시작했다. 그는 소어아의 손을 잡으면서 입을 열었다.

"너 이자식아, 아직 그 말을 기억하고 있구나."
"그것이야 말로 진리인데 내가 어찌 잊겠어요?"

이때 구양 형제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온몸과 얼굴이
흙투성이였고 두 마리의 큰 돼지 같았다.
혈수 두살은 싸늘한 얼굴로 그들의 뒤를 따라오면서 그들이 느려지기만 하면 옆구리를 한
번씩 걷어찼다. 두 사람을 대하는 것이 집에서 키우는 집 짐승을 다루는 것 보다도
못하였다.

"이십 년 이래 처음으로 우리 형제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군. 크게 경축하는 연회라도
열어야지."

도교교는 껄껄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강호에서 우리가 모두 모였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놀라서 간이 떨어질 거야."

이대취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간이 떨어져 버리면 안 되지. 간이 얼마나 맛있는데."

소어아는 가만히 그들을 보며 자기 어린시절을 회상하자 마음 속에 아련한 감정이
가득찼다.
이 사람들은 비록 악인들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눈에는 사람마다 친숙한 얼굴이었다.
소어아는 기뻤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다시 강호에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해칠 생각을 하자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도교교가 침묵을 깨뜨렸다.

"음 노구만 아직 도착을 안했군. 무슨 일이 생겼나? 왜 아직도 오질 않을까?"

이대취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사람은 일을 할 때 극히 비밀스럽게 하지. 어쩌면 벌써 와 있는지도 몰라. 혹시 지금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때 구양정이 땅을 기면서 웃음 섞인 말로 이야기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저도 여러 형님들이 모인 것을 보니 매우 기쁘오."

구양당 역시 급히 웃으면서 구양정의 말에 한마디를 더 부언했다.

"정말 술을 마시고 경축을 해야겠군요."
"그래! 하지만 우리 돈을 너희가 다 가로챘으니 어찌 술을 살 여유가 있겠나?"

도교교의 말이었다.
구양정이 그 말을 황급히 받았다.

"도 누님이 동생을 놓아주시기만 하면 동생은 즉각 그 노씨를 찾아서 목숨을 걸고라도
물건을 빼앗아 오겠소."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살이 그의 팔을 잡어 비틀었다.

"두형, 나는 거짓말을 안 했소. 제발 살려주시오."

두살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싸늘했다.

"물건이 어디에 있지, 말해봐?"
"정말...... 정말 노중달이......."

두살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다시 후려쳤다. 그의 입에서는 '달'이란 소리와 함께 피가
쏟아졌고 그 속에는 세 개의 이빨이 함께 섞여 있었다.
도교교는 화로에 꽂혀 있던 벌겋게 단 쇠젓가락을 뽑아 들고 가볍게 구양당의 목에 대며
애교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두형처럼 수단이 악독하지 못해서 너를 때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네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불덩어리의 맛을 좀 봐야지."

구양당은 땅을 뒹굴다가 이대취의 앞으로 굴러 애원을 했다.

"제가 말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이형, 당신...... 옛날의 친분을 보아서라도 제발 좀 봐
주시오."

이대취는 탄식을 했다.

"도 누나가 너를 아프게 했는가?"
"아파...... 죽겠오."
"어디가 아픈가?"
"온 몸이 아프오. 더욱이...... 더욱이 목은......."

이대취는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가만히 매만졌다.

"여긴가?"

그의 목소리에는 농담기가 담뿍 들어 있었다.
구양당은 쓴웃음을 지었다.

"음...... 네...... 바로 거기요."
"좋아, 내가 그 살을 베어버리지. 그러면 아프지 않을 거야."

구양당의 놀라움은 대단했다. 그는 말조차 제대로 잊지 못했다.

"이...... 이형, 당신이......."

구양당이 더듬거리는 사이 이대취는 벌써 신발 속에서 작은 칼을 빼어 들고는 구양당의
목에서 살점을 도려 내었다. 그는 그 살점을 불 위에 올려 놓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불고기는 소금과 후추가루를 치면 맛이 좋아지지. 그런데 오늘은 후추가 없어."

그는 옆에 놓인 단지 속에서 소금을 꺼내서 살에다 뿌린 뒤 입속에 넣고 우물거리며
씹었다.
소어아는 살점이 불에 타는 소리를 듣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더구나 먹는 소리를
듣고는 토하고 싶었다.
백개심, 도교교도 모두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왝'하는 소리가 나면서 구양당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 몸의 살점이 남에게 먹히는
것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대취가 또 다시 중얼거렸다.

"요 몇 년 사이에 너희들은 무술을 열심히 연마했구나. 살점이 탄탄한 것이 탄력이 있어."

구양당의 얼굴은 피가 범벅인데다 토한 것까지 묻어 있어서 사람의 모습 같지도 않았다.
그는 짐승처럼 땅을 기면서 통곡을 했다.
덩치가 큰 남자가 땅을 기면서 우는 모습은 정말 보기가 흉했다.
이대취는 고개를 돌려 이번엔 구양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도 몸이 아프냐?"

구양정이 겁에 질려 우물거렸다.

"아...... 아프지 않소. 조금도 아프지 않소."

이대취는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가련한 듯이 말했다.

"정말 불쌍하군. 노대가 너를 이토록 만들었으니 어찌 아프지 않겠어?"

구양정이 파리하게 질렸다.

"정말 아프지 않소......."

이때 두살이 다가서더니 발로 그의 얼굴을 걷어차며 싸늘하게 말했다.

"지금은 아프겠지?"

구양정은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데다 너무 아파서 말을 하지도 못했다.
이대취가 싱긋 웃었다.

"지금은 필시 아플 테니 내가 아프지 않게 해주지!"

그는 다시 칼로 그의 얼굴에서 살점을 베어 낸 후 불에다 구워 먹으면서 말했다.

"이상한데. 이 고기는 돼지 간이 아닌데 어째서 돼지 간 냄새가 나지...... 부어 오른 살은
맛이 없구나. 네 놈은 요즘 몸이 안 좋은 모양인데."

소어아는 분명히 이 구양 형제가 누구보다도 악한 줄은 알고 있었으나 그들의 모습을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구양정이 소리쳤다.

"말을 하겠오. 그 물건들은 아직 건재하오. 노중달은 손을 대지도 않았오. 모두
거짓말이었으니 용서하시오."

소어아는 탄식을 하며 중얼거렸다.

(말을 할 바엔 왜 일찍 말을 하지 않고 꼭 남이 이런 방법으로 상대하게 하고야 마는가!)

도교교도 그제서야 웃었다.
두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물건이 건재하다면 어디에 있지?"

구양정이 떨리는 소리로 말을 받았다.

"말을 한 후에 우리를 죽이지는 않겠소?"

합합아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하하, 우리는 본래 형제와 같은데 어찌 너희들을 죽이겠느냐?"

그러나 구양당은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두 노대가 보증을 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소."

혈수 두살이란 사람은 비록 악한 사람이었지만 말을 하면 꼭 실천을 하는 사람이었고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두살이 싸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직하게 말을 하면 절대로 너의 목숨은 다치지 않겠다."

구양정은 안심이 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물건들은 바로 구산의 어느 동굴에다......."

구양당이 급히 말을 받았다.

"제가 지도를 그릴 수 있소."

옆에 있던 이대취가 그의 어깨를 치며 탄식을 했다.

"진작 말을 했더라면 너의 고기를 먹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야."

잠시 후 지도가 완성되자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손을 동시에 내밀었다. '퍽 퍽' 하며
주먹이 오가다가는 네 쌍의 손이 동시에 거두어 졌다.
이대취는 분을 참아가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 지도는 두 노대에게 보관하도록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질 않으니까."
"그렇소. 두 노대 외에는 나도 안심을 할 수 없소."

그들이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동안 창 밖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합합아가 재빠르게 말했다.

"하하, 음 노구는 역시 영리한 사람이군. 우리는 한 나절의 시간을 허비했는데 그는 힘도
들이지 않고 알맹이를  빼먹으니......."
"나는 편했는 줄 알아?"

도교교가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왜, 귀신이라도 봤소?"
"방금 귀신을 만났지."
"무슨 귀신? 목 매어 죽은 귀신이라도 보았느냐?"

합합아의 조롱섞인 말이었다.
음구유는 눈길을 소어아의 몸으로 돌리며 돌연 음산하게 웃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소어아, 네가 말해 봐라. 무슨 귀신이지?"

소어아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웃었다.

"두 백부를 잡을 수 있는 귀신은 얼마 없지요. 그러나 두 백부를 무섭게 하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있죠."

도교교는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연남천을 만난 것이오?"
"그를 만났다면 여기에 올 수 있었겠오? 다만 멀리서 그를 봤을 뿐이야. 완전히 공력을
회복한 것 같았어."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이대취, 합합아, 백개심, 도교교 등 여러 사람들은 안색이 모두 변했다.
더욱이 도교교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한발 앞으로 나서며 재차 물었다.

"그...... 그는 어디로 갔지?"
"내가 어찌 어디로 갔는지 알겠어? 이쪽으로 오는지도 모르지."

이 말이 떨어지자 천하에서 악명이 높은 십대악인들도 안절부절했다.
이대취가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여기는 확실히 오래 있을 곳이 못 돼. 빨리 가자."

합합아도 따라서 일어섰다.

"누구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탄복을 하겠어."

구양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 속에 끼어들었다.

"제발 부탁이오. 나도 데리고 가 주시오. 나...... 나는 연남천을 보고 싶지 않소."

백개심도 탄식했다.

"연남천...... 연남천, 그를 본다면 바로 제삿날이 되는 거야."

소어아는 이 광경을 보며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몰래 탄식을 했다.

(어떤 사람이든 연남천과 만나게 되면...... 아! 내가 비록 혼자 잘났다고 생각했지만 그와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나 연남천도 사람이다. 연남천이 할 수 있는 일을 강소어가
왜 못한단 말인가!)

이때 구양정의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피가 튕기더니 그의 한 팔과 하나의 다리가
도교교에 의해 날아가 버렸다.
구양당이 당황한 나머지 소리쳤다.

"두 노대, 당신...... 약속을 하지 않았소. 당신...... 당신......."

도교교가 웃으면서 그의 말에 대답했다.

"두 노대는 다만 너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고 했지 다른 것을 약속하지는 않았어!"

그녀는 말을 하면서 이번에는 구양당의 한 팔과 한 발도 짜르고는 단지 속의 흰설탕을
그들의 몸에 뿌렸다.
개미들이 그들의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구양당이 큰소리로 외쳤다.

"빨리 나를 죽이시오. 빨리!"
"두 노대가 너희를 죽이지 않겠다고 했는데 내가 어떻게 죽이겠어!'

도교교의 말에 구양정은 이를 부드득하며 갈았다.

"당신...... 당신은 악독하군. 정말로 악독한 수단이야!"

도교교는 껄껄웃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너의 손에 걸렸다면 몇 백 배나 더 악독하게 했을 걸."
 

소어아는 혼자 석양에 서 있었다.
도교교, 백개심, 이대취, 두살, 음구유는 모두 가버렸다. 그들은 모두 귀산으로 갔다. 그들은
소어아에게는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다.
소어아도 따라 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다만 그들의 마지막 말만을 기억했다.

"좀 조심 하거라. 연남천을 조심하고 강별학을 무너뜨려라.
우리를 따라 오면 불편도 많으니 그대로 지내거라. 금후에 우리가 찾아 오겠다."

소어아는 그들의 말을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마음은 돌연
연남천이라는 세 글자에 부풀어 있었다.
그의 몸에는 영웅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만 약간 식어 있었을 뿐이었는데 지금 또다시
연남천이 그의 피를 들끓게 만든 것이었다.

(연남천, 나는 왜 연남천을 따를 수 없을까? 왜 도교교에게 배웠을까? 이대취, 두살, 합합아,
음구유...... 왜 나는 연남천처럼 떳떳하게 적과 맞설 수가 없을까? 오히려 도교교와 이대취를
본받고 있으니...... 몰래 못된 짓이나 하고.)

구양 형제의 비참한 신음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소어아는 돌연 몸을 돌려서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양 형제는 피밭에 누워 있었다. 개미들이 그들의 몸에 새까맣게 붙어 있었다.
그들 몸의 고통은 정말 형용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들은 소어아가 온 것을 보자 떨리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발 부탁이오. 나를 죽이면 감사하겠소."

소어아는 탄식을 하면서 두 사람을 우물가로 엎고 가 깨끗이 목욕을 시켜 주었다.
구양 형제는 소어아가 그들을 구하러 올 줄은 몰랐다. 그들의 눈초리 속에는 놀라움과
감격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소어아는 중얼거렸다.

"내가 돌연 이렇게 자비롭게 된 것을 이상히 여기는가? 난 비록 너희들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너희들을 처분하는 것은 너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양정이 그를 바라보면서 못 믿겠다는 눈치를 보였다.

"당신...... 당신이 나를 구한다면 나는...... 필시 보답을 하겠소."
"네가 살 수 있다면 내가 구해주지. 그러나 보답은 필요 없어!"

구양정이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 보물은 귀산에 있지 않소."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자 소어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귀산에 있지 않다고?"

구양정은 그 어느 누가 보아도 음침한 얼굴이었는데 그 얼굴에 쓴웃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 못했을 거요."

구양당은 아픔을 참느라고 입술을 떨고 있었지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만 한 번 헛걸음을 하게 되는 것만은 아니야."

구양정이 역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들이 산에서 돌아 온다고 해도 적어도 목숨의 반은 귀산에 두고 와야지."

소어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우리 형제가 말한 곳에는 보물이 없을 뿐더러 악마가 있지. 꿈속에서도 귀산에 악마가
숨어 있을지는 모를 거야."

구양당은 말을 잠시 끊었다가 이었다.

"그들은 연남천만 두려워 할 줄 알았지. 그러나 이 악마는 연남천보다 십 배는 더 무서워.
십대악인도 그와 비하면 어린애가 돼버리는 거지."
"내가 왜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을까?"
"네가 모르는 일은 아직도 많아."

구양정이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 악마를 만나면 그들의 비참함은 우리의 십 배나 더할 거야."

소어아는 고개를 저으면서 탄식을 했다.

"너희들은 죽어 가면서도 사람을 해치는구나!"

구양정은 눈 알을 몇 번 굴리더니 대답했다.

"우리는 분명히 그들이 우리를 살려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들을
사지(死地)로 가게 했지. 나 구양정은 바로 목숨을 걸어서도 이익을 봐야 하는 사람이
아니야?"

구양당 역시 웃음을 지었다.

"우리 두 사람 형제의 목숨으로 다섯 사람의 목숨과 바꾸는 것은 큰 이익이야. 나 구양당은
바로 죽어도 손해는 안 보는 거야."

이 두 사람은 죽음 직전인데도 이때의 웃음은 그토록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미
고통이나 생사의 문제는 완전히 잊어 버린 사람들 같았다.
소어아는 그들이 고통스러움을 참아가며 웃는 모습을 보자 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들이 분명 죽는 줄 알고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 죽어가는
것이군. 참으로 보기 드문 녀석들이야."

이 두 형제는 비록 웃고 있었지만 웃는 소리조차 점차로 미약해져 갔다.
구양당은 구양정에게 뒹굴어 와서 수근대기 시작했다.

"형, 우리 그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 곳을 이 자식에게 말할까?"
"이 자식은 천생에 좋은 놈이 아니야. 보물을 얻은 후 더욱 많은 사람을 해칠 놈이야.
우리가 죽은 뒤 이 자식이 우리의 보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구양당이 크게 웃었다.

"그래 그래. 형은 과연 현명한 사람이야."

그들은 웃으면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숨을 이어가기 조차 힘들어 보였다.
소어아는 탄식했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좋은 말을 한다던데 너희들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좋은 말을 하지
못하는구나."
"우리...... 우리는 살아서는 악인이고 죽어서도 악한 귀신이 될거야."

구양당이 한마디 하자 구양정이 말을 받았다.

"너에게 말하는데 사실 보물은...... 한구성 팔보리상가 골목의 오른쪽 세번째 노랑색의 문이
있는 집에 있어."

구양당이 간신히 웃음띤 얼굴로 거들었다.

"그들은 우리가 필시 보물을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숨겨 놓을 것으로 알겠지만 우리는
보물을 인적이 많은 곳에 숨겨 두었지. 그들은 꿈 속에서도 생각을 못할 거야."

두 사람의 말소리는 점차 약해졌다. 듣기 조차 어려워졌고 그들의 상처에서도 차츰 피가
말라갔다.
소어아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좋아, 귀신이 되고 싶다면 되어 보아라. 그러나 너희들은 잊지 말아라. 귀신이 되는 것도
많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구양 형제는 일제히 웃음을 그쳤다.
그들은 동시에 지옥에서의 고생을 상상했다.

(머리는 소, 얼굴은 말인 사나운 짐승, 또 칼과 같이 날카로운 산, 펄펄 끓는 기름
가마솥.......)

구양당이 돌연 소리쳤다.

"난 악한 귀신이 되고 싶지는 않아. 나는...... 나는 지옥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구양정은 방금까지도 크게 웃으며 호기를 부렸으나 지금은 이미 눈물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니 나를 용서해 주게."
"용서해 주고 싶지만 그렇다고 내가 염라대왕은 아니오."

구양당이 사경을 헤매며 중얼거렸다.

"제발 부탁이오. 우리의 보물로 좋은 일을 하시오."
"그렇다. 우리는 나쁜 일들을 너무 많이 했으니 너는 우리를 위해 대신 속죄할 기회를
가져라."

소어아는 두 형제를 번갈아가며 살피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탄식했다.

"이상하군. 많은 사람들이 몇 푼 돈으로 속죄를 할 수 있다고 믿는데 이거 너무 웃기는
것이 아닐까?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천당에는 모두 부자만 있겠군. 가난한 자들은 모두
지옥에 들어가야 하고."

구양 형제는 동시에 비참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제발 부탁이니 우리의 말을 들어주시오."
"너희들도 두려울 때가 있는 모양이구나."

구양정은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다시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계속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었다.
소어아는 고개를 돌리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만약 천하의 악인들이 모두 당신들의 모습을 본다면 나쁜 일을 할 마음을 고쳐먹을 거야."

그는 탄식을 하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너희들 말대로 하지. 지금에 와서 참회하는 것은 늦기는 했지만 그러나 하지 않은
것보다는 좋지. 이제 안심을 해라."


소어아는 얼굴을 깨끗이 씻고 하늘색의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는 비록 만 하루 동안 눈을 부치지 못했지만 정신은 또렷하고 맑았다. 다만 배가 좀
고팠을 뿐이었다.
그는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음식점인 장원루를 찾아서 배불리 식사를 했다.
사방에서 모여든 강호 친구들은 여전히 안경성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 장원루의 탁자도
반 이상을 무림 호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소어아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조춘형도 오늘밤에는 이 장원루에 오셨군."

조춘형이라고 불리운 사람도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강 대협께서 고맙게도 청첩을 보내 주셨소. 그래서 오늘 밤에는 나도 여기에 와서 한
잔하고 싶었오."

그가 말소리를 일부러 크게 하니 주위의 사람들은 자연히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눈초리에는 부러움과 질투가 섞여 있었다.
이렇게 되자 또 많은 사람들이 청첩장을 꺼내서 자랑을 하니 청첩장이 없는 사람은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해졌다.
강남 대협께서 손님을 초대하는데 자기의 이름이 없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소어아는 우스워 하면서도 기분이 나빴다.
강별학은 무슨 낯으로 손님을 초대했으며 또 초대된 손님들은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이건 정말 소어아에게는 웃기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창가의 탁자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돌연 놀라면서 말했다.

"강 대협이 잔치를 벌이자는 것은 화공자를 축하하려는 것인데 화공자는 강 대협의 체면도
보지 않고 가버리다니."

다른 한 사람이 또 말했다.

"화공자와 강 대협은 생사를 초월한 교제관계이고 화공자는 강 대협을 도왔는데 어찌 강
대협에게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을까?"

세번째의 손님이 웃으면서 말을 했다.

"오늘은 날씨도 청명하니 화공자는 필시 자기 미래의 처를 데리고 성 밖으로 구경을 갔을
거요. 정말 떠난 것은 아닐 것이오."

소어아도 창가로 와서는 밖을 내다 보았다.
동쪽에서 달려오는 하나의 마차 속에서 검은 머리의 여인을 볼 수가 있었다.
화무결은 흰 옷을 입고 잘 생긴 얼굴에 천리마를 타고 마차의 옆을 따라가면서 수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어아는 이런 광경을 바라보게 되자 넋을 잃고 말았다.
이때 이층의 사람들은 모두 창가로 몰려와 바라보고는 부러워하는 소리를 냈다.

"화공자, 재미가 좋소?"

화무결은 고개를 들고 담담히 웃어버렸다.
이층의 사람들은 자기를 보지 못할까봐서 서로 다투어 밖을 바라보는데 소어아는 그에게
발견될까 봐서 급히 고개를 숙였다.


 
             연남천의 출현(出現) 
 
 
화무결의 마차가 지나가자 이층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자리로 돌아 갔으나 소어아만은
여전히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서 중얼거렸다.

"내가 이렇게 피하는 것도 언제까지 일까? 그렇다면 나는 한평생 피해야만 한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을 하던 그는 갑자기 일어서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무슨 일을 생각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부모를 닮은
점이었다.
강풍과 화월노가 이런 성미가 아니었다면 어찌 위험을 무릅쓰고 이화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랴.
강씨 집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해야하고, 한 사람을 좋아하면 죽을
때까지 좋아하는 성미다. 강풍은 비록 겉으로는 다정하고 연약했으나 실은 강철보다 더욱
강경한 사람이었다.
이 점이 바로 소어아가 아버지를 닮은 점이다.
따뜻한 햇빛 속에서 행인들은 모두 노곤한 졸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거리에서 뛰어 가는 사람을 보자 이상함을 금치 못했다.
소어아는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도 상관하지 않고 빨리 달려가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화무결의 마차를 따라 잡았다.
마차는 이 때에 성을 막 나갈려고 하고 있었다. 화무결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종일 들어 앉아 있었으니 밖으로 나가 보는 것도 좋겠소......."

이 때 한 사람이 큰소리로 불렀다.

"화무결, 잠깐만!"

화무결은 약간 이맛살을 찡그리며 말고삐를 잡자 철심난이 창문사이로 고개를 약간
내밀었다. 소어아는 이미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소어아가 갑자기 나타나자 화무결은 크게 놀랐다.
화무결도 믿지 못할 정도였는데 철심난이 놀란 것은 더욱 당연했다.
소어아는 참으면서 철심난을 보지 않으려 했다. 다만 계속 화무결을 노려보면서 한바탕
웃고는 말을 했다.

"내가 너를 찾아올 줄은 몰랐었겠지. 그렇지?"
"정말 뜻밖의 일인데."

그는 그저 웃고 싶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너는 내가 자살하러 온줄 알겠지?"
"그렇다."

그의 말은 간단 명료했다.
소어아는 크게 웃었다.

"너는 정말 성실하군. 그러나 이것은 항상 그 누구도 너를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에 남을
속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화무결의 눈에서 빛이 번쩍했다.

"그렇다!"

다시 그의 말은 짧막했다.
화무결을 바라보면서 소어아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는지 큰소리로 대신했다.

"네가 정 그렇게 나를 죽이고 싶다면 나를 찾지 않고 내가 너를 찾기를 기다렸지?"
"나는 본래 너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으니 너를 찾을 필요는 없었지. 그러나 너를 본 이상
너를 죽여야 해."

철심난이 그때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돌연 마차 문을 열며 달려나왔다. 소어아의 앞을 막은
그녀는 곧 큰소리로 원망하듯 말했다.

"이번에는 그가 스스로 당신을 찾아왔으니 죽일 수는 없어요."

소어아는 한 손을 들어 그녀를 밀어버렸다.
화무결의 안색이 금시 변하면서 드디어는 입도 열지 못했다.
철심난은 소어아를 바라보면서 떨리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 당신은 왜 저를 이토록 험악하게 대하죠?"

소어아는 그녀에게 아는 체도 하지 않고 화무결을 노려볼 뿐이었다.

"이 난(蘭)이 너의 미혼처라고 들었는데 왜 나의 일에 간섭하는 거지? 나는 그녀를 알지도
못하는데!"

철심난은 입술을 힘차게 깨물었다. 피가 흐르고 눈에는 눈물 방울이 맺혔다.
소어아가 어떻게 그녀를 대하든 간에 그녀가 소어아를 본 이상 소어아는 채찍으로도 그녀를
쫓아버리지 못할 것이다.
화무결은 가슴이 아팠다.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네가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겠지?"

소어아는 하늘을 향해 크게 웃었다.

"내가 남의 구원이 필요하면 어찌 너를 찾아 오겠느냐?"

그는 돌연 웃음을 끝내고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마음 속으로 알고 있겠지.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죽기 위해서 너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 내가 왜 왔는가 궁금해 할 거야."
"바로 그 점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너는 나를 죽이려 해도 나를 죽이지는 못 해. 나 자신도 너 때문에 애태우고 있어.
더군다나 너는 나를 죽이려 하지만 내가 너를 죽이려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네가 나를 죽이지는 못할 걸."
"너는 내가 너를 죽이지 못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나도 네가 나를 죽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끌고 나간다면 이백 년 이전에는 네 말이 맞는 것인지 내 말이 맞는
것인지 모를 거야. 내 마음 속으로도 애태우고 있을 뿐이지. 너는 나보다 더욱 애타고 있을
거야. 그래서 오늘 온 것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화무결의 눈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강렬한 빛이었다.

"어떻게 해결 할 생각인가?"
"네가 한 곳을 정해라. 삼 개월 후에 내가 반드시 그곳에 가서 너와 사생 결단을 할 테다.
생사를 판가름 내기 전에는 그 누구도 달아나지는 못할 거야."

화무결이 담담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절대로 달아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겠지?"
"네가 약속하는 건가?"
"그렇다."

소어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말했다.

"그러나 삼 개월의 약속 날짜가 되기 전에는 네가 나를 보아도 못 본 척 해야 하며 나와
싸울 수도 없어!"

화무결은 침울하게 생각해볼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소어아가 재차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찾지 않으면 삼 개월 동안 너는 나를 찾지 못할 거야. 이 조건은 손해가 아닌데
왜 대답을 안 하지?"

화무결이 서서히 대꾸했다.

"네가 말한 조건에는 필시 무슨 함정이 있을 것이다."

소어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너는 그럼 약속하지 않겠다는 거냐?"

화무결은 돌연 말고삐를 고쳐 잡았다.

"삼 개월 후에는 내가 무한(武漢) 일대에 있을 테니까 나를 찾으면 돼."
"좋아. 네가 그토록 나를 믿으니 너에게 실망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철심난은 그가 자기를 바라보기를 기다렸으나 그러나 그는 시종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철심난은 여전히 넋을 읽고 서 있었다.
화무결은 조용히 말 위에 앉아 있을 뿐 그녀를 재촉하지도 않았다.
마차 옆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면서 이 마차가 왜 떠나지 않는가 하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그 누가 그들의 육체는 비록 거기에 있어도 그들의 마음은 벌써 먼 곳으로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랴!
얼마가 지났는지 몰라도 한참 후에야 철심난은 몸을 움직여 마차의 문을 열었다.
화무결이 여전히 마차에서 기다리는 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부터 뜻모를 감정이 우러나왔다.
마차를 몰던 사람은 이 한쌍의 남녀가 다투는 것도 모르고 그녀가 마차에 오르자 즉각
소리를 내어 마차를 성 밖으로 몰았다.
화무결은 철심난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 데리고 나왔는데, 지금 성을 나온 후 서로
마음을 풀기가 어려워졌다.
철심난은 계속 밖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림 같은 정경도 그녀의 눈에는 황무지처럼
보였다.
마차를 몰던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른 척 웃으면서 물었다.

"공자와 아가씨께선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화무결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손짓으로 앞을 가리킬 뿐이었다.
울창한 나무숲에는 꽃이 만발해 있었고 조그만 개울이 숲을 지나면서 초가을의 햇빛을 받아
은빛을 띠우고 있었다.
멀리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개울 옆에서 햇빛을 쬐고 있었고, 마차 곁에는 꽃향기와
새소리가 가득했고 땅은 진흙으로 덮여 담요를 펴놓은 것 같았다.
화무결은 말에서 내려 나무에 기대선 채 평화로운 풍경에 도취해 있었다. 그의 흰옷이
바람에 휘날릴 뿐 그 모습은 목석 같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철심난은 가볍게 마차 문을 열고 연약한 걸음으로 화무결의 곁으로 다가가 넋을 잃고
풍경에 취해있는 화무결에게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분명히 그 속에 어떤 함정이 있는 것을 알면서 왜 대답을 했지요?"

화무결은 길게 한숨을 내쉴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철심난은 재차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화무결은 고개를 저었다.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결국 하지 못하는 했다.
철심난은 그의 옆을 지나면서 꽃을 꺾었다. 그녀는 이 무명의 꽃을 들고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왜 말을 하지 않지요?"

화무결은 담담히 웃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묵이 때로는 말하는 것보다 좋을 때가 있지."

철심난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당신의 가슴 속에는 많은 할 말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는데요. 말해 보세요. 나는
언짢아 하지는 않으니까요."
"내마음 속의 말들은 그대가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겠오?"
"이 이 년 동안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을 보살폈고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나는 과거에 당신 같이 다정한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화무결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탄식을 했다.

"나의 일생 중에 그처럼 나를 나쁘게 대해주는 사람도 처음이에요. 그러나 나...... 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를 보면 아무 생각도 없어져요."

화무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 말은 나에게 할 필요가 없었어!"

철심난의 어깨가 떨었다.

"나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자세히 말을 하지 않으면 더욱 괴로워요. 더욱
미안한 느낌이 들거든요."

화무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어찌 그대의 책임인가? 나에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당신...... 왜 나를 원망 않죠? 왜 나를 이토록 좋게 대하는 거죠? 당신...... 당신......."

그녀는 나무에 기대며 울기 시작했다.
화무결은 결국 눈을 뜨고 다정히 그녀의 머리를 매만져 주려 했다.
그러나 손을 내밀다가 곧 거두면서 하늘을 향해 가볍게 탄식을 했다.

"날이 저물었으니 이제 어서 돌아갑시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그 남루한 차림의 사나이가 길게 허리를 편 후 중얼거렸다.

"젊은 나이에 그런 작은 일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면 어리석다. 너희들이 크면 세상에는
더욱 많은 고통스러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

화무결은 그에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으나 그가 중얼거리는 작은 소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그의 귀에 모두 들렸다.
철심난은 울음을 그치면서 고개를 들어 그 사나이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 남루한 차림의 사나이는 허리를 편 후 돌연 일어선다.
그가 일어서지 않았을 때는 몰랐으나 그가 일어서니 화무결과 철심난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금 앉아있을 때에는 고양이 같았으나 막상 일어서고 보니 마치 맹호와 같았고,
한쌍의 눈에서는 번개 같은 광채가 뻗쳐 나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매말랐으나 짙은 눈썹과 수염, 그리고 생기가 도는 눈동자, 이런 것들로 보아선
그의 나이를 측정할 수가 없었다.
화무결은 많은 천하 영웅들을 보았지만 그의 눈에 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남루한 차림의 사나이는 형용할 수 없는, 즉 사람을 놀라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 누구도 그의 앞에서는 몸을 움추려야 하는 위엄 또한
도사리고 있었다.
한쌍의 움직이는 눈동자가 더욱 사람을 무섭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 남루한 차림의 사나이는 화무결을 바라보면서 약간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그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닮을 리 없는데. 남의 일은 상관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의 일...... 그의 일에는 내가 도와 줘야지."

화무결과 철심난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 사나이는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매우 느린 걸음 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화무결 앞에까지 걸어와 있었다.
이때 화무결은 그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의 몸에는 부옇게 퇴색돼 가는 검은 옷이 걸쳐 있었고 다 떨어진 짚신에 한쌍의 큰 손은
무릎을 덮을 만큼 길었으며 허리에는 녹이 슨 철검이 달려 있었다.
 이 사나이는 아래 위로 화무결을 몇 번 훑어본 뒤 돌연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너는 마음 속으로 이 아가씨를 좋아하는가?"

화무결은 꿈에도 그가 이렇게 물을 줄은 몰랐기에 약간 당황했다.

"그건......."

그 사나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좋으면 좋다 하고 싫으면 싫은 거야. 사나이 대장부가 그런 말도 하지를 못한단 말이야!"

화무결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뭐가 침묵이 말을 하는 것보다 더욱 좋다는 거야? 전부 개소리다.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남이 어찌 네가 그녀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느냐 말이다."

화무결은 얼굴이 더욱 붉어지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처럼 말을 했다면 그는 필시 속되다고 했을 것이지만 웬지 이 사나이의
말은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철심난은 얼굴이 비록 빨갛게 변하긴 했지만 용기를 내서 말했다.

"어떤 말들은 그가 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어요."

그 사나이의 눈에서는 즉각 빛이 뻗어나와 그녀를 쏘아 보았다.

"좋아, 매우 좋았어. 너는 그보다 통쾌하구나. 이런 여자 아이라면 그뿐 아니라 내가 봐도
좋아할 거야."

만약에 다른 사람이 철심난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그녀의 성질로 미루어 보아 필경
그에게 따귀를 갈겼을 것이다.
그러나 철심난은 다만 고개를 숙일 뿐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하하, 정 그렇다면 그가 너를 좋아하는 것을 알겠군."

철심난은 다시 용기를 냈다.

"알아요."
"너도 그 사람을 좋아하나?"
"나는......."

그녀는 고개를 들어 화무결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숙였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그 사나이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크게 웃었다.

"싫어하지 않는 것이 아니면 좋아하는 것이겠군. 너희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한다면 내가
중매할 테니 여기서 식을 올리지!"

이 말이 나오자 화무결과 철심난은 모두 놀랐다.

"귀하께서 농담하시는 것이 아니오?"

그 사나이는 화무결의 말에 눈을 뜨며 큰소리를 쳤다.

"이것이 어찌 농담이야. 이 땅과 새울음 소리와 꽃의 향기, 그리고 좋은 날씨에 너희 두
사람이 여기서 식을 올리면 얼마나 좋으냐."

그는 말을 할수록 의기양양해 하며 그저 만면에 희색이 돌았다.

"촛불이 어찌 햇빛과 비하겠느냐? 세상의 모든 담요는 이 흙의 향기와 비할 바가 아니야.
너희 두 사람은 빨리 이런 좋은 날씨에 서로 예식을 올리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나 자신도 통쾌하다고 느끼고 있는데!"

화무결은 그의 말을 듣고 화를 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를 몰랐다.
철심난은 그 자리에 선채 넋을 잃고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때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화무결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는 없었다.
화무결은 그녀의 눈치를 살핀 뒤 돌연 입을 열었다.

"귀하께선 비록 좋은 뜻이지만 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소."

그 사나이는 웃음을 멈추었다.

"응답하지 않는 건가?"

화무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네."

그 사나이는 화를 벌컥 냈다.

"네가 그녀를 좋아한다면 왜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제가...... 다만......."
"알겠어, 네가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싫어할까봐 그러는구나. 그러나 그녀는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거지?"

화무결은 생각을 거듭한 후 천천히 말했다.

"어떤 말들은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좋을 때가 있소."

그 사나이는 탄식을 했다.

"넌 분명히 그녀를 미치도록 좋아하는데 그러나 그녀를 위해서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과연
네 애비의 아들답구나."

화무결은 그의 말뜻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그 사나이는 벌써 철심난을 보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남자에게 시집가지 않으면 어떤 사람에게 시집을 가겠느냐?"

철심난은 고개를 숙였다.

"나...... 난 아니...... 그러나......."

그 사나이는 노하여 소리를 쳤다.

"너희들 둘이 젊은 나이에 어찌 말을 할 줄도 모르는가? 나를 화나게 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빨리 꿇어앉아서 식을 올려라. 누가 싫다고
한다면 나는 몽땅 죽여버릴테다."

화무결도 그가 자기를 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화를 내며
싸늘하게 웃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결혼을 강요하는 사람은 처음이오."
"네가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너를 못 죽일줄 알아 그러는 모양이로구나!"

그러면서 허리의 칼을 빼 옆의 나무쪽으로 휘둘러댔다. 보기엔 녹이 슬어서 못 쓸 것
같았으나 단칼에 거대한 나무가 소리없이 두 동강이 되어버렸다.
철심난과 화무결은 벌써부터 이 사람의 무술이 뛰어날 것으로 생각은 했으나 그의 검력이
이토록 불가사의 한 줄은 몰랐다.

"이 검은 비록 녹슬었어도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애를 죽이는 것은 손쉬운 일이야. 너희들
어떻게 하겠는가?"

철심난은 화무결이 그 사람을 노하게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이 사람의 무술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화무결도 그의 상대가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철심난은 마음이 약했다. 비록 화무결이 소어아를 못 다치게는 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남이 화무결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는 좋아요."

사나이는 그제야 크게 웃었다.

"그래야 도리이지. 너희들은 천생배필이야. 지금은 어려워해도 결혼만 하면 나에게 감사할
것이야."

화무결이 돌연 그의 말을 받았다.

"난 절대로 안 되오."

그의 말은 단호했다. 끝까지 버틸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녀도 좋다고 했는데 너는 왜 싫다하는 것이냐?"

화무결은 철심난이 진심으로 대답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철심난을
죽도록 사랑하지만 절대로 강요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노골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겉으로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피는 끓고 있었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정열적인 사람의 후예이지만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냉정한
사람 곁에서 자라왔기 때문이었다.
화무결은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대답 못하오. 당신이 죽이고 싶다면 죽이시오."
"당신...... 당신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단 말예요?"

철심난의 다급해진 목소리였다.
화무결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는 비록 소어아와 조금도 같은 점이 없어도 성질 만큼은
똑같았다.

"너는 평생에 고통을 겪는 한이 있더라도 대답을 못하겠는가?"
"절대로 대답 못하오!"
"좋아! 네가 평생 동안 통곡을 하게 하는 것보다 지금 죽이는 게 좋겠다."

그는 검빛을 빛내면서 화무결을 향해 찔러갔다.
그의 검은 온몸의 힘을 쓰지 않았으나 매우 빠르고 절묘해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철심난은 멀리서도 이 검기에 숨이 막히는데 바로 앞에선 화무결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파'는 소리가 나면서 화무결이 비록 검을 피하기는 했으나 옥관이 끊겨서 머리가
흐트러졌다.
검의 위력이 이렇게 큰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철심난은 급히 소리쳤다.

"선배님, 멈추시오. 그가 대답을 못하는 것은 나 때문이에요. 제가 진심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으니 나를 죽여 주시오!"

그녀가 놀란 나머지 속마음의 얘기를 폭로하니 화무결은 가슴이 아파왔다.
온 힘을 다해 세 번을 공격한 뒤 죽음도 상관 없다는 듯이 검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오히려 검을 거두면서 웃었다.

"강씨, 과연 소 같은 성질이군. 그러나 너의 아버지보다는 약간 병신이야. 그녀가 정말 싫고
대답도 하기 싫으면 어찌 너를 위해 죽겠는가!"

화무결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강씨란 말이오?"

사나이는 놀랐다.

"네가 강씨가 아닌가?"

철심난도 따라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정말 강씨가 아니에요. 그는 화무결이에요."

사나이는 자기의 머리를 만져보면서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강씨가 아냐? 일이 이상한데. 너는 강씨와 똑같이 생겼단 말이다."

화무결도 손을 쓰는 것을 멈추고 이 사람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사나이는 탄식을 한 후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강씨가 아니면 결혼을 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으니 가고 싶으면 가거라."

그는 정말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면서 돌아섰다.
화무결과 철심난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다.
어리둥절 하는 사이 사나이는 걸어가면서 혼자 계속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 소년이 강소어가 아니라고? 이상한데......."

철심난은 이 소리를 듣자 놀랍고도 기뻐서 급히 물었다.

"선배님은 혹시 그이가 강소어인줄 알고 결혼하라는 것이 아니었어요?"

사나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난 비록 너희들이 정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으나 그러나 강소어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참견을 하지 않았을 거야."

철심난은 생각을 참지 못하고 '호호'하고 웃어 버렸다.

"당신은 아시는군요. 제가 강소어 때문에 그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화무결을 바라본 후 말을 더 계속하지 못했다.
화무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지 우뚝 서있기만 했다.
사나이는 철심난을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화무결을 바라 보았다.

"이제야 알겠다, 알겠어. 알고 보니 네가 말한 나쁜 사람이 바로 강소어로구나.
너희들은 결혼을 할 수 있는데 강소어 때문에 못하는 것이지?"

사나이는 손으로 머리를 두드리고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난 좋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돼버렸으니......."

그는 평생 동안 검법만을 잘 사용하고 강호에서 고생만 했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천하를 종횡무진으로 섭렵하였기에 그 어느 무서운 무술도 그의 앞에서는
간단하게 변하면서 그가 한 눈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정은 무술보다 더욱 어렵고 더욱 복잡하여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화무결은 이런 웃음을 듣고 분노를 이기기 어려웠으나 억지로 참으면서 돌연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가고 싶으시오?"
"내가 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어?"

화무결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해갔다.

"당신의 무공 실력을 보고 싶소."

사나이는 웃었다.

"나는 너의 가슴이 따끔했을 줄 알고 있으니 어디 한번 네가 때려 봐라."

화무결도 역시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의 무술이 지극히 강하더라도 나의 일장을 당하지는 못할 터이니 막지 않으면 자살
행위요!"

말을 하면서 일장을 가했다.
이 한 손이 연약한 것 같으면서도 매우 악독하여 피하기가 어려운 수법이었다.
사나이의 눈길이 빨라지면서 다급히 말했다.

"좋은 장력이군!"

그는 천성이 싸우기를 좋아했으므로 이때 이런 소년 고수의 무술이 어떤가를 시험해 보고
싶어서 왼손으로 응전했다.
그러나 화무결의 장력이 돌연 오른 쪽으로 뻗히면서 교묘하게 변하는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화궁 독보로 세상에서 말하는 '이화접옥'이었다.
화무결이 사용을 하면 상대방이 공격을 한다는 것이 스스로를 때리고 마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사나이는 급히 돌아서 천하에 그 누구도 막아내지 못하는 이화접옥을 피해 버렸다.
화무결은 그제서야 크게 놀랐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사나이가 다시 그를 마주할 때에는 안색이 변했고 무서운 소리를 질렀다.

"너는 이화궁의 제자냐?"
"그렇소!"

사나이는 하늘을 향해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나는 평생 이화궁의 무술을 시험 못한 것을 한으로 생각했는데 오늘 여기서 이화궁의
제자를 만나다니......."

맑은 웃음소리에도 나무 잎이 흔들려 떨어졌다.
철심난이 한걸음 나섰다.

"선배님은 이화궁과 무슨 원한이라도......."

사나이는 웃음을 그치고 다시 소리를 쳤다.

"내가 바로 이화궁과 큰 원수가 있는 사람이지. 내가 십 년 동안 검을 손질해 온 것을
이화궁의 제자들을 모두 죽이자는 것이었어......."

철심난은 놀란 나머지 온 몸에 소름이 끼쳐옴을 느꼈다.
화무결이 돌연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연남천! 당신은 연남천이지요!"

이화궁의 가장 큰 적이 바로 연남천이다.
이 하늘 아래서 연남천 외에는 또 어느 누가 이화궁과 맞서고 이화궁의 사람을 모조리
죽인다고 하랴!
화무결이 이 점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 철심난도 생각이 났다.


 
             숙질상면(叔姪相面) 
 
 
화무결과 철심난은 넋을 잃고 있다가 사나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내가 바로 연남천이다!"

철심난은 온 몸 속의 피가 머리로 치솟는 듯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화무결은 잠시 정신을 놓은 듯 멍하니 서있다가 옷을 벗어 정성스럽게 접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철심난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그 옷을 건냈다.
사실 그가 이러한 동작을 취한 것은 그러한 행위들을 통하여 감정의 평온을 찾아보려 한
것이었다.
철심난은 그가 자기에게 주는 옷을 묵묵히 받을 뿐 그의 무겁고도 복잡한 심경은 알 수가
없었다.
화무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옷을 잘 보관했다가 이화궁으로 보내시오!"

철심난은 그제서야 그가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옷을 받은 뒤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정말 그 사람과 싸우겠다는 거예요?"
"연남천과 겨뤄보는 것은 무술을 배운 사람의 일대 희망이오.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의 말투는 비록 침착하고 평온했지만 창백한 얼굴은 흥분으로 빨간 빛이 감돌았고 호흡
또한 거칠었다.
철심난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냥 이곳을 떠나세요. 내가 대신 그를 막으면 그는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화무결은 미소를 지었다.

"나의 일생은 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화궁을 위한 것이오. 내가 어찌 여길 피한단
말이오!"

그의 말소리에는 매우 무거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또 사실 내가 강소어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나와 원한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화궁을
위해서였소. 석 달 후에 그를 만나거든 그에게 말해주시오. 비록 그를 죽이려고 했었지만
조금도 내가 원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 사람이 나를 원망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철심난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당신은 왜 남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나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살지를 못 하고......."

화무결은 하늘을 향해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나는 누구지?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지?"

이 말은 그가 처음으로 남 앞에서 자기의 비통함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비록 간단한 몇
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속에 내포된 비통함은 태산 같이 깊었다.
철심난은 눈물을 흘리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남들은 모두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그 누가 당신의 이러한 뼈저린 고통을 알겠어요! 또 남들은 당신이 빈틈이 없고 냉정하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 누가 당신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없이 죽고 사는 것조차 남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알겠어요!"

연남천은 곁에 서서 화무결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화무결, 너는 과연 '이화궁'의 제자구나! 이번 싸움의 성패에 상관없이 이화궁의 이름이
너로 인해서 빛날 것이다."
"감사하오."
"그러나 너도 알아야 될 것이 한 가지 있다. 너 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지는 않아. 그리고 설혹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그렇게
행복하다고만 할 수 없지. 어쩌면 그들의 삶이 더 슬플 수도 있지."

화무결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당신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를 죽여야 한단 말이오?"

연남천은 한참 동안 침묵해 있다가 돌연 하늘을 향해 기괴한 탄성을 발했다.
그의 소리는 너무나 맑고 처량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슬픔을 느끼게 했다.
화무결은 길게 탄식을 하며 품속에서 하나의 은검을 꺼냈다.

"오늘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것도 나를 위해서는 아니오!"

철심난은 그가 항상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화궁의 무공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인 줄로 알았었다. 그녀는 화무결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그가 손 안에 쥐고 있는 검은 매우 가늘어서 마치 손가락 같았다.
다섯 자의 길이로 전체가 은빛으로 번쩍거렸고 즉각 손을 벗어나 나를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비록 검이었지만 마치 고무로 만든 것처럼 휘어질 수가 있는 특이한 무기였다.
이것을 본 연남천은 눈에서 빛을 발하면서 그 괴이한 무기를 담 담하게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무기까지 꺼내 들었으면서 왜 아직 손을 쓰지 않는 것이지?"

그의 말이 떨어지자 화무결은 왼손으로 은검을 튕겼다. 순간 '챙'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
검은 찬란한 무지개 빛을 발했다.
검이 움직이자 검에서 솟아 나오는 빛이 눈부신 광채를 번뜩이며 날렵하고 신속하기 이를
데 없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연남천은 검을 들고 마치 태산처럼 서 있었다. 화무결의 거센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돌연 화무결의 검세가 방향을 바꾸었다.
화무결은 여러 가지 수법으로 유혹했지만 연남천은 결코 속지 않았고 화무결의 검은 허공을
찌를 뿐이었다.
알고 보니 화무결의 검은 허공을 찌른 것이었다.
철심난은 검의 변화를 똑똑히 볼 수가 없었고 다만 '쉭쉭' 하며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화무결은 일곱 번의 공격을 했으나 연남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초식은 '이화궁' 검법 중에서도 가장 교묘한 것이었다. 그러나 화무결은 계속 일곱 번의
허검을 찌른 것이다. 사실 누구라도 이런 현란한 검빛 아래서 그것이 허검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그래서 당연히 상대방을 피하려 애를 쓰게 되지만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 모두 검초의 계산 속에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일곱 개의 허검은 불가사의한 위력을 발휘하면서 상대방이 물러설 길을 완전히 봉쇄시킬
수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화궁'의 비기(秘技)였고, 천하의 어느 검파와도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연남천은 검빛에 현혹되지 않았으며 이 일곱 검의 초식은 연남천 앞에서 완전히 그
효력을 잃고 말았다.
화무결이 일곱 번의 초식을 끝내자 이번에는 연남천의 검이 빛을 내면서 화무결의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이 검은 아무런 변화없이 팽팽히 찔러 들어갔으며 매우 빠르고 맹렬한 위력을 품고 있었다.
화무결은 자신의 검법이 아무리 변화무쌍하다 해도 우선 이 검은 피해야만 했다.
연남천은 검풍을 일으키면서 세 번을 지쳐들어갔다.
그의 검은 결코 허식이 아니었다. 매우 단순한 검초였지만 연남천의 손에 들린 검은 실로
신기한 위력을 발했다.
화무결은 가까스로 검을 피한 뒤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그의 검은 온통 은빛을 발했고 연남천은 빛에 휩싸여 버렸다.
화무결은 연남천을 둘러싸며 돌았지만 연남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화무결의 검빛은 물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연남천은 마치 흐르는 물 속의 바위와 같았다.
화무결의 이러한 검법은 연남천의 검법을 충분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남천은 공력이 깊고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화무결이 감히 따르지를 못했다.
화무결은 비록 몸을 재빠르게 움직이며 초식을 펼쳐내고 있었지만 사실 그 위기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검풍에 꽃잎들이 날리며 화림(花林) 안에서는 그야말로 다시 보기 힘든 용호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소어아는 한 잠 푹 자고 싶은 생각에 여관에 들었다. 그러나 많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오갔고 아무리 노력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다시 옷을 줏어 입고 여관의 대청으로 나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여관은 본래 진검과 남궁유가 묵었던 곳이었다. 여관 전체를 차지하고 있던 그들이
떠나버리자 여관은 텅 비어 버려 소어아를 제외하곤 단 하나의 방에 사람이 들어 있었다.
그 방은 분명 인기척이 있었으나 문과 창들이 모두 꼭꼭 닫혀 있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문을 꼭꼭 닫고 있는 것을 보자 소어아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얘기를 엿듣기 위해 그 방의 창가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때 돌연 한 청의를 입은 사나이가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말채찍을 들고 있는
것으로 봐 마차를 몰고 온 것 같았다.
그는 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큰소리로 외쳤다.

"강 나으리께서는 여기에 계십니까?"

소어아는 얼굴색이 변했다.

(강별학이 무슨 일로 여기에 왔을까?)

소어아는 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며 강별학이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냐?"
"소인은 단귀입니다. 방금 화공자를 성 밖에까지 모신......."
"왜 네가 여기를 찾아 왔지? 화공자는 어디 있느냐?"
"화공자는 성 밖에서 웬 기인(奇人)과 마주쳤습니다. 소인은 급히 돌아와 보고를 하려고
했으나...... 이제야 겨우 나으리께서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강별학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화공자는 무슨 일을 당해도 혼자서 처리할 수 있다. 그토록 애태울 필요가 있겠느냐?"
"그러나...... 화공자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한 듯 보였습니다. 철 아가씨께서도 애태우고
있는 것을 보면 필시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강별학은 단귀라는 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내가 가보지."

이때 방 안에서 돌연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우선 가보아라."
"오늘밤 늦게까지는 꼭 돌아오겠습니다."

강별학은 급히 단귀를 따라 나가버렸다.
소어아는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강별학을
기다리고 있는 이상 그리 급하게 서둘러 그의 신원을 파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히려 누가 화무결에게 어려움을 주는지 먼저 알고 싶었다.
소어아는 화무결과는 비록 적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화무결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리를
듣자 적잖이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다.
문 밖에서 마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어아는 뒤따라 나갔다. 그러나 큰 길에서는 경공을 보일 수가 없어 그리 빨리 갈 수는
없었다. 성을 빠져 나가자 마차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마차가 성을 빠져 나오자 강별학은 차내에서 큰소리로 물었다.

"화공자는 그 사람과 대적을 해봤는가?"
"그는 공자님의 옥관을 끊어버렸고 공자님도 그에게 일장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볍게 공자님의 일장을 피해버렸습니다."
"음, 화공자의 일장을 막을 수 있다니 굉장한 실력이구나. 그는 어떻게 생겼던가?"
"그 사람은 매우 키가 컸습니다. 옷은 저보다 더욱 남루했고 생김새도 매우 신기했습니다."

강별학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이가 얼마나 되어 보이던가?"
"사십 살 내외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오십이 다 된 것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또 어찌보면 서른 살도 같고 하여튼 그는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토록 신비한 사람은 종래 본 적이 없습니다."

강별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단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그 사람은 허리에 철검을 차고 있었는데 이미 녹이 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강별학은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그는 한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있다가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너는 조용히 마차를 몰고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멀리 세우도록 해라. 알았느냐?"

단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강별학의 말을 아니 들을 수도 없었다.
화림(花林)에서 약 이십장(丈)의 거리를 두고 마차는 멈추었다.

"아! 화공자와 그 분이 싸우고 있어요!"

강별학은 이미 화림 안에서의 검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기가 싸인 곳에는 한 사람이 태산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화무결은 몸을 매우 가볍게 움직이며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별학 또한 안목이
높았다. 그는 곧 화무결이 교묘하게 공격하고는 있지만 감히 쳐들어 가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연남천의 무서운 검기가 하늘을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강별학은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며 중얼거렸다.

"연남천, 틀림없이 연남천일 것이다."

그는 비록 화무결과 싸우는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연남천 외에는 다른
사람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별학은 연남천이 다만 이화궁의 검법을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화무결을 죽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단귀는 그 검기를 보며 화무결이 걱정되는지 진땀을 흘렸다.

"강 나으리, 화공자를 돕지 않을 겁니까?"
"당연히 가야지."

단귀는 반가운 듯 기쁜 얼굴을 보이면서 말했다.

"강 나으리는 화공자의 친구이시니 꼭 화공자를 도울 줄을 알았습니다."

이때 강별학이 마차 문의 손잡이를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왜 마차 문이 열리지를 않지. 고장인가?"

단귀는 마부석에서 내려와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 문은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강 나으리께서는 너무 급해서 문을 열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그가 말을 하며 고개를 들자 강별학은 싸늘한 눈초리로 단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단귀는 그 음산한 얼굴과 살기가 가득찬 눈초리를 보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쳐왔다.

"강 나으리...... 무슨 일......."

강별학은 음산하게 웃으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너무 남의 일에 참견하면 못 써. 오래 살지 못 하니까."

단귀는 놀란 나머지 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달아나려고 했으나 이미
강별학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단귀는 애원했다.

"강...... 강 나으리...... 소인은...... 당신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네가 고생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너를 좋은 곳으로 보내자는 거다."
"소인...... 소인은......."

그러나 검은 이미 깊숙이 그를 찔러 들어갔다.
강별학은 천천히 단검을 뽑아 피가 자기 몸에 튀지 않게 했다.
그가 사용한 검은 바로 '정소(情銷)'의 보검이었다.
강별학은 길게 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내가 여기에 온 것을 모른다. 그러니 내가 화무결을 구하지 않아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 협객이라는 이름이 이 자식 때문에 손상을 당해선 안 되지......
네가 없어지므로 나 강남 대협이 이름을 보전하는 것을 원망하지는 말아라......."

그는 조용히 마차에서 뛰어 내려 발길을 돌렸다. 그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산을 빙
돌아 성내로 향했다.
화림에서는 계속 악전고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강별학은 날렵하게 신법을 써 달리며 중얼거렸다.

"화무결, 너를 구해주고 싶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야. 그러나 나로서는 연남천을 감당할
수가 없구나. 해마다 이때가 돌아오면 내가 잊지 않고 너를 위해 향을 피워 놓겠다.
안심하고 눈을 감아라!"

소어아는 성을 벗어나자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