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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17:29

숙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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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객





       ----- 차 례 -----
        1. 제1장 살인마 한당
        2. 제2장 미녀와 맹인
        3. 제3장 낭인시장
        4. 제4장 비밀번호 숙객
        5. 제5장 투견장의 괴소년
        6. 제6장 사도십병 혈수마시
        7. 제7장 기이한 고문
        8. 제8장 약혼자를 구해다오
        9. 제9장 황금 구천냥의 청부
       10. 제10장 사막의 상인
       11. 제11장 삼월동풍륜
       12. 제12장 기인 남화룡
       13. 제13장 음모속의 미녀
       14. 제14장 친구의 유언
       15. 제15장 채하
       16. 제16장 북천문
       17. 제17장 대습지대의 야만인
       18. 제18장 부이족의 여왕
  1. 제1장 살인마 한당(殺人魔 寒堂)
  특령 제백팔 호
  <취라특령 제백팔 호.
  사경 마중뇌옥 제삼방 뇌옥에 갇힌 자를 구할 것.
  기한 육 개월, 소요 경비 황금 일만 냥.  총력 투입. 대외 극비.
  ---취라신성 정무원주 백--->
  <사경(死境) 마중뇌옥(魔中牢獄)에 관한 제반 탐색 및 정찰 보고에 관한 (件).
취라특령 제백팔 호에 의거함.
  --- 기(基)--
  마중뇌옥은 중원 동북방 열하성(熱河省)과 찰합이성(察哈爾省)에 걸쳐 있는
열하 대사막(熱河 大沙漠)에 위치함. 산해관(山海關) 북방 이백 리 지점.
  사막의 안에는 일백 리에 걸친 유사지대(流沙地帶)가 있으며, 유사지대가 끝
나는 곳에 신기루 같은 원시림(原始林)과 그 원시림에 둘러싸인 바위산이 있음.
마중뇌옥은 바로 그 바위산을 통째로 뚫어 위치함. 뇌옥을 누가 다스리는지에
대해선 일체의 신비에 싸여 있음. 하나의 신비로운 단체가 마중뇌옥을 다스림.
  그들은 돈을 받고 사람을 수감(收監)하며 일방부터 십방 감옥까지는 가장 비
싼 죄수들을 수감함.  난해한 관문(關門)과 극험의 매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
는 관계로 접근조차 불허함. 전문적인 매복 고수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음. 
무자비한 잔인성이 엿보임.>
  "칠호(七號), 칠호! 어디 있나?"
  급박한 외침. 그러나, 위이잉---
  대답 대신 날아온 것은 보기에도 끔찍한 톱날이었다. 둥근 철륜(鐵輪)에 서른
세 개의 날이 달린 외문의 병기.
  "슈파앗--"
  사내는 바닥에 떨어진 한 자루의 피 묻은 검을 보느라고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칠호의 검......? 칠호도 당했단 말인가?"
  하지만 설사 보았다고 해도 그것을 피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날아오는 철륜
은 정확히 오백구십이 개였으므로, 사방 열 자의 좁은 방 안에서 이 엄청난 톱
날들을 제대로 피해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악--!"
  한 소리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에 이어 사내는 형체조차 없어지고 말
았다. 신형 하나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날렵한 청의경장(靑衣輕奬)의 이마에는
흰 띠를 두른 무사 하나가 피비린내가 감도는 방 안으로 번쩍 날아들었다.
  "오호(五號)!"
  먼저 죽은 사내와 똑같은 복장이니 같은 계열의 무사인 듯, 그는 얼떨결에 죽
은 사내의 수급을 안아들고 말았다. 무사의 얼굴에 부르르 경련이 일었다.
  "지독한 놈들!"
  그는 수중의 수급을 팽개치듯 하고 전면에 나 있는 문으로 뛰어 들었다. 둥근
원형에 보라색 주렴이 드리워진 평범한 문, 그러나 그의 신형이 문 안으로 뛰어
들기 무섭게 느닷없이 하나의 거대한 칼날이 위에서 불쑥 떨어져 내렸다.
  "으윽---!"
  무사의 발 하나가 무슨 무우 잘려나가듯 덥썩 베어져 나갔다. 무사는 오만상
을 찡그리며 뛰어 들었던 방바닥을 데구르르 굴러 나갔다.
  그러나 곤룡퇴(昆龍退)의 마지막 동작이 끝나는 순간, 그의 발 아래선 다섯
개의 창날이 불쑥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그것은 미로(迷路)였다. 그것도 수없이 많은 험관이 죽음처럼 도사린 미로였
다. 얇은 비단의 홋겹 청의, 이마에 두른 영웅건도 하얀 비단이었다. 두 개의 용
이 조각된 칼자루 끝엔 노란 수실이 찰랑이고 있었고 그 칼자루엔 일호(一號)의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사 우양(尤陽)은 수중의 칼을 불끈 움켜 쥐었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철문 하나와 회백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향로
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음산한 귀기(鬼氣)가 그 향연 속을 피비린내처럼 감돌고
있었다.  처음 여기까지 올 때는 매우 많은 수의 검수들이 우양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지금까지 눈에 뜨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모두 죽
었을지도 모른다.
  우양은 이마에 푸른 힘줄을 돋우며 가슴에 걸고 있던 붉은 옥패(玉佩) 하나를
끊어 내팽겨쳤다.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각오, 그는 칼을 비스듬히 세워든 채 천
천히 앞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때 돌연, 무게가 천 근은 족히 나갈
것 같은 향로가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맴돌았다. 동시에, 슈파팍-- 치밀한
각도, 그 각도는 앞으로도, 위로도, 옆으로도 피할 수 없는 시각을 찔러오고 있
었다. 피할 수 있는 각도는 오직 위 뿐이었다.
  우양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둥실 몸을 위로 띄워 올렸다.
  순간, 이번에는 공중에 뜬 그의 몸을 향해 양쪽 벽에서 스물 네 자루의 창이
쏟아져 왔다. 우양은 싸늘하게 웃으며 수중의 검을 부챗살처럼 휘둘러 냈다.
  "감히 이 따위 수작으로 날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건가?"
  순간, 날아들던 창들은 그의 치밀한 검초에 하나도 남김없이 반으로 잘려져
나가고 말았다.
  "차차창--! 파파팍--!"
  헌데 이때, 쩌엉-- 부러진 창 토막들이 미처 다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창이
쏟아져 나왔던 구멍에선 또 다시 오색의 현란한 광채들이 쏟아져 나왔다. 광채,
그것의 정체는 놀랍게도 뱀이었다. 붉고 노라며 파란데다 그 크기란 것도 어른
엄지 손가락만한 가는 실뱀이었다. 핏빛 혈광이 쉴 새 없이 번뜩이는 두 눈으로
보아 상상도 할 수 없는 맹독을 지닌 독물이리라.
  일견해 보기에도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검으로 베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우양은 크게 날아 오르던 자세 그대로 왼발 끝으로 오른 발등을 찍으며 두
자 정도 떠올랐다. 이것은 몹시 어려운 묘기였다. 마치 제비가 허공을 차고 날
아 오르는 것 같다고나 할까. 허나 이번에는 또 그가 날아 오르기로 마음먹은
천정이 그대로 주저앉고 있었다. 그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몸
은 떠오르는데 무거운 천정이 그대로 내려 앉다니, 돌천정에 그대로 머리를 갖
다 댄 형세랄까?  전면의 거대한 벽에 하나의 수정거울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때, 거울 속엔 사악하게 웃는 얼굴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참혹하게 머리가 으
스러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퍽-  소름 끼치는 둔음이 있었고......
   "아아악-- !"
  폭죽처럼 터져나온 핏발이 있었다. 그리고 정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는 듯 태연한 죽음의 정적이었다.
  *      *      *
  "구르릉-- 우르르르--"
  원시림, 나무는 하늘을 덮고 땅을 덮었다. 그 중 가장 작은 것이라 해도 높이
가 십여 장은 족히 되는 이 엄청난 원시 수림의 뒤쪽으론 하나의 불쑥 솟은 바
위산이 웅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석산(石山), 멀리서 보자면 마치 한 개
의 해골 바가지가 을씨년스럽게 세워진 것 같았다. 산과 원시림의 앞 뒤로 끝도
없이 펼쳐진 대사막의 황량한 경치에 비추어 이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쓸쓸하고
스산해 보였다.
  바로 이때 숲속을 움직이는 희미한 물체가 여럿 보였다. 그 원시림 속에서 굴
러나온 것은 다름아닌 열다섯 개의 수레였다.
  "우르르르-- 구르릉--"
  비루 먹은 나귀 한 마리가 끈에 끈을 이은 열다섯 개의 수레를 한 꺼번에 끌
고 있을 뿐 끄는 사람도, 타고 있는 사람도 없는 수레들. 수레의 짐칸에 올려진
것은 기이하게도 시커먼 옻칠을 한 검은 관이었다. 수레의 수가 열다섯 개이니
도합 열다섯 개의 관, 이 수레와 관은 노을 속의 원시림을 매우 완만히 굴러나
오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천지사방이 모래 뿐인 사막 한가운데에 이런 거대한 원시림이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려니와 그 원시림 속에서 굴러나온 열다섯 개
의 흑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수레의 방향은 사막 남쪽, 바로 중원을 향하
고 있었다.  괴괴한 정적 속에 수레의 행렬은 지루할 정도로 오래 계속되었다.
그 수레가 바위산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지점에 이르렀을 때 돌연,
  "번쩍--!"
  번갯불 같은 광후가 사막의 한쪽을 수놓는다 싶더니, 캐액-- 수레를 끌던 나
귀가 비명을 토하며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동시에, 두 개의 파란 그림자가
스르르 그 옆에 내려섰다.
  청의(靑衣), 노란 수실의 검을 차고 있는 두 명의 청의사내들, 한 명은 바위산
쪽을 경계하듯 바라보고 다른 한 명은 수레에 실린 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이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경계하던 자가 시선을 바위산에서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숨이 붙어 있는 자는 없는가?"
  "없어. 있을 턱이 없지."
  "흐흠..... 또 실패라는 얘기군."
  관을 살피던 청의인은 마지막 관 앞에 터억 엉덩이를 앉히며 탄식을 터뜨렸
다.
  "신룡검객 우양이라면 소주 제일의 검객인데..... 이런 사람을 도대체 뉘라서
이토록 가볍게 죽인단 말인가? 저 바위산 속에 있는 무리들은 실로 놀라운 자
들이로군."
  서 있던 사내는 경계를 풀고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저 바위산 마중뇌옥의 옥주는 어떤 인물일까? 돈을 받고 사람을 가
두어 준다는 이 옥중업(獄中業)은 이제까지 볼 수 없던 장사일 뿐 아니라 그의
조직이며 수하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고수들인 것 같거든."
  "낸들 알 턱이 있나. 하나부터 열까지 신비 속에 가려진 녀석들이니..... 그렇
지 않다면 본성의 난다 긴다 하는 정찰 고수들이 아직까지 그들의 정체를 모르
고 있을 리가 없지."
  "내가 보기에는....."
  사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을 이었다.
  "저 마중뇌옥의 옥주는 아무래도 실존배교(失存拜敎)의 인물인 것 같아."
  관 앞에 앉아있던 청의인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흐흠.... 우선 그들의 기관매복은 할 수 없던 것이 태반이야. 거기다가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이렇게 사막에 버리는 풍습이며, 그속에<깃든 주술적(呪術的)인
의미들은 과거 온갖 사법(邪法)과 주술(呪術)로 이 땅을 풍미했던 배교의 수법
과 너무도 흡사하단 말일세."
  "하지만 배교는 이미 이십 년 전에 멸망했어. 그것도 전무림의 합공에 의해
멸망했지. 그런 배교가 지금에 와서 나타날 리가 있겠나?"
  이때다. 돌연,
  스슥---스으윽---
  몹시 귀에 거슬리는 소리 하나가 느닷없이 두 사람의 귓전을 파고 들었다. 두
사람은 아연 긴장하여 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일순, 그들의
동공에 커다란 놀람의 파장이 스쳐 지났다.
  "저것은....."
  거북, 땅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모래 위를 기어오고 있는 것들은 놀랍게도 수
십, 수백 마리의 거북이었다. 짙은 녹색의 이끼로 뒤덮인 등, 파란 녹광을 이글
거리는 이것들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사막을 기어오고 있었다. 순간, 관 앞에
앉아있던 청의인이 다급히 땅에 엎드렸다.
  "엎드려!"
  영문도 모르고 따라 엎드리며 사내는 말했다.
  "왜 그러지? 저 괴물 같은 거북이들은 뭔가? 사막 한가운데에 웬 거북이들
   일까?"
  "잔소리 말고 숨을 끊게. 귀식대법(龜息大法)으로 죽은 척하고있어야 해. 저
놈들은 식인 거북이다."
  "맙소사! 사람을 잡아 먹는단 말인가?"
  "저것들은 눈도 멀고, 귀도 멀었네. 다만 물체의 호흡이나 온도로써 방향을
알아채고 공격해 온다네. 도, 검, 창, 칼로도 베어지지 않는 괴물들이야."
  말과 함께 그는 얼굴을 모래에 푹 박으며 일체의 호흡을 끊었다. 하지만, 사
내는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식인 거북이라고?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거북이들의 사막에 있단 말
   이지?"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청의인과 똑같은 자세로 숨을 끊었다.
  "스르르-- 스스슷--"
  거북이들은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 앞까지 이르렀다. 그 놈들은 시체가 실린
수레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살아있다고 판정된 것이 없었는지 두 사람의
앞으로 기어왔다.  사내는 그 중 한 놈이 자신의 등 위로 스물스물 기어 지나가
는 것을 느꼈다. 참을 수 없이 징그러운 감촉이었다. 이어, 두 세 마리가 한꺼번
에 그의 몸 위를 지나갔다.  한 놈이 유난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사타구
니 사이에서 꼼지락거리는 것이었다. 이쯤 되자 사내는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굴러 떨어지는 그 놈을 맹렬히 베어냈다.
  깡--, 허나 거북은 베어지기는커녕 두꺼운 등껍질에 금 하나 가지 않았다. 
사내는 다급히 검을 거두어 들였다. 이때, 그는 엉덩이 쪽이 따끔한 것을 느꼈
다.
  "익!"
  다급히 돌린 시선 속으로 엉덩이 살을 한 웅큼이나 베어물고 있는 거북이의
피묻은 입이 보였다.
  "이 괴물이!"
  그는 황망히 검을 치켜들었다. 허나,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동작이었다.  검을 치켜드는 짧은 순간에 세 마리의 거북이 그의 다
리 아래를 파고들고 있었으며 연이어, 호흡과 체온을 감지한 나머지 거북이들이
번갯불이 휘몰아치듯 그의 몸을 향해 달려 들었다. 그것들은 놀랍게도 하늘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 수도 있었다.
  "아아아악!"
  비명은 길지 않았다. 사내의 몸은 단숨에 한 줌의 뼈만 남긴 채 형체도 없어
지고 말았다.
  "스스슷 -- 스으윽--"
  거북이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이내 그들이 온 쪽으로 사라지기 시
작했다. 그 놈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마중뇌옥이었다.   청의인은 오랜 후에야
시선을 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사내의 뼈를 주워들었다. 그 얼굴엔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서리고 있었다.
  "배교..... 이것은 배교다..... 하늘을 나는 식인 거북을 키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망연한 중얼거림이 뒤를 이었다.
  "한당(寒堂), 이 살인마(殺人魔)가 살이 있었단 말인가.....?"
  2. 제2장 미녀와 맹인(美女와 盲人)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길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필시 깊은 산중의 한적
한 소로를 택할 것이다. 혹은 바다라거나 섬 정도를 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 더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그는 오히려 도시를 태고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과 복잡한 거리구조, 서로 알지 못하는 도시인의 특성이야말로 이목
을 감추기에는 가장 좋은 적소가 아니겠는가.   취취루(醉醉樓)는 난주(蘭州)에
있었다. 취취루는 난주성에서도 술맛이 좋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이곳은 자연
좋은 술을 찾는 사람으로 매일같이 버글거렸다.   이층의 구조에다 삼백 석이라
는 많은 좌석을 갖춘 이 이름난 주루로 삿갓을 깊숙이 눌러 쓴 사람 하나가 나
타난 것은 칠월의 햇살이 따가운 여름날 어느 나른한 오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 취취루에는 하루
에도 약 일천 가량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며, 그 중에는 타지의 떠돌이가 태
반이기 때문이었다.   삿갓을 쓴 이는 이상한 주문을 했다.
  "술은 반 병이면 된다. 안주는 콩 백 알로 버무린 두부를 가져오라."
  술과 두부를 안주로 시키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콩 백 알로 만든 두부를
가져오라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점소이는 이 이상한 손님을 힐끗 바라본 후 그대로 가져다 주었다.
  만약, 매우 한가로운 사람이 있어 이 삿갓 과객의 행동을 예의 주시해 보았다
면 그는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삿갓 과객의 두부안주 속에선 한 장의 쪽지가 나왔다는 것. 그리고 삿갓 과객
은 그 쪽지를 두부와 함께 태연하게 입 속에 물었으며, 술을 한 잔도 채 다 비
우기도 전에 그 술집을 빠르게 나섰다는 것이다. 삿갓 과객은 한 개의 은밀한
골목으로 들어서선 이내 입속에 물고 있던 쪽지를 꺼내 들었다.
  <백양로(白陽路)를 지나가는 세 번째 마차를 탈 것.>
  마차는 평범했다. 그저 사람을 태우거나 짐을 싣는 짐꾼 마차였다. 삿갓 과객
은 이웃집에 나들이 가는 사람처럼 그 마차를 세워 탔다. 행선지도 방향도 일러
주지 않았지만 마차는 마부 멋대로 굴러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마차가 난주성 골목을 세 바퀴나 돌고 난 후에는 이미 그 안에 탔
던 삿갓 과객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차는 다시 다른 사람을 태우고 영업을 시
작했으며 나른한 여름 오후에 벌어진 이 한 개의 괴사(怪事)를 눈여겨 본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이 일에서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참으로 치
밀한 운반 계책이라는 것이다. 누가 드나들든 별반 관심을 두지 않을 복잡한 주
루가 최초의 접선 장소요, 마차는 두 번째의 매개처였다. 삿갓 과객이 마차를
올라탄 후 만약 행선지를 말했거나 물었다면 마부는 평범한 마부로서 그가 말
한 행선지를 데려다 주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과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곧 일종의 접선 암호였고 마부 또한 특별한 마부가 되어 그를
최종 목적지로 데려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 안에 어떠한 일이 있어 삿갓 과객을 감쪽같이 증발하게 했는지 우린 알
수 없다. 아마 더욱 더 치밀한 안배가 있어 그를 목적지로 운반했을 것이다.  
조직(組織), 끈에 끈을 물듯 치밀한 조직이 없고서는 이러한 운반 계책은 사실
불가능했다. 이 조직의 수뇌는 실로 남의 눈에 뜨이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일 것
이다. 또한 이 난주성에 사는 사람일 것이다.
  *          *          *
  여인의 몸은 아름다웠다. 사실, 어떤 여자의 몸이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른 여자는 마른 여자대로 뚱뚱한 여자는 뚱뚱한 여자대로 각각
여체가 지니는 은밀한 장점이 있는 것이다. 이 지상에서 진정한 찬사를 받아 마
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여체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체는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살인적인 유혹의 동체, 높이 여섯 자의
백옥을 치밀하게 각(角)을 지어 조각한다면 이런 몸매가 나올 수 있을까.
  좁아야 할 곳은 좁고, 넒어야 할 곳은 넓고, 잘룩할 곳은 잘룩하고, 두툼해야
할 곳은 두툼하고, 날씬해야 할 곳은 날씬하고 들어가야 할 곳과 나올 곳 등이
신비로울 정도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엄연히 따지자면 나신
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풀거리는 붉은 비단자락의 웃도리는 봉곳 솟은 젖
가슴을 가리고 있으되 허리 아래의 아랫도리만 노출된 여체였다.
  위에는 입고 아래는 벗었다 하는 식이지만 이 야릇한 차림은 모조리 다 벗고
있는 것보다 오히려 더 아찔한 색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육중한 사내의 동체가 그 위에 있었다. 바둥거리듯 흐트러지는 자지러질 듯한
여체의 비틀림으로 인해 비릿한 정사의 여운이 사방으로 피어 오르고 있었다. 
사내의 몸은 매우 건장했다. 그러나 그는 장님이었다. 비록 그는 두 눈은 멀었
지만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 그 어떤 사내보다도 훌륭한 기능을 가지고 있
는 것 같았다.
  사내의 하체가 꿈틀거릴 때마다 여인의 입에선 자지러질 듯 고혹적인 신음이
연발로 터져 나왔다. 바로 그때다.
  "팍--!"
  방의 좌측 벽에 꽂혀 있던 붉은 야명주 하나가 번쩍 빛을 토했다. 여인의 신
음도 동시에 멈췄다.  그녀의 투명한 동공이 벽을 향했다.  벽에 꽂힌 야명주의
숫자는 도합 다섯 개였다. 그 중 붉은 야명주 홍령(紅靈)은 매우 중요한 사람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암호 전갈이었다.
  "아도, 그만."
  순간, 장님 사내의 격렬한 율동이 뚝 멈췄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듯 숨 한 번
가쁨없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침상 하단에 털썩 엎드렸다. 여인은 그의 엎드
린 등을 밟고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섰다.  이곳은 장방형의 아담한 밀실이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침상과 벽에는 눈뜨고 보기 민망한 춘화도(春畵圖)가 사
방에 걸려 있고 합환주며 거북이 등껍질 등의 여인을 즐겁게 해주는 은밀한 도
구들이 즐비하게 흩어져 있었다.  장님 사내는 침상 아래에 흩어져 있던 여인의
옷을 뒤에서 걸쳐 주었다. 여인은 그가 걸쳐주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다가 문득
배시시 웃으며 아직도 거대하게 발기하고 있는 그의 성기를 손가락으로 톡 건
드렸다.
  "돌아가 있어."
  장님 사내의 거구는 이내 방 한쪽의 은밀한 문을 통해 사라졌다. 여인은 하얀
허리띠를 잘근 동이며 사르르 탁자에 서려 앉았다. 옥같이 가늘고 흰 손이 탁자
아래를 가볍게 눌렀다. 순간 보라!
  "그그긍-- 쿠쿠쿠--"
  한 소리 기음에 이어 갑자기 방 안의 정경이 일변하는 것이 아닌가.  벽에 걸
린 춘화도며 방바닥의 거북이 껍질, 술 등이 차례대로 사라지더니 대신 그 자리
엔 수천 권의 책이 꽂힌 책장이며 일견해 보기에도 말할 수 없이 우아한 장식
의 가구들이 그윽한 조화를 이루며 나타났다. 그것들은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않
았고 마치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온 것 같았다.
  뿐인가, 분명히 느낌 뿐이겠지만.....
실내에 감돌던 질탕한 정사의 열기, 더운 열락의 비릿한 향기 등이 일시에 사라
지고 대신 이를 데 없이 청아하며 부드러운 분위기가 그 방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치 조금 전의 방이 음탕한 창녀(娼女)의 방이었다면 지금의 방은
요지선녀의 방 같았다.
  여인이 탁자 위에 놓인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을 때 그 방문을 밀고 한 사
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청의 비단 장삼에 이마에는 흰 띠를 우건(雨巾)으로 두
른 사내, 나이는 이제 사십 줄에 이르렀을까? 창백한 얼굴과 수염없는 파릇한
턱 등이 냉혹하며 지혜로운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그는 탁자의 여인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려 보인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오의 척살조(刺殺組)도 실패했습니다. 방금 연락이 들어 왔습니다."
  책을 행해 있던 여인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를 향했다. 보는 이의 마음조차 성
결하게 물들여 내는 듯한 그 눈빛이 가볍게 우울해졌다.
  "우양도 죽었단 말인가요?"
  중년사내는 이 모든 일의 책임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듯 황망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갔던 사람은 모두 다 죽었습니다."
  "우양이라면..... 대내(大內)의 금의위장(錦衣衛長)까지 지냈던 인물인데....."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를 포섭하는 데 황금 천 냥의 거액을 투자했습니다."
  "이젠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군요. 최고의 살수(殺手)들로 이루어졌던 제일
척살조(刺殺組)도 안 된다..... 관 외의 유랑검수(流浪劍手)들로 이루어졌던 제이
척살조도 안 된다..... 동영의 신비로운 인자(忍者)들로 구성됐던 제삼 척살조도
실패하더니 녹림(綠林)의 대도(大盜)로 이루어진 제사 척살조도 시체가 되었고
이젠 황금 천 냥의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끌어 들였던 황궁(皇宮)의 위사단까지
실패..... 도저히 방법이 없군요....."
  "하지만 이번 일에선 한 가지 수확이 있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뭔가요?"
  "마중뇌옥의 수뇌가 밝혀졌습니다."
  미녀의 성결한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번쩍 스쳐 지났다.
  "그는 누구죠?"
  "한당(寒堂)입니다."
  순간, 미녀의 고운 아미가 살풋 찡그려졌다.
  "한당이라고요? 설마하니 장순찰(張巡擦)께선 이십 년 전 배교의 교주였던 혈
신 한당을 말하는 건가요?"
  "바로 그입니다."
  "그럴 리가..... 그는 이십 년 전에 죽었잖아요. 삼천고수의 협공에 몰려 대파
산(大巴山) 불귀곡(不歸谷)으로 떨어져 죽었잖아요."
  "그러나 살아 있습니다. 이번에 그의 독문비기(獨門秘技)인 혈록식인구갑(血綠
食人龜甲)이 발견되었습니다. 본성의 정찰 무사 하나가 그 괴물에게 죽었습니
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미녀는 탄식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더욱 방법이 없게 되었군요..... 한당은 이십 년 전에도 천하제일의
살인마(殺人魔)였어요. 그런 그를 지금에 와서 누가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우울하게 말을 이었다.
  "불쌍한 사람..... 당신을 그 뇌옥에서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은 갈수록 희박해
지는군요..... 그 춥고 어두운 감옥에서 얼마나 고초를 겪고 있을지....."
  얼굴에 우울한 빛이 떠돌자 주위가 일시에 우울해지고 마는듯 하다. 그녀는
실로 무서운 아름다움의 소유자였다. 천하에 미녀는 많았다 하나 살풋 찌푸린
아미만으로도 온통 주위를 슬프게 만들 수 있는 미녀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었
다. 중년사내는 그 우울함에 경의를 표하듯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이번 일을 위하여 천하를 다 뒤졌습니다. 중원의 우수한 고수들은 말
할 것도 없고 관외, 동영까지 가서 고수들을 모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미녀의 눈이 그를 향했다.
  "그 한 곳이라면?"
  "낭인시장(浪人市場)입니다."
  "낭인시장?"
  실망이 컸던 것일까? 미녀는 아까보다도 더욱 깊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곳은..... 더 이상 오갈 데 없는 낭인무사들이 모여 무예를 구걸하듯 파는
곳이 아닌가요? 장순찰은 어찌 그런 곳을 말씀하시죠?"
  중년사내는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물론 낭인시장 자체로는 별 쓸모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확인된 것
은 아닙니다만 그 낭인시장 안에는 또 다른 제이의 낭인시장이 있다고 들었습
니다."
  "제이의 낭인시장?"
  "그렇습니다. 그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단의 놀라운 고수들이 있다고 합
니다. 왜 그들이 그런 곳에 있는지, 그들을 통제하는 사람이 누군지 하는 것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매우
많은 돈을 썼지만 아직 황금 이천 냥 정도의 여분이 있습니다. 그 돈을 모조리
다 퍼붓는다면 어쩌면.....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돈이
라면 부모까지 죽이는 자들이니까요."
  "하지만....."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소저."
  미녀는 입 밖까지 흘러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 사실 그녀는 물 위에
뜬 한 올의 실오라기라도 붙잡아야 할 형편이었다. 중년사내는 정중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그럼 승낙하신 것으로 믿고 그들과 접촉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아니예요."
  놀라 고개를 드는 중년사내를 향해 미녀는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곳엔 제가 직접 가겠어요."
  3. 제3장 낭인시장(浪人市場)
  중원의 대도(大都) 낙양(洛陽)--
  고대 왕국의 수도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로도 그 명성이 드높은
곳이지만 이곳에는 그런 것들보다도 더욱 유명한 낙양삼절(洛陽三絶)이 있었다.
  낙양삼절, 낙양을 찾는 사람으로서 보지 않고 갈 수 없다는 이 세 개의 명물
이란, 그 첫째는 북방산(北邙山)이었다. 현재와 과거를 잇는 수천, 수만의 무덤
이 그 육신을 한 점 부토로 눕히고 있는 곳.
  그 둘째는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였다. 낙양성 북문에 서면 빤히 올려다 보이는 안개 속의 장엄한
숭산 연봉, 그 한 곳 소실봉 중턱의 소림사야말로 천 년의 역사를 이어온 위엄
에 찬 증인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그럼 낙양삼절의 세 번째는 무엇일까? 그것은 산도, 절도 아니었
다. 그것은 다만 하나의 집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집은 실로 보통 집이 아니었
다.  우선, 이 집은 그 규모가 매우 컸다.  대도 낙양에 어찌 큰 집이 이곳 하나
뿐이겠는가만은 이 집은 유난히 컸다. 들리는 말로는 근 십만여 평에 달하는 방
대한 부지라 했다.
  또한 낙양성문 남쪽의 야산을 끼고 있는 이 거대한 집으로 남자들이 발을 옮
기고자 하면 그 아낙네들은 두 눈을 있는 대로 모조리 치켜뜬다 했다. 그 이유
는 이곳에는 그녀들보다 수백 배는 더 아름다운 미녀들이 구름처럼 득시글거리
기 때문이었다.
  천요무영각, 이곳은 여인네들이 남정네를 향해 웃음과 술, 기분 좋으면 몸까
지 파는 기루(妓樓)였다. 이곳은 남정네들이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털어 자신의
운(運)을 시험해 보는 도박장(賭博場)이었다. 이곳은 호기있는 선비들이 술 한잔
에 교교한 달빛을 노래하며 시 한 수 낭송하는 주점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열거한 이유보다도 훨씬 중요하고도 놀라운 의미가 천요무
영각에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낭인시장(浪人市場)이 천요무영각에 있다는 것이
었다.   매월 달 밝은 만월의 보름날, 천요무영각의 뒷산 소나무 아래로 달빛이
휘영청 걸린 곳을 어정거리며 모여드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허리나 어깨엔 검, 또는 각기 독특한 병기를 차고 모여드는 사람들. 하지만
그 형색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고 생의 의욕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한 점 은
자에 더 눈을 붉히는 위인들.
  낭인, 어떤 이유로든 무림계에선 더 이상 밥을 먹을 수 없다거나 그럴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 이들은 달빛 소나무 아래서 자신을 지목해 주는 한 개의 손가락
을 기다렸다. 또한 그 손가락이 쥐어주는 은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했다.
   비록 이미 무림계에선 버림받은 쓰레기 같은 무사들이라 해도 일반 평민들
의 세상에선 그럭저럭 쓸모가 있는 법이었다.   그 하나의 이유로 이들은 지목
되고 있었고 그 숫자는 놀랍도록 많았다.   낙양관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지난 일 년 동안 이 낭인 시장에서 거래된 낭인의 수는 거의 육천에 달하며, 이
낭인시장을 오간 돈의 액수는 무려 은자 십만 냥에 달했다고 했다.
  이것은 낙양 전 상인의 돈 중 거의 일 할이 바로 이 천요무영각으로 흘러들
어간 것을 의미했다.   그 낭인시장을 조성하여 낭인들이 받는 급전의 일 할을
소개 수수료로 챙기는 사람이 바로 천요무영각주였다.
  풍사향(風沙香)--.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제 겨우 이십을 약간 넘길까 말까한 젊은 미녀라 하는
데 그녀는 사실 낙양성 제일의 거부였다. 그녀가 연간 올리는 수입은 천요무영
각의 기루, 도박장, 주루를 합하여 은자 이만 냥 거기다가 낭인시장의 수수료를
합하면 거의 삼만 냥 정도의 거액을 매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낭인시장의 신비와 더불어 그녀 또한 극도의 신비로움에 감싸여 있는 여인이
었다. 그녀의 사생활은 일체 밝혀지지 않았다.   때는 폭양의 칠월 열 닷새 날,
올해의 일곱 번째 낭인시장이 열리는 낙양성으로 한 명의 시종을 거느린 준수
하기 이를 데 없는 미남 공자가 찾아들었다.
  *          *          *
  연추(蓮秋)는 아까부터 넋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매우 많은 사람들
을 보아왔지만 사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내는 처음 보기 때문이엇다. 사내는 비
단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점잖기 이를데 없었고 인품 또한 부드럽
고 고매하게 느껴졌다.
  "공자께선 낙양이 초행(初行)이신가요?"
  혀 끝에 녹아 붙는 나긋나긋한 어조, 말아올리는 말끝이며 향기가 풍기는 듯
한 일거수 일투족이 이름난 천요무영각의 일급기녀로서 조금의 손색도 없는듯
싶었다.  사내는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루는요?"
  여자를 경험해 보았냐는 뜻이리라.  말과 함께 연추는 사내의 동작을 시험해
보기 위해 매끄러운 우수로 그의 가슴을 살짝 더듬어 갔다.  순간, 사내는 거의
보일 듯 말 듯 몸을 뒤채며 여전히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내 말에는 콩과 연두를 섞어 모이를 주는 것이 좋을텐데..."
  엉뚱한 말, 연추는 더듬어 가던 손이 허탕을 치자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대다수의 사내란, 특히 천요무영각에 오는 사내들인란 하나같이 이곳의 미녀들
을 어떻게 품어볼 수 없을까 하는 응큼만 생각을 안고 오기 마련이었다.
천요무영각의 미녀들은 자신의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결코 몸을 맡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 사내는 그런 미녀가 은근히 뜻을 보이는 데도 오히려 피하
는 눈치가 아닌가? 거기다가 기껏 말문을 열어선 그 따위 하찮은 말 먹이 운운
이라니.
  "공자께선 소녀가 싫으세요?"
  내친 김이니 한번 더 시도해 보았다. 술도 이미 세 병이나 비운 뒤였다.  연
추는 사내의 품을 향해 과감하게 몸을 던졌다.  일순 사내의 몸이 빙글 돌았다.
이어 허리에 찬 검자루로 덥쳐드는 연추의 치맛자락을 들치는가 싶더니 우수를
그 속으로 쑥 집어넣었다.
  순간, 연추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고통이라거나 그런 것과는 다른 황
홀의 비음이랄까? 사내는 치맛 속으로 그녀의 은밀한 곳을 찔러 잡은 것이었다.
  비명인지 비음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을 터뜨리는 연추의 귓전으로 사내의 고
요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왜 이렇게 서두르지. 밤은 아직도 멀었는데?"
  사내가 손을 놓자 연추는 주춤 물러나선 하악하악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흘겼다.
  "나쁜 사람, 이제 보니 좋은 사람이 아니로군요."
  "하핫..... 연추, 너는 물론 아름답다. 그러나 낙양에 와서 낙양삼절이 시작되고
있는데 그것을 구경하지 않고서야 어찌 색의 흥인들 나겠느냐?"
  "그러고 보니..... 공자께선 낭인시장에 관심을....."
  오늘은 보름이었다. 바로 낭인시장이 열리는 날이던 것이었다.
  연추는 눈을 가늘게 흘겨 떴다.
  '여러가지로 호기심이 많은 사내로군. 흐흥..... 그러나 네가 오늘 내 치마폭에
감겨들지 않는다면 내 성을 갈고 말겠다..... 너 같은 남자는 처음이거든.'
  *         *          *
  "낭인들은 천지인황(天地人荒)의 네 종류 급수로 나뉘어져요. 이 중 천자급은
가장 비싼 낭인들로서 하루를 빌리는데 거의 은자 세 냥 가량 소요되지요. 이들
은 늙어 거의 쓸모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천자급쯤 되면 웬만한 강호 고수
와도 능히 겨룰 수 있는 실력자들이죠. 천자급 낭인들은 낭인이라기 보다는 돈
을 벌기 위해 이곳에 있다 하는 쪽이 맞을 거예요."
  분지 같은 산중턱에는 수백 개의 바위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바위 위에는
깎아 세운 석상처럼 표정없는 낭인들이 자신의 무기를 바위 아래 세워둔 채 앉
아 있었다.   바위는 색깔이 있었고 천자급은 황색(黃色)의 바위, 지자급은 적색
(赤色)의 바위, 인자급은 남색(藍色)의 바위, 황자급은 흑색(黑色)의 바위로 구분
한다 했다. 각 급수의 앞에는 녹의단삼(綠衣短衫)을 두른 묘령의 소녀들이 서서
낭인을 고르러 온 사람들과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낭인들은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소녀들과 고객이 흥정을 이루면 말
없이 고객의 뒤를 따라 나서곤 했다. 지금도 낭인들이 앉은 바위 앞에는 일견하
기에도 이삼백 명의 사람들이 눈빛을 빛내며 낭인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이미 인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잘 훈련된 가축
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중 어떤 사람은 직접 낭인에게 다가가 그의 팔근육
등을 만져보다가 소녀들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다.
  "각 수급의 낭인들이 지닌 무예수준은 본각에서 직접 정한 것이예요. 그러니
만큼 그들의 무예에 대한 책임 또한 본각에서 지는 것입니다. 그냥 눈으로 보시
기만 해도 충분할 거예요."
  묵묵히 이 거래를 바라보고 있던 미공자가 옆의 연추에게 입을 열었다.
  "낭인 개개인이 지닌 능력은 눈으로만 봐선 모를 것이 아닌가?"
  연추가 요염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낭인들에 대해선 따로 목록이 있어요. 비치된 낭인록(浪人錄)이라 하는 것으
로서 사람들은 먼저 그 낭인록을 본 후 자신에게 어울리는 낭인이 있다 생각했
을 때 이곳에서 직접 실물을 확인하는 것이예요.'
  "그 낭인록을 좀 볼 수 있을까?"
  낭인록, 매장(賣場)의 전면 세 개의 탁자에 비치되어 있는 낭인록은 모두 다
섯 권으로서 양피지를 묶어 쓴 것이 매우 두꺼워 보였다.
  미공자는 그 중 천자급 낭인록이라 쓰인 책자를 골라 펼쳐 들었다. 각 장마다
인물의 그림이 맨 위에 있고, 그 아래 그 사람의 지닌 특기며 성격, 내력, 그리
고 매매 금액들이 깨알처럼 기록되어 있었다.
  <음풍절수(陰風絶手) 진천풍(陳天風).
  악주 태생.
  나부파(羅浮派) 계열의  쌍필무예(雙筆武藝)에 익숙함.
  냉혹한 성격으로 고리대금 환수 전문가.
  하루 청부액 은자 두냥 닷푼.>
  <흑심마혼(黑心魔魂) 등강(登剛).
  냉혹무쌍, 잔인검예 소유자.>
  미공자는 싸늘하게 웃으며 낭인록을 놓았다. 하나같이 흑심이 어쩌고 탈혼,
음풍 등의 유치한 별호들이었다. 거기가, 냉혹한 성격이니 잔인한 검예니 하여
고객의 흥미를 돋구는 문구가 태반이었다. 이런 낭인을 사는 사람은 필경 나쁜
짓을 하고 싶은 자들이리라. 미공자가 원하는 사람은 이런 허수아비 같은 허명
의 낭인들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으로 강한 사람을 원했다.
  "낭인들은 이게 다인가?'
  연추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오늘 날짜에 배당된 사람들이예요. 실제로는 이 숫자의 세배 가량 돼요."
  "그럼 그들은 어디서 먹고 자는가?'
  "핏! 낭인시장을 구경하러 왔다면서 그것도 모르나요? 이들은 모두 본각에서
거두어 먹이고 재워요. 그렇지 않고 자신의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
기는 하지만요."
  "그리고 수수료를 받는단 말인가?"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전 자세한 내역은 잘 몰라
요."
  미공자는 무엇을 캐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묵묵히 쏘아보더니
돌연 그녀의 오른손을 덥석 잡아챘다. 연추는 흠칫 입을 열려다가 놀란 빛으로
급히 말을 삼켰다. 손 안으로 무엇인가가 잡혀들었다. 볼 순 없었지만 그녀는
즉시 그것이 매우 묵직한 은자란 것을 이내 알아챘다. 미공자의 목소리가 속삭
이듯 귓전으로 스며들었다.
  "각주(閣主) 풍사향을 만날 수 있을까?"
  연추는 순간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욕심도 많으시군요. 감히 그 분을 만나려 하시다니..... 하지만 특별한 손님이
시니 말은 해 보겠어요."
  손에 잡힌 은자의 감촉이 아무리 못 되도 다섯 냥은 족히 된다는 것을 짐작
하고 난 그녀는 더욱 더 흐드러지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결국 전 당신을 놓치고 마는군요."
  미공자를 안내한 것은 시녀였다. 그녀는 시종 한마디 말도 않고 앞장서서 길
을 안내했다. 몇 개인가의 회랑을 돌고 났을 때 미공자는 문득 한 줄기 기이한
빛을 얼굴에 떠올렸다. 그의 시선은 앞에서 요염하게 씰룩이는 시녀의 엉덩이를
향하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탄력이 있군..... 거기다가 힘이 실려 있다. 이 여자는 무예를 익
혔다..... 한낱 기루의 시녀가 왜 무예를 익혀야 했을까? 이 천요무영각은 함부로
볼 곳이 아니로군.....'
  "이곳이예요."
  침묵으로 안내하던 시녀의 시선이 힐끗 미공자를 향했다. 그들은 화려하기 이
를 데 없는 방 앞에 이르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방의 문살이란 것까지 옥(玉)
으로 이루어진 방이었다.
  "대단하군..... 이 안에 풍사향이 계신단 말인가?"
  "손님들과 어울려 주사위 놀이를 하고 계시지요."
  시녀가 먼저 안으로 들어서려는 것을 미공자는 웃으며 제지했다.
  "이미 전갈을 하였을 테니 그냥 들어가도록 하겠소."
  불쑥 문 안으로 들어서는 미공자, 시녀의 눈 앞으론 한 냥 쯤의 은자가 요염
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문은 쉽게 열렸다. 방 안에는 대여섯 명의 사람이
빙 둘러 앉아 주사위를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공자의 시선은 중앙의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명의 여자를 향해 쏘듯 박혀갔다. 묻지 않아도 그는 알 수 있었
다.
  '풍사향.....'
  여인 풍사향 앞에는 한 병의 술병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더 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류의 여인은 결코 평탄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리라. 항상 긴장하고 있
거나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처지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취하기 위해 먹는
술좌석에서 그렇듯 맑은 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옥으로 만든 주사위가 은쟁반 위를 굴러가는 음향은 일품이었다.
  방 안의 촛대와 등잔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팔랑거리는 촛불은
금으로 만든 기구들에 반사되어 융단이 깔린 바닥을 비추고 홍옥석으로 만든
상 위를 밝혀 주고 있었다.  주사위를 던지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리는 가운데
도박판의 은자는 점점 더 막대한 양이 되어가고 노름꾼들의 이마에도 비지땀이
흥건해졌다.  이곳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굴지의 대부호이거나 명성이 쟁쟁
한 인물들로서 원래 아녀자 따위와는 상종도 하지 않는 거물들이었다.허나, 이
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풍사향의 입가엔 보일 듯 말 듯한 냉소가 피어올라 있었
다.  평소에는 위풍이 당당하고 의젓한 대장부들이지만 일단 도박과 여자를 접
하게 되면 곧 개나 돼지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돌연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얼른 또 한 모금의 술을 들이켰다.  이때, 한쪽에서 걸직한 사내의 목소리
가들려왔다.
  "여주인 이번에는 내가 선을 잡을 차례인데 어울려 보지 않겠소?"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 개의 대백자(大白子)를 집어 도박대 위에올려놓았
다.
   바로 그때, 하나의 섬세한 손이 그녀의 뒤쪽에서 튀어나왔다. 이 손에는 두
개의 대백자가 들려 있었다.
  "소생도 이번 판에 걸겠소."
  풍사향의 시선이 힐끗 뒤쪽을 향했다.  미공자, 그의 수려한 용모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녀의 초롱한 시선은 가볍게 흐트러지는 듯 했으나 이내 말없이 고
개를 끄덕였다.
  "연추가 말한 공자님이시로군. 좋은 배짱이예요."
  "과찬의 말씀!"
  권하지도 않았는데 미공자는 풍사향의 옆에 덥석 앉았다.
  물주 노릇을 하는 자는 노동(魯東)의 호족인 부가(夫家) 집안의 육대 주인이
었다. 이 자는 평소에도 손가락에 낀 눈알만한 보석 반지를 자랑하는 허영심많
은 위인이었다.  그가 던진 주사위의 숫자는 열 하나였다.
  "아!"
  "좋은 수!"
  자기의 솜씨와 운을 자랑이라도 하듯 주위를 휘둘러보며 부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풍사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다가 살짝 은쟁반
위에 굴렸다.
  "와!"
  대청이 떠나갈 듯한 탄성, 주사위의 점수가 열 둘이었다.
  미공자도 담담하게 웃으며 떼구르르 굴렸다. 또 한번의 탄성이 터져나왔다.그
의 숫자도 열 둘이었다.  물주 부가는 아직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으나 그 미
소는 어색하기 이를 데없이 일그러져 마치 한 개의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뒤이어, 두 사람이 내건 대백자의 액수가 어마어마하게도 삼천
냥이나 되는 것을 보자 그의 안색은 누런 이빨보다도 더 누렇게 변했다.
  풍사향은 차가운 얼굴에 얼음 같은 조소를 피워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건 다만 심심풀이로 한 것이니 부노야가 만약 품에 은자를 지닌 게 없다
면 개짖는 소리를 내며 탁자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좋겠군요. 그럼 그것으로 지
금의 빛을 청산하는 것으로 하겠어요."
  방 안에는 즉시 요란한 개 짖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은자 삼천 냥
을 위해 탁자를 한 바퀴 아니라 수천 바퀴라도 돌 사람은 많기 때문이었다.
  풍사향은 싸늘하게 웃으며 힐끗 옆의 미공자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무승부이니 한 번 더 승부를 내는 것이 좋겠군요."
  미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이 여인이 남자들을 골리는 것을 취미
로 삼고있다는 것을 알아챈지라 좀 더 대범하게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의 액수에다 각기 삼천 냥 씩을 더하면 좋겠군요."
  삼천 냥에다 육천 냥이 더해지면 은자 구천 냥의 거액, 큰 대택을 세 채는 족
히 사고도 남을 이 거액이 한 판의 도박에 걸린다는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돌
변했다.
  풍사향도 가볍게 놀란 듯 아미를 살포시 찡그렸다. 허나, 그녀는 이내 담담하
게 웃으며 한결 낭랑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요."
  도박이 시작됐다. 먼저 주사위를 던진 쪽은 풍사향이었다.
  나온 숫자는 열 둘, 주사위 놀음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끝발이었다.
  풍사향은 아미를 아까보다 더욱 짙게 찌푸렸다. 상대가 고수라는 생각이었을
까? 주사위를 들어 올리는 그녀의 동작은 신중했다.
  "똑또르르....."
  순간 애석한 탄성이 터졌다.
  "열 하나로군."
  풍사향은 굳은 얼굴로 미공자를 주시했다. 그녀는 자신이 졌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곳이 도박판이었으므로 허나, 미공자는 장
난이라도 하듯 건성으로 휘익 주사위를 던졌다. 순간,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웃음 띤 얼굴로풍사향을 돌아보았다.
  "잘 안 되는구료. 두 번이나 비겼으니 사나이 체면으로 더 버틸 수가 없소.
여자인 당신이 이긴 것으로 합시다."  풍사향의 두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번쩍
스쳐 지났다. 그녀는 미공자가 일부러 양보한 것을 알고 있었다. 신중을 기했다
면 승자는 그였을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이 번졌다.
  "오랜만에 영웅을 만났으니 이 구천 냥으로 술다운 술을 한번 마셔봐야겠군
요."
  허나, 뜻밖에도 미공자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술을 잘하지 못하니....."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여호걸 풍사향이 누구에게 술자리를 자청하는 것도
그들로선 처음 보았거니와 그런 그녀의 호의를 거절할 수 있는 남자가 있으리
라곤 더 더욱 생각지 못한 그들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야 놀라건 말건 담담
하게 웃으며 미공자는 말을 이었다.
  "나는 그 구천 냥으로 풍낭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하오."
  4. 제4장 비밀번호 숙객(秘密番號 宿客)
  "제이의 낭인시장이라고?"
  웃던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는 것은 그리 보기좋은 일이 아니엇다. 일그러
질 뿐 아니라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의 목에다 칼을 들이댄다는 것은 더 더욱 보
기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공자의 목에는 분명히 칼이 닿아 있었다. 새파란 광채가 이글거리
는 한 자의 단검.  풍사향의 이 동작은 놀랍도록 빨랐다. 설사 눈치채고 있었다
해도 미처 피하지 못할 만큼 빠른 동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칼이 목에
닿기 무섭게 미공자가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 양쪽과 뒤에선
 "무쇠로 만든 올가미가 불쑥 튀어나와 미공자의 전신을 단단히 결박해 버렸다.
  미공자는 자신을 묶고 있는 강철 올가미를 힐끗 바라본 후 씁쓸하게 웃었다.
  "천요무영각에선 손님을 이렇게 대접한다는 걸 미처 몰랐군."
  풍사향은 어름처럼 냉엄한 얼굴로 말을 뱉았다.
  "어려운 말은 하지 않겠다. 너는 제이의 낭인시장을 어떻게 알았지? 그 이유
를 대지 못한다면 살아나갈 생각을 마라."
  "쯧쯧..... 나는 그들을 해치러 온 사람이 아니오. 오히려 도움을 청하러 온 사
람이오."
  "거짓말!"
  풍사향은 싸늘한 교갈과 함께 미공자의 미리카락을 왈칵 잡아챘다.
  "그렇다면 너는 처음부터 그 얘기를 하지 않....."
  그녀는 말을 잇다 말고 문득 한 줄기 놀람에 찬 빛을 떠올렸다.
  보라! 느닷없이 미공자의 머리 뒤로 찰랑찰랑 늘어진 미발을. 그녀가 미공자
의 유건을 잡아채는 바람에 유건이 벗겨지며 나타난 놀라운 광경은 구름결인
양 흐드러진 미발이었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절세의 용모가 그 아래 있었다. 말로는 형용조
차 되지 않는 아름다움이요,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봐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
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풍사향의 얼굴에서 놀람의 빛은 이내
사라졌다. 그녀는 싸늘한 냉소를 터뜨렸다.
  "흥, 정체까지 숨긴 고인이셨군. 바른 대로 고하시는 게 어떨까?"
  미공자, 아니 미녀는 고요하게 웃었다.
  "고할 것도, 아니할 것도 없어요. 난 분명히 제이의 낭인시장에 도움을 청하
러 왔어요. 당신이 기왕 그들과 연락이 닿을 수 있다면 말을 해주길 바래요."
  얼굴에 감도는 성결한 기운, 말투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풍사향은 아미
를 찡그렸다.
  "그럼..... 당신은 청부를 하기 위해 왔단 말인가?"
  "나는 이 일을 위해 황금 이천 냥 투자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풍사향은 입을 쩍 벌렸다. 황금 이천 냥, 낙양의 부호로 소문 난 그녀라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금액이 아닌가?
  풍사향은 묵묵히 미녀를 쏘아보다가 천천히 검을 거두어 들였다. 그녀는 탁자
에 놓인 술을 들어 꿀꺽 마시며 말을 이었다.
  "좋은 금액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예요."
  미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초조한 표정을 떠올렸다.
  "꼭 만나지 않으면 안 될 사연이 있어요."
  풍사향의 시선이 다시 그녀를 향했다. 마시던 술잔이 거칠게 놓였다.
  "흐흠, 난 사람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당신을 한 번 믿어보기로 하겠어요. 단,
당신은 이곳에 이틀 동안 감금되어 있어 해요."
  "그건 왜죠?"
  "그 동안 당신의 뒷조사를 해야 하니까. 신분이 확실치 않은 사람을 받아드릴
순 없지 않은가요?"
  "나는 신분을 숨기지 않겠어요. 지금이라도 말하라면 할 수 있어요."
  풍사향은 야릇하게 웃었다. 웃으며 그녀는 말했다.
  "난 사람의 입은 믿지 않아요. 아름다운 사람의 아름다운 입술은 더욱."
  *          *          *
  기다리는 사람에게 이틀은 매우 지루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미녀는 끈기있게
기다렸다. 풍사향이 과연 장담한 대로 자신의 신분을 이틀 안에 밝혀낼 수 있을
지 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자신의 행적은 거의 장막 속에 가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람 하나를 만나는 데도 철저한 이중, 삼중의 연락망을
통해서 만나던 그녀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해온 일은 그만큼의 철저한 비밀이
보장되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비밀을 정말로 꿰뚫어 낼 수 있다면
풍사향은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제이의 낭인
시장에 대해 기대해 볼 수도 있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미녀는 묶여 있었지만 하루 세 때의 식사는 사람이 들어와서 반드시 먹여 주
었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째의 날이 밝은 칠월 열이레의 새벽, 미녀가 묶여 있
는 방으로는 한 명의 무장한 소녀가 들어섰다.
  "여협(女俠)을 모셔 오라는 분부예요."
  그녀의 어조는 정중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투와는 달리 몹시 투박한 태도로
검은 천을 꺼내 미녀의 눈을 가렸다. 이어, 튼튼한 끈으로 그녀의 양손을 단단
히 묶어냈다.   슬쩍 힘을 주어보고 난 그녀는 그것이 도검에도 끊어지지 않는
교룡삭(蛟龍索)이란 것을 알고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꼭 이렇게 해야 하나요?"
  "명령이예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천오무영각의 뒷문이라고 여겨지는 곳을
지나 미녀는 한 대의 마차에 태워졌다. 마차는 매우 긴 시간을 달려갔다. 거의
하루쯤의 시간을 달렸다고 여겨졌을 때 미녀는 또 다른 마차에 옮겨졌으며 다
시 하루가 더 지난 뒤에야 간신히 마차는 멈추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시종 미녀의 옆에 바싹 붙어 있던 소녀가 미녀의 눈에
둘려 있던 검은 천을 풀어 주었다.
  "내리세요"
  마차 밖은 어느 산등성이었다. 밖에는 가는 실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빗물에
젖어 풀잎이 파릇하게 물기를 떨구고 있었다. 가시덤불이 무성하게 돋은 산벼랑
뒤로 한 개의 은밀한 동굴이 있었다.   미녀 둘이 다가서자 동굴 입구에 서 있
던 녹의소녀 하나가 공손히 예의를 올려왔다.
  "어서 오세요. 각주께선 이미 오래 전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녀는 시선을 모두어 주위의 풍경을 가볍게 둘러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 주세요."
  동굴은 매우 작았다. 이런 곳에 무슨 사람이 있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들어서
자 곧장 끝이었다. 허나, 녹의소녀는 태연하게 동굴 한쪽의 돌출부를 눌렀다.
  그러자, 보라!
  그그긍-- 한 소리 기음과 더불어 동굴의 끝 부분이 스르르 밀려나가더니 그
곳으로 하나의 은밀한 통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통로는 아래쪽으로 긴 계단이 나 있었다. 계단은 얼마나 긴지 그 끝을 거의
알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양쪽의 석벽엔 일 장 간격으로 일정하게 유등(油燈)이
걸려 어둠을 밝혀 주고 있었다.
  '보기와는 달리 굉장한 구조로구나..... 이 정도의 동굴을 만들자면 많은 돈과
인력이 들었을 터, 풍사향은 왜 이런 동굴이 필요한 것일까?"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계단은 마침내 끝이 났다.   두
명의 엷은 나삼을 걸친 소녀들이 일행을 마중했다. 그녀들의 뒤로는 서천동부
(西天洞府)란 글귀가 쓰인 커다란 문이 하나 있었다. 문 안은 곧장 복도였다. 복
도 끝에 화려한 대청이 은은히 불빛을 보였다.
  "이곳입니다."
  소녀들은 공손히 예의를 올려 보인 후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미녀는
서천동부란 글귀를 한 차례 더 올려다 본 후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일신에
보라색 나삼을 걸친 여자 하나가 붉은 탁자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풍사향이었다. 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풍사향은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세요. 일전에는 무례를 범해 죄송했어요."
  공손한 말투였다. 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당신의 오해는 풀렸나요?'
  풍사향도 따라 웃었다.
  "그럼요. 남해(南海)의 성녀(聖女)이며 중원제일미(中原第一美)란 이름으로 일
세를 풍미한 일운연(一雲燕) 소저를 누가 감히 더 의심할 수 있겠어요. 제가 생
각 못한 것은 그런 고귀한 분이 낭인시장까지 오신 것이지요. 거듭 무례를 용서
빌어요."
  순간, 미녀의 옥용엔 크게 놀란 빛이 스쳐갔다. 그는 이 여자가 정말로 자신
의 정체를 밝힐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었다.
  "풍사향..... 당신은 정말 대단하군요."
  "직업이니까요. 하지만 이 땅의 제일 큰 문파인 취라성(翠羅城)의 둘째 소성
주(小城主)와 약혼까지 하신 일운연 소저라는 사실을 밝히고도 믿어지질 않았어
요. 그러나 요 며칠째 천요무영각 주위를 배회하는 일단의 고수들이 바로 취라
성의 정무순찰(正武巡察) 장개(張蓋) 대협을 중심으로 한 취라성의 고수들이란
것을 알고는 완전히 의심을 풀었지요."
  오오..... 취라성, 이 도대체 무슨 이름인가?
  정의로운 협행을 그 신조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을 정도(正道)라 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악행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의 모임을 사도(邪道)라 한다
면..... 취라성은 바로 그 정도의 대표적인 문파였다. 일명 취라신성(翠羅神城)이
라고도 했다.
  -- 검성(劍聖) 서천무개(西天武蓋)!
  일생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던 희대의 협객이자 정의의 무인인 그를
중심으로 한 일만의 대무인군단(大武人軍團).   숭산 소림이 천 년의 무예를 계
승해 왔으며, 도가의 무당이 고유의 검술로 일천 성상을 검도지왕으로 군림해
왔지만, 당금에 이르러선 그 누구도 검성 서천무개의 위명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는 한마디로 무예의 신(神)이었다. 온갖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최고의
무인이었다. 또한 그런 그가 이끄는 취라성은 아무도 넘보지 못할 무림제일의
문파로 일컬어지니.....   사도의 신비세력 천종(天宗)과 더불어 취라성은 절대성
역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장개라면 바로 미녀에게 낭인시장을 탐사해 볼 것을 주장했던 그 중
년사내이리라, 미녀 일운연이 실종하자 종적을 밝히기 위해 천요무영각 주위를
얼쩡거린 것이 틀림없었다.   풍사향은 그윽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전 아직도 천하의 일운연 소저께서 왜 낭인시장에 도움을 청하시는
지는 모르겠어요. 당신의 권력이라면 태산이라도 마음대로 움직이실수 있을 텐
데요. 하늘의 별을 따고 싶다면 그 별도 딸 수 있을 텐데요."
  "그 이유는 지금 말씀드릴 수 없어요. 오직 이 일을 맡은 사람에게만 말할 수
있어요. 가왕 의심을 풀었다면 제이의 낭인시장에 대해서도 제게 말해줄 수 있
겠군요."
  "황금 이천 냥이라면 작은 금액이 아니예요. 더구나 이토록 확실한 신분의
귀인께서 말씀하신 부탁을 들어드리지 않을 수 없지요. 단, 이 일엔 절대의 비
밀이 보장될 수 있어야 해요."
  "그건 오히려 제가 더 바랄 일이로군요."
  "좋아요. 일운연 소저의 명성을 믿겠어요."
   풍사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즉시 한 명의
시녀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벽의 한쪽에 드리워진 휘장을 걷었다.
  그 안에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투명하고 빳빳한 천 하나가 가로 일 장의 크
기로 드리워져 있었고, 휘장의 양쪽으로는 두 개의 어른 주먹만한 푸른 구슬이
박혀 있었다. 시녀는 방 안의 불을 다 끄고서야 밖으로 걸어나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풍사향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제이의 낭인시장이란 확실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저는 낭인시장을 거느리고
있긴 하지만 이 제이의 낭인시장만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이곳은 하나
의 독립된 조직이예요. 그렇다고 해서 제이의 낭인시장이 우두머리가 있고 부하
가 있는 계급체계라는 말은 아니예요.
  이들은 개개인이 모두 자유인이지요. 설사 이곳에서 일운연 소저가 한 사람을
지목했다고 해도 그가 일을 하기 싫다면 강요할 수 없게 되요. 저는 다만 고객
과 제이의 낭인시장을 연결해 주는 연락인에 불과하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각자가 따로 행동하나요?"
  "철저하게 개인생활을 하지요. 가깝게는 이곳 낙양성에서부터 멀리는 남해며
북쪽의 대사막까지 흩어져 있어요. 하지만 황금 이천 냥이라면 이들도 마다하지
는 않을 거예요. 자, 전면의 벽을 봐 주세요, 소저."
   일운연은 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 개의 푸
른 구슬이 각기 희뿌연 광채를 내뿜기 시작하더니 다음 순간 벽의 흰 천에 뚜
렷한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생은 흘러가는 구름 같은 것,  검 또한 봄날의 나비 같은 것,
  검의 광채는 시들고,  영웅의 웅지는 기미줄에 잠드니,
  먼지 끼어 녹슨 보검 가슴에 안고,  발하는 유성을 우러러 보노라.
  이 한 몸 흘러 의탁한 곳 어디인가?  아름다운 여인의 가슴에 기대어
  한 잔 술에 시름 잊다.>
  몇 줄의 장엄한 싯구에 이어 한 사람의  모습이 그 화면에 나타났다. 얼굴의
아래에는 다시 빽빽한 글이 쓰여 있었다.
  <고검유혼(孤劍幽魂) 상백(常白)!
  삼십육수회풍무류검법(三十六手廻風無流劍法)의 달인!
  내력 불명, 여자는 죽이지 않음.>
  팍--! 한 소리 기음에 이어 또 다른 사람의 얼굴과 내력이 적힌 글이 화면에
나타났다.
  <산예검인(珊藝劍人) 무거(無居)!
  백서른 자루 비검(飛劍)의 명인(名人)! 내력 불명, 한 번 실패하면 두 번 손을
쓰지 않는 괴이한 성격.>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던 일운연의 시선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불과 두 사람
뿐이었지만..... 이 두 사람은 실로 놀라운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구검유혼 상백이라면 십 년 전에 유례가 없는 대복수극으로 흉명을 떨친 인
물. 그의 복수대상은 당시 명성 높던 송운노협(松雲老俠) 조영의 일가였는데,고
검유혼 상백은 그 송운노협의 송운장(松雲莊) 일가 이백삼십이 명을 모조리 도
륙해 죽였던 것이다. 그가 죽이지 않은 인물은 송운장의 여인들 밖에 없었다.
그밖에 어린 아이까지 참살해 죽인 이 복수극은 무림에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송운장이 속해 있던 서북무림(西北武林)의 고수들은 이 사건을 무인의 한계와
긍지를 침범한 중대한 사건으로 규정짓고, 오백 인의 척살단을 조직하여 고검유
혼 상백의 뒤를 추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국, 상백은 이 오백 인의 척살단에 쫓긴 끝에 종남산 비운곡에 떨어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뿐인가? 산예검인 무거는 더욱 놀라운 인물이었다. 그는
어떤 문파에도 적(籍)을 두지 않은 방랑수업자였다. 그는 한 번 뻗으면 이미 적
의 목을 꿰뚫는 절쾌의 비도수법을 사용하였는데 그와 비무를 한 인물은 모두
이 비도수법에 의해 잔인하게 죽고 말았던 것이니.....
  -- 수업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이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이들이
나를 죽이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문파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
를 멸시하고 경멸했다.--
  적도 없는 방랑수업자에게 당했다는 자존심이 그를 향한 일련의 추적대를 만
들게 되었고..... 결국, 삼십이 인의 고수를 연하여 산예 검인이라는 불리웠던 이
공포의 방랑수업자는 분하(分河)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이
다.
  헌데, 그러한 고검유혼이며 산예검인의 명호가 지금 이 자리에 버젓이 나타나
고 있으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랴.  비단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뒤를 이
어 화폭엔 십수 명의 초상과 내력이 소개되었는데 그 인물들 또한 앞의 두 사
람에 못지않은 놀라운 내력의 고수자들이었다.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이들이 모두 자의이든 타의이든 무림에선 더 이상 생
활할 수 없었던 내력의 인물들이라는 것.
  "극강의 무예를 갖고도 이십 년 이래로 어쩔 수 없이 무림에서 사라지고 말
았던 사람들이 이곳에 모조리 모여 있구나..... 이 거물들이 낭인시장의 제이선을
맡고 있을 줄이야.....'
  일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무예는 모두 한 문파의 장문지존에 버금가
는 것이었다. 낙양의 대부호요, 천하의 여걸인 풍사향이 단지 연락인을 자처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운연은 정신을 바짝 차려 화폭에 집중했다. 그녀로
선 자신의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이 중에서 골라 내야만 천하 제일의 살인
마 한당의 마중뇌옥을 겁없이 쳐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을......
  다시 십여 명의 사람들이 화폭을 스쳐갔다. 도합 이십삼 명이었다. 그리고,
이십사 명째,   팍--! 불이 들어 왔는 데도 화폭엔 사람이 없었다. 온통 새까만
화면이었다.
  "고장인가요? 저 화면에 아무 것도 없군요."
  즉시 어둠 속에서 풍사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없는 것이 아니예요. 그는 제이의 낭인시장의 마지막 사람이예요."
  "그런데 어째서 초상도, 내력도 없는 거죠?"
  "유감스럽게도 거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돌연, 팍--! 하고 실내에 불이 들어왔다.
  풍사향은 탁자에 요염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말간 호박색 액체가 담긴 술
잔을 입에 대며 생긋 웃어보였다.
  "한 잔 어때요?"
  일운연은 고개를 저었다.
  "술은 못해요."
  "명가의 규수답군요. 전 열두 살 때부터 술을 마셨지요. 이젠 술이 없으면 아
무 것도 못해요."
  풍사향은 술을 입으로 핥듯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스물네 번째의 사람..... 그는 신비의 인물이예요. 그는 너무 많은 무기를 사
용하지요. 어떤 때는 검이다가도 어떤 때는 칼이며, 어떤 때는 창이나 부채예요.
우린 그의 특기가 어떤 것인지 몰라요. 무기사용이 그러니 사문이나 사승내력은
더욱 알 수 없어요. 내력, 출신, 심지어는 그의 본 이름조차 알지 못하지요."
  "그럼.....?"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단 한가지 뿐이예요."
  "그게 뭔가요?"
  "그가 이십 세에서 삼십 세 사이의 나이라는 거예요."
  일운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내력불명의 사람을 당신들은 믿고 일을 맡기나요?"
  "우리가 믿는 것은 그의 실력이죠. 그는 요 이 년 동안에 열두 건의 일을
맡았었는데 낭인시장의 최고급 고수들조차 고개를 젓던 그 일들을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완벽하게 해 냈어요."
  "흐흠..... 그럼 그의 별호는?"
  "숙객(宿客)!"
  풍사향은 신비롭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늘 잠을 자지요. 밤낮없이 잠을 잔답니다. 그가 잠을 자지 않는 시간은
술을 마실 때와 측간에 있을 때,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를 볼 때밖에 없어요. 그
래서 우린 그를 숙객이라 부르죠."
  5. 제5장 투견장의 괴청년
     (鬪犬場의 怪靑年)
  "풍사향과 말인가?"
  목소리는 음산했다. 이 음산한 목소리는 대전(大殿)에 걸린 거대한 수정거울
속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다. 대전의 바닥은 굼실굼실 회백색의 연기가 감돌
고..... 그 연기 속에 한 인영이 부복해 있었다.
  "십중팔구는 틀림없습니다."
  "그가 일운연이란 확실한 증거라도 있는가?"
  "일운연의 종적은 묘연하게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낙양성 언저리에서 감시망
을 피해 갔습니다. 낙양성에는 풍사향이 있고 풍사향에게는 낭인시장이 있습니
다."
  "그렇다면....."
  목소리가 무겁게 깔렸다.
  "일운연이 제이의 낭인시장을 지목하고 있단 말인가?"
  "속하의 짐작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제이의 낭인시장이라 해도 크게 겁낼 것
은 없다고 봅니다. 일운연이 아무리 많은 돈을 걸어도 그들은 상대가 본옥임을
알고나면 틀림없이 거절한 것입니다. 더구나 옥주(獄主)님을 상대한다면 말입니
다."
  일순, 수정거울 속에 돌연 한 개의 투명한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 온 얼굴은
흉터로 뒤덮였다. 지렁이가 기어간 듯한 끔찍한 상흔이며, 이 공포스러운 얼굴
의 이마에는 화염 모양의 붉은 화인(火印)이 찍혀 있었다. 입술은 열리지도 않
았는데 목소리가 그 얼굴에서 흘러나왔다.
  "그렇지 않아..... 낭인시장도 풍사향도 나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고 있
는 것은..... 숙객이다...."
  부복해 있던 사내는 순간, 의아한 빛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옥주가 저런 말투를 쓰는 것은 처음 보았
다. 마치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 듯한 떨떠름한 어조.  마중뇌옥의 한당, 이
이름 앞에는 천하의 모든 이가 공포에 떨었다.
  그것이 살인마 한당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한당이 두려움에 찬 어조를
꺼내고 있는 것이다.  '숙객..... 숙객이라고.....?'
  이때 돌연, 거울 속에서 한 줄기 선렬하도록 붉은 광채가 번갯불처럼 뻗어나
왔다.
  슈파앗--!
  광채가 바닥에 닿자 즉시 붉은 화염의 회오리가 소용돌이쳤다.
  순간, 보라!
  그 화염의 회오리 속에는 하늘하늘한 인영 하나가 어느새 환상처럼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닌가?
  타오르듯 짙붉은 혈의(血衣). 붉은 망또를 어깨 뒤로 드리웠으며 그런 차림에
비추어 안색은 지나치게 창백한 한 명의 소녀. 얼굴 왼쪽으로 그어진 긴 검혼
(劍痕)이 오히려 기이한 매력을 더했다.  혈의소녀는 모습을 보이기 무섭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혈지주(血蜘蛛)가 삼가 옥주를 뵈어요."
  거울 속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웃었다.
  "살인의 여왕이여! 나를 위해 일을 하나 해주겠는가?"
  "하명 기다립니다."
  "그대는 한 사람을 죽여 달라."
  "누구를?"
  "숙객."
  순간, 혈의소녀는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불길 속에 그녀의 가지런한 치아
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심각한 어조로 말씀하시기에 옥황상제의 목이라도 따오라는 것으로..... 고작
사람 하나를 죽이는데 그렇게 많은 말씀이 계십니까?
  거울 속의 어조가 웅웅 울리듯 터져 나왔다.
  "내 평생에 단 한 사람을 눈여겨 보고 그 한 사람만을 두려워 해 왔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숙객이다. 그대는 이 일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만약 그를 죽
일 수 없다고 여겨지면 그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죽이도록. 개미새끼 한 마
리도 그의 옆으로 다가갈 수 없도록 만들라. 한당의 진심어린 부탁으로 여기
라."
  혈지주는 혈광이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거울 속의 흉안을 잠시 우러러 보더니
순간, 그 자리에서 몸을 빙글 돌렸다.
  "목숨을 바쳐 명령을!"
  광란하는 듯한 불길의 회오리가 대전 저쪽으로 폭발해 갔다. 짙은 혈연(血煙)
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           *           *
  <답신(答信).
  대우에 감사드리나 정중히 사절함.
  고검유혼 상백.>
  <황금 이천 냥은 좋은 액수이지만 아직
맡은 일이 있음.
  산예검인 무거.>
  <다른 일이 있는 관계로 정중히 사절.
  독패신창(獨覇神槍) 우경(尤勁).>
  풍사향은 비둘기 다리에 매달려 온 스물두 번째 답신을 풀어 본 다음 싸늘하
게 웃으며 서신을 내팽개쳤다.
  "겁장이들 같으니. 한당 따위가 그토록 겁이 난단 말인가? 산예검인이나 독패
신창은 다른 일이 없어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요. 그런데도 내빼는 것은
한당을 두려워 하는 탓이예요."
  그녀의 흥분한 어조가 짤랑짤랑 번지는 속을 일운연은 우울하게 앉아있었다.
  한당, 그가 이끄는 마중뇌옥에 대한 서신을 낭인시장의 고수들에게 보낸 것이
바로 사흘 전의 일이었다. 이들이 지닌 능력을 감안하여 특별히 취라성에 전갈
을 보내어 청부액수도 황금 일천 냥을 더해 도합 삼천 냥의 거액을 걸었다. 그
런데도 전해오는 답신의 내용은 한결같이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돈이라면 그 어떤 일도 서슴치 않는 그들을 이토록 망설이게 하는 원인은 무
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한당때문이리라.한당과 마주선다는 것은 곧 죽
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이들을 망설이게 하는 것이었
다.
  푸르륵--
  스물세 번째 답신이었다. 풍사향은 그들만의 독특한 표지인 붉은 끈이 달려
있는 그 비둘기를 힐끗 바라보더니 냉랭한 웃음을 터뜨렸다.
  "볼 것도 없어요. 보나마나 일이 있어 못하겠다는 투의 말일 거예요. 이 따위
비겁한 작자들을 그 동안 나는 우상 받들 듯 모셔댔단 말인가?"
  일운연은 그녀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비둘기 다리에 묶인 전서를
풀어냈다.
  <답신.
  풍사향 소저에게 권함.  이 세상에 청부를 받지 못할 사람이 세 사람 있음.
  취라성주 서천노주(西天老主)와 천종(天宗)의 종주(宗主), 그리고 한당임.  이
세 사람에 대한 청부는 어떤 일이있어도 거절하는 것이 좋을 것임.
  독조수(毒爪手) 위걸(魏傑)>
  "흥! 무섭다는 말을 하기 어려우니 이젠 취라성주와 천종 종주까지 끌어 들였
군. 정말 한심한 작자들이 아닐 수 없구나."
  어깨너머로 서신의 내용을 힐끗 바라보고 난 풍사향의 말이었다. 일운연은 씁
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되니 어쩔 수 없군요. 풍소저의 노고에 감사드리는 것으로서 이 일은
없던 것으로 해야겠어요."
  풍사향이 급히 말했다.
  "가만 있어 봐요.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잖아요?"
  일운연은 그 사람이라고 이들과 다를 것이 있겠냐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녀는 풍사향의 얼굴에 문득 피어오른 소녀 같은 천진한 표정을 읽고는 급히 말
을 삼켰다. 그 표정은 마치 선물을 사갖고 오는 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낙의 표정
같았다. 풍사향 같은 여인은 그 살아온 과정에 비추어 볼 때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몹시 드물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여인에게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인물에게 일운연은 갑자기 가벼운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숙객..... 숙객이라 했던가?'
  파르륵-- 문득 창 밖에서 비둘기의 날개짓 소리가 들려왔다.
  두 여인은 긴장된 표정으로 급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윽고,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기이한 비둘기 한 마리가 푸르륵 날아들어왔
다. 이 비둘기는 방 안으로 들어선 후에도 자신의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
매는 모습이 역력했다.
  풍사향은 그 비틀거리는 비둘기를 잡아채며 까르르 흐드러진 웃음을터뜨렸다.
  "세상에! 서신을 전하러 간 비둘기까지 술을 먹여 보냈군요. 과연 숙객이군."
  술취한 비둘기라..... 일운연도 피식 실소를 흘렸다.
  두 사람은 급히 비둘기 다리에 묶인 끈을 풀었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글
귀가 쓰여 있었다.
  <골치아픈 얘기는 그만하고 와서 술이나 한잔 하자.
  숙객.>
  일운연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이죠?"
  풍사향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의 나쁜 취미 중 하나가 바로 여자를 앉혀 놓고 술을 마시는 거예요. 아무
리 그렇지만 놀랍군요. 난 서신 속에 낭자의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벌
써 여자냄새를 맡았어요."
  얼떨떨한 일운연의 표정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모르겠나요? 이제부터 소저가 할 일은 좋은 술을 한 병 구하는 것이
라구요. 그는 술냄새만 맡아도 그것이 몇 년 묵은 것인지 알아내 버리는 희대의
주당이거든요."
  *          *          *
  낙양에서 백 리쯤 떨어진 곳엔 개봉부(開封府)가 있었다. 서쪽으론 숭산이요,
북쪽으론 태행산(太行山), 남으론 이수(伊水)요, 동으로 황하(黃河)가 흐르는 일
대의 명승고도.   이 지역의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사통팔달한 지리적 여건으
로 몹시 활발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더우기 다른 지방에선 볼 수도 없는 하
나의 유흥거리로 투견(鬪犬)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문제는, 사람들이 투견을
즐긴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개를 서로 싸움시켜 놓고 거기에다 돈을 건다거
나, 노름판을 만들어 버리는 데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투견을 하다가 집과 토지를 몽땅 날려 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이런 심리를 노려 강한 싸움 개를 길 남의 재산을 노리는 불한당들까지 설치는
판이었다.  관부에서는 여러 차례 이러한 투견을 하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했으
나 워낙 뿌리 깊은 놀이 풍습이고 보니 어쩔 수 없어 이제는 거의 방관하고 있
는 상태였다.   한낮의 폭양이 기승를 부리는 미시경(未時更)인데도 지금 성으
로 들어 가는 관도의 길목에선 투견놀음으로 후끈한 열기가 달아 오르고 있었
다.  길에서 십여 장쯤 들어간 곳에 사방 삼장여의 새끼줄이 둘러쳐 있고 그 안
에선피로 온 몸을 물들인 개 두마리가 서로의목줄을 끊어 놓기 위해 사력을 다
해 싸우고있었다.  그 주위로는 두 눈을 시뻘겋게 물들인사람들이 있었다.
  "물어, 꽉 물어 제끼라구, 이 병신아!"
  "피해, 그것도 못 피하니?"
  찌렁 공간을 울리는 외침이며 왁작한소음, 개와 사람이 동시에 피워 올리는
열기가 찐득한 오후였다.  싸움은 하얀 털의 개와 검은 털의 개사이에 벌어지고
있었는데 검은 털의 개가 좀 더 우세해 보였다. 이미 적의 목을 서너차례 물어
뜯어 놓은 그 놈은 기세등등하여 덮쳐 갔으며, 반면에 목이 피로 물든 하얀 털
의 개는 이미 싸울 의욕을 잃은 듯 연신 물러나고 있었다. 몹시 뚱뚱한 사내가
개의 주인인 듯 연신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 병신아, 피하란 말이다. 몸을 돌리면서 물어!"
  그는 이미 은자 이십 냥을 잃었다. 이번에도 지면은 은자 사십 냥째 잃는 셈
이었다.  그는 목우(木雨)라는 이름의 사람으로서 본시는 선량한 농민이었으나,
이 투견에 맛을 들인 후로는 농사고 뭐고 모조리 다 팽개치고 투견놀음에만 몰
두하고 있었다. 허리에 찬 긴 칼이 말해 주듯 그는 이미 이 일대에서 이름난 투
견꾼이었다. 그의 두 눈은 광란의 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이때, 관도 저편에선 한 필의 말이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말은 말이되
이상한 말이었다. 분명히 사람이 타고 있는데도 말에는 안장이 없었고 고삐도
없었다. 게다가 또 이 말은 지나치게 늙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마치 거북이
가 힘없이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말의 몰골은 대충 그렇다고 해도 이 말을 타
고 있는 주인은 더욱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탄 채 끄덕끄덕 졸고 있었
던 것이다.
  머리에는 햇살을 피하기 위해 차양을 쓰고 있는 탓으로 그 용모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풍기는 분위기 같은 것으로 볼 때는 나이 삼십을 아직 넘기
지 않은 청년임이 분명했다.   그는 속이 다 비치는 농부들이 입는 무명적삼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었고, 아랫바지도 무릎까지 간신힌 내려 올까 싶은 차림이
었다.
  이십대의 나이란 한창 멋을 부릴 나이며 더구나 낮에 끄덕끄덕 졸기는커녕
밤에도 잠이 안 와 펄펄 날아 다닐 나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다 늙은 촌놈
같은 청년의 이런 행색과 태도는 몹시 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말을 타
고 다가오고 있는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투견에 미쳐 있었던 것이다.
  "물어! 물어 죽여, 이 병신아!"
  문득, 무심히 그 자리를 스쳐가던 말이 뚝 멈춰 섰다.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
던 청년의 시선이 차양 새로 싸늘히 장내를 쏘아갔다.
  깨앵, 깨앵--.
  하얀 털의 개가 비명을 지르며 우리 속을 도망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좁
은 우리에서 가면 어딜 가겠는가? 검은 털의 개는 집요하게 도망가는 흰 개를
물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욱 광란했다. 그들은 어서 빨리 검은 개든 흰 개든 한쪽이 다른
쪽을 잔인하게 물어 죽이길 바랬다. 그리하여, 이 무더운 여름 하늘에 찐뜩한
피내음이 번지길 바랬다.   청년은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그는 말없이 장내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나 그는 별반 개의치 않고
그들 속으로 파고 들었다. 새끼줄로 가로쳐진 우리가 나타나자 그것도 성큼 넘
었다. 사람들의 놀란 시선을 안고 그는 싸우고 있는 두 마리 개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흰 개는 이미 반 죽음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검은 개가 그 놈의 목을 사정없이
물어 뜯고 있었다.   청년은 발을 휘둘러 검은 개를 찼다. 개는 흠칫하더니 이
내 흰 이빨을 드러내며 청년을 쏘아 보았다.   청년도 말없이 그 놈을 마주 쏘
아보았다.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차양 속의 시선.   무슨 일인지..... 그 흉악
한 싸움개가 꼬리를 말고 주춤 물러섰다. 청년은 묵묵히 바닥에 쓰러진 흰 개를
안아 들었다.
  이때, 흰 개의 주인인 목우가 득달하듯 울타리를 넘었다. 그는 청년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네 놈은 뭐냐?"
  청년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순간, 그렇잖아도 개 싸움에 혈압
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목우는 사정없이 주먹을 쳐올렸다.   사람들은 개 싸움
에 이어 벌어진 이 사람 싸움을 흥미롭게 바라 보았다.   허나, 땅바닥에 처박
힌 것은 엉뚱하게도 주먹을 쳐간 목우였다. 그는 쓰러져서도 이게 어떻게 된 영
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멀뚱멀뚱 뜨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 놈은 웬 놈이냐? 왜 남의 싸우던 개를 집어들고 야단이야?"
  청년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순간, 그는 대답 대신 앞발로 쓰러진 목우
의 목을 지그시 눌렀다. 숨이 막혀 캑캑대는 목우의 귓전으로 청년의 싸늘한 목
소리가 파고 들었다.
  "당신의 개는 이미 싸울 만큼 싸웠어."
  "우욱....."
  벌겋게 충혈되어 가는 목우의 얼굴 위로 은자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청년
은 빙글 몸을 돌렸다. 목우는 땅에 떨어진 은자가 한 냥인 것을 보자 청년의 뒷
등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개는 최소한 세 냥은 줘야 한다구!"
  순간, 주춤 몸을 일으키던 그의 복부로 무섭도록 빠른 주먹 하나가 날카롭게
틀어 박혔다. 퍽--!
  "욱--!"
  싸늘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다 죽어가는 개가 세 냥이란 말인가?
  허나, 목우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점심 때 자신이 먹었던 음식이 어떤 것인가를 입 밖으로 다시 뱉아 엄숙하
게 검토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돌연, 걸어 나가던 청년의 앞을 일단의 무
리들이 막아섰다.
  "이봐, 친구! 그 개를 그렇게 싸게 들고 가려는가?"
  "제 값은 주고 가야 할 거 아냐."
  험악한 얼굴들, 번뜩이는 칼날, 투견싸움으로 먹고 사는 불한당들이 틀림없었
다.   청년의 시선이 차양 속으로 차갑게 번뜩였다. 그는 갑자기 가장 앞에 선
장한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다음 순간, 놀랍게도 검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뚝 부러져 나갔다. 이어, 부러진 조각을 장난하듯 흩뿌리더니 검 조각은그대로
바위에 박혀 버리고 말았다.
  쨍--! 청년이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무리들은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주춤 뒤로 물러났다. 청년은 개를 말 등에 툭 얹고는 날렵하게 그 위로 올랐다.
  "가자."
  딸랑딸랑-- 말방울 소리가 사람들의 귓전으로 스물스물 스며들었다.
  한 사람이 넋을 잃고 중어거렸다.
  "손가락으로 검을 뚝..... 인간이 아니로군....."
  6. 제6장 사도십병 혈수마시
     (邪道十兵 血穗魔矢)
  나무, 통나무집, 나무 외의 다른 구조물이라고는 단 한 개도 들어가지 않은
그런 집이었다. 집 앞에 약간의 비탈진 마당이 있는 외엔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옆에도 숲, 아래도 숲인 그런 집.   마당에는 고기와 짐승가죽을 말리는 것으로
보이는 나무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지금 시뻘건 고깃덩이가 주렁주렁 매
달려 있었다. 통나무 목옥의 옆에는 다시 나무로 만든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가
놓인 선반이 있었고, 그 선반 위로는 등나무 등걸이 보기좋은 그늘을 만들고 있
었다. 등나무엔 보라색 꽃이 피어 있었다.   집 근처는 말할 것도 없고, 온 산이
온통 새파란 녹색 일빛으로 출렁이는 듯. 사냥꾼의 집일까? 누구의 집이든 이
집주인은 집을 지은 자리나 그 밖의 세간이 놓여 있는 규모로 보아 매우 운치
있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때, 목옥의 문이 덜컹 열리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개봉부의 관도에 나타났던 그 청년이었다. 이번에는 차양
을 쓰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의 용모가 확연히 드러났다.
  선이 뚜렷한 용모, 눈이며, 코며 입 등이 뚜렷했다. 특히, 검은 눈썹 아래 한
광처럼 빛나는 두 눈이며, 굳게 닫힌 호선의 입술 등이 일견하기에도 대단한 의
지의 소유자라는 것을 짐작케 하는 듯.   그러한 뚜렷한 용모 탓으로 그의 나이
는 실제보다 좀 더 들어 보였지만, 사실 그의 나이는 이제 겨우 십구 세에 불과
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허름한 모시적삼 새로 비치는 팔 근
육이며 가슴의 흉근 등이 보기 좋게 발달해 있었다.
  청년이라기에는 나이가 조금 적고 소년이라기엔 나이가 많은 그는 손에 그릇
하나를 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놈이 어딜 갔을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켠에서 개 한 마리가 살랑살랑 나타났다.   청년
의 얼굴에 싱긋 웃음이 번졌다.
  "너는 시간선택을 잘해야 할 것이다. 만약 내가 깊이 잠들어 버린다면 넌 굶
어죽어야 한단 말이거든."
  개는 고기가 담긴 그룻이 눈앞에 놓이자 청년을 향해 가볍게 흰 이빨을 드러
냈다.  청년의 손이 그런 놈의 머리를 쿡 쥐어 박았다.
  "은인을 향해 감히 이빨을 들이댄단 말이지. 놈, 넌 내가 아니었으면 이미 개
고기가 되어 여름철 보신용으로 사람들의 뱃속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개는 움찔하는 듯 싶더니 주섬주섬 그릇에 입을 처박았다. 처박았다 싶자 이
내 걸신 들린 듯 고기를 씹어대기 시작했다.   청년은 담담하게 웃으며 얼굴을
들었다. 들었다 싶자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뭐랄까? 강렬한 예기랄까? 얼굴에 감도는 그런 빛은 청년을 매우 강인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는 천천히 등나무 아래 탁자로 다가갔다. 그는 의자에
앉아 깎다 만 화살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헌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손은
분명히 화살을 다듬고 있는데 그 눈은 엉뚱하게도 스르르 감기는 것이었다. 비
단, 감겼을 뿐 아니라 그는 이내 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자는 척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분명히 자고 있었다. 그것도 완벽하게 깊
은 잠이 들어 있었다. 이럴 수도 있을까? 사람이란 아주 피곤할 때 선 채 잘 수
도 있다는 이야기는 있었다. 그러나, 피곤하지도 않으며 자야겠다는 의식도 없
이 그저 무감동하게 잠들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하늘 아래 오직 이 한 사람밖
에 없을 것이다.
  코고는 소리가 나른한 햇살 아래 진동했다. 그런데도 화살은 여전히 깎이고
있는 것이니.....  바로 그때다.
  슈풍--! 날카로운 파공음이 주위의 정적을 꿰뚫었다.
  일순, 청년의 코고는 소리가 뚝 그쳤다. 번쩍 뜨인 그의 시선 속으로 햇살을
꿰뚫고 날아들고 있는 한 자루의 화살이 보였다. 화살 뒤에 매달린 핏빛 시수도
보였다.   순간, 청년은 놀란 얼굴로 언뜻 몸을 일으켰다.
  "저것은 혈수마시?"
  그는 다급히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다 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몸의
방향을 홱 틀었다. 공중을 앉은 채 삼 장이나 날아간 그는 음식을 먹기에 여념
이 없는 개의 목덜미를 홱 잡아챘다.
  캥--! 그의 몸이 개와 함께 다시 땅을 박차고 솟은 순간, 그들의 발 아래서
화살이 폭죽처럼 터져올랐다.
  파팍--! 폭발하는 화살. 그 속에선 솜털처럼 가는 침들이 수천 수만 개나
솟구쳐 나왔다.
  사도십병(邪道十兵)의 하나라 했다.  혈수마시, 화살처럼 쏘아 날리지만 그 촉
속에는 다시 수만 개의 독 묻은 비침들이 숨겨져 있어 아무데나 닿기만 하면
폭발하여 십 장 방원을 덮어버린다는 가공할 무기!
  청년은 간일발의 차로 독침의 방원을 벗어났다. 그는 머리 위의 높은 고송 위
에 개를 얹어 놓은 다음 대붕처럼 몸을 틀어 화살이 날아온 곳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의 신법은 무섭도록 빨랐다. 그저 몸을 틀었다 싶었는데 사람은 이미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짐작되는 가시덤불 숲 속으로 짓쳐들고 있었다.
  파팍--!
  허나, 당연하게도 그곳엔 이미 인적이 없었다. 암수를 가해 놓고 죽여줍쇼기
다리고 있을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청년은 두 눈에 예광을 발하며 바닥을 세
심히 살펴나갔다.  본시, 그는 몹시 느려 보였다. 너털거리는 적삼자락을 휘적이
며 걷는 걸음이 그렇고, 아무 곳에나 앉아 코를 골아대는 것이 또 그랬다. 하지
만,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그의 몸은 무섭도록 빠르고 예리했다.
  바닥의 풀잎을 살피는 그의 두 눈에선 불똥이 튀길 것 같았다. 풀잎은 전혀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허나, 청년은 그 속에서 문제점을 두 가지나 발견해 냈
다. 첫째는 풀잎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눕혀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중 몇 개는 뽑혀져 있기도 했다. 둘째는 공간에 감도는 기이한 향기였다. 식물
의 향으로부터 추출해 낸 이런 향기는 여인들이 쓰는 장품(粧品)의 냄새였다.
  '암습자는 이곳에서 내가 오기를 오랫 동안 기다렸다..... 풀이 뽑힌 것은 무료
함을 견디기 위해 손 장난으로 뽑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암습자는 여자겠
지.'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여자란 일반적으로 참을성이 없는데..... 이 여자는 거의 반 나절이나 이곳에
숨어 있을 수 있었으니 전문적인 수련을 받은 그런 여자라고 밖엔 여길 수 없
군. 흐흠..... 나는 많은 암습자를 보았지만 여자 암습자, 그것도 고도의 수련자는
처음인 걸."
  그는 천천히 쭈그리고 앉았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엇이 어찌되었건 너는 운이 없는 것으로 여기도록 하라. 나 사우(沙雨)는
함부로 암습이나 해대는 작자를 가장 증오하거든....."
  그는 느릿하게 걸어 목옥으로 돌아왔다. 이어,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챙기기
시작했다. 어깨에는 활을 메고 허리에는 한 자루 단검을 꿰어찼다. 마지막으로
적삼자락을 질끈 묶은 후 처마에 걸린 마른 건량을 몇 조각 떼어 허리춤의 주
머니에 갈무리했다.
 "이틀치의 식량이면 충분해. 나는 네가 그 이상을 도망갈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니까."
  그는 몸을 돌리려다 무슨생각을 했던지 나뭇대 위에 걸린 고깃덩이 하나를
떼어 멀건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개에게 던져 주었다.
  "이제야 네 이름이 떠올랐다. 여자수련자를 추적하는 첫 번째 기념으로 추아
(追兒)라 하자. 추아, 넌 내가 올 때까지 그것으로 먹이를 대신하도록."
  그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걸로 모자란다면 그냥 굶고 있도록 해라. 네 주인도 그때쯤이면 어쩔
수 없이 굶고 있게 될 테니까. 고깃덩이를 함부로 떼어 먹는다면 와서 물구나무
서기를 세워 놓을 테다.
 
  *          *          *
  "하악..... 하악....."
  혈지주는 숨이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기복을 일으키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힐끗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있다. 등에 화살을 멘
채 느릿하게 산을 오르고 있는 한 사람.
  "물귀신 같은 놈..... 혈수마시를 그렇게 간단히 피해 내다니....."
  혈지주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이런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녀는
평생 사람을 쫓거나 죽이기만 했지, 이렇게 쫓기거나 죽임을 당하려는 입장이
되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최초의 혈수마시가 실패한 후, 그녀는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다음을 기약하
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혈수마시를 날려 본 것은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 본 것이
었고, 그 짧은 순간에 자신 뿐 아니라 개까지 구해 몸을 날린 그의 빠름은 확실
히 상상 밖이었다.
  "상대를 너무 얕보았다. 나는 조금 더 신중을 기해 그 자리를 떠나야 했었고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엉뚱한 곤경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에서 나의 흔
적을 따라올 수 있는 자가 있다니....."
  그녀의 별호는 붉은 거미, 즉 혈지주였다. 거미는 거미줄 위로만 다니지, 결코
흔적을 지상에 남기지 않는다. 흔적은 커녕 눈을 부릅뜨고 있어봐도 어디로 왔
다가 어디로 사라지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 지금까지의 그녀였다면.....  그런
그녀를 하루 반나절이나 따라올 수 있는 저 놈은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혈지주는 오랫 동안 산 아래를 느릿하게 기어오르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가 등의 바랑에서 꺼낸 것은 하나의 신발이었다.
신발의 앞과 뒤가 거꾸로 달려 있는 신발이었다. 즉, 신기는 똑바로 신되 신고
걸으면 발자국은 반대로 나는 신발인 것이다.
  이어 그녀는 몸을 구부려 작은 돌과 나뭇조각들을 모아선 땅에 무엇인가를
어지럽게 설치해 놓기 시작했다. 대저, 동영의 인자술(忍者術)에는 급인진술(急
引陣術)이란 것이 있었다.  이것은 급하게 추적을 받을 때 주위에 있는 간단한
몇 개의 물건으로 진법(陣法)을 설치하여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으로써, 만
약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진법 속에 몇 시진이나 갇혀 헤매게 되는 것
이었다.
  혈지주는 이 진법을 평생에 단 한 번을 썼다. 바로 지금의 옥주인 한당에게
쫓길 때였다. 하지만 한당은 웬 어린애 장난이냐는 듯 두 시진 만에 간단하게
진법을 파해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챘었고, 그 수법이며 시간에 감탄한 혈지
주는 스스로 그의 수족을 자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당과 같은 사람은 세상에
실로 많지 않다.
  "나는 네 놈이 이것까지 파해해 낼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녀는 주위를 휘둘러 보더니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다가 급히 몸을 공중
으로 솟구쳐 올렸다. 높이 이십여 장은 족히 될듯한 거목, 혈지주는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주위를 살펴 보았다. 저만큼 동굴이 하나 보였다.
  "저곳이 좋겠군....."
  남아서 놈이 곤경을 치르는 모습을 보고도 싶었지만 그녀에게 우선 급한 것
은 휴식이었다.   사내는 너무 느닷없이 그녀를 따라 왔으므로 지금껏 그녀는
식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을 굳힌 그녀는 일순 나뭇가지를
박차고 목표한 동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갔다.
  청년 사우가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차 반 잔 마실 시각이 지났을
때였다. 그는 마른 건량을 씹으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는데 급인진술이 설치된
곳까지 이르렀을 때 문득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서늘한 동공에 이채의 빛
이 언뜻 스쳐 지났다.
  "가만 있자..... 이건 발자국이 거꾸로 되어 있지 않은가?"
  그는 흥미롭다는 듯 그 자리에 느릿하게 쭈그리고 앉았다.
  "거꾸로 된 발자국 끝엔 돌 일곱 개와 나뭇가지 열 두 개가 인공적으로 질서
를 갖추었군. 그녀의 짓일텐데..... 이건 무얼 말하는 걸까....."
  그의 시선이 예광을 발하며 주위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주위에 흐트러진
먼지 한 톨, 부러진 풀잎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십여 보 밖의 거대한 나무였다. 그 시선은
나무 위의 가지 하나가 약간 부러져 나가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 모
습을 바라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것으로 시간을 벌겠다는 뜻이로군. 한 두 시진이면 능히 체력을 회
복할 수 있을 것이다. 흐흥....."
  그는 씩 웃으며 어깨의 화살을 질끈 동여 메었다.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난 나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할 입장이라서..... 앞으로
반나절 안에 너를 잡지 못하면 무엇보다도 굶게 된단 말이거든."
  내력(內力) 일주천(一週天).
 무림인은 피로를 회복하는 방법으로 바로 호흡을 조절하는 운기조식의 내력
일주천을 했다. 이것은 몸 속에 축적된 나쁜 기운을 내공의 힘을 빌어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무공의 고하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반
시진 가량이면 어떤 피로라도 말끔히 회복될 수 있는 것이었다.
  혈지주는 밖으로 내뻗었던 숨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피어올라
있던 내력의 덩어리, 백색몽연이 그녀의 벌린 입 속으로 스르르 빨려 들었다.
마지막 한 조각의 숨이 빨려들고 나자 그녀의 눈에선 새파란 녹광이 넘실거리
듯 피어올랐다. 혈지주는 온 몸에 힘이 충만한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까진 내가 쫓겼지만 이젠 네 차례다. 혈지주가 어떤 사람이란 것을
똑똑히 보여 주마."
  그녀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상대는 보나마나 아직도 진법
안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천하의 한당도 두 시진이나 헤매야만 했던
급인진술인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반대로 찍어놓고 온 발자국도 있었다. 그
속에 단긴 이유를 풀어내자면 못 되도 한 두 시진은 골치를 앓아야 할 것이 분
명했다.
  그녀는 씩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이때 돌연, 그녀의 얼굴에 피어 올라 있던
웃음이 일시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시선은 놀람의 빛을 가득 담은 채 한 곳을
향하였다.
  "저건....."
  드러렁-- 쿨--
  코고는 소리였다. 하지만, 혈지주가 놀란 것은 그것이 코고는 소리라는데 있
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의 주인, 동굴 바로 앞의 한 그루 느릅나무에 기대어
나른한 낮잠을 즐기고 있는 자.
  오오..... 그는 바로 숙객이 아닌가? 이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혈지주는 머리털
이 허공으로 치솟는 것만 같았다.   이때, 감겨 있던 숙객의 두 눈이 가늘게 떠
졌다. 그는 마치 잘 닦아 놓은 보물을 바라보는 늙은 수집광 같은 눈빛으로 키
들키들 웃었다.
  "푹 쉬셨는가.....? 운기조식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니 지루해서 잠시 눈을
붙였던 참인데."
  혈지주는 주춤 물러나선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는 기가 막혔다. 자신이 동
굴 안에 들어가서 운기조식을 하고 나온 시간이래 봐야 불과 반 시진 정도, 그
런데 기다리기 지루해서 잠을 자고 있었다면 그는 도대체 언제 온 것이란 말인
가?   놀람의 끝은 분노였다. 더우기 완벽한 체력을 회복해서 이젠 더 이상 두
려울 것이 없는 그녀가 아닌가?
  "타앗--!"
  한 소리 낭랑한 교갈에 이어 붉은 신형이 번쩍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그녀의
열 손가락 끝에선 청광을 발하는 가시 같은 독침이 회오리처럼 휘몰아쳐 갔다. 
 숙개 사우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것 봐라. 사납게 나오는군. 잘못을 회개할 생각도 않는단 말인가?"
j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쭈욱 뒤로 물러났다. 독침들이 방금까지 그가 기대어
있던 나무등걸을 무지막지하게 꿰뚫었다.  사우는 순식간에 이 장 뒤로 물러나
선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허나 그의 웃음은 일시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보라! 공중에서 회오리 바람처럼 맴돌아 오는 혈지주의 신형을, 그녀의 몸이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일신에 걸치고 있는 옷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있었다. 비단
그 옷은 벗겨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벗겨지기 무섭게 칼날처럼 곤두서서 날아
오는 것이 아닌가?
  "철수신공(鐵手神功)!"
  철수신공. 옷이나 소맷자락을 칼날처럼 만들어서 상대를 해치는 이런 무예는
그리 귀한 것은 아니었다. 웬만한 무림고수라면 이 정도는 능히 해낸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을 날린 창망 간에 옷이 입은 채로 벗겨지고 그것이 곧장
철수신공으로 날아 온다는 식의 공격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얘기였다. 거기
다가 또, 상대는여자였다. 아무리 여자에 무심한 사람이라도 멀건 대낮에 활짝
벗겨져 드러나는 빛나는 나신에 무심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웃저고리 유의에 이어 치마와 속곳이 더불어 날아 왔다. 여체도 아름다웠지만
이 공격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흉험했다.   사우는 창졸간에 몸을 빙글 돌렸
다. 뒤로 세 바퀴나 거푸 맴을 돌고난 그는 회전하던 자세 그대로 활의 시위를
당겼다. 언제 화살을 정전한 것일까?
  푸슝--! 한 대의 화살이 그대로 날아오던 웃저고리를 격중시켰다. 격중시켰다
싶은 순간, 두 번째의 화살이 또 치마를 꿰뚫었다. 하지만, 뒤를 이어 들이닥치
는 속곳만은 도저히 피할 겨를이 없다. 사우는 급한 김에 공력을 주입시켜 머리
로 날아오는 속곳을 들이 받았다.
  퍽--! 주춤 뒤로 물러나는 신형, 그러나, 혈지주의 예상대로 상대의 머리는
깨어지지도, 부서지지도 않았다.  사우는 두 세 걸음을 비틀거리듯 물러난 다음
태연히 그 자리에 섰을 뿐이었다.  그는 손으로 얼굴에 씌워진 속곳을 벗겨내더
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굉장한 공력이로군. 내 대가리가 돌대가리가 아니었다면 박살이 나고 말았겠
는데? 그건 그렇고....."
  그는 돌연, 손에 든 속곳을 코에 갖다 대고 개처럼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
다.
  "흐흠..... 목욕은 자주 하는 편이군. 여자는 늘 속옷이 깨끗해야 한단 말이야.
사용하는 분(粉)은 천가분(天佳粉)인 모양이군. 하지만 저 여자는 분을 얼굴이
아니라 아랫도리에 처바르고 다닌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냄새가 독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여자의 속옷을 킁킁대며 분이 어쩌고 저쩌고라니.  순간, 혈지주의 얼굴이 노
을 빛처럼 물들었다. 그녀는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짐승 같은 폭갈을 터뜨리며
햇살이 보석처럼 묻어나는 알몸 그대로 미친 듯이 덮쳐들었다.
  "더러운 자식!"
  7. 제7장 기이한 고문(奇異한 拷問)
  이번에는 숙객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는 빙글 몸을 돌린다 싶더니 일수의 매
서운 금나수(檎拿手)를 발휘하여 혈지주의 완맥을 덥썩 거머잡았다.
  "여자의 몸이란 늘 아름답지만 말이야....."
  혈지주는 뭍에 팽개쳐진 물고기처럼 바둥거렸다. 그러나, 완맥을 잡혔으니 힘
은 고사하고 전신의 기력까지 모조리 다 빠져 나가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사우는 빙긋 웃으며 빠르게 손을 놀려 그녀의 전신 마형(摩穴)을 세 군데나
짚었다. 이어 준비해 온 끈으로 그녀의 을 칭칭 동여매며 중얼거림을 이었다.  
"어디까지나 예쁜 몸이란 남자가 벗겨준 몸을 말하는 것이지, 이 따위로 혼자서
멋대로 벗어던진 몸이 아니란 말일세. 여자의 가치는 혼자 옷을 벗기 시작하면
서 떨어지고 마는 법이야."
  혈지주는 독살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쏘아 보았다. 허나, 마혈을 찍히고 묶이
기까지 하였으니 이젠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어도 상대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
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그녀는 떠나올 때 옥주 한당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내 평생에 단 한 사람을 눈여겨 보고 그 한 사람만을 두려워해 왔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숙객이다.--
  '그 말을 진작 들었어야..... 혈수마시에 옥인철수신공(玉引鐵手神功)도 통하지
않는 상대를 무슨 수로 대적하랴.....'
  혈지주는 모든 것을 체념했다는 듯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사우는 그런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싱긋 웃으며 그녀를 사냥한 짐승처럼
어깨에 냉큼 둘러맸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왔던 길을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
했다.   어느새 피어오르기 시작한 노을이 그의 건장한 뒷등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인적에 놀란 산새 한 마리가 앞길에 후드득 날아 올랐다.
  *          *          *
  "여긴가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후아..... 힘들군요."
  어둑어둑한 산길이 그대로 밝아지고 말았다.
  달빛? 별빛? 아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의 정체는 두 여인이었다. 그녀들이 피
워올리는 미모였다.  하나는 녹새의 비단 치마저고리요, 또 하나는 눈처럼 흰
백의였는데..... 녹의쪽이 황홀한 암향을 피워 올리는 야화(野花) 같은 농염한 아
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면, 백의쪽은 투명하도록 맑고 성스러운 설백의 아름다움
이랄까?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미녀란 그리 많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바로 낙양을 떠나온 풍사향과 일운연이었다. 풍사향은 언뜻 걸음을
멈추더니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산 위를 올려다 보았다.
  "저도 이곳은 처음이예요. 말로만 들었지요. 하지만 이렇게 높은 산 위라고
는..... 나쁜 사람! 마중이라도 나오면 발에 종기가 날까....."
  일운연이 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배시시 웃었다.
  "조직을 이용한다면 편안히 가마에 앉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텐데요."
  풍사향은 기겁할 듯 고개를 저었다.
  "큰일 날라구요?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낯선 사람이예요. 그는 도대
체가 옹고집이지요. 그렇게 돈을 많이 벌면서도 벌 줄만 알지 쓸 생각은 않는다
구요. 타고 다니는 말만 해도 늙어 죽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인 늙은 말인 걸
요."
  그녀가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바람에 두 여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낙양에서 이곳 대파산중의 이십 리 길을 오는 동안 두 여인
은 매우 친해졌다. 일운연이 호감을 가진 쪽은 풍사향의 원숙하고도 발랄한 성
격이었고, 반면에 풍사향은 또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런 것을 조금도 내색
지 않는 일운연의 소탈한 성격을 좋아 했다.
  그런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높은 지위란 것을 매우 소
중히 여기고 뽐내길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교만과 아집을 완전히 해탈한 듯한
일운연의 소탈한 성품은 그녀의 미를 반감하기는커녕 성결한 아름다움을 더욱
빛내주는 요소가 되는 듯 싶었다.
  "그 바람둥이가 일운연 소저를 보면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군요. 아마
도 자던 잠도 마다하고 소저의 얼굴을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을 거예요."
  이때다. 돌연, 산허리의 윗길로부터 가벼운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발굽
소리라 한 것은 그 외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고, 사실 지금 들려오
는 이 소리는 다 죽어가는 말이 발굽을 끌며 걷고 있는 소리 같았다.
  두 여인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외딴 산 속에 웬 말일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엷은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말, 그러
나 저런 것도 과연 말이라 할 수 있을까? 앙상하다 못해 옆구리 갈비뼈가 다
드러나는 몸통이며, 얼마나 오랫 동안 씻기지 않았는지 멋대로 엉킨 털갈귀며
빛을 잃은 흐리멍텅한 눈동자, 말이 죽어 바로 유령이 된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은 이 앙상한 말은 두 여인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풍사향의 얼굴에 생긋 웃음이 번졌다.
  "그의 애마(愛馬) 풍혼(風魂)이예요. 그가 보냈군요."
  말에는 두 개의 안장이 얹혀 있었다. 풍사향이 거듭 타라고 권하는데도 일운
연은 적이 망설였다.
  "타도..... 괜찮을까요?"
  와드득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는 소리였다.
  과연 숙객의 애마 풍혼은 두 사람이 한꺼번에 올라타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달빛이 내려 깔리는 대파산의 경치는 아름다왔으나 두 사람은
그 경치는커녕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할 지경이었다.
  풍사향이 아미를 살포시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당장 이 말부터 갈아 치우라고 해야 겠
군. 그것도 아니면 이 대파산을 아예 말로 뒤엎어 버리든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하나 나타났
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것은 바로 모닥불이었다. 모닥불 옆엔 등나무로 뒤덮
인 탁자 하나가 있었고 그 아래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 보였
다.
  "그예요!"
  급히 말에서 뛰어 내리던 두 여인은 몇 걸음 다가서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저게 뭘까? 모닥불 옆엔 고깃덩이를 거는 데 쓰이는 나뭇대가 하나 놓여 있었
다.   헌데, 거기에 걸려 있는 것은 고기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전신
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였다.여자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는데 치렁치
렁한 머리카락은 거의 땅에 끌리고 있었다.
  "맙소사! 그의 취미는 요 근래에 여자를 학대하는 쪽으로 바뀐 모양이군요.
저게 도대체 무슨 꼴일까?"
  풍사향은 까르르 웃으며 모닥불 앞의 사내, 사우를 향해 다가섰다.
  "좋은 취미로군요. 변태처럼 보이긴 하지만....."
  사우의 시선이 힐끗 그녀를 향했다. 그 시선 속에 웃음이 번졌다.
  "네가 해보겠나? 도대체 말을 듣지 않아서 말이야."
  "먼저 사람부터 소개하겠어요."
  풍사향은 웃으면서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중원제일미 일운연이라면 사(沙) 오라버니도 들어 보셨겠죠?"
  사우의 눈길이 풍사향의 뒤에 선 일운연을 향했다. 일운연은 담담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이예요."
  떠오르기 시작한 달빛 아래 도저히 형용할 길이 없는 그윽한 자태요, 아름다
운 모습, 풍사향은 어떠냐는 듯 사우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보나마나 넋을 잃고 한 시진은 바라볼거야.....'
  허나, 그녀의 예측과는 달리 숙객 사우는 일운연 쪽을 힐끗 한 번 바라보았을
뿐 이내 풍사향에게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풍사향의 얼굴에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한 이채가 스쳐 지났다.
  '웬일일까?'
  그녀는 힐끗 일운연 쪽을 바라봤다. 일운연의 안색은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
도로 미미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비록 뽐내길 좋아하는 여자는 아니었지만
여인의 자존심은 가볍게 상처를 입은 것이리라.
  풍사향의 예측을 벗어난 이 일련의 일들은 장내의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말았으므로 풍사향은 즉시 호들갑스럽게 사우를 향해 어깨를 으쓱 치켜 올렸다.
  "그건 그렇고 언제부터 사 오라버니는 여자를 고기처럼 걸어 놓고 감상하는
취미가 생겼죠?"
  사우는 씩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녀는 예고도 없이 날 찾아 왔었지. 상당히 사나운 여잔데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어도 도통 입을 열지 않는 거야."
  "오라버니는 그녀에게 어떤 방법을 썼는데요?"
  "바로 이런 방법이지."
  사우는 한쪽에 쭈그리고 앉은 흰 개 추아에게 익살맞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여 보였다.
  "네가 한 번 더 수고를 해주어야겠다. 추아!"
  추아는 꼬리를 흔들더니 거꾸로 매달린 혈지주 앞으로 다가갔다. 혈지주의 머
리는 거의 땅에 닿을 듯 늘어져 있었는데, 이놈은 그녀의 얼굴에 이빨을 바짝
갖다대곤 으르렁거리는 것이었다.
  허나, 혈지주는 뉘집 개가 짖느냐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개를 쳐다보지
도 않았다.
  이 모습이 너무나도 우스웠으므로 풍사향은 말할 것도 없고 일운연조차 빙긋
웃음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이고 지금 그게 여자를 고문하는 방법이란 말인가요?"
  "거꾸로 매달린 채 개를 바라본다는 것 만큼 무서운 일이란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 여자는 워낙 담이 커서 말이야."
  풍사향은 야릇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오라버니의 방법보다는 못하지만 제가 한 번 해보겠어요."
  그녀는 혈지주의 앞에 사르르 쪼그리고 앉았다. 이어 속삭이듯 감미로운 목소
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지요?"
  혈지주는 대답은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
  "당신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난 내 이름을 말하겠어요. 내 이름은 풍사향이
예요."
  순간, 혈지주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녀의 눈에는 가볍게 놀란 빛이 떠올라
있었다.
  "낭인시장의 그 풍사향?"
  "당신은 마치 풍사향이 몇 명이나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군요. 미안하지만 지
금부터 당신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좀 해 주어야 겠어요."
  풍사향이란 이름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젊은 나이에 낭인시장이란 신비로운 계파를 만들어 운영하며, 무림의 많은 계
파와 알게 모르게 연관을 맺고 있는 신비의 여인, 게다가 그녀의 손속은 악랄하
고 무서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었다. 혈지주는 한참이나 풍사향을 바라보다
가 탄식을 터뜨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풍사향이 말했다.
  "얘기 하고 않고는 사실 당신의 자유예요. 하지만 저는 제 얘기를 조금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전 매우 많은 돈을 벌었지요. 이 험한 세상에서 돈을..... 더우기
여자의 몸으로 많이 번다는 것은 실로 보통 일이 아니랍니다."
  "....."
  "그 동안 저는 매우 무서운 일을 많이 보았지요. 제 부하들 중에는 잔인한 사
람이 많아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들을 직접 불러올 수 있어요. 아아....."
  풍사향은 탄식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늘 그런 잔인한 짓들을 말리지만 때로 그들은 사람을 무섭게 다루더군
요. 물론 당신이 웬만한 고통쯤은 그냥 웃어 넘기는 사람이란 걸 알아요. 하지
만 정말 그들의 고문은 견디기 어렵지요."
  "....."
  "사람을 기둥에 묶어 놓고 위에서 맷돌을 하나씩 떨어뜨린는 낙석추(落石錘)
나 사람을 엎어 놓고 코 속에다 고춧가루를 뿌리는 역흡잔(逆吸殘) 같은 것은
가장 기초적인 것이예요.
  어떤 때는 그들은 아예 사람의 살을 한 조각씩 발라내기도 한답니다. 우리가
푸줏간에 가서 먹기 좋게 고기를 썰어 달라고 할 때처럼 말이예요. 고기를 발라
낸 다음에는 그 위에다 또 소금을 뿌리지요. 금방 도려낸 살에 소금이 닿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어요. 비록 그들은 내 부하지만 어떤 때는 난 그
들이 원래 백정짓을 하다 온 자들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답니다."
  말을 잇는 중에도 풍사향의 가는 손가락은 혈지주의 맨살에 슬쩍슬쩍 닿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칼로 살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을 주는지 그때마다 혈지주
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와 같은 일은 인간으로선 할 짓이 못 돼요. 하지만 때로 인간세
상에는 좋게 말하는 경주(慶酒)는 들지 않고 꼭 그런 벌주(罰酒)를 마시고 싶어
하는 얼빠진 인간들이 있더군요. 물론 당신을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요."
  풍사향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돌연, 혈지주는 긴 탄식을 터뜨렸다.
  "그만! 풍사향, 당신을 만났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소. 당신이 묻고 싶은 것은
뭐예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사우는 피식 웃더니 옆의 추아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알겠느냐, 추아? 여자란 저렇게 변덕이 심한 짐승이란다. 예의를 다해 물을
땐 입을 다물고 있더니 이제와서 묻고 싶은 말이 뭐냐는구나."
  풍사향은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 당신은 말이 좀 통하는군요. 하긴 당신의 심정은 이해가 가요. 여자를
이 따위로 몰상식하게 다루는 남자 따위에겐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그럼 묻겠는데 당신은 어디에서 나온 사람이죠? 왜 사 오라버니를 습격한 거
죠?"
  그녀는 습격이란 말은 듣지도 않았으면서 전후 사정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혈지주는 그녀의 총명한 물음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는 혈지자란 사람이예요. 이번에는 밀명을 받고 마중....."
  이때 돌연,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붉은 광채가 빛살처럼 뻗어 나왔다. 슈파앗
--! 그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채 알아 보기도 전에 그 광채는 이미 혈지주의
등을 꿰뚫었다.
  "악--!"
  풍사향과 일운연의 안색이 싹 변했다.   혈지주의 등을 꿰뚫고 가슴 앞까지
삐죽 튀어 나온 물건, 오오..... 그것은 바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창이 아닌가?
  이때 사우의 몸은 앉은 자세 그대로 어둠 속으로 빨리듯 솟구쳐 가고 있었다.
  땅과 한 자 가량의 거리에 뜬 채 날아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좌선해 앉은 부
처상이 떠가는 것 같았다.  일운연은 놀람에 찬 어조로 외쳤다.
  "저것은 능공허도(凌功虛渡)의 신법이군요!"
  능공허도, 전기 한 모금으로 공중을 반 각 이상 날 수 있는 신법의 최정화.
무림은 넓지만 이 정도의 신법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일운연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두 여자가 혈지주의 상처를 살피는 사이
사우가 바람처럼 날아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한 개의 이상한 물건, 마치 난장
이처럼 작은 키, 두 자 가량의 사람이 들려 있었다.   풍사향이 놀란 어조로 외
쳤다.
  "그 이상한 물건은 뭐죠?"
  사우는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사도십병의 하나인 사인마창(死引魔槍)이다. 이 난장이는 창을 던진 시창인
이야!"
  "시창인이라니요?"
  "사인마창은 사람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창 뒤에 매달려 창과 더불어
날아오며 방향을 조정하는 것이다. 그 빠름, 그 악독함, 그 정확도로하여 사도십
병의 아홉 번째 무기로 꼽히는 것이다."
  풍사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오..... 그렇다면 그 난장이가 창 뒤에 매달려 오며 방향을 조정했단 말인가
요?"
  "그렇다. 이 놈은 내가 목덜미를 잡아채자 달아나다 말고 스스로 입 속에 물
고 있던 독약을 품어 죽었다."
  난장이의 입 끝이 시커멓게 탄 것으로 보아 독하기 이를 데 없는 맹독(猛毒)
인 듯. 사우는 난장이를 바닥에 던지며 침중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사도십병은 그 흉악함으로하여 무림에서 근 오십 년 간이나 자취를 감추었
던 것인데..... 나는 벌써 두 가지나 보았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는 중얼거리다 말고 급히 혈지주를 부축했다. 창은 그녀의 몸을 완전히 고
치처럼 꿰뚫었다. 게다가 창 끝에는 독이 묻혀져 있었던 듯 혈지주의 몸은 이미
시커멓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사우는 즉시 그녀의 몸을 일으켜 앉히고는 뒤
에서 그녀의 등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풍사향, 사인마창은 반드시 삼인일조(三人一組)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도 주
위에는 두 사람이 더 있을 것이다. 내가 혈지주를 치료하는 동안 너는 호법을
서라. 경계를 게을리 말도록....."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말릴 새도 없이 혈지주의 몸에다 자신의 내공을 주
입시키기 시작했다. 풍사향은 탄식을 터뜨렸고 일운연은 아름다운 봉목에 기광
을 떠올렸다.
  저렇듯 내공을 이용하여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은 몹시 위험한 것이었다. 까닥
하면 둘 다 죽을 우려가 있으며 설사 치료에 성공한다 해도 시술자는 본연의
진기를 과도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내력을 탕감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림에선 여간한 일이 아니고는 저러한 내공치료법을 쓰지 않았다. 
 헌데 자신과 별 친분도 없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우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
는 것이니.....
  일운연은 오랫 동안 사우의 옆 얼굴을 보다가 천천히 허리 춤에 차고 있던
자린보검(紫鱗寶劍)을 뽑아들었다. 그녀는 우의 오른쪽을 맡고 풍사향은 왼쪽을
맡았다. 두 미녀의 시선은 고양이 눈처럼 빛을 내며 전면의 어둠을 쏘아져 갔
다.
  8. 제8장 약혼자(約婚者)를 구해다오
  돌연, 전면의 숲 속에서 두 개의 반짝이는 눈이 나타났다. 풍사향의 시선이
힐끗 일운연을 향했다. 그녀의 가는 전음지성(傳音之聲)이 일운연의 귀를 파고
들었다.
  "놈들이 나타났군요. 조심해요. 운연소저."
  "알았어요."
  눈은 살괭이처럼 번뜩이며 한동안 이쪽을 노려본다 싶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
었다. 아니, 감추었다 싶은 순간, 느닷없이 두 미녀의 반대쪽에서 맹렬한 파공음
이 울려 퍼졌다.
  "아차 속았어요!"
  두 미녀의 몸이 빙글 돌았다. 두 개의 황금빛이 무서운 속도로 치료에 여념없
는 사우를 향해 쏘아 오는 것이 보였다. 창, 뒤에는 난장이들이 깃발처럼 펄럭
이며 매달려 있었다. 두 미녀는 너무 다급하여 급히 손을 뻗어 맹렬한 경풍을
쏘아 냈다.
  "하앗--!"
  "타앗--!"
  허나, 천근의 힘은 족히 실린 이 경풍을 맞고도 창은 속도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빠르게 휘몰아쳤다.
  "아차, 이 괴상한 창은 장풍도 소용없군요."
  풍사향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우수를 쭉 내뻗었다. 일순, 하나의 채대(彩帶)
가 오색의 광채를 흩뿌리며 좌측의 창을 향해 쭈욱 뻗어갔다. 일운연도 수중의
보검을 사정없이 내던졌다.
  퓨웅-- 양쪽의 세력이 맞부딪치자마자
장내엔 요란한 금속성이 터져나왔다.
  --째앵- 차앙--! 두 미녀의 사력을 다한
공격에 쏘아왔던 두 개의 사인마창은 올 때 보다 더욱 빠르게 되튀어 갔다.
  두 미녀는 아찔한 순간을 넘기자 용기백배하여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자신들의
무기를 주워들자마자 그녀들은 또 다시 마주오는 창을 향해 맹렬히 채대와 검
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앗--!"
  째앵--차앙--!
  한편, 사우는 이 모든 모습을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환히 알수 있었다. 그는
가볍게 마음이 초조해짐을 금치 못했다. 이때 문득, 혈지주의 몸이 가늘게 떨린
다 싶더니 나약한 목소리 하나가 사우의 귓전을 파고 들었다.
  "공연히 진기를 소모하지 말아요. 난 이미 가망없어요."
  사우는 침중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쓸데없는 소리말고 진기를 돋우도록 하시오. 지금이 고비이오."
  "소용없어요. 독이 이미 심장까지 들어왔어요. 어서 손을 떼세요."
  "어서 진기를 운용하라니까!"
  "당신이 계속 고집 부리겠다면 난 스스로 심맥을 끊겠어요. 그렇게 되면 당신
까지 위험해 진다는 것을 아시겠죠?"
  "당신은....."
  이때, 느닷없이 강한 반탄력이 혈지주의 체내에서 소용돌이 치는 것을 느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만약, 사우가 손을 떼지 않는다면 자신의 목숨
은 말할 것도 없고 혈지주는 당장 전신의 혈맥이 터져 죽고 말 것이다.
  사우는 탄식을 터뜨리며 진기를 거두고 손을 그녀의 등에서 떼었다. 순간 혈
지주의 몸이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   사우가 다급히 부축하자 혈지주는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떠올렸다.
  "당신은 매우 좋은 사람이로군요..... 저....."
  "사우라 부르시오."
  "사우..... 나는 하고 싶은 말이나 해야겠어요. 그들은 나에게 일을 시키더니
쓸모가 없어지자 오히려 죽이려 하는군요. 난 충실히 일해 왔었는데....."
  "그들이란?'
  "마중뇌옥..... 한당..... 이죠. 그는 당신을 노리고 있어요. 그는 또 당신을 매우
두려워..... 하고 있어요."
  독이 발작을 일으킨 것일까? 말을 잇는 도중에도 혈지주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가 나를 알고 있단 말이오?"
  "매우 잘 아는 것 같았..... 어요....."
  혈지주는 입 밖으로 가는 핏줄기를 주르르 흘리더니 배시시 웃었다.
  "당신이..... 잘 보이지 않는군요..... 고마왔..... 어요..... 누구에게 온정을 입어보
긴 처음이라서..... 어떻게 인사를 해야하는..... 것인지..... 몰라....."
  끝말은 다 이어지지 않았다. 사우는 자신의 팔에 안긴 혈지주의 몸이 싸늘하
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죽은 것이다.   사우는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내려
놓았다. 손을 들어 부릅뜬 여인의 눈을 감겨준다. 그의 시선이 힐끗 장내를 향
했다.
  이때 두 미녀와 사인마창들의 싸움은 이미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풍사향의
채대와 일운연의 자린보검은 사인마창들을 정신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사우는
그 중에서도 일운연의 무공을 잠시 눈여겨 보았다. 그 안에서 무엇을 발견한 것
일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수의 식지와 중지를 쭉 내뻗었다. 일순, 그의
손에선 두 줄기 보라색 광채가 실처럼 쭉 뻗어 나왔다.
  슈팟--!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일운연은 한창 신나는 싸움을 하고 있었
으나 느닷없이 자신의 상대가 이마에 뻥 구멍이 뚫리더니 그 자리에 푹 고꾸라
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급히 시선을 모아 보다가 심장이 멎을 듯 놀랐다.
  '불문(佛門)의 광한신지(曠寒神指)?'
  사인마창의 난장이들은 거의 도검이 들어가지 않는 특수한 몸을 지니고 있었
다. 자신의 검이 몇 차례 베었어도 그들은 상처 하나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이마를 단 한 차례의 지력으로 박살을 낸 것이다. 실전된 지 오
래라는 불문의 최극강지력 광한신지의 위력이었다.
  일운연은 일시 검을 거둘 것도 잊고 저만큼 우뚝 서있는 사우를 바라보았다. 
 문득, 한 줄기 의문이 그녀의 뇌리를 쳤다.
  '그는 도대체 누굴까?'
  *          *          *
  모닥불은 찰랑찰랑 타오른다. 그 농익은 불빛은 불 주위로 빙 둘러앉은 세 사
람의 얼굴에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짙은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사우였다.
그의 시선은 똑바로 일운연을 향하고 있었다.
  "당신의 말을 들어 봅시다. 이 일에는 커다란 의문의 하나가 있소."
  일운연은 모닥불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맑은 시선을 들었다.
  "그럼 사대협께선 소녀의 청탁을 들어 주시는 겁니까?"
  티끌 하나 없이 맑고 정결한 눈빛, 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난 처음 서신을 받았을 때부터 이 일에 흥미를 느꼈소. 오 할은 승낙상
태요. 다만 당신의 말을 좀 더 듣고 싶소. 우선 도대체 당신이 마중뇌옥을 그토
록 노리는 까닭이 무엇이오?"
  그는 옆에 엎드린 추아의 털을 가볍게 스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당시은 이 일에 엄청난 금액과 노력을 기울였소. 당신은 그
동안 중원의 살수며 관외의 유랑검수에다 동영의 인자들, 그리고 녹림고수들과
황궁의 위사들까지 동원했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택한 곳이 낭인시장이오. 이런
노력을 기울이면서까지 당신이 마중뇌옥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오?"
   일운연은 가볍게 놀란 빛을 떠올렸다.
  "사대협은 이미 그 안의 사정을 모두 알고 계십니까?"
  풍사향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오라버니는 일을 대함에 있어 세심하기 이를 데 없지요. 우리를 오라고 했을
때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다음일 거예요."
  일운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승낙하신 것으로 믿고 말씀드리겠어요. 사실 이 일의 발단은 지금부터 넉 달
전의 일이었어요. 알다시피 지금의 천하는 취라성과 천종이 양분하고 있는 상태
지요. 두 세력은 이미 십 년 간을 그렇게 대치해 오고 있어요.
  특히 천종은 호시탐탐 무림을 재패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니 만큼 그들에게
눈의 가시는 바로 취라성의 서천노주였지요. 그런데 바로 넉 달 전에 천종은 취
라성의 심장을 찌르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던 거예요."
  일운연은 탄식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은 이러했다.
  취라성의 기인 서천노주에게는 본시 아들이 둘이 있었다. 그 중 큰 아들을 서
천종리(西天種里)라 하고 둘째 아들은 서천무결(西天無結)이라 했다. 큰 아들 서
천종리는 어릴 적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취라성의 무예를 십분 달통했을 뿐 아
니라 그 위인됨이 심히 화통하여 나이 서른을 넘긴 지금에선 취라성의 뒤를 이
을 가장 강력한 후계자로서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다. 무림계에서도 그는 태양신
협(太陽神俠)이란 명호로 불리우는 명성높은 협객이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 서천무결은 이상하게도 어릴 때부터 무예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문(文)을 좋아하여 책에만 심취해 살더니 나이 이
십을 넘겼을 때는 스스로 집을 떠나 학문지도를 닦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는
올해 이십육 세였지만 사실 무림인들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인물인 것
이다.   취라성에서는 처음에는 그의 이와 같은 학문유랑을 우려했지만 본인의
결심이 워낙 굳은 탓으로 지금에 와서는 거의 묵인하는 지경이 되었다.
  서천노주 또한 고매한 선비의 길을 걷는 둘째 아들을 각별히 총애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저 아이가 무예의 길을 걸었다면 나보다 수십 배는 더 뛰어난 인물
이었을 거라고 중신들에게 말하곤 했다.
  첫째 아들 서천종리는 이미 결혼을하여 딸까지 두고 있었지만 둘째 서천무결
은 독신이었다. 서천노주의 강압에 못 이겨 남해성녀 일운연과 약혼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이요, 그 본인은 이러한 일에 조금도 관심이 없
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넉 달 전, 봄볕이 무르익는 어느 따뜻한 봄날에 그
서천무결이 의문의 실종을 한 것이다.
  "취라성은 발칵 뒤집혔어요. 전 무림의 조직을 풀어 그의 행방을 조사했지요.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서천무결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어요. 그러던 취라성에
어느 한 장의 괴서신이 날아 들었지요. 그 서신은 취라성의 대외연락을 담당하
는 외전총관(外殿總官)의 전서방(傳書房)으로 비둘기를 통해 날아 들었답니다.
그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어요.
  <취라성주 귀전,
  서천무결은 마중뇌옥의 제삼방 감옥에 갇혀 있소.
  우리는 당신에게 육 개월의 시한을 주거니와 그 육 개월 동안 취라성의 모든
대외행정을 중지하지 않는다면 아들의 목숨은 없는 것으로 아시오.
  천종 종주(宗主)>
  묵묵히 말을 듣고 있던 풍사향이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천종 종주가 감히 취라성의 둘째 아들을 납치했단 말인가요?"
  "그래요."
  "하지만 왜 취라성에선 직접 그를 구출해 낼 생각을 않죠? 마중뇌옥이 비록
사악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 취라성의 힘이라면 능히 마중뇌옥을 파괴할 수
있을 텐데요."
  일운연은 우울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나 서신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로 적혀 있었어요. 만약 마중뇌옥의
서천무결을 구출하는데 있어 취라성의 인물이 단 한 명이라도 나서게 된다면,
한 명이 나섰음이 발견될 때는 서천무결의 귀를 자르고, 두 명이 발견되면 서천
무결의 눈을 파내며, 세 명 이상이 발견된다면 사지를 모조리 잘라 내겠다고 말
이예요. 취라성에선 이 위험한 협박을 중시하여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소저가 이 일에 나서게 된 건가요?"
  "저는 전갈을 받자마자 중원으로 달려왔어요. 저는 비록 서천무결의 약혼녀이
긴 하지만 아직 취라성의 완전한 사람이 아니므로 이 일을 직접 지휘하게 된
거예요. 취라성의 사람들은 저에게 암중으로 협조할 뿐으로 아무도 앞으로 나서
진 못해요.
  마중뇌옥과 가까운 난주성(蘭州城)에 비밀거점을 확보해 놓고 그 동안 각계의
고수들을 포섭하여 마중뇌옥으로 보냈던 거랍니다."
  결과는 다섯 번 보내서 다섯 번 다 실패, 풍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중뇌옥은 현 무림에서도 가장 위험한 조직으로 꼽히고 있었다. 그곳의 옥주
가 한당이라는 사실도 최근에야 밝혀진 것이지, 지금까진 그 조직이 어떤 이유
로 창설되었는지 하는 것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과거 무림에서 사라졌었던 한당의 흉악함과 돈을 받고 사람을 가두어
준다는 기괴한 장사로 미루어 볼 때 좋은 뜻으로 무림에 나타난 것이 아니란
것쯤은 능히 알 수 있었다.   이때 사우가 검미를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천종이 보냈다는 그 협박장에는 이상한 점이 몇 개 있군."
  두 여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첫째는 납치자들이 자신들이 납치한 인질이 있는 장소를 공공연하게 말했다
는 것이야. 이것은 일반적인 납치사건과는 판이하게 틀린 형태거든. 어떤 납치
자이든 납치한 인물은 감춰 놓을 수록 유리한 법인데....."
  풍사향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일은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예요. 천종은 이제 생긴지는 불과 십
년밖에 안 됐지만 흑도제일의 문파로 부상해 있었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
들의 위명을 천하에 알리려는 뜻이 있을 지도 몰라요. 장소는 거기이니 구해 갈
테면 구해가라. 즉,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얘기겠지요."
  "좋아,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두 번쩌 의문을 말하겠는데..... 취라성이라면 이
미 오십 년 동안 무림의 최고문파로 성장해 온 대문파이다.
  헌데, 둘째 아들 정도로 협박한다고 해서 조직 총원 일만의 대취라성이 그 동
안 이룩해 온 업적을 포기하겠다고 마음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취라성주가 자
신의 아들을 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이번에는 일운연이 말을 받았다.
  "취라성의 수뇌들도 그 사실을 지적했어요. 그들은 그 일을 심사숙고해 본 결
과 이번 일에 취라성을 본격적으로 무너뜨리겠다는 의사보다는 취라성의 위엄
을 손상시켜 보겠다는 뜻이 있다는 것으로 결론지어 졌어요.
  사우는 피식 웃었다.
  "좀 쉽게 말하 주시오, 소저. 워낙 배운 것이 미천하다 보니 이해할 수 없소."
  "말하자면 서천노주께서는 지난 오십 년 동안 무적(無敵)의 고수로 일컬어져
왔어요. 무림인에게 있어 서천노주께서는 바로 신(神)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
는 거지요. 하지만 아들을 미끼로 한 이번 일로써 그들은 서천노주의 위엄을
추락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아요."
  "흐흠..... 서천노주도 인간인 이상 아들로 하여 고심할 것이고, 결국 그도 신
이 아니라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얘기이오?"
  "바로 보셨군요."
  "그 또한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천종은 이번 일에 천하제패를 위한 첫 번째
포석으로 삼고 있겠군. 취라성이 지닌 힘을 저울질해 본다는 것 아니오."
  "그렇겠지요."
  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내 마지막 의문인데..... 취라성에선 어쩌다 서천무결 같은 중요한 인
물을 상대에게 뺐겼냐는 얘기이오. 아무리 학문유랑을 한다고 해도 그만한 신분
이면 엄중한 호위가 늘 따랐을 텐데?"
  "그것은 아무도 말해 줄 수가 없어요. 서천공자를 따르던 오십 명의 호위무사
들은 모조리 죽어 버렸으니까요. 이 일은 워낙 졸지간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그
사실을 취라성에서 알았을 땐 이미 손 쓸 겨를이 없었어요."
  "결론적으로 이 일은 치밀한 계획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얘기로군..... 천
종..... 대단한데?"
  "만약 기한 내에 서천공자를 구해내지 못하게 되면 천하는 곧 피 바람에 휩
싸이고 말 거예요. 최고의 성세를 자랑하는 두 개의 대 문파가 격돌하는 싸움에
휘말리게 될 것은 뻔한 이치이고 그렇게 된다면 평화는 간 곳이 없고 시산혈하
가 이 땅을 뒤덮게 될 거예요....."
  사우는 말없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오랜 후에야 그는 다시 일운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소. 마중뇌옥의 서천공자를 구하는 일은 내가 맡겠소."
  다급히 감사의 말을 하려는 일운연의 손을 저어 막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9. 제9장 황금 구천냥의 청부
     (黃金 九千兩의 請負
  "세상을 구한다거나 하는 말은 나에게 별 의미가 없소. 단지 나에게 있어 무
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숭고한 이념이 아니라 황금 삼천 냥의 돈일 뿐이오."
  사우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일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소."
  일운연이 급히 물었다.
  "무슨 조건인가요?"
  "첫째, 이번 일에 데리고 갈 사람을 내가 직접 정하게 할 것, 그들을 포섭하
여 준비하는 기간이 한 달이요. 한당은 실로 쉬운 적수가 아니니까."
  일운연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둘째 조건,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이 일에는 황금 육천 냥이 더 있
어야 겠소. 내가 쓸 사람들은 매우 비싼 사람들이기 때문에. 도합 황금 구천 냥
이오. 이 중 절반인 사천오백 냥을 은자로 바꾸어 선불해 주시오. 이상이오."
  이번에는 일운연도 섣불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황금 구천 냥(약 사십오
억 원 정도). 은자로 환산한다 해도 자그만치 구만 냥이다.   단지, 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이 천문학적 금액을 투자해야 한단 말인가? 거기다가 취라성으
로선 이미 다섯 개의 척살조를 만드느라고 황금 팔천 냥 가량을 써버렸다. 지금
의 액수까지 포함한다면 자그만치 황금 일만 칠천 냥, 은자로는 십칠만 냥이 되
는 것이다. 취라성이 아무리 거대한 문파라 해도 노략질이나 도적질을 하지 않
는 이상 이런 거대한 지출이 있고 나면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운연은 오랫 동안 침묵을 지켰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던 그녀는 이윽고 발딱 고개를 쳐들더니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좋아요. 승낙하겠어요. 취라성이 하지못하겠다면 제 고향인 남해의 돈을 써
서라도 당신이 원하는 액수를 채워 드리겠어요. 대신 사대협도 제 부탁을 하나
들어 주셔야겠어요."
  "부탁?"
  "사대협이 사람을 끌어 들이는데 저도 있게 해 주세요."
  사우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상관없소. 하지만 워낙 괴상한 위인들이라서 말이오. 어쨌든 남해는
부자로 소문나 있으니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료. 이것으로 협상은 훌륭
하게 이루어 졌소."
  그는 손으로 목옥을 가리켰다.
  "내일 당장 출발하겠으니 당신들은 저 목옥에서 자시오."
  풍사향이 물었다.
  "오라버니는?"
  사우는 싱긋 웃었다. 웃으며 그는 말했다.
  "술이 이렇게 남았으니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          *          *
  "그는 어떤 사람이죠. 풍낭자?"
  느닷없이 물어온 말이었다. 풍사향은 어둠 속에서 들려온 일운연의 목소리에
흠칫 팔베개를 들었다.
  "무슨 말.....?"
  두 미녀는 나란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창 밖으로 스미는 달빛이 너무 고운
여름밤이었다.   일운연의 고요한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 들었다.
  "풍낭자는 처음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했어요. 내력, 출
신 그 모두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보니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한 관계인 것 같더
군요."
  "....."
  "제가 알고 싶은 것은 풍낭자와 그와의 관계가 아니예요. 다만 저는 이 세상
에 어떤 사람이 저토록 젊은 나이에 능공허도(凌空虛渡)의 신법과 절전된 광한
신지(曠寒神指)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숙객이
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말해줄 수 없나요?"
  풍사향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차 반 잔 가량 마실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그
녀는 입을 열었다.
  "운연소저는 충분히 알 자격이 있어요. 소저는 이 일에 황금 구천 냥의 거액
을 투자한 사람이니까요. 무엇보다도 그런 물질적인 것보다는 소저의 훌륭한 성
품이 나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풍사향은 어둠 탓으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천장을 올려다 보며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제 앞에 나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이었어요..... 저는
그때 제 남편이 남긴 유산인 낭인시장을 간신히 경영해 가고 있던 참이었죠."
  "남편이 있었나요? 유산이라면 그는 혹시....."
  "그래요. 이미 죽었지요."
  "낭인시장을 계획하고 이룬 것이 바로 그 분이란 말인가요? 오오..... 그런 멋
있는 사업을 계획해낸 그 분은 도대체 누굴까요?"
  "말해도 상관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풍사향은 씁쓸한 고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운연소저는 중원쌍화(中原雙花)란 말을 들어 보셨나요?"
  순간, 일운연은 숨을 삼켰다.
  "중원쌍화?"
  어찌 모르겠는가? 무예를 단 한 초식이라도 익힌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모르
는 사람을 결단코 없을 것이다.   중원쌍화는 한마디로 대파 소림사(少林寺)가
배출해낸 두 기재였다.  소림은 천 년의 역사를 내려 오는 동안 본사의 기예 외
에도 수많은 지파(支派)를 만들어 냈는데, 당대에 이름난 두 지파는 소림남파
(少林南派)의 보법활불(普法活佛)과 천산(天山)의 북천상인(北天上人)이었다.
  이 중, 북천상인은 소림이 배출해 낸 역대고승 중에서도 괴상한 기승(奇僧)으
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소림남파의 보법활불이 소림정계(少林正系)를 지켰다
면 북천상인은 끊임없는 파격을 추구해 나간 신비로운 고수였다.
  그는 중원천지는 말할 것도 없고 관외, 서장, 밀종(密宗) 등의 무예까지 두루
섭렵한 끝에 천산 산정에 웅거하여 소림무예의 새로운 유파를 만들어 낸 것이
었다.   중원쌍화는 바로 이 두 고승, 보법활불과 북천상인이 만들어 낸 것이었
다.   보법활불의 제자가 단목장룡(端木長龍)이요, 북천상인의 제자가 옥청풍(玉
淸風)이었고 이 두 사람은 나이 십오 세의 어린 나이로 무림에 출도하자마자
도처에서 사파마도를 가차없이 징계하여 신화에 가까운 명성을 쌓아 올렸다.
  당시의 무림에는 취라성주의 애자인 태양신협 서천종리도 이들의 기품에는
따를 수 없다는 싯귀가 공공연히 나돌 지경이었다.  헌데, 이 중원쌍화가 일시
에 증발해 버린 것이 불과 삼 년 전, 그들의 나이 십칠 세가 되던 해였으니.....
  사람들은 이 일을 놓고 의논이 분분했다. 두 사람이 천하제일의 명성을 놓고
다투어 동귀어진 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했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일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차츰 사라져 갔던 것인데....
  "오오..... 그럼 풍낭자의 부군은 바로 그 중원쌍화의 한 사람.....?   일운연의
놀란 외침에 풍사향은 씁쓸하게 웃었다.
  "보법활불의 제자 단목장룡이 바로 제 남편이었지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정
혼한 사이로서 그가 십칠 세가 되던 해에 우린 결혼했어요."
  "그럼 그 분이 실종되던 해로군요."
  "그래요. 그것도 우리가 결혼하던 신혼 첫날 밤. 그는 갑자기 한 통의 괴서신
을 받고는 급히 다녀오겠다며 나간 것이예요."
  "흥분한 표정이었나요?"
  "아니예요. 당신은 웃으면서 이 놈이 우리가 결혼한 것이 질투가 나는 모양인
데.....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을 만들어 날 불러낼 리가 없지 않은가? 한 열흘이
면 될 것이오. 하며 몹시 유쾌하게 나갔어요."
  "그럼 아는 사람의 서신이었겠군요."
  "그 의문이 풀린 것은 그로부터 석 달쯤 지난 다음이었어요. 제 앞에 사 오라
버니가 나타난 것이죠."
  이 년 전. 풍사향은 남편으로부터 본의 아니게 물려받게 된 낭인시장을 힘겹
게 꾸려 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단목장룡은 그로부터 소식 한 장 없었고 그 틈
을 타 낭인시장이란 거대한 장사를 노리는 자들이 안팎에서 기승을 부리던 때
였다.   그때 그녀는 낙양성 밖에서 일대의 대결투를 보았다. 한쪽은 낙양 일대
의 이름난 검객들인 중주삼객(中州三客)이었고 다른 한쪽은 십칠팔 세 가량의
청년이었다.
  중주삼객이라면 무림이 공인하는 검도의 절정고수들, 그런 고수들을 맞아 청
년은 조금의 꿀림도 없이 태연히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는 아예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은 거의 환상에 가까운 무예였어요. 야생마같이 거칠지만 방울뱀의 희롱
인 양 유연한 허리와 몸놀림..... 먹이를 향해 내뻗는 독수리 발톱처럼 힘찬 기운
이 깃든 검 끝, 그의 몸에선 싸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는 듯한 불타는 투지
가.... 집념을 향하는 채색나비 같은 독기(毒氣)가 맴돌았어요....."
  "혹시 사대협.....?"
  "그래요. 바로 그였지요. 싸움은 결국 그의 승리로 끝났고, 그는 즉시 뒤도 돌
아보지 않고 사라졌어요. 그런 그가 두 번째로 나타난 것은 제가 낭인시장을 노
리는 자들에 의해 무서운 함정에 빠져 있을 때였지요."
  "어떤 함정이었나요?"
  "미약(迷藥)이었어요. 놈들은 저에게 미약이 든 술을 마시게 하고는 그 틈을
타 강제로 윤간(輪姦)을 하려 했어요."
  "나쁜 놈들....."
  "그 속엔 제 측근도 끼어 있었는지라 전 거의 무방비 상태였지요. 그런데 사
오라버니가 나타난 거예요."
  "멋지게 해치웠겠군요."
  풍사향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칼이었어요. 먼저 번에는 검이더니 이번에는 또 도(刀)더군요. 어떤 것이
든 그는 강했어요. 저는 거의 의식을 잃었었는데 깨어나 보니 옆에 그가 있었어
요. 그리고 그의 손에는 놀랍게도 남편이 실종할 때 입고 갔던 옷자락이..... 찢
어진 옷자락이 들려 있었던 거지요."
  "오오..... 어찌된 일일까? 그럼 그가 바로 풍낭자의 남편을 불러냈던 사람이겠
군요."
  "그러리라고 짐작했을 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 아침에 저
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옷자락을 내밀며 그는 웃었지요. 그 웃음은 말할 수 없
이 슬펐어요. 깊은 우수가 여울처럼 패인 그런 웃음이었어요. 그리고 말했죠. 앞
으로 당신은 내가 지키리다. 그 한마디 뿐이었어요."
  "왜 남편에 대해 묻지 않았죠?"
  "그 웃음 때문이었지요. 물을 수가 없었어요. 그 후로도 지금까지 묻지 못했
죠."
  "궁금하지 않나요?"
  풍사향은 느릿하게 누웠던 자리를 일으켰다. 그녀는 달빛이 쏟아지는 창가로
다가갔다.
  "궁금하지요. 얼마나 궁금한지 생각도 못할 거예요. 첫날 밤도 치르지 못하고
간 남자였어요. 하지만 사 오라버니는 그 동안 절 너무나 잘 돌보아 주었어요.
낭인시장의 일원이 되어 곤란한 일들을 도와줬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우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설사..... 이제와서 사 오라버니가 남편을 죽인 사람이라 해도 나는 그를 벌할
수 없게 되어 버렸어요. 그는 이 년의 청춘을 여기에 버렸어요....."
  일운연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이 말짱 깬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럼 사대협, 그는 도대체 누군가요?"
  "옥청풍, 북천상인의 제자이며 중원쌍화의 한 사람, 또한 남편 친구였던 사람
이었어요."
  "옥청풍!"
  일운연은 놀람의 신음을 삼켰다.
  "그런데 그는 왜 사우란 이름을 쓰지요?"
  "그는 자신을 모래비라 불러 달라고 했어요."
  풍사향은 하늘의 달빛을 올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사막에 내리는 마른 비..... 더 이상 마를 것도 없는 모래비..... 사우라 불러달
라 했어요.....
  *          *          *
  흑룡강(黑龍江)은 중원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실로 믿을 수 없
을 만큼 거대한 황야(荒野)이며, 중원인들은 이 황야를 일컬어 북대황(北大荒)이
라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상상과는 달리 북대황은 삭막한 곳이 아니다. 오
히려, 이곳은 중원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들풀이 무성한 푸른 초원이며 쪽빛 하늘과 저 멀리 지평선을 가로 지르는 흥
안령(興安嶺)이며 수인령(守忍嶺) 등의 거대한 산봉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는 곳이 바로 북대황의 평원이었다.   그러나, 이 대초원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밤이 되어 북풍이 몰아치고 이리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난무
하기도 하며, 외로운 여행자가 그 이리의 습격을 받아 한 줌의 뼛골만 남는 일
도 종종 있는 곳이었다.  때는 여름도 그 한 고비가 넘어가고 있는 팔월의 중순
어느 하루인데.....
  넓은 초원의 한쪽 매가목장(梅家牧場)이란 쓰인 푯말이 저만큼 보이는 파란
들풀 위엔 두 사람의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린 이렇게 계속 기다려야 하나요?"
  아름다운 옥성이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언뜻 보자니 도저히 인세의 여인
이라곤 볼 수 없는 성결하고 아름다운 미녀였다. 그저 시선이 닿기만 해도 황홀
한 이 미녀의 옆에는 허름한 적삼에 누런 차양을 쓴 농부차림의 청년이 앉아
말을 받았다.
  "당신은 보기보단 말이 많군. 우린 이제 기다리기 시작한 지 하루도 채 안 됐
소.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놈이란 어쩌면 일 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단 말이오."
  "그를 찾는 다른 방법은 없나요?"
  청년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소. 오직 이렇게 기다리는 것 뿐이오.기다리다 보면 그는 오게 되어 있소."
  10. 제10장 사막의 상인(沙漠의 商人)
  초원의 시간은 매우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눈앞에서 아지랭이처럼 아른대는
아름다운 풀밭과 쪽빛 하늘도 그냥 그 자리에 정지해 있는 것 같았다. 오랜 시
간이 흐르자 일운연은 지루했던지 사르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마침 풀밭을
뛰어 달아나는 토끼를 발견했으므로 즉시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그녀는 옅은 하늘색 치마에 빨간 허리띠를 맨 차림이었다.   토끼를
쫓아 초원을 달려가는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인간세상에 없는 그림같았다.  
사우는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허리춤에 찬 호로를 끌러 술 한 모금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아름답긴 하지만 가시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그는 옆에 턱을 괴고 엎드린 백견 추아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한당이라....."
  한당의 이름이 나오자 문득 시선 속에 한 줄기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난다. 그
는 이내 무엇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때 돌연, 어디선가 맑은 방울
소리가 바람에 실려 그의 상념에 빠진 귓전을 간지럽혔다. 순간 추아가 벌떡 몸
을 일으키더니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소리, 이것은 바로 낙타 방울소리였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낙타 방울소리를
내며 다니는 사람이란 사막의 대상(大商)밖에 없었다. 대상들, 이들은 멀리는 천
축, 대리국까지 다니며 교역을 하는 일종의 무역중개인들이었다. 이들이 거래하
는 사람들은 보통 문명지와는 멀리 떨어진 오지의 소수 부락민들인데 돈을 받
고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받고 물건을 파는 물물교역이 대부분이었
다.
  즉, 이들이 타고 오는 낙타의 등에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온갖 것, 중원의
식료품과 서쪽나라의 기이한 생활용품, 보석, 장난감 따위들이 가득 실려 있었
다.  반면에, 이들을 맞이하는 소수 부락민들은 수백 리나 떨어진 산간벽지로부
터 귀한 모피를 챙겨 길들인 사슴을 몰고 내려오거나, 말에다 한약재로 쓰이는
값비싼 녹용과 호골(虎骨), 싣고와서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서 얻은 모피와 한약재들을 대상들은 다시 도회지로 가지고 나가 팔았다.
  지평선 저 멀리에서 거대한 대상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우는 질겅질겅
씹던 풀을 뱉으며 한쪽에서 토끼와 장난하고 있는 일운연을 불렀다.
  "갑시다."
  두 사람이 매가목장이라 쓰인 현판을 넘어 목장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사람
들은 줄을 지어 대상들과 열띤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여인들은 비단과 장신구들이 진열된 앞에서 저마다 하나씩 골라 걸치고는 상
인의 거울에다 모습을 비춰보고 있었다.   버드나무 바구니를 든 아이들이 장난
감과 과자가 산더미처럼 쌓인 앞에서 침을 흘리는 모습도 보였다.  사우는 그
중 한 대상 앞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검은 옷에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몽고모자를 쓰고 있는 중년의 상인, 뚱뚱한 체
구인데다 땀을 비오듯 쏟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둥글고 커다란 공 하나가
사람 옷을 걸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부락민 하나와 열띤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부락민이 가진 호랑이 가죽이 탐이 나는 모양인데 좀처럼 값이 맞지 않
는 것 같았다.
  "글쎄! 이 유리그릇은 대리국에서도 귀족들이나 쓰는 귀한 것이란 말이오. 가
죽 한 장에 그릇 하나면 값이 후한 것이오."
   사우는 그 앞에 우뚝 몸을 세우더니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사람가죽 값은 얼마나 주려오, 상인 나리!"
  순간, 뚱보상인의 시선이 흘깃 들렸다. 무심히 들린 눈빛이었으나 그 눈은 세
상에서 가장 놀라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부릅떠졌다.
  "맙소사! 내가 헛 것을 보고 있단 말인가? 세상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어째서
내 앞에 있을까?"
  "그래도 날 기억하는 걸 보니 아직 살아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군. 돌팔
이 상인!"
  이십여 세의 청년 앞에서 사십 살도 넘은 중년인이 쩔쩔매는 모습이 부락민
의 눈에 이상하게 비친 모양이었다. 부락민은 자신만의 언어로 무어라 뚱보 상
인에게 중얼거렸다. 사우가 그 말을 가로챘다.
  "아노족의 말이로군. 나도 이 말은 조금 알지. 어떻소? 난 이 노인에게 당신
의 유리그릇이 동정 두 푼이면 살 수 있는 싸구려라는 것을 말해 주고 싶은
데..... 그것은 사실 유리도 뭣도 아닌 조악한 사기품인데 당신의 호랑이가죽 하
나면 그릇은 서른 개도 더 살 수 있다고 말이오. 아노족의 성품으로 보아 그렇
게 되면 당신은 이곳에서 뼈도 못추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뚱보상인은 땀을 비오듯 흘렸다.
  "제발..... 이 유령같은 사람아! 왜 느닷없이 나타나선 훼방인가 훼방이길....."
  "그럼 내 말을 들어 보겠소?"
  "하지만 나는 장사를....."
  "그럼 좀 더 큰 소리로 말해야겠군. 당신의 품 속에는 이미 앞에 있는 노인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금부스러기가 몽땅 다 들어가 있다고 말이야. 당신이 사실은
중원제일의 소매치기라는 사실도 함께....."
  순간, 뚱보상인은 미친 듯이 손을 저었다.
  "알았어, 알았네. 듣지, 들어. 무슨 말인지 듣겠네."
  그는 즉시 부락민 노인에게 유리그릇 다섯 개를 주고는 호랑이 가죽을 받았
다. 이어, 참새를 쫓듯 훠이훠이 노인을 보내고 난 다음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자네의 용건은?"
  "이곳은 안 되겠소. 저쪽 그늘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떻소?"
  뚱보상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말없이 사우의 뒤를 따랐다.
  한 그루의 노송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곳에 왔을 때 뚱보상인은 나무아래
서 있는 미녀를 그제서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것 봐라. 천하의 냉혈한이 드디어 여자 맛을 알았단 말인가?"
  그는 호들갑스럽게 웃으며 그늘 안으로 들어서다가 그만 꿀먹은 벙어리가 되
고 말았다. 멀리서 볼 때도 미녀다 싶었더니 가까이서 보니 아예 상상을 초월하
고 있었던 것이다.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우단처럼 두리우고 있는 저 섬연한 자태가 과연 인간의
것이란 말인가?
  그가 말도 못하고 멍청하게 일운연만 들여다 보고 있자 사우는 싱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왜 마음에 드오?"
  뚱보상인은 넋을 잃듯 중얼거렸다.
  "들다마다..... 내 나이가 이십 년만 젊다면 자네와 사생결간이라도 내고 싶을
지경일세."
  "왜 나하고 낸단 말이오? 당신이 미녀를 차지하고 싶다면 겨루어야 할 사람
은 내가 아니라 서천무결이오."
  순간, 뚱보상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서천무결이라고? 그렇다면 이 소저가 바로 남해성녀 일운연이란 말인가?"
  일운연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하찮은 이름을 기억하시는군요."
  뚱보상인은 손을 휘휘 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그런 예의는 감당 못하오. 지체높은 아가씨. 나는 색양(色陽)이란 무명필부외
다."
  이번에는 일운연이 봉목을 동그랗게 떴다.
  "색양이라면 헌원삼결(軒轅三缺)의 심결(心缺) 색양인가요?"
  사우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당신은 이 뚱보의 값을 지나치게 올려 주시는 군요. 헌원은 무슨 헌원이란
말인가? 원숭이라는 말이 더 좋을 것이오."
 그러나,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일운연의 놀라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삼결삼광(三缺三狂).
  이 괴상한 여섯 고수에 대한 소문은 오래 전부터 무림을 진동시켜 왔었기 때
문이다.
  헌원삼결(軒轅三缺), 각기 감정이
없고(情缺), 마음이 없으며(心缺), 눈이 없는(盲缺) 삼결의 고수들.
  정결(情缺) 비도사신(飛刀死神)남화룡(南華龍).
  그는 감정이 없다. 그는 비단 상대의 사정을 봐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사정도 보지 않았다.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의 비도는 손을 떠났고 적의 목
에 북두칠성 모양의 비도가 나란히 꽂히는 것으로써 싸움은 끝났다.
                          
  심결(心缺) 도수(盜首) 색양.
  그는 마음이 없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돈이었다. 자금성(紫禁城)의 옥
쇄는 칠겹의 철금고 안에 꽁꽁 붕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하의 대도, 도수
색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눈 앞에 선 여자가 입고 있는
속곳까지도 쥐도새도 모르게 빼낼 수 있는 도신(盜神)이었다.
  맹결(盲缺) 인상인(引上人) 중산.
  그는 눈이 없다. 당연히 앞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눈을 뜨고 있
는 어떤 사람보다도 빠른 검을 썼다. 일대쾌검(一大快劍)의 달인, 혼(魂)을 이끌
어 가는 승인(僧人)이라하여 불렀다.
  헌원삼결이 없을 결(缺)을 쓰는 인물들이라면 헌원삼광(軒轅三狂)은 미칠 광
(狂)을 쓰는 삼 인의 고수들.
  궁광(弓狂) 혈궁신전(血弓神箭) 석도해(石道解).
  그는 활에 미쳤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오백 보 떨어진 곳에서 앵두 한 알을
머리에 얹게 하고 활을 연습하다가 그 아들을 죽였다. 아내에게는 앵두보다도
더 작은 쌀알 하나를 얹게 하다가 그 아내마저 죽였다. 그는 활의 불가사의함에
도전하는 활의 구도자였다. 천하에서 가장 큰 활부터 가장 작은 활까지 자유자
재로 달통한 기인.
  의광(疑狂) 쌍창무애(雙槍無愛) 철마린.
  그는 의심이 많다.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누구에게든 절대 등
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그는 특별히 의자를 돌려 벽을 등진
후에나 먹었다. 그는 매우 잘 생겼지만 냉혹했다. 그의 쌍창은 지금까지 자신과
대적한 사람을 살려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요광(妖狂) 혈부용(血芙蓉) 채하(彩霞).
  요염하기 이를 데 없는 미녀고수, 그녀의 경공(輕功)은 천하 무적이었다. 그녀
가 한 번 쫓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아무도 그 추적권을 벗아날 수 없었다. 또한
그녀는 한 번 숨기로 마음먹으면 그 누구도 그녀를 찾거나 쫓을 수 없었다. 아
름답지만 잔인한 손속으로하여 혈부용이라 불리우는 사갈 같은 미녀.
  헌원삼결과 헌원삼광은 각기 그 독특한 재주로써 무림에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는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행동하며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고집불통의 독선적인 고수들로 이름나 있기도 한 것인데.....
  일운연은 이런 고수 중 하나를 고양이의 앞에 쥐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
우를 특별한 시선으로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그는 확실히 특이한 사람이다.....'
  이때, 색양이 큰 입을 벌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대파산을 떠나지 않던 자네가 웬일로 이런 초원까지 왔
단 말인가? 난 솔직이 귀신을 본 줄 알았네."
  일운연이 배시시 웃었다.
 "헌원삼결이라면 무림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그 삼결의
일 인이신 색대협께서 무엇을 두려워 하십니까?"
  색양은 가만히 흐르는 땀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모르는 말씀이오. 난 비록 삼결이라 불리우지만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은
일생 동안 만나지 않으려 했소. 그 사람이 바로 이 친구란 말이오."
  사우가 고개를 저었다.
  "쓸데 없는 말은 그만 두고 난 당신에게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소."
  "그게 뭔가?"
  "비도사신 남화룡의 거처를 당신은 알고 있겠지?"
  순간, 색양은 미친 듯이 손을 저었다.
  "무슨 소리! 내가 그를 모른 지는 이미 삼 년이 넘었네."
  "거짓말! 천하에서 오직 한 사람, 당신만은 그가 사는 곳을 알고 있소."
  "쯧쯧..... 내가 무엇이 아쉬워 거짓말을 하겠나? 우리 헌원삼결은 삼 년 전에
헤어진 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네."
  이때다. 돌연. 한 자루 검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색양의 허벅지엔 어느 샌가
새파란 광채를 일렁이는 단검 한 자루가 닿아 있었다.   사우가 싱긋 웃으며 말
했다.
  "이 화린보검(華鱗寶劍)은 비록 사용한 지 오래되긴 했지만 당신의 다리 하나
쯤 자르는 데는 아직도 쓸모가 있을 것 같은데....."
  말과 함께 그가 칼을 든 손에 가볍게  주자 즉시 색양이 걸친 바지자락이 스
윽 잘려 나갔다. 색양은 식은 땀을 주르르 흘리며 말을 이었다.
  "헤헤..... 물론이지. 난 방금까진 잘 몰랐지만 자네가 그렇게 충고를 해주니
조금 기억이 나는 것도 같운데.....? 할 수 없군, 할 수 없어. 내 다리를 위해 친
구를 배신할 수밖에 없군....."
  "남화룡이 있는 곳은?"
  "그는 소주(蘇州)에 있네. 태호(太湖)의 백룡탄(白龍灘)에서 일곱 살된 딸과
함께 살고 있을 걸, 아마?"
  "아마?"
  "헤헤..... 거의 맞겠지."
  사우는 웃으며 검을 거두었다.
  "당신의 양심을 믿도록 하겠소."
  색양이 자신의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급히 물었다.
  "그런데 자넨 왜 남화룡을 만나려 하나? 그는 이미 일에서 손을 뗀지 삼 년
이 넘었는데....."
  "이번 일은 하게 될 것이오."
  "그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당신은 알 것 없소."
  색양이 급히 몸을 돌리려는 사우의 앞을 막아섰다.
  "헤헤..... 그래도 우린 한때 같이 일한 동료가 아닌가? 말해주게, 응?"
  사우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한 사람에게 황금 천 냥의 배당이 돌아가는 일이오?"
  "지금..... 뭐라고 했나? 황금 뭐라고?"
  "천 냥이오."
  순간, 색양은 쓰고 있던 모자를 미친 듯이 벗어 내팽개쳤다.
  "자넨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런 신나는 장사에 날 빼겠다는 얘긴가, 응?"
  "당신은 너무 겁이 많소."
  "무슨 소리야? 바로 어제만 해도 천 마리의 이리와 싸워 이긴 날세. 난 너무
이리를 많이 잡았으므로 하루 세 끼를 이리 튀김, 이리 볶음, 이리 국으로 때워
야 했단 말이야."
  그러나, 사우는 여전히 시큰둥하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당신은 워낙 멋대로 행동해서 말이오....."
  "약속이라도 하겠네."
  "뭘로 한단 말이오?"
  색양은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이내 품 속에서 검은 옥패 하나를 꺼냈다.
  "이건 죽은 아내의 유일한 유물이야. 이걸 맡기겠다면 믿겠나?"
  사우는 힐끗 옥패를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또!"
  "응?"
  "다 꺼내란 말이오."
  색양은 한쪽의 일운연을 힐끗 바라보더니 겸연쩍은 표정으로 주섬주섬 뭔가
를 꺼냈다. 그가 이번에 꺼낸 것은 여자들이 귀에 다 거는 장신구였다. 벽옥에
호박을 덧붙인 그것은 매우 귀해 보였다.   순간, 일운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
러졌다. 그녀는 급히 자신의 귀를 만져 보았다.
  헌데 없었다. 귀에 걸고 있떤 귀걸이가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
  사우는 그러나 여전이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말이 끝날 때까지도 당신이 모든 것을 다 털어놓지 않겠다면 당신은 제
외시키는 것으로 하겠소."
  순간, 색양의 품에선 물건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여자의 손지갑에다
노리개며 상아로 만든 장품(粧品), 마지막에는 얇은 홋겹의 속옷까지 나왔다.  
일운연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졌다. 그 속옷은 바로 자신의 최후의 속가리개
위에다 겹쳐 입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헤헤..... 용서하십시오, 소저. 천잠사로 만든 속옷이란 처음 보는 것이라
서.....?
                                       
  11. 제11장 삼월 동풍륜(三月 東風輪)
  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름 소나기였다.  뽀얀 우막(雨幕)이 소오대산(小
五台山)의 깊은 원시림을 신비의 저경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빗방울이 나뭇
잎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자못 운치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사대협은 왜 처음부터 그를 쓰겠다고 말하지 않았죠? 그는 돈 얘기
만 하면 즉시 승낙할 사람이던데."
  산길을 걷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난 참이었다. 달리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없었
던 터라 두 사람은 근처의 작은 동굴에 찾아 들어 몸을 녹이고 있었다. 두 사람
이 타고 온 말과 추아는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말이 동굴이지 두 사람이 들어가 앉아 있으면 몸과 몸이 맞닿아 서로의 체온
이 느껴지는 그런 작은 동혈. 동혈의 사방은 흙이었다. 동혈의 입구에 드리워진
거미줄에도 빗방울이 묻어나고 있었다.   사우는 그 거미줄을 무심히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색양은 골치아픈 인물이오. 변덕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끓듯 변하오. 만약
내가 처음부터 그에게 부탁조로 나갔다면 그는 고주알 미주알 값을 두 배 세
배로 올리고자 혈안이 되었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다짐을 받지 않는다면 그 말
썽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오. 나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스스로 이 일
에 끼어들도록 만든 것이오."
  일운연은 한쌍의 봉목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군요. 심결 색양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사대협밖엔 없을 거예요."
  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도무지 칭찬이라거나 그 밖의 인간들이 갖는
감정에는 무표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관심을 느끼는 것은 오로지 맡을 일 뿐이
었다. 그게 아니라면 잠이다.   그의 잠은 도대체가 시도 때도 없었다. 심지어
는, 주루에서 밥을 시켜놓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는 눈을 감고 잠을 잤으
니까. 일운연이 문득 다시 물었다.
  "색양에게 헌원삼광의 하나인 요광 채하를 찾으라고 말했는데 그는 그녀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요?"
  "숨어 있는 사람을 찾는데 색양보다 뛰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소. 천하에서 오
직 그만이 채하를 찾을 수 있소."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찾는 사람들을 모두 그에게 찾도록 맡기면 좋지 않았
나요?"
  "그는 다만 찾을 뿐이지, 그들을 설득시킬 수 없소. 채하만은 예외이오."
  "왜 그런가요?"
  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운연도 더 묻지 않았다. 물은 것이 바보였다.   채
하는 여자이고 사우는 그런 여자들이 꿈에서 찾아 헤매는 이상적인 남성상이
아닌가? 모르긴 몰라도 그녀와 사우와의 관계는 부르기만 하면 달려오는 그런
관계일 것이다.
  헌원삼결과 헌원삼광, 이들 모두를 계획에 끌어 들이려는 것이 사우의 계획이
었다. 그 기한이 한 달, 그리고 마중뇌옥을 침공하는 시간을 다시 한 달로 하여
남은 두 달의 시한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제 천종과의 약속시간은 정확히 육십
일이 남아 있었다.
  이때다. 돌연, 꽈앙--! 벼락치는 듯한 천둥음이 두 사람의 바로 뒤에서 터져
나왔다.
  "악--!"
  "윽--!"
  거대한 강풍이 두 사람의 등을 강타했다.  순간, 사우와 일운연은 폭풍에 휘
말린 가랑잎처럼 사오 장 밖으로 날려갔다. 사우는 허공에 뜬 자세 그대로 바로
옆을 스쳐 퉁겨가는 일운연의 등을 잡아챘다. 연후 세 바퀴나 거푸 맴돌아서야
간신히 땅에 내려설 수 있었다.  급히 품에 안긴 일운연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한 줄의 핏물이 가늘게 흘러 나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등에도 깊은
균열이 생겨 피가 샘솟 듯 솟구치고 있었다. 엄중한 상처요,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사우는 급히 그녀의 상처를 지혈시킨 후 전면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엇인가가
동혈의 막힌 뒤쪽에서부터 터져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등도 지금 아련히
통증이 일고 있었다.
  '무엇인가? 굉장한 힘이었는데.....?'
  바로 그때, 우웅-- 한 소리 날카로운 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황급히
돌린 시선 속으로.....  오오, 저게 뭘까? 톱니바퀴, 공중을 떠오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톱니바퀴였다.  헌데, 이 톱니바퀴에는 지금 십여 세가량의 동자(童子)
하나가 올라 타 있는 것이었다.
  "아하하하--"
  요사스런 웃음소리,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오호호호--"
  이번에는 계집아이의 짤랑짤랑한 웃음소리에 이어 반대 쪽에서 은빛의 톱니
바퀴를 올라탄 작은 소녀 하나가 나타났다.
  그들은 누부신 금빛과 은빛을 사방으로 교차해 내며 어지럽게 허공을 맴돌더
니  일순, 공중의 한 곳에 둥둥 떠선 사우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숙객, 이곳이 너의 무덤이다."
  그제서야 두 어린 아이의 형체를 확연히 알아본 사우는 내심 크게 놀랐다.
  "삼월동풍륜(三月冬風輪)? 저것은 사도십병의 서열 여덟 번째 무긴인데?"
  사도십병, 이것은 사파에 전해 오는 열 가지의 전설적인 무기를 말한다. 그
하나 하나가 모두 패도적인 위력을 지니며 그 한 가지만 가지고도 거의 무적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절대신병(絶代神兵)들!  혈수마시, 사인마창에 이어 삼월
동풍륜은 여덟 번째 서열을 차지하고 있었다.
  허나, 사우는 이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형제들, 자네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금빛 철륜을 올라탄 동자가 거만하게 말을 받았다.
  "경고하노니 죽음이 두렵거든 온 길로 다시 가라."
  사우는 의식을 잃은 일운연을 근처의 나무등걸 아래 눕혀 놓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경고는 고맙네만 난 남의 말이라면 기를 쓰고 안 듣는 못 된 습관이 있어서
말이야."
  동자, 동녀는 서로의 시선을 힐끗 마주치더니 싸늘하게 웃었다.
  "그럼 죽어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두 줄의 금빛, 은빛 선으로 화(化)하여 사우의
전신을 무섭게 짓쳐 들어왔다.   위이잉---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바람
소리와 무섭게 회전하는 톱날이 보일 뿐이었다.
  사우는 그것들이 너무 빨리 닥쳐 왔으므로 별다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다급히 땅을 뒹굴었다. 두 개의 삼월동풍륜은 그의 머리카락을 한 올 차이로 스
치고 지나갔다.  슈왁--!
  동풍륜은 삼 장여를 위로 솟구치더니 재차 날카로운 기세로 짓쳐 들었다.
그것들은 도대체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빨랐다.
  사우는 몸을 채 다 일으키기도 전에 이 두 번째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과연 사도십병의 여덟째다운 위력이로군..... 공격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러
나 세상에 완벽이란 없는데....'
  세 번째 공격이 짓쳐들 때 사우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지켜 보았다.
이번에는 한 개의 동풍륜이 그의 왼쪽 어깨를 도끼처럼 가르고 지나갔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를 지혈시키며 사우는 싱긋 웃었다.
  '허점은 있기 마련이지..... 내 어깨를 찢은 대가로 너희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될 것이다.'
  네 번째의 공격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사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돌
진해 오는 철륜을 향해 마주 몸을 날렸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는 두 자루의 비
수가 무섭게 허공을 갈랐다.
  슈욱-- 쨍--!
  철륜은 회전한다. 그들은 특수한 훈련을 거쳐 회전하는데 따른 어지러움증이
나 현기증은 다른 사람에 비해 적을지 모른다. 그러나, 회전을 하다보면 주위의
사물은 명확히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우가 노린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그
의 비수는 정확히 철륜의 틈바구니를찔렀다.
  짜앙-- 쨍--! 철륜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멈칫하는 순간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파앗--! 피어오르는 청광, 청광은 두 줄기였고 그 하나는 동자의 목을,
다른 하나는 동녀의 어깨를 파고 들었다.
  "윽--!"
  "아악--!"
  순간, 허공을 감돌던 죽음의 금빛, 은빛이 일시에 사라졌다. 동자의 몸은 사오
장이나 날려가선 한 그루의 거목에 쿵-- 하고 부딪치고는 즉시 목숨을 잃고 말
았다.  동녀는 어깨에 관통한 비수를 움켜잡고는 어쩔줄 몰라 주춤 물러나고 있
었다.
  "살인자..... 같으니....."
  사우는 싱긋 웃었다.
  "살인자란 말이냐? 너희들이 나를 죽이고도 너희들은 서로를 살인자라 부르
겠는가?"
  그는 돌연 위엄 어린 얼굴을 하고 싸늘한 어조로 내뱉았다.
  "나는 본시 여자와 약자(弱者)는 죽이지 않는다. 너를 보낸 한당에게 가서 전
하라. 머지않아 사우가 이 빚을 갚으러 간다고."
  동녀는 이를 바드득 갈더니 피를 토하고 죽은 동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 원한은 청산녹수(靑山綠水)가 흐르는 한 잊지 않고 갚을테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숲 그늘 속으로 번쩍 몸을 날려선 이내 사라졌다.
  사우는 천천히 허공에 손을 뻗었다. 두자루의 비수가 손 안으로 무엇에 이끌
리기라도 하듯 빨려 들자 그는 그것들을 품 속에 잘 갈무리하고는 한쪽의 일운
연에게 다가갔다. 일운연의 얼굴은 납빛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손
목을 짚어본 사우는 검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어렵군. 내장이 위치를 벗어났는데....."
  그는 하늘을 한 차례 힐끗 올려다 보고는 이내 손가락을 입에 넣어 삐익 소
리를 불었다.   어디에 머리를 처박고 숨어 있었던 걸까? 애마(愛馬) 풍혼과 추
아가 꼬리를 만 채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일운연의 말은 도망갔는지 이미 보
이지 않았다.  사우는 일운연을 풍혼의 등에 덥썩 얹고는 낭랑하게 소리쳤다.
  "있는 힘을 다해 달리는 게 좋아, 풍혼. 그러지 않는다면 네 놈을 사흘 동안
굶기겠다!"
  *          *          *
  일곱 살? 여덟 살쯤 되어 보인다. 계집아이는 맑은 시냇물에 손을 담그었다
빼는 무미로운 동작을 오랫 동안 계속하고 있었다.
  이때 돌연, 계집아이의 눈이 초롱하게 빛을 발했다. 계곡물에 사르르 떠내려
오고 있는 작은 종이배 하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나뭇잎이 세 장 얹힌 그것은
이를 데 없이예쁘고 귀여웠다.
  계집아이는 조심스레 종이배를 주워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배가 흘러온
상류쪽을 향했다.   한 그루 느티나무 아래 우뚝 선 신형 하나, 하얀 백견이 그
옆에 도사리고 있었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오른 숲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그의 윤곽이 뚜렷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아저씨는 누구죠?"
  인영은 빙긋 웃었다. 입술 새로 드러나는 이빨이 박속처럼 희었다.
  "네가 경아(瓊兒)냐?"
  "예, 아저씨는 어떻게 제 이름을 알아요?"
  "나는 너의 아버지를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
  "흐흥....."
  계집아이는 낯선 사람인지라 말을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영은 어깨를 으
쓱해 보이더니 자신의 발 아래를 가리켰다.
   "만약 네가 말을 늦게 한다면 이 아줌마는 죽을지도 모른다. 경아."
  경아는 사내가 가리키는 곳을 힐끗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
다.
  "굉장히 예쁜 아줌마로군요?"
  "그래, 그러나 심한 상처를 입었지. 네 아버지가 아니면 아무도 고칠 수 없단
다."
  계집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나무를 하러 가셨어요. 그 아줌마는 제가 집으로 모실께요. 바로 저
쪽이예요."
  아침 햇살 아래 뿌연 도광(刀光)이 허공을 갈랐다. 나무, 한 그루의 소나무가
정확히 이백 네 토막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금이 가기만 했을 뿐 와르
르 갈라지진 않았다.
  웃통을 벌거 벗은 장한 하나, 자욱한 구레나룻이며 강인한 체격이 부처를 수
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의 웅자를 연상케 하는 그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다
시 맹렬한 기합과 함께 허공에 도광을 그어냈다.
  슈슈슉--! 파파팍--!
  이백 네 줄기의 도광, 그것은 처음과 똑같은 순서로 나무 속을 파고 들어갔
다. 그러나 나무는 여전히 금이 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금이란 것도 주
의를 기울여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세했으니....
  아아, 나무를 이백 네 토막으로, 그것도 한 칼에 잘라낸다는 것도 웬만한 고
수로선 엄두도 못 낼 일이련만..... 거기다가, 두 번, 세 번 똑같은 순서로 그것을
베며 또한 벤 흔적이 처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아니
두 번, 세 번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삼 년 동안이나 이 나무를 베어왔다. 똑같
은 순서에 똑같은 힘, 그리고 삼천 번을 베인 이 나무는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차례의 심호흡이 있었다.   광채! 파파팟! 섬뜩한 도광이 아침
공기를 사납게 찢는다.  이때 돌연, 희뿌연 인영 하나가 중년인의 도광 속으로
한 줄기 연기처럼 스며들었다. 그리고, 차차창--! 귓청을 찢어낼 듯한 금속성,
중년인의 무표정한 얼굴이 홱 돌변했다.
  그는 자신의 부풍도식(浮風刀式)의 이백사변(二百四變)이 일제히 봉쇄되는 것
을 느꼈다. 그 도를 가로막은 물건이 무슨 희대의 병장기가 아니라 한 개의 풀
잎에 불과함도 아침 햇살 아래 분명히 보았다.
  천하는 넓고 넓지만.....
  중년인은 이러한 무예의 소유자를 단 한 사람 알고 있다. 그는 도를 거두고
성큼 물러났다. 무표정한 목소리가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우 자넨가?"
  한 사람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수중에 들고 있던 풀잎
을 툭 버렸다.
  "속세를 떠난 지 삼 년이나 된다는 양반이 웬 칼질을 그렇게 험하게 하고 있
소?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게 아니오?"
  중년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에 걸쳐 놓았던 옷을 입었다. 그는 짐
승 가죽으로 만든 전형적인 사냥꾼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매우 무뚝
뚝했지만 사우는 조금도 언짢게 생각지 않았다. 중년인 남화룡(南華龍), 무림에
선 삼결삼광의 우두머리로 불리우는 정결(情缺) 비도사신(飛刀死神), 정결이란
그의 별호로도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은 아무리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과장된
몸짓으로 환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네가 웬일인가?"
 "환자가 하나 있어서. 삼월동풍륜의 날에 상했는데 당신이 좀 보아주어야겠소."
  "그런 환자를 왜 나에게 데려오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화룡은 이미 물건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패어
놓은 나뭇짐을 성큼 둘러멘 그는 사우를 힐끗 바라 보았다.
  "집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네. 그 아래를 파보면 술이 한 병 있어. 술 값
은 함부로 입을 나불거린 색양에게 받을 테니 마시고 있게."
  12. 제12장 기인 남화룡(奇人 南華龍)
  달빛이 마주앉은 두 사람의 어깨에 내려 쌓이고 있었다. 바람이 산정을 휘몰
아 가고 있었고, 저 아래 달빛 안개에 감싸인 남화룡의 초옥(草屋)이 보였다.
  남화룡의 어린 딸 경아와 일운연은 벌써 잠이 들었다.
  사우와 남화룡은 이미 두 병의 술을 비운 참이었다. 한 잔의 술을 비운 후 묵
묵히 산 아래를 바라보고 있던 남화룡이 입을 열었다.
  "낮에 내가 치료한 아가씨는 자네와 어떤 관계인가?"
  사우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일을 청부하고 청부받은 사이이오."
  "다행이군."
  무슨 말일까? 사우가 싱긋 웃었다.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어떤 쪽으로 말을 듣고 싶나?"
  "당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
  남화룡은 꿀꺽 잔의 술을 삼켰다.
  "그녀는 매우 이상한 여자일세. 나는 무심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믿어지
지 않아 정밀검사까지 해 보았네."
  "당신의 의술(醫術)은 부풍도법과 더불어 이절(二絶)로 불리고 있으니 난 그
말을 모두 믿겠소."
  "흠..... 그녀는 성결한 미모와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더군. 치료 중에
잠시 눈을 떴었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본다는 쪽이 옳겠지. 하지만
그녀는 몸 속에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죄악을 가지고 있더군."
  "그게 뭔가요?"
  남화룡은 사우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사파마도의 무리들이나 익히는 흡정섭양(吸精攝陽)의 대법을 익힌 상태더란
말이야."
  흡정섭양, 남녀간의 교합에 있어서 상대 남자의 기(氣)와 정(精)을 빨아들여
자신의 내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사악한 무예. 이러한 무예는 상대의 피를 빠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서 무림에서는 금지된 무공 중의 하나였다.
  사우의 눈에 이채가 스쳐지났다.
  "그게 정말이오?"
  "몸의 좌골(左骨)이 검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흡정섭양을 익힌 마녀
(魔女)들의 독특한 표시이지."
  "내 말은 그런 것들을 밖으로 드러나게 할 수 있느냐는 말이오."
  남화룡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었다.
  "흡정섭양의 마녀들은 남자의 시선에 쉽게 흥분하게 되지 여자란 일반적으로
남자의 손이 닿고 애무가 계속되어야 흥분을 하지만 말이야. 알몸으로 만든 후
잠시 지켜보기만 해도 흡정섭양의 마녀들은 온 몸을 뒤틀 정도로 흥분을 하게
되네. 그 순간 이마에 엷은 꽃모양의 도화인(桃花印)이 나타나지."
  "도화인이라? 복숭아꽃의 무늬란 말이로군."
  남화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우를 정시했다.
  "그렇네. 이런 괴상한 무예의 여인은 오십 년 이래로 무림에 없었지. 이 괴상
한 여인의 청부를 받아들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사우는 대답 대신 자신의 팔소매를 걷었다. 우측 팔의 팔꿈치 부분, 그곳엔
한 일자로 길게 그어진 상처가 있었다.
  "이 상처를 아시오?"
  남화룡은 그것을 힐끗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자네가 옥청풍(玉靑風)의 이름으로 강호를 유협(遊俠)할 때 살인마
한당과 싸우다 입은 상처가 아닌가?"
  "그렇소."
  사우는 담담하게 웃었다.
  "당시 나는 군웅들에게 쫓기던 그와 사천(四川)의 한 비곡(秘谷)에서 정면으
로 맞닥뜨렸었소. 무려 일천 초를 싸운 끝에야 나는 간신히 그를 죽일 수 있었
소. 비록 천하의 살인마이긴 하지만 난 그의 무예를 존중하는 뜻에서 그를 정중
히 묻어 주었던 것이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요."
  "그렇네."
  "내 손으로 땅에 묻기까지 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면 당신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겠소?"
  좀처럼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던 남화룡의 얼굴에 가볍게 놀란 빛이 스
쳐 지났다.
  "그 한당이 살아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비단 살아났을 뿐 아니라 버젓이 마중뇌옥이란 장사를 하고 있소."
  "무덤을 뚫고 살아났을까?"
  "아니."
  사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안개에 감싸인 건너편 산봉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청부를 받자마자 나는 그 한당의 무덤을 확인했소. 그의 뼈는 틀림없이
있었소. 내 화린보검에 맞은 칼자국까지도 선명한 뼈였소. 지금 무림에 나타난
한당은 가짜 한당이오."
  "간도 크군. 어떤 자가 감히 한당을 자처하고 있을까?"
  "그가 누구든 간에 그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오. 그는 지금 천하의 양대세력인
취라성과 천종의 정면대결을 일으킬 수도 있는 불씨이오. 거기다가 그는 사도십
병을 가지고 있소. 내가 본 것만 해도 벌써 혈수마시, 사인마창, 삼월동풍륜의
세 가지이오."
  남화룡은 신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그는 진짜 한당보다도 더욱 무서운 인물이로군. 굉장한
자이겠는데..... 그 자를 죽이는 것이 자네 임무인가?"
  "그가 하고 있는 마중뇌옥에서 사람 하나를 빼오는 것이 내 일이오."
  "어차피 싸워야 한다는 말 아닌가?"
  사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쨌든 그녀를 치료해 주어 고맙소. 난 그만 가보아야겠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우는 산 아래로 성큼성큼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순
간 남화룡의 말이 그의 등을 붙잡았다.
  "자넨 나에게 따로 할 말이 없나?"
  사우는 뒤도 안 돌아보고 대답했다.
  "없소. 속세를 삼 년이나 떠나 사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소."
  일순, 그의 앞으로 남화룡의 건장한 신형이 후르르 날아내렸다.
  "이 능글맞은 친구, 갈 수록 능글 맞아지는군."
  그는 드물게도 껄껄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너다. 그런 네가 사지를
가는데 내가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의 딸은 어떻게 하고 날 따라온단 말이오?"
  "이 놈, 벌써 그에 대한 안배도 해 놓았으렸다."
  비로소 사우도 빙긋 웃었다.
  "난 벌써 당신이 이 일을 마다하지 않을 줄 알았지. 당신의 딸은 훌륭하게 맡
아줄 사람이 있소."
  "그가 누군가?"
  "풍사향."
  사우는 빙글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자식 하나 없는 과부니까."
  *          *          *
  그는 깡 말라 있었다. 십 년을 땅 속에서 썩은 해골이라 해도 그보다는 덜 말
랐을 것이다. 그의 나이는 이제 겨우 삼십을 조금 넘겼지만 겉으로 볼 때는 육
십도 넘은 사람 같았다. 그는 자신의 초가집 마루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의 집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낡아 있었고, 그
나마 마당에 심어놓은 고추밭 정도가 사람이 사는곳이란 심증을 가게 하는 침
울한 곳이었다.   사우, 그리고 남화룡과 일운연이 그의 초가 마당으로 들어섰
을 때 이 괴상한 해골은 느닷없이 무릎에 놓여 있던 검은 활을 들었다.
  그가 겨냥한 사람은 일운연이었다.
  슈팟--! 무섭도록 빠른 활, 이 화살이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오자 일운연
은 기겁하여 급히 몸을 피하려 했다.  헌데 이때, 사우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냥 두고 보는 게 좋소."
  일운연은 질끈 눈을 감았다. 헌데 보라. 화살은 그녀의 얼굴 반 치 앞에서 돌
연 맹렬하게 회전하더니 다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닌가? 그냥 되돌아 가는 것
이 아니다. 본시 마당에는 매우 많은 고추가 심겨져 있었고, 활은 그 고추를 빙
글빙글 돌아가며 따는 것이다.  화살이 멋대로 방향을 바꾸다니, 거기다가 이리
저리 들쑥날쑥 돋은 고추를 눈이라도 달린 듯 찾아다니며 딸 수 있다니, 이 괴
사에 일운연은 눈을 부릅떴다.
  눈 깜짝할 새에 마당의 고추는 다 땅에 떨어졌다. 화살도 쏘아낸 주인에게 사
뿐히 돌아갔다. 비로소 해골처럼 마른 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순간, 남화룡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석도해(石道解), 자네의 회회전(廻廻箭)이 성취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석도해라 불린 이의 입이 무감동하게 열렸다.
  "길고도 긴 세월이었지."
  남화룡이 다시 말했다.
  "내가 처음 자네를 보았을 때, 자네는 아내가 베를 짜고 있는 베틀 아래 누워
서 좌우로 부산하게 오가는 실북을 응시하고 있었네.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
자 자네는 대답했네."
  "수련을 쌓을 수록 좌우로 오가는 이동의 폭이 점점 좁아지는데 실북이 움직
이지 않고 고정된 것처럼 보인다고 했겠지."
  "맞네.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난 후 자넬 다시 보았을 때 자네는 머리카락에 이
를 한 마리 묶어놓고 하루종일 그 이를 들여다보고 있더군."
  "대상과 마음이 여일(如一)하게 되면 비록 작은 이라도 말처럼 크게 보이는
경지를 깨닫기 위해서였지."
  남화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과 대상이 하나로 융합되어 어떤 움직이는 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무심
지경(無心之境)을 자넨 깨달았던 거네. 난 그때 자네가 이미 명궁(名弓)이 되었
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그 뒤로 자네가 아들 풍(風)과 아내 여설까지 죽이더군.
활의 불가능한 경지, 돌아가며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더불어 이동하는 전설의
회회전에 자네는 도전했던 거네."
  남화룡은 여기까지 말한 후 마음이 무거운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한참만에
야 다시 이었다.
  "그 기적을 마침내 이루고 만 자네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네....."
  그는 말을 끝내자 그 자리에 선 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사우가 박수를 따
라쳤다. 얼떨떨하여 서 있던 일운연도 덩달아 쳤다.  문득, 활의 명인 석도해의
퀭한 두 눈에 한 줄기 투명한 눈물이 찰랑찰랑 차올랐다. 그는 급히 고개를 떨
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으로 들어 오시오. 옛 친구들, 고추나마 안주삼아 쓴 술 한 잔 올리겠
소......"
  *          *            *
        
  절의 이름은 무시사(無時寺)였다. 일주문을 넘어서며 일운연은 이 절 이름이
못내 이상했던지 바로 옆을 걷는 사우를 향해 속삭이듯 물었다.
  "무시(無時)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사우는 정면을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시간이 필요 없다는 뜻이오."
  "누가 필요 없다는 말인가요?"
  "이 절의 주인이오."
  "그 분이 바로 헌원삼결의 맹결(盲缺) 인상인(引上人) 중산 스님인가요?"
  "그의 나이는 이제 겨우 서른이니 스님이라 굳이 부르지 않아도 되오."
  일운연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인상인 중산께선 어째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앞서 성큼성큼 걷던 남화룡이 말을 받았다.
  "그는 장님이오.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그는 촉각과 영감(靈感)을 누구보다
도 발달시켰소. 그래서 그는 빗물을 손바닥에 받아보는 것만으로도 그 비 끝에
어느 법당 앞의 모란이 꽃망울을 터뜨릴 것인가를 알고, 아침 안개를 얼굴에 쐬
어보고 종각곁의 단풍이 오늘부터 붉어질 것이라는 예언을 할 수 있소. 이런 그
에게 무슨 시간이 더 필요하겠소."
  일운연은 아름다운 한 쌍의 눈에 해연히 놀란 빛을 떠올렸다.
  "어찌 그럴 수가....."
  이때, 그들의 눈 앞으로 한 채의 아담한 선방(禪房) 나타났다. 따뜻한 아침 햇
살이 내려 쪼이는 선방 마루에는 한 명의 백의승인(白衣僧人)이 앉아 손을 햇살
속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는 장님이었으나 이 순간의 그는 매우 정결하고 깨끗
해 보였다.   혈궁신전 석도해가 언뜻 걸음을 멈추더니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남화룡이 말을 받았다.
  "나는 인상인이 햇살이 따뜻하고 차가움으로 지금의 시간을 짐작한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 그는 햇살의 냉온(冷溫)을 가늠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사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중산은 검의 달인(達人)이오. 그의 검은 무림에서 가장 빠르지. 눈이 먼 사람
이 검이 빠르다는 것은 손바닥에 달려 있소. 그의 손바닥은 혈관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얇소.
  그는 지금 그 손바닥으로 단순히 햇빛의 냉온만을 가늠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햇빛의 무겁고 가벼운 경중(輕重)을 가늠하고 있을 것이오."
  햇빛, 그것은 거의 무게가 없다.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그런
햇빛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때, 백의승인 중
산이 힐끗 이쪽을 향해 보이지 않는 눈을 돌리더니 담담하게 웃었다.
  "사막에 내리는 마른 비..... 더 이상 마를 것도 없는 모래비..... 사우야 말로
과연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지우(知友)로군. 희대의 바람둥이요, 무예의 달인께
서 이 한적한 산사에는 웬일이신가?"
  바람둥이, 이 말에 한쪽의 일운연은 미묘한 광채를 두 눈에 스쳐 보냈다.  사
우는 껄껄 웃으며 외쳤다.
  "이 가난한 중아, 네 놈의 먼지 나는 주머니에 황금을 시주하러 왔다."
  "그거 반가운 일이로군. 사실 그 동안 본승은 옥수수 죽과 감자로 연명해 온
터라서."
  절은 정말 지독히 가난했다. 그 흔한 사미승 하나 없었다. 인상인 중산이 곧
지주요, 상좌승이고 사미승이었다. 이빨 빠진 차잔에 담긴 식은 차를 앞에 놓고
사람들이 빙 둘러앉자 중산은 바로 옆에 앉은 석도해의 손을 잠시 잡아 보더니
담담히 웃었다.
  "석시주께선 그 동안 회회전을 성취하셨구료. 아미타불..... 정말 축하드리오."
  석도해는 몹시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자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을 텐데?"
  "손을 감도는 피의 속도가 매우 안정되어 있소. 마음의 안정이 없고서는 이런
속도가 나오지 않아요. 석시주의 안정이란 회회전의 성취 외에는 없는 것이 아
니겠습니까?"
  그는 또 남화룡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경아는 잘 크고 있군요. 남대협."
  남화룡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자네?"
  "구레나룻 중에 정일하지 않게 뽑힌 자국이 있습니다. 딸이 재롱부리며 뽑은
수염이겠지요. 잘 크는 아이는 그런 장난을 하게 마련이지요."
  말을 끝맺은 중산은 한쪽의 일운연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소저는 될 수 있으면 지금 부리고 있는 시녀를 당장 그만 두게 하십시오. 빠
를 수록 좋소. 게으름뱅이에다 일을 너무 거칠게 하는군요."
  순간, 일운연은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혹시 스님께선 제가 거처하는 곳에 와보신 것이 아닌가요?"
  "그까짓 걸 알려고 소저의 집까지 가겠소. 소승은 툇마루를 올라올 때 소저의
신발을 잠시 만져 보았을 뿐이오. 소저는 달포 전에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을 비
에 흠뻑 적신 적이 있지 않았소?"
  "그래요....."
  "그걸 소저는 시녀에게 말끔히 닦아 놓으라고 하였을 것이오. 그런데 그 게으
른 시녀는 신발에 묻은 흙을 털려고 부지깽이 같은 것으로 북북 긁었더군요. 덕
분에 뒤꿈치와 옆쪽에 흠이 난 것이오. 그리고는 말리려고 불이 훨훨 타오르는
아궁이 옆에 멋대로 놔서 가죽이 보기 흉하게 바래버린 것이오."
  사람들은 입을 쩍 벌렸다. 촉각이란 것도 이쯤이면 가히 신의 경지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별 같잖은 재간에 놀랄 것 없소. 저 놈은 본시 저렇게 유별난 놈이라 남의
집 처녀 신발이나 만지고 다니니 말이오."
  한바탕 웃음이 장내를 휩쓸고 지났다. 분위기가 슬슬 무르익어 가자 사우는
그제서야 그 동안의 사정을 간략히 설명한 다음, 품 속에서 일곱 개의 금낭을
중산과 석도해에게 하나씩 나누어 준 다음 나머지는 모조리 남화룡에게 넘겨주
었다.   "이것은 각자에게 배당된 몫 중의 절반이오. 나머지 절반은 일이 끝난
다음 분배하게 되오. 색양과 채하는 이달 보름에 연경성으로 오게 되어 있으니
남대협은 그들을 만나 몫을 준 다음 남는 돈으로는 열하사막(熱河沙漠)을 들어
가는데 필요한 제반 준비를 해 주시오."
  남화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자넨 철마린을 만나러 가나?"
  헌원삼광의 하나인 의광(疑狂) 쌍창무애(雙槍無愛) 철마린, 그는 삼결삼광의
마지막 인물이었다. 사우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집결하는 시간은 이달 스무 날이오. 그때는 즉시 출발할
수 있어야 하오."
  석도해가 자신의 활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삼결삼광에다 사우..... 우리 낭인칠걸(浪人七傑)이 다시 합류하는 것은 실로
삼 년 만의 일이로군....."
  중산이 불호를 외우며 말을 받았다.
  "이 일은 아마도 제이의 낭인시장이 생긴 이래 가장 큰 사업일 것이오. 나무
관세음보살....."
  일운연은 사람들의 얼굴을 조용히 둘러 보다가 힐끗 창 밖의 국화 숲으로 던
졌다.
  '제이의 낭인시장.....남화룡은 놀라운 비도로써 일세를 풍미했던 대살수(大殺
手)..... 그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고..... 석도해는 자신의 아들과 아내까지 무공
연습의 대상으로 삼았다하여 배척당한 인물.....  중산은 단 한 칼에 사람을 베는
살이예술(殺人藝術)의 검수..... 색양은 천하제일의 도둑이요, 채하는 보이지 않는
검의 그림자로서 무림의 피어나는 후기지수를 숱하게 망친 요화(妖花).....  거기
다가 쌍창무애 철마린은 잔인한 창법으로 명문대파들을 희롱하다가 쫓겨난 고
수자..... 사우는 유일하게 흠이 없지만 한때는 중원쌍화의 일인으로써 젊은층의
천하제일인이라 일컬어졌던 인물.....  이들은 모두 어떤 이유로든 강호에선 더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제이의 낭인시장..... 너무 강하구나.....'
  강하다는 것이 좋다는 걸까, 나쁘다는 걸까? 확실한 것은 그녀 자신만이 아는
일일 것이다. 국화는 이제 막 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13. 제13장 음모속의 미녀
      (陰謀속의 美女)
  팔월 십오일(八月 十五日)-- 약속 시간을 닷새 남겨 놓은 날이었다. 길을 잃
은 것일까? 산을 헤매노라니 날은 금방 어두워졌다. 태산(泰山)의 한자락인 관
풍산(觀風山) 어림이었다. 달도 없는 밤이었다.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으며 눈
앞에 내민 다섯 손가락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캐앵-- 캥-- 어디선가 늑대가 짖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오고 있었다.   문
득 일운연이 사우의 손을 잡아 왔다. 여인 특유의 두려움이라는 것일까? 그녀의
옥수는 땀으로 촉촉히 젖어 있었다. 사우는 힐끗 야공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에
가린 달의 잔영(殘影)이 어렴풋이 보였다.
  "요괴(妖怪)들이 출몰하기에는 좋은 날씨로군....."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해주겠다는 듯,  돌연, 스윽--
  풀잎을 스치는 미세한 소리와,
  "악--!"
  짤막한 일운연의 비명이 들려왔다. 사우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허나, 바로
옆에서 손을 잡고 있던 그녀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운연소저!"
  팍-- 한 개의 불꽃이 피어 오른 것은 바로 그때. 그 불꽃은 너무 느닷없이
피어 올랐다. 바로 눈앞이라 그 화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불꽃의 안에선 뱀과
똑같이 닮은 길쭉한 얼굴 하나가 혀를 날름거리며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숙객..... 이곳이 너의 무덤이다....."
  "타앗--!"
  사우의 좌수가 쭈욱 뻗어 나갔다. 맹렬한 권풍(券風)! 허나 불꽃은 이내 퍽--
하고 사라졌다.
  후두두-- 권풍이 주위의 나무를 애꿎게 휩쓸고 지나는 소리만이 정적을 찢었
을 뿐, 그 소리가 막 끝났을 때 이번에는 귀청을 찢을 듯 거센 말발굽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두두-- 두두두두--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이 빽빽한 원시 숲에선 말은커녕 쥐새끼 한 마
리 마음대로 다니기 힘들었다. 헌데, 만마(萬馬)가 한꺼번에 구르듯 이토록 요란
한 말발굽 소리라니.....   우두두-  와아아아--
  "끗끗..... 숙객..... 이곳이 너의 무덤이다....."
  돌연, 퀘액--!
  시퍼런 인광을 번뜩이는 도끼 하나가 사우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허나 이 소
리는 말발굽 소리에 뒤섞여 들리지도 않았다.   두 자, 한 자의 거리! 필사절명
의 찰라, 사우의 몸이 일순 빙글 돌더니 새파란 광채 하나가 도끼를 사납게 후
려쳤다.   꽝--! 도끼는 왔을 때보다 더욱 빨리 튀어 나갔다. 사우의 이마에는
식은 땀이 솟구치고 있었다. 등골이 서늘하다고 느껴져 무심코 휘두른 일검이었
던 것이다.
  "사골마부(邪骨魔斧), 사도십병의 서열 일곱 번째 무기로군. 또 놈들의 습격이
란 말인가? 어떤 수를 쓰든 나를 마중뇌옥으로 이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말이
렸다....."
  와두두-- 두두두두--
  사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런 공격이 계속 이어진다면 자신은 십 초도
못 가 땅을 뒹굴고 말 것이다.  사우는 공력을 자욱이 끌어 올렸다. 천리지청술
(千里地聽術), 백 리 밖에서 떨어지는 낙엽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즉시 그의 귓
속으로 오만가지 잡동사니 소리가 다 쏟아져 들어왔다. 괴이한 말발굽 소리는
수십 배로 커졌고.....
  와두두-- 늑대며 맹수가 울부짖는 소리,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 벌레 기는 소
리, 소리 또 소리.....
  컹컹-- 캥캥-- 크르르-- 스르르-- 왕왕--
  찾아라. 숨소리를, 보이지 않는 곳에 숨은 것이 뱀인지 사람인지 모를 괴물을!
  쐐액--! 또 하나의 도끼, 사골마부가 날아오나 보다. 사우는 우측 어깨를 휙
돌리며 일부러 도끼에다 어깨를 갖다 댔다.  파앗--! 도끼날이 옷자락을 가르고
지났다. 이때 호흡, 분명히 사람의 것인 호흡 소리가 귓전을 파고 들었다. 순간
사우의 몸이 번쩍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의 동작은 너무 빨라서 어떻게 몸
을 움직였는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검!
  '기다리고 있던 것이 성공하면 사람이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게 되는 법이
지, 흥분은 호흡을 거칠게 만든다. 뱀인지 사람인지 모를 괴물이여..... 너는 내
어깨를 맞추자 무의식으로 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숨이 바로 죽음이다!'
  슈파앗--!
  검, 그것은 마치 수천, 수만 개의 유성(流星)이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예음과 함께 쏟아져 나온 그 한성은 일순 아름답기조차 했다.
  문득, 뱀머리 인간의 얼굴이 시선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얼굴은 공포로
휩싸여 있었다. 검은 똑바로 그 얼굴을 꿰뚫었다.   휘청거리는 뱀머리 인간, 사
도십병의 일곱째 사골마부의 주인인 그는 검을 꽂은 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
굴로 중얼거렸다.
  "대유성검법(大流星劍法)..... 당신은 중원쌍화 옥청풍.....?"
  *          *          *
  "하윽..... 아아....."
  여인의 신음은 달큰했다. 사내의 우람한 팔근육 안에서 이 여체는 몸부림 치
고 있었다. 해파리처럼 흐느적이는 수발이며 사내의 동체에 사뿐 둘러진 아름다
운 손목이 쾌락으로 파르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사내는 장님이었다. 하지만
그의 율동은 어떤 눈 뜬 사내보다도 격렬하고 훌륭했다. 여인 일운연은 자신의
머리칼을 잡아 뜯었다.  그것도 모자란다는 듯 흙바닥을 긁어가는 그녀의 손톱
엔 핏자국이 맺히고 있었다.
  "아아..... 제발....."
  근 한 달이나 사내 맛을 못 본 여체였다.그 동안의 굶주림을 풀겠다는 듯 여
체의율동 격렬하다 못해 처절하기조차 했다.  이때 돌연, 장님사내 아도의 율동
이 뚝멈췄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을 허공을향해 둘러보더니 무표정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가 사골마부를 뚫었습니다."
  일운연은 흠칫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아도의 목을 힘주어 끌어 안으며 격렬
하게 소리쳤다.
  "멈추지 말아! 이 멍청아!"
  아도는 말이 채 다 끝나기 무섭게 말 잘 듣도록 만들어진 장난감 인형처럼
멈추었던 율동을 계속했다.
  "허억....."
  잠시의 시간이 흐른후, 일운연의 체내에서 한 차례 강렬한 분사가 있었다. 그
녀는 몸을 활처럼 휘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쾌락이었다. 그녀는 축 늘어
졌다. 허나 허공을 향하는 시선은 어느 새 예리하고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옷을 가져와"
  아도가 입혀 주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던 그녀는 마지막 허리띠는 자신이 직
접 둘렀다. 잘끈 동인 허리띠 그대로 그녀는 한 차례 몸을 빙글 돌려 보았다.  
그러다 말고,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 냈다.
이어, 아도를 향해 냉엄한 음성을 흘려냈다.
  "내 어깨에 상처를 내라."
  아도가 망설이자 음성은 한결 더 싸늘해 졌다.
  "어서!"
  아도는 허리춤에서 한 자루 단도를 뽑아 내더니 일운연의 둥근 어깨를 가볍
게 그었다. 가볍게라곤 하나 순간, 그 어깨에선 피가 샘솟 듯 솟구쳤다. 살은 다
치지 않고 피만 내도록 혈관을 두어 개 잘라낸 정교한 솜씨, 아도는 검도의 고
수가 틀림없었다. 일운연은 어깨를 한 차례 추스려 본 후 냉막하게 웃었다.
  "사우야, 사우..... 네가 비록 뛰어나다곤 하나 이런 일들은 도저히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그의 앞을 막고 있는 것 누구지?"
  "사도십병의 여섯째 혈혈귀망(血血鬼網)입니다."
  "망에 걸리거든 내가 있는 곳으로 보내라. 그리고 너는 앞으로도 계속 내 뒤
를 놓치지 말고 따르도록!"
  아도는 즉시 허리를 굽혔다.
 "분부 받듭니다."
  *          *          *
  일운연은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한 개의 낡은 사당이었다. 사우는 그 안으로 무심히 발을 들어놓던 참
이었다. 헌데,
  화악--! 이게 도대체 뭔가? 사당의 안을 막 들어서는 순간, 끈적끈적 하고 칙
칙한 느낌이 전신으로 번졌다. 아니 번졌다고 느낀 순간 그의 몸은 대자로 허공
에 둥둥 매달리고 말았다.
  사(絲)-- 보이지도 않고 흔적도 없는 엄청난 힘의 실.
  사우는 발버둥을 쳤다. 허나, 사지(四肢)가 문어의 흡반에 달라 붙은 듯한 몰
골로 힘이 써질 리가 없는 일,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망은 그를 더욱 단단히 흡착
시켰으며,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 수 없게 그의 몸은 느닷없이 벌어진 사당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지고 말았다.
  쿵--무거운 물체가 위에서 닫히는 듯한 굉음이 있었고, 사우의 몸은 어둠 속
으로 끝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급히 진기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몸을 가볍
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꽝--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자 그 충격은 의식을 거의
혼미하게 할 정도였다.
  "끄응--"
  사우는 주춤 몸을 일으켰다.   이때, 한 소리 놀람에 찬 목소리가 그의 귓전
을 파고 들었다.
  "사대협인가요?"
  사우는 힐끗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일운연이었다. 찢겨 나간 옷이
며 초췌한 그녀의 몰골을 일견하고 난 후 그는 피식 웃었다.
  "이 친구들은 매우 거칠군. 난 그렇다 치고 아름다운 숙녀까지 그 지경으로
만들다니 말이야."
  "당신의 상처는 어때요?"
  일운연은 근심에 찬 표정으로 사우를 향해 다가왔다.
  "보다시피 멀쩡하지."
  "내상은 입지 않았나요?"
  "말은 할 수 있으니까."
  그윽한 여인의 장향이 코 끝에 스며들었다. 일운연만의 독특한 향기였다. 사
우는 한쪽의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어깨로 와닿은 그녀의 향기와 손길을 음미했
다. 문득 그가 말했다.
  "서천무결은 운이 좋은 친구로군."
  "예?"
  "아니, 그냥 해 본 말이오?"
  사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둠이 눈에 익자 그는 세심히 주위를 살피기 시
작했다. 이곳은 호로병 모양을 한 깊은 석굴이었다. 주위의 바닥이래봐야 겨우
세 사람 정도가 나란히 누울 수 있는 크기였고, 아득한 천장까지의 높이는 거의
삽십여 장 정도나 되었다. 사방의 벽이란 것은 손디딜 틈 하나없는 매끈한 돌,
사우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날개가 없는 한 빠져 나갈 수 없는 곳이로군. 옛날 화적떼들이 사용하던 재
물 창고인 모양이오."
  "재물 창고라고요?"
  "끈을 매달아 이 아래까지 물건을 옮겨 놓는 것이오. 필요할 때면 광주리를
타고 내려와 물건을 꺼내가곤 했겠지."
  사우는 줄을 내리는 시늉을 하며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일운연이 기
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사대협은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십니까? 약속 시간은 이제 겨우 닷새
남았고 이곳은 빠져 나가기는커녕 죽어도 모를 함정인데요."
  사우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웃지 않으면? 그렇다고 울 순 없잖소."
  14. 제14장 친구의 유언(親舊의 遺言)
  사흘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그 동안 적들은 물과 음식을 내려주기는커녕 꼭
대기의 문 한 번 열어보지 않았다. 일운연은 초조했다. 아니 초조해 보였다는
쪽이 더 옳으리라. 그녀는 기갈과 굶주림으로 정신마저 멍해질 지경이었다. 무
엇보다도 덮쳐오는 졸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그녀는 한쪽의 사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사우는 자고 있었다.
  "드르렁-- 쿨--"
  그것도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사흘이나 굶은데다 바닥에는 뭔지도 모를
독충들이 기어다니는 이런 괴상한 곳에서 잠을 자다니. 문득, 그녀의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정말..... 괴상한 자로군..... 그는 이곳을 어떻게 빠져 나가겠다는 것일까? 어떡
하나..... 여기서 저 자를 죽여야 하는가..... 더 놔두어야 하는가....."
  오오..... 일운연, 그녀는 도대체 사우을 왜 죽이려 한단 말인가? 아까 그녀를
만나 정사를 치루었던 장님사내 아도는 누구이고 이런 그녀의 행동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만약 여기서 사우가 죽는다면 마중뇌옥의 서천무결을 구하려
는 낭인시장의 일은 중단되고 말 것이다. 그녀는 도대체 서천무결을 구하고 싶
어 하는 걸까, 구하고 싶지 않는 걸까?
  어쨌든 죽이기로 한다면 지금이 제일 좋은 기회였다. 코를 골면서 자는 사람
하나 죽이는 데는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할 것이다.
  일운연의 얼굴이 짧은 순간 여러 차례 변하였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문득 그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일운연은 그 손을 힐끗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자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이든 망설인 적이 없는 이 손.....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람....."
  그녀는 망연한 시선으로 사우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선과 윤곽이 뚜렷한
골격의 얼굴이며 파릇한 구레나룻, 강인한 의지를 상징하는 입술은 굳게 다물린
채 신비로운 웃음이 금방이라도 피어오를 듯하다. 웃을 때 드러나는 박속처럼
흰 이에 가슴이 뛰었던 적도 있었다. 무심히 바라보매 그 입가에 매달리던 봄날
송화가루 흩날리는 듯한 웃음에 방심이 철렁 내려앉았던 적도 있었다. 자신을
망설이게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때의 그러한 감정임을 일운연은 안다. 일순, 그
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안녕, 사우.'
  대외의 지시에 의해 마침내 쳐들었던 손이 번쩍 내려쳐질려는 찰라, 돌연 사
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일운연은 내심 까무러칠 듯 놀라 다급히 손을 거두었
다. 사우는 아함 잘잤다는 듯 기지개를 한 차례 늘어지게 켠 다음 엉거주춤 앉
아 있는 일운연을 향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왜 그러고 있소?"
  일운연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그렇게 태연히 잘 수 있는 사람이 이상해서요."
  사우는 피식 웃었다.
  "이상할 것 없소. 어차피 자두지 않으면 곤란해질 테니까. 잠이란 휴식의 가
장 훌륭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당신도 이내 깨닫게 될 거요."
  이때였다. 느닷없이 한 소리 기음이 주위의 정적을 찢었다.
  그그긍-- 몹시 무거운 물체가 마찰되는 듯한 소리.
  힐끗 위를 올려다보던 일운연이 순간 비명 같은 외침을 터뜨렸다.
  "저 위를 봐요!"
  사우는 그녀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어 들었다. 천장, 호로병 모양을 한 이 석굴의 천장이 송두리째 밀
려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도는 몹시 느렸지만 저것이 다 내려 온다면
두 사람은 말린 오징어 꼴이 될 것이다.
  "사흘씩이나 굶기더니 이제 와서 죽이겠다는 얘기인가? 정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도록 악독한 자들이로군....."
  일운연은 다급히 외쳤다.
  "어떻게 좀 해보세요!"
  "방법이 없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러시오? 저건 돌이오. 무게가 못
돼도 만 근은 나갈 것이오.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앉아서 깔려 죽을까, 누워서
깔려 죽을까를 결정하는 것 뿐이오."
  시험삼아 사우는 내려오는 돌을 향해 일 장을 쏘아냈다.
  슈욱-- 펑--!
  허나, 그 반진력에 사우의 몸이 주춤 밀려 났을 뿐 내려오는 돌에는 추호의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대단해..... 대단하군....."
  문득, 일운연이 파들파들 떨며 그의 품으로 안겨왔다.
  "어쩌지요.....?"
  사우는 그녀의 몸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윽한 우유빛 여인의 체향이 코 끝을
파고들었다. 사우는 그녀의 몸을 안은 채 한쪽 석벽에 기대어 앉았다. 뼈가 없
는 듯한 여인의 몸이 더욱 바싹 밀착되어 왔다. 사우도 에라 모르겠다는 듯 그
녀의 몸을 힘주어 끌어 안으며 싱긋 웃었다.
  "사우야, 사우. 너는 운도 좋구나. 죽는 순간까지도 미녀가 품에 안기다니 말
이야."
  무거운 침묵, 죽음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그긍-- 돌벽이 마찰되는 둔음이 끊임없이 주위를 울리고 있었고, 두 사람
은 서로의 체온에 취한 듯 묵묵히 그 소리를 몸으로 듣고 있었다.
  이때 문득, 품에 안겨있던 일운연이 취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어요?"
  "물어도 상관은 없긴 하지만 사흘이나 굶고 죽음을 눈앞에 둔 여자가 그 굶
주림과 죽음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놀라운 일이로군."
  "기왕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면 못할 말이 어디 있겠어요? 저는 다만 풀지 못
한 의문이 하나 있어서....."
  "그게 무엇이오?"
  "제가 듣기로는..... 당신과 풍사향과의 관계가....."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풍사향의 신혼 첫날 밤 그녀의 부군을 불러냈다고 하던데....."
  사우의 눈에 특이한 광채가 번뜩 스쳐 지났다.
  "그녀가 그러던가요?"
  "매우 친한 사람이 보낸 서신이라 했어요. 무엇보다도 당신은 과거 그녀의 남
편과 함께 명성을 날린 적도 있지 않나요?"
  "여자란 역시 입이 가볍군. 그래서 죽을지 살지도 모를 이런 곳에서 그런 옛
날 얘기가 듣고 싶다는 얘기요 뭐요?"
  일운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싫으심 안 하셔도 돼요."
  사우는 손을 들어 일운연의 구름결 같은 수발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는 여전히 완만한 속도로 내려오고 있는 거석을 힐끗 바라본 후 문득, 피식
웃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시간문제로군. 어제까지만 해도 당신과 나는
백 살도 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지. 그런데 이젠 죽음의 문턱이란 말이오.....그
렇소. 풍사향의 남편을 불러낸 사람은 바로 나였지....."
  "왜 불러냈나요?"
  "당시 우린 굉장한 물건 하나를 추적하고 있었지. 바로 소림이 잃어버렸던 불
문제일신공 달마신공(達摩神功)의 경본이었소.
  풍사향의 남편인 단목장룡과 나는 비록 계파는 다르나 소림의 같은 계보를
지닌 제자들로서 마땅히 잃어버린 선조의 유물을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고 있었던 것이오.
  그런데 내가 그 정보를 입수한 것이 바로 단목장룡이 장가를 가던 날이었소.
난 너무 기쁜 나머지 그쪽 사정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바로 서신을 띄웠던 것
이오....."
  사우는 과거를 더듬듯 아련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곳은 이제까지 인간의 손이 닿아본 적이 없던 하나의 거대한 오지(奧地)였
소. 발 아래론 닿기만 해도 살이 녹아버리는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고 위로는
천야만야한 절벽이었소. 우린 그 절벽을 올라 가야만 했소. 달마경본은 바로 그
위에 있었으니까....."
  *          *          *
  "대단하군, 청풍. 이런 곳이라면 나는 새도 넘어들 수 없을 것이다."
  "시끄럽다, 장룡. 한눈 팔다간 곧장 부처님 곁이야."
  용암으로부터 올라오는 매운 연기가 쉴 새 없이 눈을 자극하고 있었다. 두 사
람은 일신에 지닌 모든 무예를 다 동원하여 아득한 절벽을 기어 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싸워야 할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였다.
  절벽의 틈에는 전갈처럼 생긴 무서운 맹독의 독충이 이따금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들이 기어간 자리에는 새파란 선이 그러지는 것으로 보아 한 대 쏘
이기만 해도 죽고 말 지독한 독충이었다.
  뿐인가? 전신을 덮어오는 참을 수 없는 뜨거운 열기, 땀은 눈 속으로 쉴 새
없이 흘러들어 시야를 가리고..... 절벽은 올라도 그 끝이 없었다. 이대로 죽는다
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이 두 사람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 우린 용암의 열기에 가려 절벽의 끝을 미처 짐작하지 못한 채 오르기 시
작했던 것이오. 그것은 올라가면서도 마찬가지였소.
  하지만 소림이 배출해 낸 백 년래의 최고기재였던 명성에 어울리게도 우린
집요하게 그 오지의 절벽에 기어올랐소. 한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화망
이 나타난 것은 그 절벽을 한 시진쯤 기어 올랐을까 싶을 때였소.....
  "악--!"
  단목장룡의 비명이었다. 사우, 아니 옥청풍은 다급히 아래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 속에 놀람의 빛이 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단목장룡의 손목에
이빨을 틀어박은 채 꼬리를 흔들고 있는 길이 일 장의 거대한 뱀. 오오..... 그것
은 바로, 물리기는커녕 스치기만 해도 즉사한다는 절독(絶毒)의 독가화망이 아
닌가?
  "장룡!"
  옥청풍은 다급히 화린보검을 밑으로 떨쳐냈다. 뱀은 단숨에 네 토막으로 잘라
져 피를 흩뿌리며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허나, 단목장룡은 이미 독이 퍼지기
시작한 듯 시퍼렇게 부어오른 얼굴로 힘없이 절벽을 잡았던 손을 놓치고 말았
다. 옥청풍은 거의 몸을 날리다시피 막 떨어져 내리는 단목장룡의 손목을 움켜
잡았다.
  "정신차려! 장룡."
  단목장룡의 힘없는 시선이 그를 향했다.
  "독이..... 벌써 심장을 침범하고 있네. 난 틀렸다..... 청풍....."
  "힘을 내라!"
  옥청풍은 단목장룡을 움켜잡은 채 조금씩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그로부터 두 시진이 다시 지났
을 땐 이미 옥청풍도 지칠 대로 지쳐 가쁜 호흡을 입 밖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두 사람을 노리는 독충도 힘겹기 이를 데 없는 존재였다.
  이때 단목장룡이 힘없는 어조를 토해냈다.
  "못 가겠다..... 쉬었다 가자. 청풍."
  옥청풍은 잠시 몸을 멈추자 그는 툴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부탁 하나 들어 주겠나..... 청풍....."
  "그 따위 것은 다 올라가서 얘기하는 게 좋아, 이 멍청한 친구,"
  "아니야 난 말해야 겠다."
  형용할 수 없는 시선이 밑에서 위를 올려다 보았다. 슬픔의 여울이 짙게 패인
그런 눈빛이었다. 단목장룡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아내를 알고 있겠지..... 첫날 밤도 함께 새우지 못했느니 아내라고 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네만....."
  "풍사향 말인가?"
  "그래....."
  "그녀는 틀림없이 아름답겠군."
  "아름답지..... 하늘의 달빛이 그럴지..... 아침이슬이 그럴지....."
  단목장룡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부탁은 바로 그녀다. 살아가는 동안.....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짓지 않도록
해주게. 자네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다....."
  말이 끝나는 순간, 단목장룡은 스스로 잡고 있던 옥청풍의 손을 놓았다. 매달
려 봐야 짐만 되는 자신이었고..... 친구라도 살아나라는 슬픈 우정이었다.
      *          *          *
  "그래서 사대협은 풍사향의 앞에 나타나 그녀를 돕기 시작하신 거군요....."
  일운연이 꿈을 꾸듯 속삭였다. 사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내 마음에 평생 짐이 되고 있는 탓
으로....."
  일운연은 눈빛을 깜박였다. 그그긍-- 이때 돌천장은 이미 두 사람의 머리 위
석 자 되는 거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일운연의 시선이 힐끗 그 천장을 향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는 그 달마경본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사람은 그것을 찾아 낼 수 있었을까?"
  천년무고 소림에서도 최고의 비급으로 일컬어진다는 달마신공. 무림의 전설도
말하지 않았던가. 달마신공을 일신에 익히는 자야말로 진정한 천하제일인(天下
第一人)이라 불리울 수 있다고.
  일운연이 그것을 물어보려 했을 때였다. 돌연, 그들의 머리 위 두 자 거리까
지 이르렀던 돌천장이 그 자리에 뚝 그쳤다.   일운연의 해연히 놀란 시선이 그
천장을 향했다. 그 얼굴은 돌처럼 굳어들고 있었다.
  '누가 감히 허락도 없이.....!'
  허나, 이럴 때 지어야 하는 것은 굳은 표정이 아니라 기쁜 표정일 것이다. 그
녀는 얼른 표정을 바꾸며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천장이 멈췄어요!"
  사우도 힐끗 그것을 올려다 보더니 싱긋 웃었다.
  "오징어포가 아니라 다른 요리가 떠오른 모양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은 다시 그그긍 소리와 함께 위로 밀려 올라가기 시
작했다. 천장이 올라가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그것은 단숨에 본래의 위치까지
이르렀으며, 다음 순간, 쩌렁한 외침이 물보라처럼 휘몰아쳐 내려왔다.
  "사우, 그 안에 있나?"
  순간, 일운연은 해연히 놀란 빛으로 중얼거렸다.
  "저 목소리는 색양, 색대협의 목소리예요."
  사우는 가볍게 놀란 표정을 떠올리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과연 신출귀몰이군. 이곳에 보석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도둑의 수령다운 솜씨 아닌가."
  일운연은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무슨 보석이 있어요?"
  사우는 웃으며 그녀를 가리켰다.
  "당신"
  순간, 일운연은 봉목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느닷없이 사우 목에 미친 듯이 매
달려왔다.
  "사대협은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
  그러나, 사우는 가볍게 몸을 틀어 그녀의 손을 피했다. 그는 싱긋 웃으며 말
했다.
  "이제 다시 살아난 마당에 만약 당신을 안았다간 나는 취라성의 표적이 되어
평생 마음 편할 날이 없게 될거요. 장중하시오, 운연소저."
  일운연은 그런 그를 흘겨 보더니 까르르 흐드러지게 웃었다. 두 사람은 위에
서부터 내려온 두레박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위에는 과연 색양이 있었다. 그
는 팔짱을 낀 채 싱글벙글 웃고 있다가 사우 등이 내려서자 히죽 웃어 보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자넬 가둘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니, 누
군진 몰라도 경배를 드리고 싶어지는데."
  사우가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이곳을 왔소."
  "핫하..... 난 중간에서 남화룡 등을 만났지. 그들로부터 자네가 철마린에게 향
했다는 말을 듣고는 마중하러 나온 참이란 말이야. 그런데 이곳에서 희한한 일
을 하나 본 거지."
  "그게 뭐요?"
  "장님사내였지. 덩치도 어마어마하게 큰 놈인데 이 사당 주위에서 얼씬거리고
있더란 말이야. 그런데 그 친구는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어."
  "이상한 짓이라구요?"
  일운연이 급히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색되어 있었
다. 색양은 생각할 수록 우습다는 듯 괴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글쎄, 덩치는 산 만한 놈이 어디서 났는지 여자의 옷을 하나 들고 그 옷을
얼굴에다 뒤집어 쓰고는 황홀한 얼굴로 온 몸을 비틀고 있더란 말이오. 아마도
사모하는 여자의 옷이었던 모양인데 내가 다가오자 그는 급히 몸을 내빼더군."
  사우가 검미를 찌푸렸다.
  "장님사내라?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내가 이 아래 있다는 걸 알았소?"
  "자네의 행로대로라면 의당히 우린 중간에서 만나야 했단 말이야. 그런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기에 무슨 변을 당하거나 중간에서 미녀와 뺑소니를 치거나
둘 중의 하나로 짐작하고 있던 참이었거든. 그래서 혹시나 싶어 이 사당 안으로
들어와 봤던 걸세."
  말과 함께 그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일운연을 바라보았다.
  일운연은 얼굴을 노을처럼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허나, 이 순간 그녀의 두
눈 새로 한 줄기 살광이 번뜩 스쳐 갔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 있었을까?
  '병신 같은 놈..... 아도! 그 따위 짓으로 사람의 이목을 끌다니.....'
  15. 제15장 채하(彩霞)
  색양은 여전히 호들갑스런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당 안에서 이걸 발견한 걸세."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붉은 색의 어망(魚網) 같은 것을 내밀었다.
  "내 예리한눈은 그것이 사도십병의 하나인 혈혈귀망(血血鬼網)이란 것을 놓치
지 않았지. 알다시피 이 혈혈귀망은 전문적으로 사람을 생포할 때 사용하는 것
으로서 한 번 몸에 붙으면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란 말이야. 사람을 생
포한 다음엔 어떻게 하겠나? 당연히 가둬 놓는 법이지"
  "그래서 당신은 사람을 가두어 둘 만한 곳을 이곳에서 찾았다는 말이구료."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자네가 이렇게 마주 서서 나와 말을 하고 있을 까닭
이 없지."
  사우는 담담하게 웃었다.
  "당신이 이렇게 자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내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색양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게 말이지..... 헤헤..... 난 나의 이번 보수에 대해 엄숙하고 신중하게 생각
을 해보았네. 그런데 황금 천 냥으론 역시..... 헤헤....."
  사우는 냉랭하게 말을 잘랐다.
  "그 보수가 적다면 어쩔 수 없소. 여기서 우린 이별을 고할 수밖에."
  "어이..... 이보게, 난 자넬 구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 공치사 듣기 싫어서라도 난 다시 이 안으로 들어가겠소."
  사우가 나온 구멍 안으로 다시 말을 옮기자 색양은 기겁할 듯 그를 막았다.
  "안 돼지, 안 돼. 돈도 좋지만 목숨은 더욱 중요하거든. 자네가 만약 그 안으
로 다시 들어간다면 난 맞아 죽게 될 것일세."
  "누구에게?"
  순간, 한 소리 짤랑짤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울려 왔다.
  "나예요."
  말과 함께 한 사람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일신엔 타는 듯한 붉은 홍의, 어깨
엔 검은 피풍(被風)을 두르고 테두리에 붉은 술이 달린 검정색 모자를 썼다. 붉
은 장갑을 낀 손엔 말채찍을 들고 화사하게 웃고 있는  미소녀 하나, 순간 사우
는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채하(彩霞)!"
  색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된 마당이니 나는 이 함정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그녀란 것을 고백
하지 않을 수 없군..... 난 사실 이 사당을 그냥 지나쳐 가자고 했었단 말이
야....."
  미소녀는 머리에 쓴 모자를 벗어 들고는 광채가 일렁이는 시선으로 사우의
전신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러다, 사우가 웃으며 두 팔을 벌리자 한 마리 놀
란 기러기처럼 그의 벌린 품 속으로 뛰어 들었다.
  "사대가(沙大哥)!"
  얼굴을 사우의 앞섶에 도리질치며 한편으론 흐르는 눈물을 찍어낼라, 한편으
론 사우의 얼굴을 살필라 분주하게 시선을 옮기는 것이다.
  "마르셨군요..... 가련하게도."
  주위의 시선이라고는 전혀 가리질 않았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행동에 감정을 맡기는 정열적인 여인임에 틀림 없었다.
  일운연은 한쪽에서 기광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하..... 저 소녀가 바로 헌원삼광의 요광 혈부용 채하란 말인가..... 그 명성으
로 보아 삼십은 넘은 중연여인인 줄 알았더니 저렇게 어린 소녀일 줄이야'
  서로 간에 한바탕의 분주한 인사가 오고 갔다. 특히, 일운연이 소개됐을 때
채하는 한 쌍의 성목에 기이한 광채를 떠올리며 오랫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운연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마주 쏘아 보았으므로 일순 두 여인의 사이에는 냉
랭한 기운이 감돌기도 했다. 색양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알 수 없군..... 알 수 없어..... 애인이 있는 여자이든, 없는 여자이든, 남편이
있든, 약혼자가 있든 좌우지간 사우만 마주치면 저렇게 되고 만단 말이야. 그
이유가 무엇인지 난 지금껏 연구해 왔지만 종내 알 수 없었거든....."
  남화룡 등은 이미 연경에 이르러 사막을 넘기 위한 제반 준비를 갖추고 있다
했다. 시일이 매우 촉박했으므로 일행은 이내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팔월 열
여드레의 일이었다.
   *          *          *
  "이상하군, 이상해..... 철가, 이 놈이 하늘로 솟았단 말인가, 땅으로 꺼졌단 말
인가....."
  태원부(太原府). 중원의 정북 산서성(山西省)의 제일대도인 것이다. 부내에서
도 가장 크고 시설이 호화로운 일급 주루인 세맥루, 이층의 한 곳에 사우 일행
이 있었다.   투덜거리듯 말을 꺼낸 사람은 색양이었다. 채하가 새우요리를 뒤
적거리며 힐끗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혹시 당신이 철마린의 위치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색양은 연신 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 내며 말을 받았다.
  "내 정보는 틀림없소. 채낭자. 그는 과거 삼상오객(三霜五客)을 창에 찔린 고
치로 만든 후, 화산파(華山派)와 나부파(羅浮派)에게 쫓기다 잠적했단 말이오.
나는 철마린이 여기 있다고 확신할 수 있소."
  한 잔 술을 든 채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던 사우가 말을 받았다.
  "기왕 잠적이라니 어쩌면 이름까지도 모두 바꾸고 있을지도 몰라. 아무래도
사방으로 수소문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채하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루의 점원을 불렀다.
  그렇잖아도 선녀 같은 두 미녀에게 넋을 뺏긴 듯 흘끔흘끔 이 쪽을 쳐다보고
있던 점소이는 쏘아낸 살처럼 달려왔다.
  "철마린이라구요? 소생은 이곳 태원부에 십 년을 살아 왔지만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뎁쇼?'
  채하는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럼 그의 용모를 설명할테니 잘 들어봐요. 그는 음..... 눈이 두 개 있어요.
남자이며 코 하나, 입 하나, 그 용모는 썩 잘 생겼다고 할 순 없지만 비교적 괜
찮은 외모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를 모른단 말인가요?"
  점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더욱 빨리 고개를 저었다.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
나의 비교적 괜찮은 용모의 남자라면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본다 해도 한 수레
는 실어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사우가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은 이제 삽십 가량의 나이일세. 성은 철씨 성을 쓰는데 어쩌면 안 쓸
지도 모르네.
  얼굴의 우측 뺨 위에 붉은 사마귀가 하나 있으며 전체적으로 선이 굵은 미장
부 풍의 사람일세.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그는 절대로 남에게 등을 보이지 않
아 식사를 할 때도 사람들과 탁자를 마주 놓고야 먹는다네."
  여기까지 말이 이르렀을 때 점소이는 무릎을 탁 쳤다.
  "이제 보니 권대인(權大人)을 말씀 하시는군요!"
  색양은 어이없다는 듯 말을 받았다.
  "권대인? 권대인이라고?"
  "아무렴요. 권대인이라면 이곳 태원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죠. 그 분은 부
내에서 가장 큰 부자랍니다. 인품도 너그럽고 부내에 있는 여덟 개의 기방(妓
房), 다섯 개의 주루, 두 개의 전장(錢莊)이 그 분의 소유이지요.   이번에는 또
지부대인의 따님과 혼약까지 맺은지라 나는 새도 떨어 뜨리는 권력가요, 세도가
입죠. 그 분이 계시는 곳은 바로 길 건너편의 무애장(無愛莊)입니다요."
  *          *          *
  "대인이라고? 그 살인자가 대인이라고?"
  색양은 연신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네 사람이 무애장의 빈 객
청으로 안내 된지도 벌써 두 시진이나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철마린,
아니 권대인은 얼굴 한 번 비치지 않고 있는 것이니 색양으로선 배알이 꼬였던
것이다.
  "흥! 제깟 놈이 언제부터 대인이었단 말인가? 동가숙서가식에 발 붙일 곳 하
나 없던 놈이 말이야. 설사 대인이 되었다고 치자구, 그런다고 해서 옛 친구들
을 이렇게 멸시할 수 있는 거란 말인가?"
  일운연이 측간에 다녀 온다고 시녀의 안내를 받아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때
방 안의 그림이며 풍물 등을 감상하고 있던 채하가 슬며시 사우에게 다가오더
니 한 장의 둘둘 말린 쪽지를 건네 주었다.
  "인상인 중산이 보낸 거예요."
  "그걸 왜 이제 주나?"
  "그 동안은 드릴 기회가 없었어요."
  "기회가 없었다고?"
  사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쪽지를 펼쳐보았다 
  <사우, 일운연을 될 수 있으면 조심하는 것이 좋겠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일전에 그녀가 절에 왔을 때 그 신발을 만져보고 느낀 것인데..... 그녀는
발에 전족(중원 남부의 여인들이 발을 작게 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발의 모양
을 인공적으로 변형시킨 그런 발을 말함)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어. 전족이
란 일반적으로 황궁에 간택된 여인이나 남자를 즐겁게 하기 위한 계층의 여인
들이 하는 것이네. 일운연 같은 신분의 여인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란 말이야.
그녀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야. 잘 살펴 보도록 하게.  중산.>
  서신의 아래에는 중산 특유의 표지인 족인(足印)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사우는 싱긋 웃으며 손 끝에 삼매진화(三昧眞火)의 공력을 일으켰다. 순간 종이
는 단숨에 한 줌의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탁자에 놓인 한 잔의 차
를 입에 음미했다.
  '남화룡은 그녀의 몸에 흡정섭양의 음공이 있다고 했다..... 거기다가 또 중산
은 전족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모든 증거는 그녀가 탕녀(蕩女)라는 것을 의
미한다.
  취라성이 선택하고 남해의 유수한 명문 중 하나인 훌륭한 가문의 아가씨가
탕녀라.....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분명한 일은 하나 있군.
  일운연이 서천무결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동기가 아니라 불순한 동기
가 그 안에 있다는 것..... 흐흠, 서두를 건 없겠지. 여우의 꼬리란 언젠가는 드러
나기 마련이니까.....'
  일운연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안내했던 시녀와 무엇인가 도란도란 이
야기를 나누며 오는 모습이 어디로 보나 훌륭한 교양을 갖춘 명문의 규수였다. 
사우는 싱긋 웃으며 찻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일운연이 막 자리에 앉고 났을 때 돌연, 한 소리 낭랑한 외침이 대청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권대인께서 납십니다."
  말에 이어 네 명의 소녀들이 꽃이 가득 담긴 대나무 광주리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들은 광주리의 꽃을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한 웅큼씩 바닥에다 흩뿌리고
있었다. 그 꽃을 밟고 한 사내가 사람들의 앞에 나타났다.
  번드르한 비단 화복, 머리에는 고급 속건을 둘렀는데 뒷짐을 지고 의젓하게
나타난 모양이 영락없는 귀공자였다. 턱이 좀 길어 완강한 성격을 과시하는 외
엔 나무랄 데 없는 미장부였다. 그의 우측 뺨에는 사마귀 하나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색양이 한눈에 그를 알아보고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거창하구나, 거창해! 아예 걷는 발걸음 아래에다 꽃을 뿌릴 게 아니라 심지
그러냐?"
  귀공자는 담담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은 탁자 앞으로 한
명의 시녀가 몹시 귀한 것으로 보이는 도자기 하나와 하얀 헝겊을 정돈해 놓았
다. 귀공자가 손을 젓자 사우 일행 외의 모든 시종들은 문을 닫고 물러났다.
  팔월에 문을 닫았는 데도 덥기는커녕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는지 대청 안은
가을처럼 선선했다. 이 정도의 호사라면 가히 황제라 해도 따를 수 없을 것 같
았다. 귀공자는 팔소매를 약간 걷고는 중인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
다.
  "아까부터 하고 있던 일이라 귀인들을 모시고도 계속 하고자 하오. 귀인들의
넓은 이해를 바랍니다."
  이를 데 없는 정중한 어조에 이어 그는 흰 헝겊으로 천천히 도자기를 닦아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태도는 매우 신중했다. 마치, 도자기를 닦는 일 외에는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색양이 냉랭한 코웃음을 터뜨
리며 도자기 위에다 턱하니 손을 얹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철마린. 옛 친구들을 이 따위로 대접해야겠나?"
  귀공자는 그에게 시선조차 돌려보지 않고 말을 받았다.
  "도자기에는 생명이 있소. 그렇게 함부로 다루는 것은 좋지 못하오."
  "무슨 생명이라는 거지?"
  "소리가 있고 영혼이 있소. 때론 울기도 하지."
  순간 색양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그는 도자기를 사정없이 뺏아들더니
다음 순간, 그것을 맹렬하게 바닥에다 패대기 쳤다.
  쨍그랑-- 도자기가 산산조각 났다.
  색양은 그 도자기 파편 위에다 귀를 기울여 보더니 싸늘하게 웃었다.
  "과연 우는군. 걸맞지도 않은 주인을 만나 이 모양이라고 말이야."
  사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색양을 가로 막았다. 그는 담담히 웃으며 귀공자
에게 시선을 던졌다.
  "마린, 날 기억하겠나?"
  귀공자의 시선이 비로소 그를 향했다. 그 얼굴에 가벼운 웃음이 번졌다.
  "사우."
  "그래. 정말 오랜만이군. 자넨 많이 변했군."
  "그래, 변했지."
  사우는 우아하게 꾸면진 방 안을 한 차례 휘둘러 보고 난 후 말을 이었다.
  "자넨 혹시 우리가 온 뜻을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거리겠지. 피비린내 나는."
  "그래, 일거리일세. 과거의 자네라면 두 말 없이 나섰겠지."
  "그래....."
  "하지만 이젠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말을 하는 동안에 사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으므로 자연스럽게 철마린의 뒤
쪽에 서게 되었다. 일운연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긴장된 표정을 얼굴
에 떠올렸다.
  '듣기로는 철마린은 의심이 많아 아무도 자신의 뒤에 세우지 않고 등 뒤에
선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저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뜻밖에도 철마린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하늘에서 철마린의 등 뒤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친구여..... 나는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사우는 씩 웃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네. 난 자네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하네."
  이때, 대청의 문이 사르르 열리더니 비단옷으로 일신을 감싼 우아한 여인이안
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손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동작하
나 하나가 형용할 수 없는 기품이 서려 있었다.
  철마린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 아낼세. 연옥(燕玉), 이리 와서 내 오랜 벗에게 인사하구료."
  연옥이라 불리운 여인은 맑은 눈으로 사우등을 바라보더니 그 자리에서 정중
하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우 등도 급히 답례했다.
  "오히려 폐를 끼치오."
  철마린은 껄껄 웃으며 사우에게 다가와 그를 힘주어 포옹했다. 그가 사우의
귓전에 속삭였다.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이. 잘 가게, 벗이여."
  포옹을 풀기 무섭게 그는 아내를 부축하여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뒤
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의 모습은 이내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색양이 그가 사라진 문을 향해 퉤 침을 뱉았다.
  "더러운 놈!"
   사우는 담담하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름에도 시원한 냉방의 방이며 황금빛과 우유빛으로 물든 우아한 거실, 아
름답고 간결한 음식이며 도자기의 생명에까지 귀를 기울일수 있는 이유..... 그리
고 권력을 지닌 현숙한 아내까지..... 이런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아
또 버릴 필요도 없지....."
  그는 어깨를 으쓱 치켜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결국 한 사람이 빠지게 되었군. 아쉬운 대로 시간이 없으
니 빨리 대열에 합류하여 출발하는 것이 좋겠소."
  문득, 그의 시선이 칼끝같이 변하는가 싶더니 싸늘하게 색양을 쏘아 보았다.
   "당신은 무림인의 이름을 더렵힐 셈이오?"
  무슨 말인가 싶어 바라보는 중인들의 시선 속으로 주섬주섬 품 속에서 물건
을 꺼내고 있는 색양의 모습이 보였다.
  "제기랄!"
  그가 꺼내 놓은 것들은 방금까지만 해도 대청을 우아하게 장식했던 상아며
보석 등의 장식품들이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문가에서 잠시 허리를 굽혀 인
사했던 부인 연옥의 귀걸이까지 끼어 있었다.
  16. 제16장 북천문(北天門)
  "이 정도의 준비면 되겠나?"
  낙타 열 마리, 일곱 마리는 사람이 탈 것이고 세 마리는 짐을 운반할 것이었
다.   짐은 대략 한 달치의 식량과 물, 그리고 마른 건량이었다. 사막에서 노숙
하는데 필요한 천막과 개인 물통, 그리고 벌레를 쫓는데 필요한 약가루까지 세
세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사우는 이러한 것들을 치밀하게 살펴본 후 고개를 끄
덕였다.
  "좋군요. 사람들을 좀 모아 주십시오."
  연경성 외고가의 한 낡은 사당, 밖에는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사우를 위시하여 남화룡, 석도해, 색양, 채하, 인상인 중산, 일운
연 등이었다.   사우의 앞에는 지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열하사막까지는 천 리 길이오. 사막으로 들어선다 해도 백 리 가량
의 유사지대(流沙地帶)가 있고 그 유사지대가 끝나는 곳에 거대한 원시림이 있
다 하오. 원시림 속에 있는 바위산이 바로 우리가 목표하는 마중뇌옥이 있는 곳
이오."
  사우는 천천히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적은 숨어 있고 우린 노출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형세는 여러 가지로 불리하
오. 더군다나 흐르는 모래지역인 유사지대를 지나려면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오. 지금부터 전진한다면 대략 이십 일 후에는 목표지점에 닿을 수 있
소. 천종이 기약한 육 개월의 시한은 그렇게 되면 십 일 정도가 남는 셈이오.
그 십 일 안에 우린 서천공자를 구해내야 하오."
  여기까지 말이 이르렀을 때 문득 남화룡과 인상인 중산이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고 난 후 입
밖까지 흘러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사우의 시선이 힐끗 남화룡을 향했다.
  "남노사는 지금 준비된 물건 말고도 좀 더 필요한 것이 있는지 하룻 동안 치
밀하게 살펴 주시오."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사우는 다시 색양을 바라보았다.
  "색노사는 짐을 운반할 짐꾼을 좀 모집해 오시오. 대략 오 인 가량이면 될 것
이오."
  "그러지."
  "출발시간은 내일이오. 다른 사람들은 그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기력을
조절하도록 하시오."
  사우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할게 될 테니까!"
  *         *          *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러 나선 성내였다. 헌데, 막 하나의 모퉁이를 돌아설 때
사우는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미행하는 기척을 발견했다. 사우는 싸늘하게 웃으
며 모르는 척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놈, 누군지 얼굴이나 봐 두어야겠군.....'
  얼마 가량 걸었을 때 길 옆에 큰 식당 하나가 나타났다. 식당 안에는 큰 동경
하나가 걸려 있어 사우는 안에 들어서는 즉시 동경 앞에 서서 옷 매무새를 고
치는 척하며 동경을 통해 문 입구를 바라보았다. 과연, 한 명의 소년이 문 입구
에 나타나 그의 뒤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열 다섯, 일곱이나 되었을까? 풍도가 당당했으며 영준한 용모에 남포장삼
을 걸친 소년이었다. 등에는 비스듬히 병기를 메고 있었다. 허나, 황금색 손잡이
만 빼꼼히 보여 칼인지 검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사우가 거울 앞에 서
있자 경각심을 느꼈는지 얼른 문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사우는 빙긋 웃으며 밖
으로 걸어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매우 미행술이 서툰 친구로군 나쁜 치 같지는 않은데 왜 내 뒤를 따라오는
걸까.....?'
  사우는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그러다 말고 문득, 어느 골목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순간, 뒤따르던 남포소년은 급급히 신형을 날려 달려왔다. 헌데, 남포
소년이 골목 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뜻밖에도 그 안에선 사우가 다시 달려나
왔다.
  "어!"
  사우는 남포소년의 몸에 곧장 부딪쳐 갔다. 허나, 남포소년의 신법은 괴이할
정도로 빨랐다. 두 사람이 막 부딪치려는 찰나 남포소년은 한 줄기 숨을 들이켜
유령처럼 스르르 뒤로 미끄러져 나갔다.  사우는 일순 검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놀라운 신법..... 그런데 이 신법은 몹시 낯이 익구나. 어디서 봤을까?'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남포소년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열었다.
  "귀하는 왜 나를 쳐다보고만 있소?"
  사우는 담담하게 웃었다.
  "묻겠는데 너는 무슨 이유로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녔는가?"
  남포소년은 싸늘하게 웃었다.
  "귀하는 내가 당신을 따라 다녔다고 무엇으로 증명하오?"
  "시치미 뗄 생각인가? 너는 내 뒤를 반 각이나 따라다녔다."
  "오, 당신의 말대로 할 것 같으면 사람이 당신의 뒤에서 걸으면 따라다닌 것
이라 단정하는데 그럼 뒤에서 걸은 나는 뭐라고 해명해야 좋겠소?"
  사우는 표정을 가볍게 굳혔다.
  "너는 보기보단 장부답지 못하군."
  남포소년도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귀하가 다짜고짜 이렇게 사람을 모욕하니 사문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참을
수 없소. 어서 검을 뽑으시오."
  이쯤 되면 고의로 시비를 걸러 온 자가 틀림없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
기가 먼저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사우는 소년이 등에 메고 있는 괴병(怪兵)을 힐끗 바라본 후 조용히 웃었다.
  "너는 그 병기를 뽑는 순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소년은 느닷없이 자세를 취하여 동자배불(童子拜佛)의 일식을 펼쳐냈다. 사우
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동자배불이란 예의상 펼쳐내는 초식이다.
기세가 등등하여 날뛰더니 고작 이런 예절이란 말인가?
  "이봐! 그런 예의는 없어도 되니 어서 들어오도록 하시게."
  "좋소!"
  소년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왼손으로 가슴을 방어한 채 오른손 두 손가락
을 모아 사우의 거궐혈(巨闕穴)을 맹렬히 찍어 왔다.
  사우는 싱긋 웃으며 그의 손가락을 수도로 후려침과 동시에, 베는 일식을 찌
르는 일식으로 변화시켜 쏜살같이 상대의 가슴을 찔러나갔다.
  "좋구나!"
  소년은 비명인지 탄성인지 모를 기합을 토하며 맹렬히 사우의 손을 맞받아쳤
다. 두 사람의 싸움은 비록 매우 치열하지만 조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 점
으로 보아 두 사람의 무예는 모두 최상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우는 싸우면서 내심 놀람을 금치 못했다.
  '초식 하나 하나가 법도가 있고 위력이 있구나. 아직 나이도 어린데 어느 문
파에서 이런 훌륭한 인재를 키워냈을까?'
  그가 오랜만에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에 부쩍 호승심이 일었다. 다음 순간 그
의 초식이 일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초식이 봄날 훈풍처럼 따사롭고 은
근한 것이었다면 느닷없이 펼쳐진 이 초식은 마치 광풍폭우가 휘몰아 치는 것
같았다.
  남포소년은 사우가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낚아채 오자 급히 팔을 안으로 오므
렸다. 그러나, 오므리지 않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오히려 오므리자 손목을 상대
방의 수중에 밀어 넣는 결과가 되었다.
  "엇!"
  그는 비명을 토하며 몸을 뒤로 쭉 뽑아냈다. 순간, 소년의 팔은 마치 뼈도 없
는 것처럼 유연하게 변하더니 미꾸라지처럼 사우의 손을 슬쩍 빠져나갔다.
  사우는 크게 놀랐다. 지금 그가 펼친 금나수(檎拿手)는 북천상인이 고심하여
만들어낸 절기로써 천룡대신나(天龍大神拿)라 불리우는 것이었다.
  과거, 중원쌍화 옥청풍의 이름으로 강호를 행도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사우
의 이름으로 있어온 지금까지도 이 천룡대신나를 피해낼 수 있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인데.....
  '좋아.....!'
  사우는 정신을 모아 재차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쪽 팔꿈치를 낚아채 갔다. 그
러나, 사실 오른손은 허초이고 그 오른손을 피하려 하면 왼손이 날벼락처럼 뻗
어나가는 비식.
  헌데, 이번에도 상상은 빗나가 버렸다. 소년의 왼팔꿈치가 막 잡혔을 때 사우
의 손은 별안간 텅 비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우는 그 자리에 우뚝 몸을 세웠다. 그는 형형한 신광을 발하며 남포소년을
노려보았다.
  "훌륭한 무예! 너는 이제 무기를 뽑아라!"
  "당신은 이제 정말로 해볼 생각입니까?"
  소년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라면 자신없는데....."
  "이 말이 끝날 때까지도 무기를 뽑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회할게 될 것이다."
  "좋아요. 어차피 내가 병기를 뽑지 않으면 당신은 내가 누군지 모를테니까요."
  말과 함께 소년은 등 뒤에서 병기를 뽑아 휙 내둘렀다.
  순간, 퍼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금광이 번쩍하며 뜻밖에도 깃발이 활짝 펴졌
다. 이 깃발은 황금색 깃대에 길이는 세 자 세 푼  정도 되며 끝에는 구슬이 달
려 있었다.  구슬 아래에는 금사창당이 드리워져 있었다. 또한 기폭은 모두 금
채로 수놓아졌으며 장방형의 모양에 기폭의 중앙에는 여덟 마리의 금룡(金龍)이
날아갈 듯 수놓여 있었다.
  소년은 깃발을 품 속에 안고 위풍당당하게 웃으며 사우를 바라보았다. 사우는
내심 깜짝 놀랐다.
  '저것은.....?'
  그는 이 깃발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가 사부 북천상인의 문하에서 무예를 익히고 하산(下山)할 때 그 사부가 당부한
말이었다.
 --북천문하(北天門下)에는 또 하나의 주류가 있으니 이름을 표향상인(飄香上
人) 이라 하고 사부와는 같은 항렬이 된다.  그에게는 이미 한 명의 특별한 제
자가 있고 천룡기예(天龍奇藝)를 전수하였다 하였으니..... 이후, 무림에 천룡기가
등장하면 그를 보살펴 주도록 하라!--
  사우는 검미를 찡그리며 물었다.
  "네가 들고 있는 것은 혹시 천룡기가 아닌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가 손목을 뒤집자 천룡기는 휙 소리와 함께 다시 똘똘 말려졌다. 이어, 소
년은 앞으로 한 걸음 나와 갑자기 땅 위에 털썩 꿇어 엎드렸다.
  "사형(師兄), 소제 부영웅(夫英雄)이 인사드립니다!"
  "부영웅이라고?"
  "소제는 북천문하 표향상인의 제자이며 이번에 사문의 명을 받아 사형을 찾
아 무림에 나왔습니다."
  사우가 굽어보니 그의 기품이 과연 사숙(師叔)의 제자임이 틀림없을 것 같았
다. 사우가 껄껄 웃으며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 개구장이 같은 놈, 사형을 보자마자 놀렸구나."
  부영웅은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게 억울하시면 사형께선 술자리를 마련하십시오. 소제는 사형에게 사죄하
겠소이다."
  "사죄한다면서 술자리는 내가 준비해야 한단 말이냐?"
  "당연하지요. 소제는 형님을 찾기 위해 무림을 무려 일 년 간이나 유랑하였
소. 그 동안 해진 신발만 해도 십여 켤레는 족히 될 것이오. 이런 손해배상을
지금 받지 않고 언제 받는단 말입니까?"
  *          *          *
  "미륵상인(彌勒上人)이라고?"
  술은 두 병쯤 비운 참이었다. 사우가 검미를 찌푸리자 부영웅은 심각한 어조
로 말을 받았다.
  "본시 북천문의 시조는 바로 사형의 사부님이신 북천상인입니다. 그 분은 과
거 소림을 떠나 천하를 행도할 때 두 사람을 거두어 들였는데 그들에게 특별히
무예를 전수하는 한편 사제지간이 아닌 의(義)를 맺으신 것이오."
  "그 얘기는 나도 알고 있다. 사부 북천상인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두 사
람의 나이가 사부님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두 사람 중의 하나가 바
로 부제의 사부이신 표향상인이 아닌가?"
  "그렇지요. 세째가 바로 미륵상인이며 사형과 저에게는 세째 사숙뻘이 되는
분이지요."
  "그 미륵상인께서 어떻게 되었다는 얘기인가?"
  부영웅은 탄식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미륵상인은 과거 북천노조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막의 유명한 대도(大盜)였다
합니다. 북천노조께서 그를 감화시켜 문파로 입적시킴과 동시에 부처님을 모시
게 한 것이지요.
  그 동안 미륵상인은 북천산에서 수양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만 산을 탈
출하다시피 떠나고 말았다 합니다."
  "떠나다니?"
  "스님의 수양을 이기지 못한 것이지요. 본래 성품이 괴팍하고 다혈질인지라
이번에 다시 무림에 나와선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했습니다."
  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천문이란 북천상인이 스스로 세운 계파다. 남부의
보법활불과 더불어 북천상인이 이미 일문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고 있는 터,
중원쌍화의 하나인 단목장룡을 탄생시킨 남부 보법활불의 계파가 정대한 소림
의 기예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면, 북천상인의 북천문은 형식에 얽매임 없이
자유로운 무예를 주창하는 계파였던 것이다.
  그 북천상인에게 두 사제가 있으니, 각각 표향상인, 미륵상인이라 하였는데
이번에 미륵상인이 산을 떠나 무림으로 나왔다는 얘기였다. 과거, 사막의 대도
였던 그로선 실로 어떤 일을 벌일지 예측불허의 일인 것이었다. 사우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문파에선 어떤 지시가 있었나?"
  "앞으로 미륵상인을 만나게 되거든 될 수 있으면 정중히 타일러 산으로 돌려
보내되 정 할 수 없으면 산으로 연락을 하라는 전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제는 무림을 일 년간 행동하였다 하였으니 미륵상인의 거처는
알아냈는가?"
  부영웅은 고개를 저었다.
  "오리무중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서천목산(西天目山) 안에 있다고도 하는데
그것도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서천목산이라면 중원남부의 오지, 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의 말은 잘 들었다. 그럼 사제는 이제부터 어떻게 행동할 생각인가?"
  "저는 또 아미산(峨嵋山)에 볼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끝낸 후엔 형님의 뒤
를 따를까 합니다."
  사우는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세. 사제는 일을 마친 후 낙양으로가서 풍사향을 찾도록
하게. 나를 잘 알고 있으니 그곳에서 투숙하며 날 기다리도록 하게. 연후 같이
만나 미륵사숙을 찾는 것이 좋겠군."
  "좋습니다."
  부영웅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술이 떨어졌군요."
  *          *          *
  출발은 새벽 미명 속에서 시작됐다. 사우를 위시한 낭인시장의 특전대는 낙타
위에 몸을 싣고 천천히 미명 속을 걸어 나갔다.
  일운연은 성에서 이십여 리나 떨어진 흑하(黑河)까지 마중을 나왔다. 찰랑찰
랑 흐르는 강, 강을 건널 배를 기다리는 동안 일운연은 사우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속사였다.
  "부디 몸 조심하세요."
  시원한 강바람이 사우의 흑발을 휘날렸다. 사우는 여전히 특유의 농부 차림으
로 씩 웃었다.
  "약혼자, 서천공자와 다시 상봉할 꿈이나 꾸고 있으시오."
  "그런 말..... 싫어요."
  말 끝을 망설이던 그녀는 돌연 주위의 이목도 가리지 않고 사우의 목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이 입술은 너무나 느닷없이 다가왔으므로 얼떨결에 사우도 그녀
의 부드러운 몸을 마주 껴안고 말았다. 달콤한 타액을 교환하는 순간이었다.
  강바람 속에 옷깃을 날리며 격렬하게 얽힌 두 남녀의 모습은 마치 한폭의인
간세상에 없는 그림 같았다. 한쪽의 채하가 입을 삐죽였다.
  "염치도 없는 계집 같으니! 약혼자까지 있는 주제에 부끄럽지도 않은가봐!"
   색양이 껄껄 웃었다.
  "언젠가 헌 사당에서 채낭자가 사우에게 매달렸던 것을 복수하고 있는 것이
오. 여자란 참 알 수가 없다니까!"
  배는 이내 나룻터에 닿았다. 사람들을 싣자마자 강심을 향해 배는 찰랑찰랑
떠나가기 시작했다.   사우는 뱃전에 우뚝 서서 길가의 일운연을 바라보았다.
일운연도 배가 아주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
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웃음이 피어 올라 있었다. 그 웃음은 배가 완전
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배가 시야에서 아주 사라지고 나자 돌연 그 웃음은 씻은 듯이 사라졌
다. 손을 들어 입가를 쓰윽 훔쳤다. 격렬한 입맞춤의 여운이 아직 입가에 남아
있다가 그녀의 손 끝에 타액으로 묻어나왔다.
  "안녕....."
  그녀는 중얼거렸다.
  "안녕, 사우! 너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야....."
  이때, 그녀의 등 뒤로 한 줄기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장님사내 아도
였다. 일운연은 발작적으로 빙글 몸을 돌렸다. 몹시 신경질적인 어조가 그 입에
서 흘러나왔다.
  "서신을 띄워라. 그들이 이십 일 후에 그곳에 당도한다고....."
  17. 제17장 대습지대의 야만인
      (大濕地帶의 野蠻人)
  이십 일, 일행이 열하사막의 입구인 흑곡관(黑谷關)에 닿은 것은 그 이십 일
중 사흘을 소비한 다음이었다. 흑곡관에는 사막을 들어가는데 필요한 생필품과
양식을 파는 조그만 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중, 한 기루에서 사우는 회의
를 소집했다.
  "나는 지금부터 우리가 마중뇌옥까지 가는 길을 수정하고자 하오."
  순간, 남화룡과 인상인 중산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씩 웃었다.
  색양이 급히 물었다.
  "왜 갑자기 진로를 수정하는가?"
  사우는 담담히 웃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번 청부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몇 가지 있소. 그
첫째는 일운연의 태도이오."
  "일운연? 그 아름답고 현숙한 낭자가 왜?"
  "우리는 말하자면 그녀가 만들어 보내는 여섯 번째의 구출대이오. 나는 이 일
을 맡기 전에 우리보다 앞서갔던 다섯 조의 구출대를 면밀히 검토해 보았소. 그
중엔 동영의 인자단(忍者團)과 황궁의 금의위(錦衣衛)까지 끼어 있었소.
  그들의 실력만을 놓고 본다면 서천공자 하나를 구출해 내지 못한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들이었단 말이오. 마중뇌옥이 비록 무서운 곳이라곤
하나 모조리 몰살당할 정도로 약한 사람들이 아니었단 얘기이오."
  사우는 한 잔의 술을 음미하듯 입에 갖다대며 말을 이었다.
  "즉, 마중뇌옥은 어떤 경로인지 몰라도 그들의 출현을 먼저 짐작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이오."
  색양은 놀라 외쳤다.
  "그렇다면 일운연 소저가 바로 그 밀고꾼이란 말인가? 그녀는 청부를 맡긴
당사자인데 왜 그런 짓을 할까?"
  "나는 그녀가 밀고꾼이란 얘기는 하지 않았소. 그러나 상당한 관계를 맺고 있
음은 부정할 수 없소. 나는 사실 그녀가 서천무결을 진정으로 구하길 원하는지
조차 의문이오."
  석도해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린 이 청부를 맡을 필요가 없지 않나?"
  "그건 그렇지 않소. 그저 예감 뿐이지만 난 이 일에 굉장한 음모가 숨겨져 있
다고 생각하오. 한당의 존재만 놓고 보더라도 이 청부는 충분히 맡을 만한 가치
가 있는 것이오."
  채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우린 어떤 길로 가나요? 열하사막을 관통하는 길은 우리가 애초에 계
획했던 그 길밖에 없어요. 다른 길은 모두 대습지대(大濕地帶)같은 오지로서 나
는 새도 얼씬 못하는 곳이예요."
  "나는 바로 그 대습지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채하."
  사우는 지도를 가리켰다.
  "우리가 유사지대를 통해 가자면 약 팔백 리를 가야 한다. 사막의 모래길임을
감안할 때 절대로 보름 안에 당도할 수 없다. 그러나, 이곳 대습지대를 통해 간
다면 최소한 이레는 절약할 수 있다. 즉, 지금으로부터 열흘 뒤면 우린 마중뇌
옥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맙소사! 대습지대라고요? 습기로 가득찬데다 가는 곳마다 눅눅한 습연이 있
고 독충과 기수(奇獸)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을 가자면 아예 목숨을 내놓고 가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 대습지대는 아직까지 아무도 멀쩡하게 건너간 사람이 없
어요. 오빠."
  "그러나 가야 한다."
  사우는 광채를 두 눈에 피워올렸다.
  "마중뇌옥은 어쩌면 우리가 이십 일 후에 그곳에 당도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린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해 보고 죽고 만다. 이렇
게 죽나 저렇게 죽나 마찬가지일 땐 장엄한 자연 속에서 죽는 쪽이 훨씬 낫겠
지."
  그는 저 멀리 아득히 펼쳐진 사막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마지막 얘기는 이제 이곳까지 왔으니 여러분들의 마지막
태도를 정하라는 것이오. 난 사실 처음에는 이 청부에 이토록 많은 의문이 깃들
어 있을 줄 모르고 여러분들을 끌어 들였소.   거듭 말하거니와 이 일은 지금까
지 우리가 해온 어떤 일보다도 더 흉험한 것이 될 것이오. 여기서 그만 두겠다
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을 것이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시선을 들어 아득히 펼쳐진 장엄한 사막을
바라보았다. 사막에는 한줄기 바람이 불고 있었다. 죽음을 예고하듯 귀기서린
바람이었다.  이때 돌연, 남화룡이 껄껄 웃으며 옆의 중산을 바라보았다.
  "이것 봐, 중산! 자네 혹시 우리가 옛날에 십육비룡방(十六飛龍幇)과 싸울 때
를 기억하나?"
  중산의 초점없는 동공에 흐릿한 광채가 스쳐 지났다.
  "왜 기억 못하겠소. 그 일은 바로 우리 낭인칠걸이 합작한 최초의 일이었지."
  "맞아. 그때 십육비룡방은 음산(陰山)에 있었고 우린 남부 광동땅에 있었네.
무려 이천 리 길이었단 말이야. 십육비룡방은 우리가 그들에게 이를 시각이 한
달 후는 될 것으로 생각하고 느긋했었지."
  "하지만 우린 그 길을 밤을 세워 이십 일 만에 주파했소."
  색양이 가가대소를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십육비룡방의 방주, 비룡천신(飛龍天神)은 자다 말고 잠옷 바람으로 끌려 나
와 대문 앞에 못박혔지. 난 아직도 그가 죽으면서 했던 얘기가 생생한데?"
  석도해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빨리 왔다..... 이 한마디였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우를 향했다.
  "아마도 이것은 무림사에 남을 위대한 싸움이 될 것 같군, 사우."
  사우는 씩 웃었다. 웃으며 그는 말했다.
  "뿐만 아니라 대습지대를 살아서 멀쩡하게 건넌 최초의 사람들로 기억될 것
이오.
  *          *          *
  대습지대는 사막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무서운 습지대를 말한
다. 사막에는 따가운 햇빛이 있지만 이 대습지대엔 햇빛이 없다. 있는 것은 썩
어 가는 물과 그 물에서 기생하는 각 종의 독충 뿐이다.
  대습지대는 가장 최악의 오지였다. 용암이나 바다는 사람을 단숨에 죽이지만
이 대습지대는 사람을 천천히 온갖 고생을 하게 한 다음 죽게 만들기 때문이다.
습한 숲이 저만큼 보였다. 사막은 여기서 끝나는 것 같았다. 흑곡관을 출발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오늘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해야겠군. 대습지대가 바로 눈앞이오."
  색양이 낙타에서 뛰어 내리며 말을 받았다.
  "지옥을 눈앞에 둔 것 같군."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숲이 있으니 어디 물이 있을 것도 같은데."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이내 저쪽 한 곳에 괴인 물웅덩이를 발견
했다. 색양은 히죽 웃으면서 그 곳을 향해 달려갔다.
  사막과 숲이 맞닿은 지역, 경사진 언덕 위로는 끝을 알 수 없는 숲의 행렬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고 이 물웅덩이는 숲에서 흘러나온 가는 물줄기가 괴어
생긴 것인 듯 싶었다. 웅덩이는 모래 속에 있었으므로 이를 데 없이 맑고 투명
했다.
  "어이, 이쪽으로들 오라구. 빌어먹을 모래를 싹 씻어 버립시다."
  색양은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이어,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웅덩이 속으로 뛰

들었다.
  "히야호!"
  이때 돌연, 피웅-- 어디선가 한 자루 놀랄 만큼 큰 강전이 그가 막 뛰어 내
리려는 공간을 향해 쏘아져 왔다. 색양은 질겁할 듯 놀랐다. 이대로 뛰어 내린
다면 자신은 그대로 꼬치에 꿰인 오징어 신세가 될 것이 아닌가? 색양은 다급
히 몸을 세 바퀴나 굴렸다. 그야말로 간일발의 차로 그는 날아든 화살을 피해냈
다.
  그러나, 아랫도리만 달랑 걸친 몸으로 흉측하게 모래 속에 엎어지고만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화살이 날아온 곳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어떤 놈이 어르신의 좋은 일을 방해하느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쪽을 향했다. 긴장된 눈빛, 화살이 날아온 곳은
바로 대습지대가 시작되는 거대한 수림 속이었던 것이다. 문득,
  "핫하하--"
  한 소리 낭랑한 웃음이 사막의 정적을 찢었다.
  "나다. 이 돌팔이 상인아."
  숲 속에서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검은 비단 옷에 검은 피풍, 머리에도 검
은 두건이요, 신은 신발도 검은 교피화다. 일신이 온통 검은 빛 일색인 그는 들
고 있던 한 자루 창을 불쑥 내밀어 보였다.
  "자네가 마시려던 물은 독물이야. 자연이 만든 독물이지."
  창 끝에는 한 마리의 검은 독사가 매달려 흉측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위에는 그 아래 물의 수원이 있는데 그 속에는 이런 뱀이 수십 마리나
우글거리고 있지. 만약, 네가 그 안에 뛰어들었다면 넌 지금쯤 한 줌 물이 되어
녹아 있을 것이다.  그는 이어 낭랑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도대체가 당신들은 무모해서 말이야. 이건 대습지대의 겨우 시작에 불과하
오. 이 정도의 상식도 없이 대습지를 넘어 가겠다는 말인가? 차라리 이 자리에
서 죽어버리는 게 훨씬 낫소. 날 데려가지 않으려거든."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돌연,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철마린! 너는 오지 않겠다고 했잖은가?"
  흑의인, 철마린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도대체 불안해서 잠이 와야 말이지. 황금침상과 비단이불이 그렇게 불편해지
리라곤 상상해 보지도 못했소."
  색양이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너는 우리가 이곳으로 오리란 걸 어떻게 알았지? 이 돌팔이 부자놈아."
  "그 정도도 모르고서야 내가 어찌 철마린이라 불리우겠는가? 더구나 나야말
로 이 대습지대를 넘어 건넜던 단 한 사람이란 말이야."
  *          *          *
  철마린이 준비해온 물건들은 거의 빈틈이 없었다. 그는 낙타 열 마리를 줄줄
이 꿰다시피 대습지대를 넘어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싣고 온 것이다.
  "식량도 보통 때의 두 배가 있어야 하오. 대습지대를 건널 때는 몹시 체력이
소모되기 때문이오. 이런 것들은 운반하기는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가지고 가야
하는 것들이오."
  거기다가, 질창이며 흙탕물을 건널 때를 대비한 대나무로 엮은 신발과 나무와
나무 사이에 흔들흔들 걸려 잘 수 있는 특수침낭 등이었다.
  "대습지대에선 천막이 소용없소. 땅은 모조리 물이나 마찬가지라 천막은 아예
칠 수도 없소. 결국 나무에 매달려 잠을 자는 수밖에 없지."
  그 밖에도, 독충과 독사를 쫓는 연기불이며 비가 올 때를 대비한 기름도롱이
등이 그가 준비한 물건들이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과연 이런 장비가 없었다면
지옥의 오지, 대습지대를 단 한 발짝이라도 걸어 건널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대습지대 안에 살고 있는 원주민 부이족(夫夷族)이
오."
  채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오지에도 사람이 살고 있단 말인가요?"
  철마린이 검미를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비단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놀라운 부족이오. 대습지의 독충, 독물 등과 천
생적으로 싸우며 자랐기 때문에 무예를 익히지 않았지만 무예를 익힌 사람보다
도 더욱 빠르고 악독하오.
  이들의 수는 대략 일천 가량에 달하는데 통치는 여왕(女王)이 하오. 매우 원
시적이고 악독하기 때문에 이들을 지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오."   남화룡이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들을 피해 갈 수는 없는가?"
  "지형적으로 불가능하오.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소이다."
  석도해가 물었다.
  "어떻게 해야 지나갈 수 있는가?"
  "여왕이 내는 관문(關門)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하오. 통과자들은 즉시 손님으
로 대우받을 수 있으며 통과하지 못하면 죽음이오."
  색양이 고개를 저었다.
  "제기랄! 여기도 죽음, 저기도 죽음, 모조리 죽음뿐이로군. 시간이 좀 거리더
라도 딴 곳으로 가는 게 어떨까?"
  묵묵히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던 사우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가야 할 곳이니 여왕을 만나더라도 갈 수밖에. 철마린, 지금 떠나면
대습지대를 벗어나는 데 얼마나 걸릴까?"
  "부이족과의 마찰을 감안한다면 칠 일 정도."
  "칠 일, 이십 일에서 이미 오 일을 썼으니 거기다 대습지대의 칠 일을 더하고
마중뇌옥까지 이르는 나머지 오십 리를 더한다 해도 도합 십삼 일이다. 이레를
단축할 수 있군."
  사우는 웃으면서 철마린의 어깨를 툭쳤다.
  "좋아, 선봉은 자네가 서게."
  *          *          *
  습지,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기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습기일 것이다. 밝음
과 활력과는 거리가 먼 음침하고 어두운 극한의 다습, 위를 봐도 아래를 봐도,
옆을 봐도 말라 붙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런 습지는 사람에게 쉽게 짜증을
유발시킨다.   낙타가 앞으로 가지 않으려고 멈칫거린 것은 대습지대로 들어온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그 놈은 아무리 채찍을 휘두르고 고삐를 당겨도 앞
발을 들어올릴 뿐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철마린이 낙타에서 내려와 지형을 잠시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가 가장 위험한 지역이다. 낙타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알아채고
가지 않으려는 거야."
  색양이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한다? 이 많은 짐을 누가 싣고 간단 말인가?"
  철마린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듯 하더니 이윽고 말을 이었다.
  "낙타는 한 번 가지 않으려 하면 무슨 수를 써도 앞으로 나가지 않소. 이 놈
들은 할 수 없이 식량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겠군 최소한의 식량을 등에지고 나
머지 중요한 짐들은 풍혼이 맡아주는 수밖에 없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우가 타고 있는 풍혼을 향했다. 오래 전부터 사우
의 친구였던 이들은 비록 풍혼이 겉으로 보기엔 비루먹은 말처럼 보이지만 사
실은 일대의 신마(神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때 풍혼은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주춤 뒤로 물
러났다. 그리고 미친 듯이 도리질을 하는 것이다.   사우가 껄껄 웃으며 그의
털을 도닥였다.
  "어쩔 수 없군. 친구. 네가 앞으로 가주어야겠다."
  그러나, 사람들이 낙타 열 마리를 죽여 가죽은 분류하고 살고기만을 간추려
등에 걸머진 후에도 이 놈은 전혀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비단, 움직이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네 다리를 대자로 뻗고 그 자리에 털썩 누워 버리는 것
이었다. 색양이 탄식을 터뜨렸다.
  "이 놈도 이젠 주인을 닮아가는군..... 저 능청이며 저 고집이라니....."
  채하가 문득 앞으로 나섰다.
  "내게 좋은 방법이 있어요."
  그녀는 풍혼의 앞으로 요염하게 걸어가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호로병을 풀
었다.
  "아마 이 술을 마시면 풍혼도 대담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풍혼의 입에다 술을 쭉 퍼부었다.
  풍혼은 찔끔하는 눈치였으나 이내 부어주는 대로 입을 쩍 벌리고는 벌컥벌컥
술을 들이 마셨다. 눈 깜짝할 새에 병을 다 비우고도 그 놈은 입맛을 쩍쩍 다셨
다. 색양이 또 다시 탄식을 터뜨렸다.
  "술버릇까지도 주인을 닮았단 말인가..... 한 번 마시면 네 놈도 끝장을 보고
싶어 하는구나. 좋아."
  그는 자신의 술호로를 풀어 채하에게 던졌다.
  "그것도 마시라고 하오, 채낭자."
  두 병, 이어 석도해와 남화룡이 던져준 술을 더하여 도합 네 병을 단숨에 들
이키고 나더니 풍혼은 비틀 몸을 일으켰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몸도 제대
로 못 가눌 정도였다.
  채하가 급히 등에다 짐을 얹어주자 이 놈은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성
큼성큼 습지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중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히죽 웃은 후 말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아악--!"
  채하의 비명보다도 더 빠르게 허공을 가른 것은 남화룡의 비도였다.
  파아앗-- 그의 도는 정말 무섭도록 빨랐다. 광채가 번뜩이는 순간 이미 채하
를 습격했던 괴물체는 여덟 토막으로 잘려 나가고 있었으니까.
  색양이 그 괴물체를 확인해 보다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뱀이오, 뱀. 맙소사! 이토록 거대한 뱀이 있다니....."
  여덟 토막으로 잘렸는데도 한 토막 한 토막이 마치 집채만 하다. 이곳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다 심키고도 남을 것 같았다. 이때, 사우가 옆을 따르고 있는 철
마린을 힐끗 바라보았다.
  "내 귀가 올바로 박힌 것이라면 아까부터 누가 우릴 따르고 있는데.....?"
  철마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이족의 전사(戰士)들이야. 아직까진 우리가 그들의 구역으로 들어서지 않
았기 때문에 그냥 뒤를 따르고 있는 거야. 조금 있으면 행동을 취해 올 걸세."
  사우는 자신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는 백견 추아에게 고기 한 조각을 던져주
며 씩 웃었다.
  "굉장한 사람들이군. 반 시진을 따르고 있는데도 소리 하나 없어. 자네의 말
이 아니었다면 난 이들을 무림의 고등미행자로 알았을 거야. 사람들에게 주의하
라고 일러 주게."
  부이족의 전사들이 뒤를 밟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중인들 사이에는 아연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때 문득, 앞서 걷던 남화룡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사우와 철마린이 다가오자 그는 전면의 땅을 가리켰다.
  "저것 보게. 인공적인 냄새가 좀 나는데?"
  땅은 질척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본다면 그 땅은 누군가 파헤친 자국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위장한 흔적을 보이지 않도록 고심한 흔적
또한 역력했다.
  철마린이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가 부이족의 경계야."
  "그걸 어떻게 아나?"
  "저 땅은 그들이 악어를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함정이야. 악어는 같은
길로 계속 지나 다니는 습성이 있지. 밤이 되길 기다려 악어가 지나간 자국에
칼이나 창을 고정시켜 흙으로 위장을 하지. 악어는 모르고 지나다 배가 갈라져
죽는 거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연 그들이 서 있는 땅 앞으로 날카로운 파공
음이 일었다.
  슈욱-- 슉--! 파파팍-- 창---!
  날아와 땅에 꽂힌 것은 바로 날이 시퍼렇게 선 창이었다. 동시에 전면의 숲
그늘 새로 무수히 많은 그림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발은 맨발이었다. 일신에는 가죽을 쪄서 만든 갑주를 걸쳤는데 창과 방패와
쇠뇌를 삼엄하게 온 몸에 두르고 있었다. 이들은 일행을 향해 새파란 독 묻은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철마린이 급히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전사들의 앞에 선
자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중원의 언어와는 판이하게 달랐
다. 인상인 중산이 보이지 않는 눈을 껌벅이며 중얼거렸다.
  "서장어(西藏語)로군. 철마린은 우리들이 이곳을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철마린은 한참 후에야 중인들 앞으로 돌아왔다.
  "무기를 버리라는군. 그런 다음에야 자기들의 여왕 앞으로 데려가겠다는 거
야."
  사우는 검미를 찌푸렸다.
  "그래도 될까?"
  "주위에서 우릴 겨누고 있는 화살은 줄잡아도 오백 개는 될 걸세. 다른 방법
이 없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일신에 지니고 있던 무기를 모아 한데 묶어 앞으로
던졌다. 사우는 애검 화린보검과 탄궁 하나를 그 속에 던졌다. 부이족의 전사들
은 또 다시 자기들끼리 무엇이라 호들갑스럽게 떠들더니 그 중 한 사람이 앞으
로 나와 무기를 수거한 후 손을 저었다. 따라오라는 뜻인 것 같았다. 약 초 한
자루 타들어갈 시간을 걷자 돌연 눈앞이 확 트였다. 이곳은 한 개의 거대한 공
지였다. 습지는 아직 사방을 두르고 있었으나 이곳 만은 마른 풀들이 듬성듬성
돋아 있었으며, 그 새로 풀로 지은 오십여 채의 집이 서 있었다. 초옥 위로 참
으로 오랜만에 보는 파랗게 개인 하늘이 있었다.
  "기적을 보는 것 같군. 대습지대의 오지 안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일행은 이내 한 곳의 가장 큰 초옥 앞으로 안내되었다. 사람들이 일행의 주위
로 몰려들었다. 모습은 중원인과 별다를 것이 없었으나 일신에 걸친 해괴한 옷
차림 탓으로 흉악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이윽고, 무리 내에서 대여섯 사람이 짐승가죽을 말린 북을 치기 시작했다.
  둥둥둥-- 두둥둥--
  북소리에 맞춰 전면의 초옥을 가리고 있던 주렴이 스르르 들추어졌다.
  이어, 그 새로 한 개의 섬세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 그림자는 초옥의 앞에
마련된 호랑이 가죽의 의자에 도도히 도사려 앉았는데, 그 모습이 햇살 아래 완
연히 드러나는 순간, 사람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인영, 그는 바로 여자였다. 그것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였다. 허리 아
래까지 치렁치렁한 미발이며..... 화려한 원색의 옷으로 감싸인 늘씬한 몸매, 수
려한 이목구비에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지닌 절세가인이었다.
  햇빛에 그을린 갈색의 까무잡잡한 피부만 아니라면 금릉성 한복판에 갖다 놔
도 손색이 없을 미모였다. 그녀는 의자에 몸을 실은 채 중인들을 하나씩 둘러보
기 시작했다. 남화룡, 철마린, 석도해, 색양, 인상인 중산을 거쳐 채하에게 잠시
머물렀던 시선은 이윽고 사우에 이르자 멈추듯 고정되었다. 동시에, 요란하게
울리던 북소리도 뚝 그쳤다.
  18. 제18장 부이족의 여왕
      (夫夷族의 女王)
  문득, 미녀가 뭐라고 입을 열었다. 사우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였다. 사우가
어리둥절해 하자 철마린의 전음(傳音)이 속삭이듯 귓전을 파고 들었다.
  "부이족의 여왕이야. 대화상대로 지넬 지목한 거네. 어서 앞으로 나가서 그녀
의 발에다 입을 맞추게. 말은 내가 계속 전음으로 통역해 주겠네."
  "나를 말인가?"
  사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신발을 신지 않은 작고 예쁜 발이 눈앞에 있었다.
  '살다 보니 별 짓을 다 해보는군.....'
  그가 부이족의 여왕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을 보자 채하는 즉시 눈꼬리가 샐
쭉해졌다.
  "저게 무슨 망측한 짓이람."
  색양이 말을 받았다.
  "무림에선 이 일을 죽어도 믿지 않을 테지. 중원쌍화 옥청풍이 한낱 여자의
발에다 입을 맞추었다면 말이야."
  여왕은 몹시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또 다시 무어라 말을 시작했다.
  "당신들은 부락을 허락없이 침입했다. 관례에 따라 당신들에게 세 가지 문제
를 내겠다....."
  잠시 멈추었던 전음은 여왕이 다시 말을 시작하자 다시 계속되었다.
  "이 세 관문은 당신들 중에 어떤 사람이 통관해도 된다. 단 반드시 한 사람만
이 해야하며 단 한가지라도 못한다면 즉시 형벌을 가한다. 우리는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 뭐 대충 그런 뜻일세.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게."
  사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첫째 관문은 부락의 가장 강한 전사와 활시합을 하는 것이다. 둘째 관문은
부락의 가장 힘이 센 전사와 힘을 겨루는 것이며, 셋째 관문은....."
  말이 잠시 끊겼다가 이어졌다.
  "맙소사. 여왕이 데리고 있는 표범과 사우 자네의 개를 서로 시합시키자는군.
이건 완전히 의도적인데? 첫째와 둘째는 어떻게 한다손 쳐도 세 번째 만은 완
전히 가망이 없지 않은가."
   사우는 힐끗 자신의 발 아래 있는 추아를 바라보았다.
  "개와 표범을 싸움시키자고?"
  그는 싱긋 웃으며 철마린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봐, 좋다는 말은 어떻게 하는 거지?"
  "승낙할 셈인가?"
  "오백 개의 독화살 앞에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자네일세."
  "흐흠..... 제기랄, 좋다는 말은 알룬일세."
  사우은 즉시 여왕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웃으며 그는 말했다.
  "알룬, 예쁜 낭자."
  *          *          *
    첫 번째 활시합은 너른 광장이었다. 부이족 측에서 나선 사람은 눈매가 유
난히 날카롭고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생겼든 사우 일행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옥의 염라대
왕이 와서 활시합을 하자고 해도 좋았다. 이쪽의 사수는 바로 혈궁마전 석도해
였기 때문이었다.
  부이족의 궁사(弓士)는 앞으로 나선 석도해를 아래 위로 쏘아보더니 상대가
안 된다고 여겼음이지 거만하게 웃으며 앞쪽을 가리켰다.
  석도해는 무심히 앞을 바라보다가 무표정한 회색 동공에 한 줄기 이채를 피
워 올렸다. 전면, 삼십여 장 앞에는 무게가 이천 근은 족히 나가보이는 거대한
물소가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검은 동체, 육중한 앞발, 이런 류의 물소는
그냥 평범한 소가 아니었다. 이런 놈들은 호랑이와 표범하고도 싸우며 위맹한
불곰이라 해도 슬슬 꽁무니를 빼고마는 일종의 맹수였다. 한마디로 원시림의 왕
자라 할 수 있었다.
  철마린이 앞으로 나아가 석도해의 뒤에서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활은 세 번을 쏘게 되는 모양이오. 첫 번째 과녁은 바로 저 물소이오. 달려
오는 물소를 단 한 방으로 죽이는 것이오. 조심 하시오, 석 노사. 저 물소는 코
끼리라 해도 단숨에 꿰뚫어 지옥의 사자(死者)라 불리우는 놈이오. 명중시키지
못했을 땐 절대 저 뿔에 받치지 마시오."
  석도해는 땅을 푸륵푸륵 차내며 흙먼지를 피어 올리고 있는 물소의 휘어 올
라간 뿔을 힐끗 바라본 후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물소 요리는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군....."
  선궁은 부이족의 궁사가 했다. 그는 물소를 노려보며 천천히 활시위를 재었
다. 동물의 뼈를 깎아 만든 촉이였지만 그 위엔 새파란 독이 발려 있었다. 하지
만, 독이 번지는 시간은 물소가 달려오는 시간보다 훨씬 느리므로 급소를 명중
시키지 못하면 물소의 뿔에 박살나는 비운을 금치 못하게 될 것이다.
  "갈!"
  한 소리 신호에 이어 물소의 뒤에 서 있던 전사 하나가 물소를 묶고 있던 끝
을 칼로 끊었다. 순간 물소는 땅을 박차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두두두--
  부이족의 궁사는 활시위를 있는 힘껏 당겨 냈다. 그 시위가 거의 타원에 가까
운 원을 그리며 휘어진 일순,
  패앵--
  날카로운 파공음이 주위의 정적을 찢고, 지축이 흔들릴 듯 달려오던 물소가
주춤 몸을 세웠다. 이마의 정가운데 활을 꽂은 지옥의 사자는 이내 스르르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와--!"
  "와아--!"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함성이 부이족 원주민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
은 그들의 궁사가 매우 자랑스럽다는 듯 사우 일행을 한 번 보고 쓰러진 물소
를 한 번 보며 미친 듯한 함성을 극 반각 동안이나 터뜨려 냈다. 석도해의 차례
가 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뚝 물소의 정면에 버티고 섰다.
  "갈!"
  우두두--
  물소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석도해는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헌데, 그의 시위
는 너무 팽팽했으므로 당기기만 하는데도 무척 시간이 걸렸다. 색양이 비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미친 놈, 평소에 활에다 기름칠을 해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당기다 끝나
고 말겠다."
  물소는 바로 지척이었다. 그제서야 석도해는 활시위를 간신히 다 당겨냈다.
누가 봐도 그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활이 명중된다고 해봐야 물소는 달리던 탄
력으로 그를 들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두두--
  채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보."
  일순, 펑--! 무슨 소리인지 모를 기이한 둔음이 장내에 터져 나왔다.
  순간, 사람들은 눈을 찢어질 듯 부릅 떴다.
  보라! 날려가고 있는 것은 석도해가 아니었다. 물소였다. 물소는 활을 이마 정
면에 꽂은 채 그 거대한 몸체를 마치 가랑잎처럼 뒤로 날리고 있었다. 다음 순
간, 물소는 활을 꽂은 채 아름드리 거목에 왕장창 틀어 박히고 말았다.
  날려간 거리는 무려 십 장이었다. 쥐죽은 듯한 정적이 장내를 감돌았다. 부이
족은 말할 것도 없고 사우 일행도 이 놀라운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석도해의 활은 이미 활이 아니었다. 그것은 만 근의 폭약이었다.
  이때, 색양과 채하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최고다!"
  부이족의 진영에서도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여왕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먼저 활을 쏘았던 부이족의 궁사도 석도해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뭐라고 중얼거
렸다.
  "당신을 신의 궁사라고 하는 거요. 나머지 두 활은 쏠 필요도 없이 자신이 진
것을 승복한다는 말이오. 그의 손을 잡아 주시오. 노 석사."
  석도해가 진영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두 번째 시합이었다. 누가 선수로 나간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가장 거구
인 색양을 향하자 색양은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것 참, 이곳의 물은 석회질이 많아 아무래도 설사를 일으키는 모양인데.
용서하시오, 여러분. 난 도저히 힘을 못 쓸 지경이오."
  남화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가 나면 힘을 못 쓰는 법이지. 그럼 내가 나가 볼까?"
  사우가 싱긋 웃으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나이든 남노사가 나서면 저들이 우리를 욕할 것이오. 내가 나가 보도록 하겠
소, 남노사."
  사우가 천천히 앞으로 나서자 부이족의 여왕은 묘한 광채를 두 눈에 피워 올
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저었다. 순간 느닷없이 지축이 쿵쿵 울리
기 시작했다.
  이어, 초옥의 뒤에서 한 사람이 느릿하게 걸어 나왔는데..... 순간, 채하의 입에
선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저건?"
  거인, 나타난 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거인이었다. 선 키는 거의 일
장에 이르렀다. 눈 하나가 큰 복숭아만하고 목에는 커다란 악어가죽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 커다란 악어가 마치 여인들이 목에 거는 목걸이처럼 보일 지경이
었다.   여왕이 뭐라고 말하자 철마린이 사우의 귀에다 탄식을 터뜨렸다.
  "맙소사. 서로 한 대씩 치고 받는 거다. 먼저 쓰러지는 쪽이 지는 거야. 자신
있나?"
  사우는 대답대신 여왕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알룬, 개구장이 여왕님."
  그는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거인은 사
우를 바라보며 징그럽게 웃었다. 사우는 그의 앞에 걸음을 멈추고는 힐끗 그를
올려다 보았다.
  "먼저 들어오라구."
  거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사우에게 자신을 먼저 치라는 뜻으로 손을
휘저었다.
  "후회할 텐데?"
   거인은 가슴을 통통 치며 가소롭다는 듯 근처의 거목을 향해 슬쩍 손을 휘
둘렀다. 순간,
  우직--두 아름은 족히 될 거목이 단숨에 허리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사우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 원한다면 들어주지. 그러나, 너는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야."
  그는 손가락을 깍지끼듯 끼고는 한 차례 우드득 소리를 냈다. 연후, 거인의
앞에 이르러 오른손을 주먹쥐어 윙윙 휘두르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거인의 복부
에다 맹렬히 그 주먹을 찔러 넣었다.
  뿍--!
  무슨 소릴까? 날아간다. 아까는 물소더니 이번에는 또 거인이었다. 비명도 없
고 발버둥도 없었다. 그저 말없이 날아간 후 한 개의 초옥을 묵사발 내듯 짓뭉
개며 사지를 쭈욱 뻗고 말았다.
  와지끈-- 쿠앙--
  사우는 툭툭 손을 털며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는 여왕의 얼굴이 가볍게 일
그러지는 것을 힐끗 보았다.   커다란 함성이 그 뒤를 이어 터져 나왔다.
  *          *         *
  역시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민을 안겨준 것은 세 번째 관문이었다. 개와 표범
의 싸움. 더구나, 여왕의 발 아래 넙죽 엎드려 있는 그 놈은 누운 길이가 일 장
은 족히 되는 거대한 놈이었다. 사우는 추아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우리의 목숨이 네 한 몸에 달려 있다..... 그 동안 놀고 먹은 대가를 지불해야
지..... 가난뱅이의 호주머니를 그만큼 털어 먹었으면 말이야....."
  그는 추아의 전신을 힘있게 한 차례 껴안아 주고는 등을 툭 밀었다.
  "가라."
  추아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맡겨졌는지 이미 짐작했다는 듯 의연하게 앞으로
걸어나가선 광장의 복판에 우뚝 섰다. 철마린이 걱정스런 어조로 중얼거렸다.
  "괜찮을까?"
  "믿어볼 수밖에, 저 놈은 사실 투견 출신이지. 싸움이라면 제법하는 놈인데
말이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상대는 표범인데....."
  여왕의 발 아래 앉아있던 표범은 어슬렁어슬렁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이 놈
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 마리 풍성한 먹이를 살광을 빛내며 바라보기 시작했다.
두 마리의 짐승은 일 장여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노려 보았다.
  일반적으로, 개는 맹수에게 약하다. 대다수의 개는 호랑이라든가 표범을 보면
꼬리를 마는 법이었다.   허나, 전문적으로 싸움훈련을 받은 추아는 조금도 꿀
림없이 표범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크르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탐색의 순간이 흘러갔다. 돌연, 표범이 도약의 자세로
몸을 낮게 웅크렸다. 웅크렸다 싶은 순간, 표범은 거의 육안으로 분갈할 수도
없는 속도로 추아를 향해 덮쳐들었다.
  추하는 재빠르게 표범의 선공을 피했다. 허나, 표범은 마치 등에도 눈이 달린
듯 거의 몸을 구십 도로 회전하다시피 돌려선 추아의 목덜미를 덥썩 물었다.
  천생의 야수다운 이 빠른 임기응변에 추아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은 표범
의 날카로운 이빨에 한 웅큼이나 물려 있었다.
  "힘을 내!"
  사우의 침중한 외침이었다. 추아는 자신의 주인을 한 차례 바라본 후 사력을
다해 몸을 틀었다. 털과 살아 한꺼번에 뭉텅 베어져 나갔다. 그러나, 추아는 피
를 흩뿌리면서도 일순, 표범의 뒷다리를 날카롭게 물었다. 카악--! 표범의 뒷다
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 놈은 추아의 이빨에서 벗어나려는 듯 발버둥을 쳤으
나 추아는 한번 문 이빨을 좀체로 놔주지 않았다. 물고 물리는 혼전, 자욱한 먼
지가 장내를 뒤덮었다. 석도해가 중얼거렸다.
  "추아는 왜 표범의 목을 물지 않았을까..... 그쪽이 휠씬 빨랐을 텐데."
  인상인 중산이 보지도 않은 일을 마치 본 것처럼 말을 받았다.
  "추아는 전문적으로 싸움훈련을 받은 투견이오. 그는 그래서 싸우는 법을 알
고 있소. 표범의 뒷다리를 문 것은 표범의 날쌘 동작을 둔화시키려는 작전의 일
환이오. 추아는 본능적으로 표범의 동작을 둔화시키지 않는 한 이길 공산이 없
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오. 이것은 마치 천성적으로 힘이 센 거인과 수업을 받은
무사가 싸우는 것 같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둔한 역(力)이란 정제된 기(氣)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오."
       1. 제1장 개와 표범
       2. 제2장 대폭우
       3. 제3장 최초의 공격
       4. 제4장 거대한 지하세계
       5. 제5장 배교의 악사도인
       6. 제6장 주술과 신공
       7. 제7장 악마상의 군무
       8. 제8장 피의 축제
       9. 제9장 친구여, 친구여
      10. 제10장 사랑의 기로
      11. 제11장 나타난 일운연
      12. 제12장 점장이 백청산
      13. 제13장 기녀의 집
      14. 제14장 달빛 정사
      15. 제15장 음탕한 여자
      16. 제16장 이대도강지계
      17. 제17장 평원속의 이인 고수
      18. 제18장 거인낙성
  1. 제1장 개와 표범
  인상인의 예언은 옳았다. 시간이 흐를 수록 추아의 기(氣)는 표범의 힘(力)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표범이 우세한 기동력과 힘을 바탕으로 추아를 쉴
새 없이 몰아 세우는 것 같았으나, 양쪽 다리를 한 차례씩 물리고 난 다음부터
이 맹수의 동작은 눈에 뜨이도록 둔화됐다.
  반면에, 흰 털을 온통 피로 물들인 채로 추아는 갈수록 더욱 용맹해졌다. 그
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듯 표범을 몰아 세웠다. 서로 피투성이가 된 채 숨찬
포효를 그치지 않는 두 마리의 짐승, 이들의 싸움은 장내를 숨막히는 열기로 가
득 채웠다.
  채하는 너무 흥분하여 자신의 앞섶이 반이나 열렸다는 것도 모르고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래, 그래, 그거야, 추아. 물어라, 물어!"
  어떤 때는 자기가 대신 물어주듯 이를 바드득 갈아대는 그녀의 옆으로 색양
이 주춤 다가섰다. 그는 고개를 있는 대로 뽑아 채하의 옷섶을 들여다 보았다.
뽀얀 젖무덤이 신비로운 백옥의 향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색양은 넋을 잃었
다. 외간처녀의 젖무덤에 넋을 잃은 남자가 다음에 취할 행동은 무엇인가?
  짝--! 그것은 바로 수편(手片)이 날아오는 대로 빙글 얼굴을 돌리는것이었다.
  짜악-- 짝--! 색양은 얼마나 세게 두들겨 맞았는지 세 대째의 수편이 작렬했
을 땐 아예 그 자리에 대자로 드러눕고 말았다.
  "끄응--"
  그러나, 장내에 드러눕고 있는 것은 비단 색양 뿐만이 아니었다. 표범도 이때
는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추아는 표범의 목을 문 채 빙글빙글 몸을
돌리고 있었다. 이것은 투견의 특유한 기술이었다. 돌 때마다 표범의 목에선 피
가 솟구쳤다. 추아의 이 바람개비 같은 묘기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크아악-- 크악--
  이때 돌연, 장내로 한 자루의 장창이 날아 들어 꽂혔다. 철마린이 다급히 사
우에게 외쳤다.
  "빨리 추아를 부르게. 저것은 싸움을 끝내자는 표식이야."
  순간, 사우는 길게 휘파람을 불어냈다. 휘익-- 갈 수록 맹렬하게 돌던 추아의
동작이 뚝 멈췄다. 그 놈은 빙글 몸을 돌려 장내로 사뿐 내려서더니 사우의 앞
으로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채하가 다급히 앞으로 달려나가 추아의 피로 젖
은 몸뚱아리를 지그시 끌어 안았다.
  "정말 잘 싸웠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추아....."
  남화룡이 껄껄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주인을 닮아 그토록 용맹한가..... 채낭자, 내가 좀 봅시다. 그 놈은 매우 심한
상처를 입었구료."
  사우는 추아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 주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철마린을 불렀다.
  "자네가 대신 말해 주게. 여왕의 자비로움으로 우린 오늘의 관문을 무사히 넘
겼노라고. 아울러, 이 나라를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야."
  철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여왕을 향해 무엇인가 말을
이었다. 여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흡족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녀는 말 도
중에 사우를 가리켜 보이기도 했다. 철마린은 정중히 여왕을 향해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사우에게 돌아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네의 용맹을 칭찬하는군. 그리고 관례에 따라 하룻밤을 여기에서 묵을 수
밖에 없겠네. 묵지 않고 그냥 간다면 이들은 자신을 모욕했다고 여기게 될테니
까....."
  "우리가 계획한 칠 일 안에 하룻밤 묵는 것도 계획에 둔 것이 아닌가?"
  "그래, 최소한 삼 일을 잡았는데 오히려 하루가 단축된 셈이지."
  "그렇다면 좋아."
  사우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도 난 마른 건량에 지쳤었단 말이야.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먹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          *          *
  용사들을 위한 잔치는 날이 어두워진 다음에 베풀어졌다. 사람들은 원을 지어
빙 둘러 앉았고 사우 일행은 군데군데 끼어 있었다. 이들의 앞으론 낮은 나무탁
자가 죽 놓였으며, 아름다운 부이족의 소녀들이 두 사람씩 붙어 앉아 나긋나긋
한 시중을 들었다.   색양은 소녀들이 정신없이 음식이며 술을 먹여주는 바람에
혼이 빠져 옆의 철마린에게 껄껄 웃으며 물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철마린. 지옥에서 졸지에 천국으로 바뀌어
버린 이 사연이."
  철마린은 씩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곳 부이족에는 괴상한 풍습이 하나 있소. 그것은 바로 부이족의 전사들은
처녀와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남자를 겪어보지 못한 여자들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생각인 것이오. 자연 이곳은 정력이 허락한다면 열
명을 한꺼번에 취해도 아무도 뭐랄 사람이 없소."
  색양은 환호를 내질렀다. 그는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입을 바로 옆에 있는 소
녀에게 마구 문질러 댔다. 채하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추잡한 위인 같으니....."
  그녀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사우, 그는 지금 여왕의 옆에 앉아 있었다.
여왕은 그의 몸에 거의 몸을 맞붙이다시피 앉아 있었으며 쉴 새 없이 교태를
부리며 사우에게 술을 권했다.
  사우도 기분이 좋은 듯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여 그녀와 주거니 받거니 술을
이어 가고 있었다.
  "남자란 다 똑같아!"
  이때, 그녀의 옆으로 큼지막한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채하는 무심히 시선
을 돌려보다가 순간, 기겁할 듯 놀랐다.   그녀의 옆에는 아까 석도해와 활시합
을 했던 그 전사가 술잔을 든 채 서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채하의 옆에 넙죽 앉아선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왔다. 채하는 기겁하
여 뺨으로 수편을 날렸다.  순간, 그녀의 손을 누군가 뒤에서 잡아 챘다. 철마린
이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빙긋 웃었다.
  "안 돼. 그랬다간 싸움이 벌어진다. 그냥 상대해 줘. 관습대로라면 그는 너와
하룻밤 자고 싶어할 거야. 침대까지도 함께 들어가 줘야 한다. 그 뒤는 네 마음
대로 하라구."
  "무슨 소리야?"
  "무사히 이곳에서 지나가고 싶으면 말이야."
  그 뒤의 시간은 악몽이었다. 원주민들은 대나무를 다발로 묶어 태웠다. 이 대
나무는 중원의 나무와는 달리 길이가 오 장에 이르고 마디가 두 척에 이르는
거대한 것이었다. 화기가 닿자 마치 귀가 멀 듯한 폭음을 터뜨려 냈다. 이것은
폭음으로 짐승의 접근을 막는 그들 고유의 놀이였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그대
로 귀와 눈이 멀어 버리기 때문에 몇 차례의 훈련을 거쳐야 했지만 사우 등은
내공이 있는지라 그럭저럭 들어 줄만 했다.
  꽝-- 꽝-- 폭음에다 온갖 진귀한 음식들, 악어를 잘라 구운 통구이며 거대한
비단 구렁이 요리, 구렁이의 배를 가르자 그 안에는 또 머리를 갈라 양념을 한
물소머리가 통째로 들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채하는 이 모든 소리며 음식 등
의 맛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느낀 것은 허리며 가슴으로 닿아오는 원
주민 전사의 징그러운 손이었다. 그녀는 그가 권하는 술을 억지로 마셔야 했고,
억지로 떠오르지 않는 웃음을 웃어야 했다.
  '성질대로라면 이걸 그냥 꽉.....!'
  그녀는 다혈질의 여인이었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은 목을 떼내어도 못하는
성미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꾹 참고 있었다. 그녀가 참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였다. 사우, 그의 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녀는 정말 꾹꾹 눌러 참았다. 화려하고 원색적인 잔치가 엉망진창 술이 취
하여 끝날 때까지도.  그리고, 원주민 전사가 그녀를 덥석 안아 들고 자신의 초
옥으로 들어섰을 때도, 그러나 그의 크지막한 손이 여인의 소중한 치맛자락을
들추었을 때 채하는 드디어 더 이상 참지 않았다.
  퍽--! 그녀의 주먹은 정확히 원주민 전사의 복부를 한 치나 파고 들었다.
  "욱--!"
  고꾸라졌다. 전사는 이것이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복부를 꾸겨 잡고는웩
웩 지금까지 먹었던 것을 미친 듯이 토하기 시작했다. 채하는 그런 그의 마혈
(痲穴)을 짚어 꼼짝도 못하게 한 후 내친 김에 수혈(睡穴)까지 짚어 아예 깊이
잠들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일어나 옷을 추스려 입은 후 힐끗 창 밖을 바라보았
다.
  달빛이 교교히 빛나고 있었다. 자정을 이미 넘긴 것이리라. 사우는 뭘 하고
있을까?
  '흥! 그 여왕인지 하는 요물덩어리와 신나게 뒹굴고 있겠지. 내 그냥 두나 봐
라.'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번쩍 몸을 날렸다. 여왕의 초옥은 낮에 봐 두었
으므로 그리 찾기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멋대로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다.
  채하는 신법을 발휘하여 마치 한 줄기 유령처럼 사람들의 사이를 지나 초옥
앞으로 접근했다. 그녀는 초옥의 들창 앞에서 잠시 안의 동정을 살폈다. 헌데
기척이 없다. 안은 마치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벌써 일을 마치고 잠들었단 말인가?'
  그럴 수록 채하는 사우가 얄미웠으므로 들창을 발칵 젖혔다. 먼저, 화려한 짐
승가죽이 깔린 침상과 그 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全裸)의 몸으로
누워있는 여왕의 모습이 보였다. 사타구니까지 있는 대로 벌린 꼴불견의 모습이
었다.
  '흥! 얼마나 격렬하게 난리를 치뤘으면 저렇게 세상 모르고 늘어졌담?'
  여왕의 옆에는 이불이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사람이 옆으로 돌아 누워 자는
것 같았다.
  채하는 입술을 잘근 깨문 채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는 들창 안으로
휙 몸을 날리려 했다. 이때 돌연, 느닷없이 그녀의 목으로 섬뜩한 감촉이 닿아
왔다. 감촉,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몸에 칼날이 와닿은 감촉이었다. 채하는 가슴
이 서늘하여 얼어붙듯이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검이 목을 쿡쿡 찔러왔다. 앞으로 가라는 뜻일까? 채하는 흉악한 원주민 전사
의 얼굴들을 떠올리고는 별 수 없이 시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검은 곧장 그녀를 숲 속으로 몰고 갔다.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 아래까지 이
르렀을 때 이번에는 검이 그녀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옷을 벗으라는 뜻인가? 망할 놈들. 이곳 놈들은 하나같이 여자에 걸신들린
개 같구나.....'
  허나, 벗으란다고 시키는 대로 벗을 수야 있겠는가? 채하는 치맛단을 올리는
척 했다. 검의 기운이 슬며시 늦춰지는 것 같았다. 순간, 그녀의 몸이 날벼락처
럼 돌았다. 돌기 무섭게 그녀는 우수를 맹렬히 뻗어냈다.
  "죽엇!"
  허나, 주먹은 반도 뻗어 나가기 전에 갈고리 같은 억센 손에 붙잡히고 말았
다. 채하는 그제서야 눈앞의 사람을 알아 보았다. 헌데 보라. 오오..... 어둠 속에
서 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이 사람은 바로 사우가 아닌가? 채하의 두 눈
이 동그랗게 떠졌다. 순간, 그녀는 미친 듯이 그의 품 속으로 뛰어 들었다.
  "당신.....?"
  사우는 싱긋 웃으며 놀란 기러기처럼 안겨온 채하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주 멋있던데? 그 친구 말이야. 먹은 걸 다 토하고 말았어."
  "다..... 보셨어요?"
  "여왕은 너무 빨리 옷을 벗어서 말이지. 난 여자를 매우 좋아하긴 하지만 그
렇게 빨리 옷을 벗는 여자는 질색이라서....."
  "그래서 다 봤단 말이죠?"
  채하는 기쁘고도 부끄러워 일순, 사우의 목에 달랑 매달리더니 그의 귓볼을
깨물었다.
  "사우야, 사우. 당신은 정말 못 된 물건이예요."
  사우는 한 손으론 그녀의 허리를 바짝 조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토실
한 엉덩이를 슬쩍 쓰다듬었다. 그는 그녀를 나무둥지 쪽으로 밀어 붙였다. 그의
손이 치마 속으로 스며 들었다. 사내의 더운 체온이 왈칵 코속으로 스며든다.
채하는 반항하지 않았다. 아니, 반항은커녕 더운 숨을 토하며 사우의 목을 바짝
끌어 안았다. 뒷등으로 나무등걸의 옹이가 박혀 든다.
  아아.... 언제던가..... 도대체 그것이 언제던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도 이랬었
다.
  *          *          *
  봉황신검(鳳凰神劍) 나봉춘(羅鳳春)을 없앤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는 요하(遼河) 제일의 검수였고 막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낭인시장의
고수들조차 그를 없애러 가는 채하를 정신없이 말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채하는 그를 단칼에 죽여 냈다. 헌원삼광의 요광이란 명성에 어울리는
전과였다. 하지만, 봉황신검 나봉춘의 수하들이 천하를 다 뒤질 듯 그녀를 쫓아
다녔고, 결국 채하는 이백의 고수들에 둘러싸인 채 황하(黃河)의 해하탄(解河灘)
에서 그들에게 붙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봉황장(鳳黃莊)으로 압송되었으며, 봉황신검의 수하들은 그녀에게 차
마 말로는 담을 수도 없는 참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 고문의 끝은 저주스런 윤
간(輪姦)이었다. 채하는 발가벗겨졌다. 그녀에게는 강력한 음약이 억지로 먹여졌
으며, 흉측한 남자의 상징을 드러낸 다섯 명의 사내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그리
하여,마침내 저주받을 윤간이 시작되려는 찰라,
   콰광--!
  고문실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피로 물든 봉황장의 고수들이 엎어지듯 밀
려 들어온 기억이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작은 칼을 빙글빙글 돌리며 한 사람이
들어섰는데, 악을 쓰듯 누구냐고 외쳐 묻는 봉황장 고수들의 말에 농부 차림의
그는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낭인시장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라면 될까..... 그저 그런 정도로 여겨 주게."
  한 칼이 번쩍이자 이미 장내에는 아무도 서 있는 사람이 없었고, 그 뒤의 기
억은 음약에 취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만, 차가운 돌바닥의 감촉이 벗은 등을 달구고 있었고..... 탄식과 함께 그녀
의 몸 위로 눌리던 체중이 있었다. 채하가 마신 음약은 정사 외에는 무엇으로도
풀 수  없었던 지독한 미약이었던 것이다.
  *          *          *
  '이것이 바로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의 일..... 그 후로도 당신은 늘 나를 놀라
게 했다...... 깊이를 잴 수 없는 부드러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냥 시선이
더워 오는 것처럼,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는 그런 빛의 샘을 당신은 가지고 있
었기 때문에..... 채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고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채하는 가쁜 숨을 훅 하고 몰아 쉬었다. 사내의 느낌이 아랫도리를 자극해 왔
기 때문이었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후끈하게 느껴졌다. 하늘엔 아스라한  별
빛..... 채하는 영혼을 껴안듯 사우의 몸을 깊이 깊이 끌어 안았다.
  이때 돌연, 저쪽 앞에서부터 주섬주섬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난 이런 독충이 우글거리는 곳에선 남녀가 정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데?"
  "천만의 말씀. 사랑 앞에선 독충도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소. 인간이란 모름
지기 십 세때는 과자에 움직이고 이십 세에는 연인에 움직이며 삼십 세에는 쾌
락, 사십 세에는 야심에, 오십 세에는 탐욕에 움직이는 법이오. 연인에 죽고 사
는 이십대의 청춘남녀에게 이까짓 독충이 무슨 문제일까?"
  이 목소리들은 바로 석도해와 인상인 중산의 목소리였다.
  채하는 기겁할 듯 놀라 다급히 사우를 밀어내고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녀
가 치맛단을 간신히 정돈한 것과 두 사람의 모습이 달빛 아래 나타난 것은 거
의 동시의 일, 인상인 중산은 느닷없이 코를 킁킁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이 냄새는 바로 사우와 채하의 냄새가 아닌가?
허, 숲 속에서 이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능청스런 말에 사우는 빙긋 웃었다.
  "돌팔이 중아, 한평생 여자라고는 어머니밖에 모를 네가 무슨 이십대의 연인
이 어쩌고 지껄이는 거야?"
  "아미타불..... 그렇게 묻는 자네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단 말인가?"
  "물론이지. 난 사랑 같은 어려운 단어는 잘 모르네만 세상에서 가장 빛나면서
가장 약한 것을 둘 알고 있지."
  "가장 빛나면서 약한 것? 그게 뭔가?"
  "하나는 여자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질그릇이지. 거기다가 한가지 덧붙인다
면....."
  "다면?"
  사우는 얼굴을 붉히며 서 있는 채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웃으며 그는 말했
다.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 안 가서 물리는 때가 오지만 선량한 여자는 결코 물
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지."
  이때,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남화룡, 철마린의 두 사람
이었다. 이들은 각기 하나씩의 물건을 끌고 있었는데, 남화룡이 끈 것은 풍혼의
고삐였고 철마린이 끌고 있는 것은 내의 바람의 색양이었다.
   색양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불쌍한 색양아, 색양..... 주는 떡도 마다하고 도망가는 이 따위 일벌레들과
같이 일하기로 한 네 운명을 저주하라."
  2. 제2장 대폭우(大暴雨)
  "저것 보라구. 저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색양의 말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이미 색양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 있었다. 
벌레, 지네처럼 생긴 것도 같고 전갈처럼도 생겼다. 그 두 종류의 벌레를 교합
하여 생긴 것이라면 좋을까? 이 괴상한 벌레는 습지 위에서 수천 마리나 떼를
지어 교미하고 있었다. 수십 개의 마디가 진 몸을 꿈틀거리며 암수가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엉켜 있는 것이었다.
  "끔찍하군....."
  괴상한 일은 그 뿐만 아니었다. 나무에 둥지를 틀고 앉아 있던 새들이 무리지
어 한 방향으로 날아가는가 하면, 땅을 파고 사는 들쥐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고
있기도 했다. 그 어떤 것이든 마치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일행은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닫기 위해 머리를 모아 보았으나 아무도
그 원인을 알지 못했다.
  "제기랄, 짐승이나 벌레 따위에게 신경 쓸 것이 뭔가? 빨리 갑시다, 가요. 난
하루라도 빨리 이 끔찍한 지옥을 벗어나고 싶으니까?"
  그러나, 짐승들이 징후을 보인 어떤 놀라운 일은 그로부터 하루도 지나기 전
에 벌어졌다. 비. 아니 폭우, 그러나 그것은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던 그런 비가
아니었다. 그토록 거대한 비가 있으리라곤 아무도 생각해보지 못했으니까.
  대습지대로 들어온 제사일째 날에 이 끔찍한 폭우는 일행을 뒤덮었다. 느닷없
이 주위가 먹물처럼 검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다음 순간, 마치 하늘에서 양동이
째 물을 퍼붓는 듯한 대폭우가 온 숲을 뒤덮었다.
  쏴아이-- 우두두두--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순식간에 온 몸이 흠뻑 젖은 채 망연하여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채하의
손을 사우가 재빨리 잡아 끌었다.
  "빨리! 늦으면 물 속에 파묻히고 만다!"
  사람들은 허둥지둥 근처의 가장 높은 거목 위로 올랐다. 추아는 사우가 안고
올랐으며 풍혼은 남화룡과 철마린이 넝쿨끈으로 묶어 근처의 고목에 꽁꽁 묶어
놓았다.
  쏴아아아-- 두두두두두--
  온 하늘이 일제히 구멍 뚫린 것일까? 조금 있자니 섬뜩한 빛을 번뜩이며 분
홍빛 섬전(閃電)이 사방에 작렬하기 시작했다.
  번쩍! 콰과광--! 빠직--!
  색양이 올라 있던 나무의 바로 옆에 있던 나무 하나가 송두리째 박살났다.
  "윽--! 아이구, 하늘님."
  색양은 다급히 벗겨진 머리를 휘감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은 매우 위
험한 일이었다. 번개는 아무 곳이나 함부로 떨어지고 있었다.
  콰콰콰--
  숲 속의 모든 것들이 비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풀과 작은 나무와 돌
과 습지의 곳곳에 피어 있던 버섯과 그 밖의 자신의 몸을 지탱할 수 없는 벌레,
짐승들이 그 물 속에 우글거리며 떠내려 가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이 도래한다면 이럴까? 비를 이어 퍼붓는 비, 거기다가, 아무 곳
에나 함부로 날아 떨어지는 번개며 그런 모든 것들이 한데 얽혀 빚어내는 무서
운 숲의 광란.....  인간은 이미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 인간이 일신에 익힌
무예 따위는 두 말할 것도 없었다. 무예가 아무리 고절한들 날아오는 번개를 맨
손으로 막아낼 수 있겠는가? 경신공부가 아무리 극강한들 이 광란의 숲을 그냥
날아 건널 수 있겠는가?  물은 점점 더 불어났다. 이미, 사람들이 올라 있는 나
무 바로 아래까지 차올라 있었다. 이대로 조금 더 내린다면 나무도 별수없이 잠
길 것 같았다.   채하가 파르르 사우의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알았으면?"
  "어제..... 사람들이 와도 당신을 그냥 받아들일 걸 그랬어요....."
  사우는 싱긋 웃었다.
  "부끄럽지 않았을까?"
  채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랬다면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뭘?"
  채하는 상큼하게 웃었다.
  "비밀이예요."
  "이것 봐,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무슨 비밀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핏--! 그래도 말 안할테야."
   이때, 문득 한 줄기 물결이 채하의 발에 닿아 왔으므로 그녀는 급히 아래를
내려다 보다가 비명 같은 외침을 터뜨렸다.
  "물이 바로 아래에 있어요."
  "물은 늘 아래에 있지."
  채하는 사우를 흘겨보더니 그의 뺨을 부드럽게 한 차례 때렸다.
  "나빠."
  "어이쿠, 죽을 때가 되니 이젠 막 사람을 팬단 말인가?"
  채하의 시선이 빤히 사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래쪽의 물을 다시 한 차례
바라보더니 긴 속눈썹을 사르르 내리 깔았다. 이어, 선연하도록 붉은 입술을 살
짝 내밀었다.  사우는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난 운이 좋은 사람이로군.
  '죽는 마당까지도 미녀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니 말이야."
  그는 채하의 턱을 살짝 받쳐들었다. 꽃잎에 나비가 내려 앉듯 그의 입술이 채
하의 붉은 입술을 덮었다. 채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섬섬옥수로 그이 목을 바짝
끌어안았다. 격렬한 순간이 두 사람의 영혼을 아스라이 끌어가고 있었다.
  남화룡이 나무에 기댄 채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웃었다.
  "청춘남녀란 건 언제든지 좋은 것이로군."
  철마린이 울부짖는 풍혼의 털을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
  "부럽습니까?"
  "아니, 나는 저렇게 열정적이진 못했지만 매우 좋은 여인을 만났었소. 그 여
인과의 추억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까."
  문득 그는 한 가지 일이 생각났다는 듯 철마린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약혼녀를 어떻게 하고 왔나? 난 여자는 잘 모르지만 매우 온유로은
여인인 것 같던데."
  철마린은 씩 웃었다.
  "나에게는 과분한 여자지요. 교양있고 아름다왔으니까."
  "그렇지 않아. 자네라면 충분히 그 정도의 여인을 맞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
다고 본다."
  "나는 이곳에 오지 않으려 했소. 나는 오랫 동안 노력한 끝에야 그런 권력,
부, 명예를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녀는 날 일깨웠소. 그녀는 나에
게 당신들을 따라가라고 했소. 우정은 함부로 맺는 것도 아니지만 함부로 버리
는 것은 더욱 아니라고 했소."
  철마린은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 해도 사랑 속에선 타인의 생명의 존귀
함을 느끼게 되는가 보오. 한 여성의 사랑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난 인생의
겸손함을 배웠지요....."
  그들의 바로 뒤에 있는 나무에 올라 있던 인상인 중산이 옆에 있는 석도해를
바라보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을 껌뻑이며 말을 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빈승도 사랑이란 것을 좀 해보는 것인데. 천하의 그 누구
도 믿질 않아 의광(疑狂)이라 불리웠던 철마린이 저렇게 변했을 정도라면 빈승
은 이미 경지에 이르러 있을 것이 아니겠소?"
  석도해는 활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묵묵히 아래의 거친 급류를 바라보다가
무심하게 웃었다.
  "기왕 하지 않았으면 영원히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아. 사랑이란 인생의 열병
이요. 광기니까."
  "석시주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군요."
  "사랑은 불과 같은 거지. 불은 너무 멀리하면 추워서 못 견디네. 하지만 너무
가까이 하면 또 불에 타고 말지."
  "그건 좋은 말인데....."
  석도해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난 어리석은 불이었다고 할까..... 그녀는 종내 말성이는 나에게 용기를 주었
었지."
  인상인 중산의 푹 패인 동공이 꿈틀거렸다. 그녀, 석도해의 그녀란 자신의 아
내를 말하는 것이리라.  천하의 사람들은 그가 활의 연마를 위해 아내를 강제로
끌어다 그 입에 쌀알을 물게 하였다고 알고 있었다. 한낱 무예연마를 위해 아들
에 이어 아내까지 죽인 그 파렴치한 짓으로 하여 그는 영원히 무림에서 추방당
하지 않았던가?
  문득, 석도해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한 줄기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활의 표적으로 써달라고 했지. 내가 계속 망설이자 그
녀는 화를 냈네. 사내가 어찌 한 번 마음먹은 바를 그렇게 망설이고 있느냐고
말이야. 그녀는 내가 좌절하지 않기를 바랬던 거지.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쯤
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세."
  슬픔의 여울이 깊게 패인 슬픈 웃음.....
  "결국 난 그녀를 죽였지....."
  중산은 언뜻 눈을 돌렸다. 그는 공연히 하늘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역시 사랑 따윈 안하는 쪽이 훨씬 낫단 말이야....."
  이때 돌연, 색양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주위를 쩌렁하게 울렸다.
  "물이 빠진다!"
  십 장 높이의 나무 바로 아래까지 넘실거렸던 물이었다. 헌데, 도대체 어디로
빠지고 있는 것일까? 눈에 뜨이도록 물의 수위는 낮아지고 있었다.
  기적, 자연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그로부터 차 반 잔 정도 마실 시각이
지나자 이윽고 물은 완전히 빠지고 폭우가 휩쓸고 간 잿더미 같은 바닥이 드러
났다. 색양은 훌쩍 뛰어 내려선 중얼거렸다.
  "놀랍구나, 놀라와..... 그 많던 독충이며 버섯, 독초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구나."
  인상인 중산이 뒤따라 내려선 후 히죽 웃었다.
  "그게 바로 자연의 섭리란 거지. 만약 그 벌레들이 그대로 번식만 계속한다면
이 숲은 온통 벌레로 뒤덮일 것이 아니오."
  마지막으로 채하와 함께 내려온 사우가 검미를 찌푸렸다.
  "좋아할 일만은 아니로군. 우리의 식량도 다 떠내려 갔다. 마린, 이 습지대는
이제 얼마나 남은 거지?"
  "사흘 정도."
  "흐흠, 그 사흘은 꼼짝없이 굶을 수밖에 없겠군."
  순간, 색양이 부르르 몸을 떨며 외쳤다.
  "사흘을 굶는다고? 오오..... 이 사람아, 차라리 날보고 죽으라고 하게."
  채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굶지 않으면? 당신이 만약 폐허에서 먹을 것을 한 줌이라도 찾아 낸다면 난
내 손에 장을 지지겠어요."
  *          *          *
  굶주림은 고통스러웠다. 마실 물도 없었다. 각자가 허리에 차고 있던 수통이
고갈된 지도 벌써 이틀째였다. 또 다시 하루가 지났다. 철마린의 예언대로라면
벌써 끝이 났어야 할 습지대는 그러나, 아직도 아득히 끝을 보이지 않고 있었
다. 색양은 굶어 죽는다고 계속 아우성이었다. 그는 괜히 좋을 길 놔두고 이 따
위 지옥으로 들어 왔다고 계속 시비를 부렸다.
  거기다가 또,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늪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
한 땅인데 밞으면 정신없이 빠져드는 늪이 폭우 후로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늪은 어찌나 인력(引力)이 강한지 한 번 빠지면 살아 나올 생각을
말아야 했다. 채하가 한 번 빠졌다가 간신히 건져진 후 그녀는 연 이틀을 구토
와 실수증(失水症)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지옥의 대습지대, 도대체 이 늪지는
어디가 그 끝이란 말인가?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사람들의 사이
에서 팽만하기 시작했다.
  슈웃-- 팟--!
  한 자루의 비수가 바로 눈앞에 꽂히자 색양은 흠짓했다. 그는 지금 썩은 고목
에 핀 버섯을 향해 손을 내민 참이었다.   버섯은 붉고 파란 빛으로 현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것을 따서 입 안에 넣는다면 새콤한 액체가 한 가득 고
여줄 것 같았다. 막 손을 내민 찰나에 사우의 비수가 날아든 것이었다.
  색양은 벌겋게 충혈된 시선을 던졌다.
  "이것 봐, 사우! 날 말리지 말라구. 말리면 너부터 죽여 버릴 테야."
  사우는 냉랭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구를 죽이든 좋아. 그러나 그 버섯을 먹는 것은 안 돼. 뱀과 버섯은 그 현
란한 색깔로 먹이를 유혹한다. 그것은 독버섯이야."
  "그래도 난 먹겠다!"
  색양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일순 미친 듯이 버섯을 향해 손을 뻗쳤다. 사우는
그보다 더 빨랐다. 신형이 번뜩이는 순간 그는 이미 색양의 앞에 서서 가로막고
있었다.
  "이 새끼, 죽인다!"
  색양은 다짜고짜 우수를 맹렬히 뻗어냈다. 사우는 가볍게 그의 일권을 피했
다. 피했다 싶은 순간 그는 색양의 완맥을 꽉 움켜쥐고는 휙 내던졌다.  색양은
바람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끄응--"
  그러나, 그는 용수철처럼 되퉁겨 일어났으며 또 다시 득달하듯 사우에게 덮쳐
갔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남화룡이 옆의 철마린에게 중얼거렸다.
  "색양을 정말로 괴롭히고 있는 것이 뭔지 아나?"
  "글쎄요."
  "그것은 절망이야. 무림인이란 그가 지닌 진원진기로 하여 굶주림이나 기갈을
보통 사람보다 세 배는 더 오래 지탱할 수 있지. 따라서 우린 아직도 이틀은 더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색양을 저
렇게 날뛰게 만들고 있는 걸세."
  색양의 손은 독수리 발톱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그의 독문절기(獨門絶技)인
응조수(鷹爪手)였다. 허나, 이번에는 사우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기이한 신법
을 발휘하여 색양의 응조수를 피함과 동시에 오른손 주먹을 그의 옆구리에 맹
렬하게 찔러 넣었다.
  푹--!
  "우욱--!"
  색양의 몸이 휘청했다. 또 한 대의 발길질이 복부를 강타하자 그는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이 장 밖의 괴목 숲으로 나가 떨어졌다.
  "끄으응--"
  이번에는 아예 대자로 뻗었다. 색양은 누운 채 하늘을 멀뚱멀뚱 올려다 보았
다. 한 줄기 핏물이 맺힌 입가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안다, 알아...... 그것이 독버섯이란 거쯤 나도 알아. 그러나 이 따위 지옥을
더 가느니 빌어먹을 독버섯이라도 먹고 죽는게 훨씬 낫다는 것을 사우, 네 놈은
모른단 말인가?"
  이때다. 문득, 색양은 자신의 벌리고 있는 오른손 팔꿈치에 따끔한 통증이 오
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급히 손을 떨며 일어나다가 순간 눈을 부릅떴다.
  "어? 이건 거북이 아니냐?"
  그는 황망히 거북이를 향해 손을 뻗어갔다. 그러나, 거북이는 피하기는커녕오
히려 뻗어나간 자신의 손을 마주 물려고 덤비는 것이 아닌가?
  "이 놈 봐라?"
  그는 뻗어나간 손에 한 줄기 장력을 모았다.
  펑--! 장력은 정통으로 거북이의 튀어 나온 머리를 격중했다. 이 정도의 장력
이라면 최소한 작은 바위 하나는 으스러뜨리고 남을 만한 위력이 있었다.   그
러나, 거북은 바위도 뭣도 아닌 주제에 으스러지기는커녕 두 눈을 말똥말똥 뜨
고 그를 올려다 보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 거북은 일반 보통 거북과는 그 생김새도 달랐다. 짙은 녹색
의 이끼로 뒤덮인 등, 살광으로 이글거리는 붉은 눈 등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섬뜩해지는 것이었다.
  철마린의 시선이 무심히 그를 향했다. 순간, 그는 크게 놀란 빛으로 번쩍 몸
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비키시오, 색양!"
  색양이 채 한 걸음을 물러나기도 전에 거북은 맹렬히 도약했다. 이 놈의 동작
은 놀랍도록 빨랐다. 눈앞에 뭔가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벌써 코 앞에 이르러 이
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때 한 줄기 유성 같은 광채가 허공을 수놓았다. 순간 핏빛 수실의 금창(金
槍) 하나가 거북의 등을 위에서 아래로 꿰뜰었다.
  꾸엑--! 거북은 괴상한 비명을 토하며 창과 함께 아래쪽의 땅에 쿡 박혀버리
고 말았다. 창을 관통했으면서도 몸은 여전히 꿈틀거렸다. 이빨 새로 핏빛 혓바
닥이 날름거리고 있었다.
  "악마같은 놈이군....."
  땀을 씻으며 색양이 중얼거리자 철마린은 스르르 그의 옆에 내려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놈은 바로 악마요."
  사람들이 분분히 몸을 날려 다가왔다. 사우가 검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이것은 혹시 혈록식인구갑(血綠食人龜甲)이 아닌가?"
  철마린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을 뼈도 안 남기고 뜯어먹는 무서운 놈이지?"
  "가만, 철마린, 그렇다면 우린.....?"
  순간, 철마린은 드물게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맞아, 대습지대가 드디어 끝난 걸세. 이 혈록식인구갑은 한당의 독문무기야.
마중뇌옥이 눈앞에 있다는 말이지. 지긋지긋한 늪지와는 이젠 이별이야!"
  *          *          *
   그것은 또 하나의 원시림이었다. 대습지대의 늪지와는 약 이백여 장의 모래
사막을 사이에 두고 원시림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그 원시림의 위로
는 다시 한 개의 거대한 바위산이 보였다.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저것이 바로 마중뇌옥일 것이오."
  사우의 말에 남화룡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바위산에?"
  "산 속에 마옥이 있소.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원시림을 통과해야 나타날
거요."
  채하가 아미를 살풋 찡그렸다.
  "전격기습해서 사람을 구하긴 어렵겠군요?'
  이번에는 철마린이 말을 받았다.
  "어려운 게 아니라 그건 아예  불가능하지. 마중뇌옥의 구조는 그것을 송두리
째 허물지 않는 한 사람을 구할 수 없게 되어 있지."
  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방법이 최고다. 우리가 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우린
저 모두를 부숴내야 해."
  그는 사막의 지형을 세심히 살펴보더니 말을 이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늪지와 원시림을 잇는 사막에 도사리고 있는 혈록식인
구갑이야. 내가 알기로는 이 괴물은 비단 사람을 습격하여 잡아 먹을 뿐 아니라
침입자를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눈에 뜨이는 대로 죽이지 않으면 즉시우리가
공격해 온 것이 탄로나게 될 것이다."
   채하가 징그럽다는 듯이 혀를 낼름 내밀었다.
  "어떻게 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가?"
  "혈록식인구갑은 천성적으로 강한 껍데기를 가지고 있다. 웬만한 도검은 통하
지도 않아. 유일한 방법이라면 눈에 뜨이는 즉시 가장 빠른 수법으로 찌르는 길
밖에 없다. 빠름, 오직 그것만이 이 괴물의 두꺼운 껍데기를 뚫을 수 있다.
  말을 이으며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공격에 효과를 기하기 위해서 우린 흩어져 산을 오르는 것이 좋겠소. 남노사
와 철마린이 한 조(組)가 되고 석노사와 색양이 다시 한 조, 그리고 채하와 중
산은 나를 따른다."
  그는 굳은 얼굴로 잘라뱉듯 말을 이었다.
 
  3. 제3장 최초의 공격(最初의 攻擊)
  화염 모양의 붉은 화인(火人), 마치 인간이 아니라 한꺼풀 석회를 바른 듯 공
포스런 얼굴의 입이 열렸다.
  "오늘이 며칠이냐.....?"
  거대한 수정거울 아래 부복하고 있던 회의인(灰衣人) 하나가 말을 받았다.
  "팔월 스무 여드레입니다."
 수정거울 안의 공포스런 얼굴은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는 어조로 말을 받았다.
  "낭인시장의 고수들이 온다는 날짜는 언제이냐?"
  "그들은 팔월 보름날 출발했으므로 아직 이레는 더 있어야 올 것입니다."
  "그러나 사막 안에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하
겠느냐?"
  "그것은 저어..... 사막이 워낙 넓고 방대한 탓으로....."
  "이 병신 같은 놈!"
  수정거울 안에서 폭갈이 터졌다.
  "그들은 지금까지 온 놈들과는 류가 다른 고수들이다. 그 하나하나가 다섯 번
의 척살조와 맞먹는 능력을 지닌 고수들이다. 그런 그들을 상대함에 있어 어찌
이토록 허술하단 말인가?"
  회의인은 부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본옥의 천라지망 안에 그들은 곧 포착될 것이므로 너무 염려하실 것
은....."
  순간, 느닷없이 수정거울 안에서 한 줄기의 붉은 화염이 쭉 뻗어나왔다.  회
의인의 동공이 부릅떠졌다.
  "옥주! 제발....."
허나, 그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시뻘건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으아아악--!"
  재, 한 차례의 몸부림 뒤에 한 줌의 재가 남았다. 거울 속의 인영은 음산한
음성을 토해냈다.
  "경추!"
  순간, 거대한 안개가 검돌고 있는 대전 한쪽으로 한 줄기의 검은 빛이 날아들
었다. 일신에는 먹물 같은 흑의, 허리춤엔 두 자루의 길고 짧은 검을 꽂았으며,
어깨 위로 붉은 눈의 독수리 한 마리를 얹고 있는 위인, 그의 눈은 초점이 없었
다. 무표정한 회색 광망이 번뜩이고 있을 뿐이었다.
  "산의 경계를 강화하라. 지옥림(地獄林)에서부터 그들을 막아라. 만약 그들을
산 안으로 들여 보낸다면 너의 목숨으로 죄를 묻겠다."
  "존명!"
  말은 곧 절대의 명령이다. 흑의인의 몸은 그 자리에서 검은 회오리가 되어 후
르르 사라져 갔다.
  "내 생각대로라면..... 그들은 최소한 내일은 온다..... 그것이 사우다....."
  *          *          *
  마동, 그는 마중뇌옥의 입산사자(入山使者)였다. 마중뇌옥에는 모두 천사십오
명의 고수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구분은 옷 색깔로 하고 있었다.   마동과 같이
홍의(紅衣)를 걸친 부류들이 홍의옥자(紅衣獄者)라 하여 가장 낮은 계급이었고
그 다음이 백의의 백의옥자(白衣獄者), 회의의 회의옥자(灰衣獄者), 가장 높은
등급이 흑의의 흑의옥자(黑衣獄者)인 것이다.
  이 흑의옥자는 도합 열 명밖에 없었다. 산을 오르는 첫 번째 관문인 지옥림을
관장하고 수비하는 사람은 홍의옥자가 대부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말이야. 연경에서 이곳까지 이십 일에 온다는 것만 해
도 기적에 가까운데 그 기한을 이레나 단축시킨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가?"
  마동은 냉랭한 코웃음을 터뜨리며 바로 옆의 또 다른 홍의옥자를 툭 쳤다.
  "그렇지 않은가, 우형(尤兄)"
  그러나, 그가 툭 밀자 우형이라 불리운 홍의옥자의 몸은 스르르 기울여지고
만다.
  "윽--! 이게 무슨 일이람?"
  이때 돌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괴이한 음성이 나직이 울려퍼졌다.
  "그 이유는 지옥에 가서 물어 봐라."
  마동은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
막으로 느껴본 감정이었다.  도(刀). 소리없이 날아온 도는 정확하게 마동의 목
에 꽂혔다.
  "우욱--!"
  마동은 목에 도가 꽂힌 그 상황에서도 재빨리 나무 옆에 달린 줄을 잡아당기
려 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목에 꽂혀있던 도는 어느 새 줄을 향해
가는 그의 손목을 자르고 있었다.
  팍--! 마동의 목과 손에서 동시에 자욱한 혈수가 피어올랐다. 고목이 서서히
기울어 쓰러지듯 그의 몸은 몇 차레 휘청거리다가 땅에 처박혔다.
  달빛 아래, 도를 든 사람의 그림자가 마동의 시신 위에 포개졌다. 사냥군 차
림의 중년 사내, 남화룡. 그는 바로 천하에서 가장 빠른 비도의 소유자였다. 이
때 돌연, 한 줄기 바람이 일렁이더니 철마린이 스르르 남화룡의 옆에 내려섰다.
  "매복한 졸개들의 수는 의외로 많군."
  남화룡의 말에 철마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동이 당기려 했던 줄을 살펴보
았다. 이윽고, 이리저리 줄과 줄의 근원을 검토하던 철마린이 느릿하게 몸을 일
으키며 말했다.
  "여기에는 화약이 장치되어 있었구료..... 이런 교묘한 장약술(藏藥術)을 구사
하는 사람을 누굴까?"
  그는 눈앞의 어둠을 잠시 응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이 원시림의 길이는 대략 일 리 정도인 것 같소. 앞으로 한 시진 안에 뚫어
내지 못하면 안에서 눈치를 챌 것이오."
  조개, 마중뇌옥의 회의옥자 중 한 사람인 그는 지옥림의 중턱에 오십여 명의
홍의옥자와 함께 진을 치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숲 앞에서 전갈이 오면 즉시지
원공격을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와 나머지 무인들은 앉거나 눕는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설운(雪雲), 흑의옥자께선 적이 내일이나 모래 온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그의 옆에 단정히 앉아 있던 홍의옥자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속하 역시 그들의 발이 그렇게 빠르다곤 생각지 않습니다.....더
구나 사막에 놓아진 식인구갑은 그들을 발견해 내는 즉시 경보를 발할....."
  그는 말을 더 할 것 같았으나 여기서 그치고 말았다.
  조개는 의아하여 그에게 시선을 돌리다가 안색이 급변했다. 홍의옥자 설운의
눈은 퉁방울처럼 부릅떠져 있었으며, 그의 목엔 어느 샌가 새파란 청광을 발하
는 화살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나직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함부로 지껄이는 자는 죽는다....."
  순간, 조개는 옆에 놓아 두었던 검을 집어들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누구냐?"
  "나다."
  한 소리 짤막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개는 화살맞은 기러기처럼 뚝 땅에
떨어졌다. 그의 이마와 양어깨, 심장, 그리고 두 허벅지엔 어느새 여섯 개의 화
살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실로 쾌속절륜한 수법, 화살을 쏜 사람은 마치 조
개가 뛰어오를 지점을 예측하고 미리 화살을 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
리보다 빠른 사전수법(射箭手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들은 설명은 길었지만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나머지 오십 명의 마졸들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분분히 무기를 집어들고 자리
에서 일어났다.
  이때 돌연, 어둠 속에서 수십 자루의 비수가 한꺼번에 쏘아져 나왔다. 더도
덜도 아닌 꼭 오십 자루의 비수. 얼떨결에 일어났던 마졸들은 이 번개 같은 비
수에 목의 인후혈을 꿰뚫린 채 낙엽이 떨어지듯 우수수 쓰러져 갔다. 싸움 같지
도 않은 싸움은 간단히 끝났다.
  뒤엉켜 쓰러진 마졸들의 시체를 밟고 두 인영이 나타났다. 화복의 얼굴에 웃
음을 띤 뚱보는 색양이요, 남루한 도복에 무표정한 얼굴을 한 이는 석도해다. 
색양은 곧장 쓰러진 마졸들의 앞으로 걸어가 그들의 몸에 꽂힌 비수를 하나씩
뽑아냈다.
  "이로써 칠십 명이다. 나는 오늘 너무 많은 살인을 하는구나....."
  *          *          *
  산, 하나의 바위산. 이 산은 통째로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하나 나 있지 않은 것은 물론, 바위 이외의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
볼 수 없다.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해골. 그것은 바로 시선만 닿아도 섬뜩한 하나의 해골이었다. 이 해골은 사람
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바위산의 중턱에 새겨진 거대한 상(像)이었다.
  멀리서 보자니 모르겠더니 가까이서 보자 이 해골의 입 부분은 정교한 동굴
이었다. 이 동굴 입구에는 아까부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두 자루 검, 어깨엔
독수리를 얹힌 흑의사내.
  "신호를 한 번 보내라."
  흑의사내 경추의 말에 아래 시립해 있던 네 명의 회의인 중 선두에 있던 자
가 급히 활에 불시위를 당겼다.
  퓨슝--!
  화살은 꼬리를 그으며 저 아래 보이는 원시림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그
러나, 화살이 사라진 지 반 각이 지나도록 산 아래에선 아무 소식도 없었다. 경
추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러나, 그느 그럴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빨라도 내일이다. 그
것도 최고의 속력으로 추산한 것이다. 대습지대로 오지 않는 한 오늘 온다는 것
은 절대 불가능하다.....
  대습지대, 이 단어를 떠올리고 나자 그의 얼굴이 갑자기 변했다. 이때 돌연,
무엇인가가 번쩍 시야를 갈랐다. 순간,
  "으윽--!"
  "윽--!"
  바로 그의 아래쪽에 서 있던 네 명의 회의옥자가 비명을 토해 냈다. 창(槍),
한 개의 창과 한 개의 도, 한 개의 화살과 한 개의 비수가 각각 네 옥자의 가슴
을 꿰뚫고 있었다. 동시에 전면의 숲 속에서 킬킬대는 웃음소리와 함께 투닥투
닥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창이 제일 빨랐다."
  "흥! 씨도 안 먹히는 소리, 내 비수가 더 빨랐다."
  "웃기지들 말라구, 내 화살이 가장 빨랐어."
 "아이, 저는 오랜만에 도를 날려 맞추었는데 세 분이 그렇게 우김심 어떡해요."
  들썩날썩 말다툼 소리, 이 네 개의 목소리는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투닥이더
니 이윽고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우린 누구의 무기가 가장 빨리 꽂혔는지 물어 보기로 하자."
  "누구에게?"
  "저기 저 해골 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
  말을 이어 나뭇잎이 살랑이는가 싶더니 그 새로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가 울
려퍼졌다. 말인가? 아니 사람도 있다. 둘 다 괴상하다. 말은 아예 비루먹다 못해
이제 곧 와장창 무너져 내릴 듯 늙은 말이었고, 그 위에 앉은 자는 차양에다 농
부차림의 청년이었는데 끄덕끄덕 졸며 말안장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또각또
각.....
  "두르릉--- 쿨--"
  이 농부 차림의 청년이 그냥 조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고 있는 것
이란 걸 깨닫자 흑의사내 경추는 정신이 혼란해 지고 말았다.
  '이 놈들은 누군가..... 설마하니 산 아래 지옥림의 매복이 모조리 다.....?'
  말은 이내 그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말 위에 앉아 있던 청년의
코고는 소리도 뚝 그쳤다. 청년의 차양 속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의 의문을 풀어주실 수 있겠소?"
  경추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놈은 누구냐?"
  "넷 중 누구의 무기가 가장 빨리 꽂혔는지 당신은 분명히 보았을 것이 아니
오. 그 정도도 말해주지 못 한단 말이오?"
  이때 돌연, 경추의 손에서 번쩍하고 한 줄기 빛이 토해졌다.
  광채! 그러나 청년은 미동도 않았다. 청년이 쓰고 있던 차양이 반으로 쪼개져
나갔다. 그 새로 드러나는 얼굴, 순간 경추는 훅 숨을 들이키며 주춤 한 걸음뒤
로 물러났다.
  "사우.....?"
  사우의 두 눈에 한 줄기 기광이 언뜻 스쳐 지났다.
   "날 안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피식 웃었다.
  "내가 이렇게 유명인사일 줄은 몰랐는 걸?"
  경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짧은 순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차
례 변해갔다. 그러다 말고 그는 이내 한 줄기 탄식을 터뜨리며 천천히 뒤로 물
러났다.
  "대단하군..... 대단해....."
  그는 해골 모양의 동굴 앞에 털썩 정좌하여 앉더니 이미 무표정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신들을 이곳까지 오게 하였으니 이미 이 경추는 목숨이 없는 것과 같다.
이 안으로 들어가자면 날 죽이고 가야 할 것이다."
  사우의 얼굴에 빙긋 웃음이 피어올랐다.
  "당신은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따위 동굴쯤은 눈
감고도 들어갈 수 있소. 누가 들으면 당신을 죽이기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
것이 아닌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우수를 쭉 뻗어냈다. 이 손은 매우 이상했다. 그것
은 경추의 몸이 아니라 그의 아래쪽 땅을 겨냥하고 있었는데 경추로 하여금 반
드시 위로 피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순간,
  "야핫--!"
  한 소리 기합에 이어 경추의 몸이 위로 대붕처럼 솟구쳐 올랐다. 헌데, 막공
중으로 몸을 띄웠던 그의 얼굴이 문득 썩은 돼지간처럼 변했다. 보라. 그의 눈
앞으로 어느 샌가 뻗어오고 있는 네 개의 각기 다른 무기를!
  창, 도, 화살, 비수의 네 종류의 무기,
이것들은 놀랍게도 이미 사우의 손이 뻗는 순간 함께 던져진 것들이었다. 즉,
경추의 몸이 날아오르는 지점을 정확히 겨냥하고 던져진 것이라는 얘기였다.
  경추는 일장 탄식을 터뜨렸다. 그 탄식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에는
네 개의 무기가 무자비하게 틀어 박히고 있었다.
  "욱--!"
  "내가 먼저다."
  "허어, 내가 먼저라니까?"
  "이번엔 분명히 나야."
  "아이, 제가 먼저라니까요?"
  투닥투닥 다투는 말소리와 함께 숲 속에서 여섯 사람이 느릿하게 걸어나왔다.
  남화룡, 철마린, 색양, 석도해, 인상인 중산, 채하의 육 인. 이들은 천천히 사
우의 뒤에 우뚝 몸을 세웠다. 인상인 중산이 감개무량한 듯 중얼거렸다.
  "우린 마침내 이곳까지 왔군....."
  철마린이 해골문양의 동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제야 나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그였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누구를 말하는 건가?"
  "원시림 안에 장치되어 있던 각종 기관매복이며 사람들의 배치형태, 그리고
화약이 저절로 터지게끔 장치된 교묘한 장약술 등을 안배한 사람말이오."
  색양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가 누군가?"
  "악사도인(惡邪道人). 이십 년 전 배교(拜敎)의 총호법(總護法)이었던 인물이
오. 또한 사도십병의 다섯째 서열인 냉환신경(冷幻神經)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오."
  사람들은 묵묵히 해골동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한줄기 스산한 모랫바람이 불어왔다.
  "어쨌든 들어가 볼 수 밖에."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렇다. 어차피 마중뇌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저것 하나 뿐이었다. 칠인은 서로의 얼굴을 한 차례 마주보고는 성큼성큼 안으
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람은..... 아득한 사막 저편으로부터 여전히 기승을 부
리고 있었다.
  4. 제4장 거대한 지하세계
           (巨大한 地下世界)
  어둠..... 동굴의 안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화섭자를 켤까?"
  "아니, 오히려 적의 표적이 된다. 이대로 가는 것이 좋아. 우리가 안 보이는
것은 적도 안 보일 테니까."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길은 밑으로 꺾어지기 시작했다. 살을 에일 듯한 찬바
람이 그 안에서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일행은 사위경계를 게을리 않는 한편,
조심스럽게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추위는 아래로 내려갈 수록 더욱 거세어졌
고.... 비례하여 주위의 어둠 또한 더 더욱 농밀해졌다. 혼돈, 태초의 혼돈이 있
다면 바로 이럴까.
  계단은 미로(迷路)였다. 한없이 밑으로 뻗다가 느닷없이 옆으로 꺾이는가 하
면..... 아득히 입을 벌린 낭떠러지와, 그 낭떠러지와 낭떠러지를 잇는 폭 한 자
의 돌다리가 위태롭게 걸려 있기도 했다.
  웅-- 우웅-- 바람이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돌다리를 건너면 이번에는 또 수십
갈래로 갈라진 길이 나오고.....
  이 지하세계는 그야말로 광대했다. 지각의 변동, 그것도 엄청난 대변혁으로
인해 이루어진 괴기로운 무저의 세계이리라. 하지만 한낱 바위산 아래 이토록
거대하고 광할한 지하세계가 펼쳐져 있으리라곤 눈으로 보아도 정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때 돌연, 어둡던 주위에 한 줄기 옅은빛이 피어 올랐다. 그 빛은 길의 정면
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맨 앞에서 걷던 사우는 바로 뒤따라 오는 채하를 힐끗 뒤돌아 본 후 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일순, 그의 걸음이 그 자리에 뚝 멈춰졌다. 그의 온 몸이 일시
에 붉게 물든다.
  뒤따라 오던 사람들이 일제하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용암, 그들의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은 거대한 용암의 불구덩이였다. 투명하도록 새빨갛고 끈적한 이
죽음의 액체 위로는 부글거리는 기포가 쉴 새 없이 끓어 오르고 있었고, 살을
태울 듯 더운 열기가 서 있는 사람들의 몸을 후끈 달아 오르게 만들었다. 사우
는 시험삼아 근처의 돌멩이 하나를 용암 속에다 툭 던져보았다. 순간, 돌은 빠
져든 흔적도 없이 닿기 무섭게 푸스스 녹아 버리고 말았다.
  "무서운 물건이로군....."
  철마린이 다가오며 중얼거리자 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하에서 천연적으로 생성된 대용암군이야."
  "저쪽 건너편까지는 한 삼십 장 가량 되겠는데? 이 정도라면 무난히 날아 건
널 수 있지 않을까?"
  사우는 고개를 저었다.
  "거리만으로 따지면 안 돼. 밑에서 피어 오르는 용암의 열기는 채 이십 장도
날기 전에 사람들의 기운을 빼버리고 말거야."
   그는 용암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용암의 열기로부터 벗어 나자면 수면으로부터 대략 십 장 정도 위를 날아
가야만 돼. 그러자면 진기 소모량이 거의 두 배는 되지. 삼십 장이 아니라 육십
장을 난다고 생각해야 될 것이다."
  육십 장, 엄청난 거리였다. 이 장 정도를 뛸 수 있으면 웬만한 기와지붕을 그
대로 날아 넘을 수 있다. 육십 장이라면 보통 집을 삼십 개 쌓아 놓은 것을 날
아 넘겨야 한다는 얘기이니 설사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라 해도 이런 거리는 함
부로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 채하가 돌연 불쑥 앞으로 나섰다.
  "제가 먼저 시험해 보겠어요."
  사우는 검미를 찌푸렸다.
  "육십 장은 위험한 거리이다. 채하."
  "당신은 도대체 날 어린 아이로 알고 있나요?"
  색양이 히죽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옳은 말이지. 혈부용 채하라면 무림에선 울던 아이도 놀라 울음을 그치고 마
니까. 미행, 잠행에다 천하제일의 경신술자(輕身術者)인 채낭자야 말로 이 일의
가장 적임자가 틀림없소."
  사우는 힐끗 색양을 바로 보았으나 이내 아무 말도 없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
다. 색양의 말은 옳았다. 경공에 관한한 아무도 채하를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채하는 날씬한 교구를 움직여 용암과 땅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부분까지 가
섰다. 그녀는 한 차례 숨을 길게 들이 쉬더니 일순, 맹렬히 땅을 박찼다.
  슈욱--! 마치 빨랫줄이 뻗어가는 것
 같았다. 사우가 다급히 외쳤다.
  "고도를 십 장으로 유지하라!"
  채하는 알았다는 듯 한 바퀴 빙글 맴돌고는 이내 십 장 높이로 떠서 쭈욱 날
아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땀을 쥐고 그녀의 날아가는 모습을 응시했다. 단숨
에 이십여 장 밖까지 날아간 그녀. 이때 문득, 채하의 잘 날아가던 몸이 그 자
리에 주춤했다. 뻗어낸 뒷다리가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진기가 딸리는 품이 역
력했다.  순간, 사우의 몸이 쏘아낸 살처럼 땅을 박찼다.
  슈팟--! 빛인가? 한 줄기 환상처럼 솟구쳐 가는 가공할 신형.
  색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째서 사람들은 숙객이 사실은  혈부용보다 더 놀라운 신법을 가졌다는 것
을 알지 못할까? 저건 마치 번갯불이 날아 가는 것 같구나....."
  사우는 단숨에 채하의 뒤에 이르렀다. 그는 즉시 쌍장을 쭉 뻗어 한 줄기 부
드러운 경기를 뿜어 냈다. 순간, 휘청대던 채하의 몸은 그 반동으로 날 듯 뻗어
나가 건너편 땅에 사뿐 착지했다. 그러나, 장력을 뿜어낸 사우는 오히려 곤란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경공이란 한 줄기 숨에 의지하여 나는 것이다. 만약, 날아가는 도
중에 다른 힘을 쓰게 된다면 몸 속의 진기운용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사우의 몸은 그대로 밑으로 맥없이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은 크게 눈을 부릅
떴다.
   "저, 저것?"
  허나 이때, 사우는 떨어지는 중에도 침착하게 밑을 향해 쌍장을 맹렬히 후려
팼다.
  파팍--! 용암의 불기둥이 풀석 속구쳐 올랐다. 사우 또한 쳐낸 장력의 반동을
빌어 위로 둥실 떠올랐다. 불기둥이 회오리처럼 몸을 덮어 씌우기 직전 그의 몸
은 대붕처럼 선회하여 건너편 땅에 사뿐 내려 섰다.
  "최고다!"
  마음을 죄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터뜨렸다. 채하가 눈물을 흐리며
사우의 몸으로 뛰어 들었다.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해요?"
  사우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슬쩍 밀어낸 다음 남화룡을 향해 외쳤다.
  "한 사람씩 건너 오시오. 내가 발판을 던져 줄 테니 중간에 그것을 밟고 오시
오."
  즉시, 남화룡의 몸이 땅을 박찼다. 사우는 근처의 돌을 하나 주워 들고는 눈
을 빛내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남화룡의 진기가 다한다 싶은 순간 그의 발을
겨냥 하고 돌을 힘껏 던져 냈다. 남화룡은 날아드는 돌을 발등으로 팍 찍으며
재차 도약하여 사뿐 이쪽으로 날아 내려왔다.
  "흐흠..... 힘들군. 열기가 굉장한데?"
  그 다음 순서는 철마린, 인상인 중산, 석도해가 차례대로 날아 건넜다. 마지막
차례는 색양. 그러나 색양은 발 아래의 용암을 힐끗 바라보고는 울상으로 외쳤
다.
  "여러분, 나 색양이 가장 약한 것이 경공이란 것을 잘 아시지 않소. 내 십장
만 난다 해도 기적이오."
  채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늘 말썽이라니까?"
  이때,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하던 사우가 앞으로 나섰다.
  "허공섭물(虛空攝物)을 발휘해 볼 수밖에 없군."
  그는 사람들을 용암가에 일렬로 세웠다.
  "색양이 진기가 떨어지는 기색이거든 즉시 허공섭물의 신공을 전력으로 발휘
하시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색양을 향해 외쳤다.
  "무슨 말인지 알았거든 빨리 몸을 날리시오."
  색양은 고개를 저었다.
  "헤헤..... 좀 더 안전한 방법은 없을까?"
  "당신이 만약 이 말이 끝날 때까지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린 그냥 떠날 수
밖에 없소."
  "알았네, 알겠어!"
  색양은 할 수 없다는 듯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사우는 주의 깊게 그의
나는 동작을 지켜 보다가 색양이 어느 한 지점에서 주춤하자 즉시 돌을 던졌냈
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돌을 발판으로 사뿐 뛰어 올랐는데 이 한심
한 뚱보는 오히려 날아온 돌에 얼굴을 정통으로 두들겨 맞았던 것이다.
  "악--!"
  그는 돌을 쳐다보지 않고 밑만 쳐다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청이 같은 놈!"
   석도해가 처음으로 중얼거리며 활시위를 맹렬히 당겼다.
  패앵--! 그의 회회전은 정확하게 색양의 떨어지는 뒷목덜미 옷을 꿰뚫었다.
이어, 맹렬히 회전하여 위로 떠올랐다.
  "허공섭물 시전!"
  사우의 쩌렁한 외침에 즉시 고수들은 허공섭물의 공력을 전력으로 펼쳐냈다. 
허공섭물이란 멀리 떨어진 물체를 손 안으로 끌어 들이는 공력을 말한다. 우웅
-- 회오리치는 듯한 굉음에 이어 색양의 몸이 주춤하더니 다음 순간, 무엇에
끌리기라도 하듯 이쪽 기슭으로 날아 들어왔다.
  쿠다탕--! 그는 땅에 쓰러지고 나서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듯 한동한
멍하니 용암을 바라봤다.  석도해가 그런 그의 등을 활로 쿡 찔렀다.
  "그 솜씨로 험한 강호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는 것이 신통하군. 내가 너였
다면 밥을 한 끼 더 먹을 시간에 신법을 한번 더 연구했겠다."
  *          *          *
  사람들의 앞을 두 번째로 가로막은 관문은 괴이한 모양의 넓은 광장이었다.
광장의 끝에는 거대한 구리문이 있었는데 그 문까지 이르는 길에는 마치 바둑
판처럼 생긴 검은 선이 종횡무진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거야 말로 귀신들의 집합처로군. 이건 또 무슨 짓일까?'
  사람들의 시선이 색양을 향했다. 색양은 본시 전문적인 대도(大盜)였다. 자연,
그는 숱한 기관진식, 매복장치 등에 정통해 있었다.
  색양은 용암의 관문에서 창피를 당해 볼이 두꺼비처럼 부어 있다가 이내 껄
걸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석도해의 곁을 스쳐갈 때 히죽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이었다면 한가할 때 활을 만지는 대신 기관장치를 한번 더 연구해
보았겠소."
  색양은 이리저리 히죽거리며 건들거리는 듯 보였으나 막상 기관장치 앞에 이
르자 표정이 이를 데 없이 신중했다.
  선(線).
  "하나..... 둘..... 셋....."
  이리 세어보고 저리 세어봐도 좌우로 열아홉씩 삼백육십일 칸의 바둑판 모양
그대로였다. 색양은 시선을 바꾸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거대한 선만 종횡무진
으로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 위에는 둥근 원이 백색으로 그어져 있
었다. 그 원의 수를 헤어 보니 이번에는 또 서른 두 칸을 채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광장의 한쪽, 모퉁이 아래에 흩어진 검은 재를 발견했다. 조
심스럽게 재를 쓸어 모아 검토해 보고난 그는 굳은 얼굴로 사우를 바라보았다.
  "알아냈네."
  "흐흠..... 이 선과 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기예(碁藝)야."
  "기예? 바둑이란 말이오?"
  "자세히 보라."
   색양은 원의 형세를 가리켜 말을 이었다.
  "이 선은 바둑판을 대형으로 확대해 놓은 것이고 저 원은 이미 펼쳐진 수를
말하는 것이네. 나는 수에 약하여 이것을 모두 알지는 못하겠지만 거의 삼십 수
앞을 읽어 내야만 풀리는 고도의 바둑 수순이지."
  그는 손에 든 재를 흩날려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재는 수를 풀지 못하고 중간에서 죽은 사람의 재지. 내가 보기엔 산폭분
(散暴粉)류의 독인 것 같은데....."
  그는 말 끝을 흐리더니 머리에 꽂은 비녀를 풀어 광장의 가운데로 휙 던져냈
다. 순간, 비녀는 바닥에 닿자마자 팍하고 한 줌의 녹색 연기로 변하여 사라지
고 말았다.
  "올바른 수순에 의해 정해진 칸만을 밟아 나가야 하는 거네. 만약, 단 한 개
의 수순이라도 틀리게 된다면 그 즉시 한 줌 연기로 변하는 거지. 혹시 자넨 기
예를 좀 아나? 대단한 실력이 아니면 안 되는데?"
  사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그저 보이느니 검고 흰 것은 바둑 알이요, 어지러이 얽힌 그 배합을 보노
라면 머리가 아찔해지니까."
  채하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남화룡과 석도해도 서로를 힐끗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간신히 한두 수는 읽지만....."
  철마린까지 고개를 흔들자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인상인 중산을 향했다.
  "당신은?"
  5. 제5장 배교의 악사도인
           (拜敎의 惡邪道人)
  인상인 중산은 동굴처럼 패인 동공을 껌벅이며 앞으로 나섰다.
  "빈승은 과거 스승님에게 약간의 기예를 배워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는 색양을 향해 말을 이었다.
  "색시주께서 그려진 원의 형태를 설명해 주시오."
  색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원의 형태를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정좌
하고 앉은 채 향 한 자루 탈 시간 동안 귀를 기울이던 인상인 중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속임수로군. 됐소. 색시주!"
  그는 사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것은 조원번랑(朝源飜浪)이란 이름의 대형속임수야. 굉장히 복잡하지."
  "풀 수 있겠나?"
  "원의 형태는 모두 외웠으니 시험해 보는 수밖에 없지. 자네가 앞장서서 지형
을 설명해 주도록 하게."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런 행진이 시작됐다. 사우는 맨 앞에서 자신의
앞에 놓인 선과 원의 모양을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면 인상인 중산이 어느 칸
으로 가라고 다시 일러주는 식이었다.
  "세 개의 원이 나란히 서 있군. 좌측 두 번째 칸에도 원이 그려져 있네."
  "좋아. 우로 세 칸 앞으로 가서 좌로 다시 두 칸을 가게."
  단 한 번의 실수는 곧 죽음이었다. 이 죽음의 선 위에선 다른 곳으로 피할 수
도 없었다. 잘못 되었음을 느끼는 순간 그는 한 줌의 연기로 변할 테니까.....
  남화룡이 두 사람의 뒤를 바짝 따르며 바로 뒤의 철마린에게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아까 배교의 악사도인(惡邪道人)이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렇소."
  "이것도 그가 만든 기관이라면 어째서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을까?"
  철마린은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소."
  "그건 왜 그런가?"
  "그는 일종의 술법자이오. 이십 년 전 배교가 무림의 연합군에 의해 패망할
때도 그는 장강(長江) 위에서 근 이백 명의 무림고수들을 수장시켰소. 하지만
그때 그가 쓴 무기는 한 동이의 물과 몇 개의 종이배에 불과했지요."
  "단지 한 동이의 물과 몇 개의 종이배로 이백의 무림고수를 수장시켰단 말인
가?"
  "그렇소. 사도십병의 다섯 번째 무기로 일컬어지는 그것은 배교의 전래되어
오는 냉환신경(冷幻神經)이란 주술(呪術)인데 양동이 안의 물에다 종이배를 띄
워 놓고 주술을 거는 것이오. 연후 그가 배를 침몰시키고 싶을 땐 양동이를 흔
들어 물결만 일으키면 되지요. 종이배가 물에 젖는 순간 강 위에 떠 있던 진짜
배들까지 가라앉게 되는 것이오."
  "믿기 어려운 얘기로군."
  "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는 얘기이기도 하오. 당년에 배교는 바로 그 냉환신
경의 무서운 주문으로 강호에 피바람을 일으켰던 것이오. 그들이 원한을 품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닮은 지푸라기 인형을 만들어 그 인형에다 침을 꽂으
면 사람은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죽게 된다 했소. 이 저주스런 주문에
빠져 죽은 사람은 당시 거의 일천에 달할 지경이었소."
  "그럼 그 냉환신경이란 것을 깨뜨릴 방법은 없단 말인가?"
  "아주 없진 않소. 첫째, 같은 술법자일 경우에는 주문이 통하지 않소. 둘째,
술법자 보다 공력이 높은 고수라도 주문이 통하지 않지요. 세 번째는 술법자와
십 장 이내의 거리에 같이 있게 된다 해도 주문은 역시 통하지 않게 되오."
  사람들은 내심 철마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배교의 술
법에 대해 섬뜩함을 느끼는 한편 그 술법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깊이 가슴
속에 새겨 두었다.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아슬아슬한 순간은 거의 한 시진
가량이나 계속 됐다. 이윽고, 사람들은 무사히 기예진식의 함정을 벗어났다.
  광장의 끝에 놓인 것은 하나의 거대한 구리문이었다. 그 문 위에는 검은 바탕
에 핏빛 글씨로 쓰인 편액이 걸려 있었다.
  <냉환선거(冷幻仙居)>
  사우는 편액을 힐끗 올려다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기관이 시작될 것이오."
  철마린이 웃으며 등 뒤에서 그의 독문무기인 혈수창을 뽑아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본격적으로 시작해 봐야지."
  석도해는 활에 시위를 재였고 색양은 비수를 꺼내 양손에 들었으며, 인상인
중산은 방편산을, 채하는 채대 그리고 남화룡은 서슬이 시퍼런 보도를 뽑아들었
다. 사우는 빙그레 웃으며 순간 쌍장을 맹렬히 앞으로 떨쳐냈다.
  "좋아! 멋지게 싸워보자구!"
  슈욱--! 꽝--!
  거대한 구리문이 산산조각으로 부숴져 나갔다. 칠 인은 그 안으로 쏘아낸 살
처럼 쏘아져 들어갔다.
   *          *         *
  제단(祭壇)일까? 일 장 높이의
청옥단상이었다. 단상의 위에는 개, 돼지, 원숭이, 말, 양 등 다섯 가지 짐승의
머리를 얹은 금쟁반이 놓인 제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붉은 지전(紙
錢)이 수북이 쌓인 다반이 있었다.  다시, 이러한 제상의 양 옆에는 배교일세(拜
敎一世) 주술천하(呪術天下)의 여덟 자 문구가 쓰인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제상의 앞에는 일신에 푸른 도복을 걸친 도사 차림의 사람 하나가 있었다. 파
릇한 청광이 감도는 음산한 얼굴, 수염도 없는 얼굴인데 눈귀퉁이며 안면엔 종
횡으로 그려진 주름살이 수북했고 그런 것들로 하여 유난히 냉혹한 인상을 풍
기는 노인이었다.
  그의 앞에는 지금 일곱 개의 지푸라기로 만든 인형이 놓여 있었다. 헌데 이
인형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그 모습들이 사우를 위시한 낭인시장의 칠 인 고수
를 꼭 빼닮았음을 알 수 있으리라. 이들 지푸라기 인형의 앞에는 다시 장방형의
석실 모양을 한 종이방(房)이 있었다.
  이때, 노인은 전혀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일곱 개의 지푸라기 인형들
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일제히 석실 모양의 종이방으로 들어갔다. 순간 노인의
얼굴에 음산한 웃음이 번졌다.
  "큽큽..... 스스로 무덤을 파서 들어가는구나..... 그래, 들어가라. 무지한 인간들
이여....."
  그는 앙상한 손을 움직여 앞에 놓인 지편, 종이조각에 무엇인가를 급히 휘갈
겨 썼다.
  <탁자(卓子).>
  <암기(暗器).>
  노인은 각기 탁자, 암기라 쓰인 지편을 종이방 위에다 던져 넣었다. 이어, 입
으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한 줄기 불씨를 종이방 안에다 퉁겨 넣으니.....
즉시 인형이며 종이방, 지편 등은 모조리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위대한 배교의 주술을 깨닫게 하라..... 단상에 제물을 던지노라....."
  *           *          *
  탁자, 사방 오십여 장의 아무 것도 없는 너른 장방형의 공간에 놓인 것은 엉
뚱하게도 약 백여 개에 달하는 탁자였다. 검은 옻칠을 한 이 탁자는 겉모양은
몹시 평범했다. 보통 주루에서 쓰는 그런 탁자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칠 인
은 무섭도록 흉험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가 맥이 쭉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거야 원, 싱거워서..... 뭐야? 탁자에 앉아서 잠이나 자라는 얘기인가?"
  색양은 무심히 중얼거리며 탁자를 슬쩍 만졌다. 순간,
    쨍--!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그는 비명을 지르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으윽--!"
  사람들은 황급히 시선을 돌리다가 두 눈 가득 놀람에 찬 빛을 떠올렸다.
  보라! 백여 개의 탁자들, 느닷없이 탁자의 네 모서리에선 섬뜩한 칼날이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톱니바퀴처럼 촘촘히 박힌 이 칼날들은 끝에 새파란
독을 묻히고 있었다.
  "찔렸나?"
  남화룡의 외침에 색양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기랄! 재수가 없군."
  "빨리 혈도를 막아라. 색깔로 보아 지독한 독이다!"
  이때 돌연,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로 한 개의 거대한 강철문이 꽝 하고 내려
닫혔다. 철마린이 황급히 몸을 날려 창으로 문을 찔렀다.
  그러나, 차앙--! 강력한 반동으로 오히려 그의 몸이 퉁겨 나왔다. 철마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한철로 만든 내 창이 뚫을 수 없는 철이라..... 제기랄! 이것은 무저음산(無底
陰山)에서만 난다는 만년곤철(萬年崑鐵)이로군."
  만년곤철, 이 말에 사람들은 놀람의 빛을 떠올렸다. 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가
장 질기다는 두 가지 성분을 더불어 소유한 신비한 물질, 이 만년곤철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자르거나 부술 수 없었다. 그것이 문이라면 잠근 사람이 열어줄
때까지는 무슨 수가 있어도 열 수가 없는 것이다.
   남화룡이 급히 벽을 만져보더니 놀람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이 벽도 만년곤철이군!"
  사우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하게도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만년곤철이오. 저 탁자도 나무로 만든
것이 아니라 만년곤철로 만든 것이며 탁자 밖으로 빠져 나온 칼날들도 만년곤
철의 칼이오. 그 밖에도 무엇이 있든 그 모든 것들이 다 만년곤철일 것이오. 우
린 지금부터 아무 것도 부술 수 없고 아무 것도 막을 수 없게 되었소."
  만년곤철의 칼날, 이것은 무엇이든 부숴뜨린다. 검으로 막으면 그 검을, 창이
라면 창을 설사 무쇠덩어리라 해도 이 신비로운 물질은 종잇장처럼 부숴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중인들은 입을 떡 벌리고는 백여 개의 탁자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백 개의 탁자에 칼날이 백 개씩만 달려있다 해도 그것은 만 개의 칼날이다.
그 만 개의 칼날이 어떻게 찔러오든 막을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거기다가
또 그 칼날엔 맹독까지 묻어 있는 것이었다. 이때, 색양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마치 파란 물감을 얼굴에 한 겹 바른 것 같았다.
  웅웅웅-- 콰아아아아--
  돌연, 방 안의 탁자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우가 다급히 채하에게
말했다.
  "색양의 옆으로 다가가서 그를 보호하라. 무조건 몸을 날려 피하기만 하도
록..... 막으려 하거나 무기를 들이대면 안 된다."
  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섭게 훌쩍 색양의 앞으로 나아갔다. 색양은 이미
의식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큰일났군. 유일하게 기관을 하는 사람이 이 모양이니 어떻게 한담? 하여간
함부로 행동하는 것 때문에 아무 일도 안 된다니까....."
  채하는 색양을 부축함과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 탁자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탁자들은 이때 기이한 방위로 중인들을 압축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혼이
붙어있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최초의 탁자 하나가 가장 앞에 선 사우를 향해 나는 듯 쏘아왔다. 사우는 시
험삼아 비수를 한 자루 꺼내어 탁자의 칼날을 막아보았다.
   쨍--!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비수는 즉시 두 동강으로 부러져 나갔다. 탁자
의 속도는 믿을 수 없이 빨랐으므로 엉겁결에 사우는 하마터면 그 칼날에 몸을
찢길 뻔했다.
  칼날 하나가 그의 옷자락을 섬뜩하게 자르고 지나갔다. 하나가 지나갔다 싶자
또 다른 하나가 무섭게 닥쳐들었다. 사우는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그러자 보라!
탁자 중 하나가 마치 눈이 달리기라도 한 듯 그를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빌어먹을! 이 놈들은 꼭 살아 있는 것 같군!"
  사우는 허공에서 몸을 두 바퀴나 맴돌았다.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날리자 탁
자들도 덩달아 날기 시작했다.
  우웅-- 위잉--
   빙글빙글 회전하며 새파란 광채를 사방으로 흩뿌리는 요물 덩어리들!
  공중은 순식간에 사람의 그림자와 그 사람을 쫓는 탁자의 그림자로 가득 차
고 말았다. 사우는 몸을 피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을 계속해서 예의 주시했다.
  채하, 색양을 안고 있지만 워낙 경신공부가 뛰어난 그녀이니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남화룡과 석도해는 워낙 노련하니 알아서 당분간은 피해
줄 것이다. 철마린과 인상인 중산도 어느 정도 버틸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버틴단 말인가?'
  탁자는 내력이 없다. 인간이 지칠 때까지 저것들은 얼마든지 날아다닐 수 있
을 것이다.
   바로 그때다. 철컹--! 철커덩--!
  한 소리 기음에 이어 사방의 벽이 벌컥벌컥 열리더니, 다음 순간, 그 구멍으
로부터 수없이 많은 암기들이 벌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슈와아아-- 파파팟--!
  사우는 검미를 찌푸렸다. 비표(飛飄)에 비황석(飛蝗石), 수노(袖弩)에다 비조
(飛??), 뿐인가? 비자(飛刺), 매화수전(梅花袖箭), 철련화(鐵蓮花), 혈적자(血滴子)
에다 성주(星鑄)까지 그야말로 온갖 암기가 다 보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암기들이 탁자와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인다
는 것이었다. 오십 장의 좁은 공간에 백 개의 탁자와 일곱의 사람이 날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발디딜 틈도 없는 이 공간에, 인간이 어디로 날아다니든지
환히 알고 있는 괴상한 대암기군까지 가세 하다니.....
  '주술..... 이것은 평범한 기관이나 암기공세가 아니라 주술에 의한 공격이다.....
그래서 이 탁자와 암기들은 살아 있는 것이다. 도대체 방법이 없구나.....'
  이때 돌연,
  "악--!"
  한 소리 짤막한 비명이 주위의 소음에 뒤섞여 귓전을 파고 들어왔다.
  사우의 시선 속으로..... 화살에 찔린 기러기처럼 날아 떨어지고 있는 채하가
빠르게 쏘아져 들어왔다.
  "채하!"
  순간, 사우의 몸이 비조처럼 그쪽을 향해 날아갔다. 탁자 서너 개가 맹렬히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사우는 상관하지 않고, 떨어지는 채하를 아슬아슬
하게 낚아챘다.
  채하는 그의 품에 안기자 힘없이 두 눈을 떴다.
  "미안해요..... 자꾸 폐만 끼치는군요."
  "다친 데는?"
  "한 자루의 매화수전에 찔렸어요. 괜찮아질 거예요....."
  이때 세 개의 탁자와 일곱 개의 암기가 그들을 노리고 날아왔으므로 사우는
황급히 몸을 띄워 무시무시한 예공을 피해냈다.
  "아픔을 참을 수 있겠나?"
  채하는 그 와중에도 고운 이를 드러내 웃으며 그를 빤히 쳐다 보았다.
  "조금 전에 대단했는데 지금은 별로  아프지 않아요."
  "혹시 상처가 마비되지는 않나?"
  "걱정마세요. 내가 맞은 것은 독약암기가 아니니까요. 처음 맞았을 땐 확실히
매우 아팠는데 당신의 품에 안기고 나서부터는 통증이 많이 가셨어요. 아마 당
신이 나를 좀 더 힘껏 껴안아 준다면 통증은 완전히 없어질 것 같아요,"
  "좋아!"
  사우는 그녀의 가냘픈 몸을 꽉 껴안았다. 채하는 까르르 웃었다. 그러다 말고
돌연, 그녀는 낯빛을 가볍게 굳혔다.
  "그런데..... 색양은? 난 아까 그가 한 자루의 암기를 맞는 바람에 그만 정신이
엇갈려서 더불어 암기를 맞았던 거예요. 그는 어디로 갔을까?"
  사우는 탁자와 암기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날며 시선을 구석구석까지 던졌
다. 문득, 그의 시선 속으로 저쪽 구석에 휴지조각처럼 처박혀 있는 색양의 모
습이 쏘아져 들어왔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는 지금 전혀 무방비 상태인데도 암기와 탁자들은 그에게
로 단 한 번도 날아가지 않고 있었다.  사우의 검미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저것은?'
  그는 홀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급히 한쪽의 철마린에게 외쳤다.
  "이봐, 마린, 아까 너는 주술을 피하는 방법이 어떤 것들이 있다고 했지?"
  철마린은 한 개의 탁자를 몸을 둥글려 피하며 낭랑하게 외쳤다.
  "같은 주술사이거나 공력이 주술사 보다 높은 사람일 것, 마지막으로 세째는
주술사와 십 장 거리 안에 있는 사람의 경우다!"
  사우는 다시 색양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지금 분명히 주술의 범위밖에   있다..... 그럼 그의 경우는 어떤 것인
가? 같은 주술사일리는 없고..... 공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아니다. 악사도인으로
말하자면 우리들보다 한 배분 위의 사람이니까. 우리 중에는 아무도 그의 공력
을 따를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우의 서늘한 동공에 한 줄기 예광이 번뜩 스쳐지났다.
  '지금 악사도인이 색양의 십 장 범위 안에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저 벽 뒤에.....?'
  사우는 번쩍 몸을 날렸다. 그가 색양의 근처에 이르자 과연 탁자와 암기들은
그를 더 이상 공격해 오지 않았다.
  "이 벽 뒤가 틀림없군....."
  그는 웃으며 채하를 돌아보았다.
  "너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아라."
  "사대가는요?"
  "난 할 일이 좀 있어!"
  말과 함께 그는 그 자리에 천천히 정좌하고 앉았다. 지그시 눈을 내려감는다
싶더니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채하는 눈을 반짝이며 그의 뒷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공력을 모아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이곳으로 모여요!"
  6. 제6장 주술과 신공(呪術과 神功)
  제단 앞의 노인, 악사도인은 홀연 흰 백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종이방 안의
인형들은 본래 이리저리 우왕좌왕 날뛰고 있었다. 헌데, 느닷없이 한 곳으로
몰리더니 조용해진 것이다. 그의 노안으로 한 줄기 사악한 웃음이 스쳐갔다.
  "봄날 나비가 비를 피해 본들 어디로 가겠는가..... 결국은 비바람에 찢겨 날개
를 흙에 묻기 마련인 것을..... 어리석은 것들....."
  그는 일곱 개의 인형 중 검은 무복을 입은 인형을 골라냈다. 이어, 앞에 놓인
금합에서 길이 두 치 가량의 금침을 뽑아 내더니 그 침을 무복인형의 복부에
쿡 찔러 넣었다.
  "윽--!"
  철마린은 홀연, 배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 주춤 쭈그리고 앉았다.
  "으으으윽--!"
  채하가 물었다.
  "왜 그러죠?"
  "주..... 술이다..... 침으로 내 인형을 찌르고 있을 거야....."
  순간, 이번에는 또 남화룡이 허벅지를 잡고 풀 쓰러졌다.
  "윽--!"
  "남노사!"
  남화룡은 안면 근육을 부르르 떨며 부축해 오는 채하의 손을 뿌리쳤다.
  "굉장하군..... 날이 선 도끼가 허벅지를 마구 후려팬 것 같아....."
  채하 등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탁자와 암기들이 날아 다
니는 파공음이 날카롭게 귓전을 찢어올 뿐 어디에도 인적이라곤 없었다.
  석도해가 중얼거렸다.
  "이걸 믿어야 한단 말인가.....? 한낱 인형을 찌르는데 정작 사람이 고통을 느
끼다니....."
  이때, 이번에는 또 사우의 등을 돌리고 앉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지 않
아도 그의 반응을 예민하게 살피고 있던 채하는 급히 그를 부축하려 했다. 순
간, 석도해가 그녀의 팔을 잽싸게 잡아 챘다.
  "안 돼!"
  채하의 시선이 성난 빛으로 그를 쏘아갔다. 그 눈빛은 왜 안되는가 하고 묻고
있었다. 석도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지금 어떤 공력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이럴 때 누군가 건드린다면 그
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고 만다."
  "공력이라고?"
  채하가 바라보니 과연 지금 사우의 옷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이것은 일
신의 내력이 극한까지 끌어 올려져 있는 상태란 표시였다. 순간, 채하의 붉은
입술 사이로 망연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공력일까.....?"
  악사도인은 일곱 개의 인형에 한 차례씩 침을 꽂고 난 후 음산하게 웃으며
이번에는 발 아래의 작두를 집어 들었다.  작두는 날이 새파랗게 서 있었다. 악
사도인은 그 작두 안에 지전 하나를 놓고 입으로 훅 불었다.
  순간, 힘을 가한 것도 아닌데 지전은 성큼 반으로 쪼개져 허공을 날았다. 악
사도인은 입가에 비릿한 살인의 웃음을 피워 올리며 일곱 개의 인형을 바라보
았다.
  '어떤 놈을 최초의 희생물로 고를까.....'
  그의 시선이 붉은 우단으로 옷을 해입은 색양의 인형으로 힐끗 향했다. 붉은
색이란 살인과 광란의 색이다. 거기다가 또, 색양은 유난히 면적이 넓어 일곱
사람 중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다.
  "흐흐--"
  악사도인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색양의 인형을 머리 높이 올렸다.
  "뇌정(雷霆)과 신주(神州)와 성력(星力)의 모든 신(神)이여..... 이제 천 년 배교
의 한을 풀 업죄의 뜻으로 일곱 제물의 하나를 바치나이다....."
  그는 색양의 인형을 천천히 작두 끝으로 가져갔다. 이어, 인형의 목을 작두
끝에 갖다 댔다.  잠시 제단 위의 배교일세 주술천하의 여덟 문구로 그의 시선
이 향했다 싶은 순간, 그는 작두의 끝을 발로 꾹 밟아 냈다.
  "억--! 이걸 좀 봐!"
  석도해의 놀란 외침에 사람들은 일제히 그가 바라보고 있는 색양을 향해 시
선을 던졌다. 순간, 사람들은 일제히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저런?"
  색양은 이때쯤 거의 의식을 잃고 있던 참이었다. 헌데, 느닷없이 그의 목어림
에서 한 줄기 짙은 혈선(血線)이 가늘게 그어진다 싶더니 그 목을 힘없이 아래
로 떨구는 것이 아닌가.
  남화룡이 급히 색양의 맥을 짚었다. 허나 그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죽었어....."
  철마린이 짙은 검미를 찌푸리며 물었다.
  "완전히 맥이 멈추었단 말이오? 사인이 무엇이오?"
  남화룡은 주의 깊게 색양의 몸을 살피고 나더니 한 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
  "도무지 모르겠는 걸? 탁자의 독은 비록 강하긴 했지만 색양 정도의 고수를
이렇게 쉽게 죽여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더구나 이 목의 혈선
은 왜 생긴 것인지 알 수 없군....."
  문득, 중인들의 뇌리로 배교의 무서운 법술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을 뿐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것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한다는 것은 불길한 일이었다. 아무리 배교의 법술이 무섭다 해도 보이지 않
는 곳에서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다는 건 절대로 믿고 싶지 않았다.
  "흐흐--"
  악사도인이 두 번째의 재물로 선택한 것은 채하의 인형이었다.
  "너희들은 머리가 부숴져라 생각해 봐도 법술의 무서움을 알수 없을 것이
다..... 나는 이 법술을 위하여 너희들을 오랫 동안 관찰해 왔단 말이다....."
  법술, 이 무서운 주문의 비결은 곧 상대를 아는 데 있다. 아무리 법술의 공력
이 최고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 해도 생판 낯모르는 사람을 인형 하나로 죽일
순 없었다.
  상대의 습관, 행동, 어조, 사상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그것을 토대로하여 지푸
라기 한올 한올에다 그런 것들을 불어 넣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작업이란 것은, 겨자꽃을 따다가 즙을 낸 후 그 즙에 일곱 마리 독사의
독과 두꺼비 기름을 섞어 버무린 후, 상대의 초상화를 눈앞에 놓고 그 모습, 그
행동, 그 습관을 하나씩 떠올리며 인형을 짜서 즙에 담군 후 햇빛이 들지 않는
습지에서 칠주야를 묵히는 것이었다.  묵히는 동안 밖에선 그 인형을 위한 진혼
제(鎭魂祭)를 올렸다. 다섯 마리 짐승의 피를 담은 금그릇과 백 여덟 장의 지전
을 태우는 것이 진혼제의 절차였다.
  그렇게 해서 즙에 담근 인형을 칠일 후에 건지게 되면 그 인형은 말할 것도
없고 인형의 실물까지 법술자의 손아귀에 완전히 장악되는 것이니.....
  "옥주께선 이 일을 위해 일천의 병력을 너희들의 주위에다 풀었지..... 그들은
너희들의 모든 것을 수집하여 내게 갖다준 것이다...."
  놀라운 일, 마중뇌옥에서 옥주라 불리울 수 있는 인물은 한당 뿐이었다. 그렇
다면, 한당은 이 칠 인이 자신의 뇌옥을 습격해 오리란 걸 미리 짐작하고 있었
단 말인가? 아니면 그 안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어쨌든 채하의 인형은 이
때 느릿하게 작두의 끝에 올려지고 있었다.   악사도인은 작두를 밟기 위해 천
천히 발을 들어올렸다.
  *          *          *
  바위, 수백 아니 수천 장의 아득한 단애를 천신만고 끝에 딛고 선 사우의 눈
에 비친 것은 하나의 투명하고도 영롱한 바위였다. 그것은 너무 밝고 현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므로 미처 바위라곤 생각도 못할 지경이었다.   사우는 그 저주스
런 하루의 끝에 발견한 바위를 증오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하나의 바위를 위해 그와 그의 친구는 이틀 주야를 절벽에 매달려 사투를
벌였던 것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친구는 만장절벽 밑으로 사라지고 그 혼자만
이 지친 몸으로 여기 이렇게 서있는 것이란 말인가.
  삼 년 전의 그 날.....
  사우는 바위를 오랫 동안 바라보지 않았다. 그냥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느닷없이 햇살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는 듯한 현란한 순간이 있었
다. 그것은 마치 황금의 그릇 속에 담근 빛을 누군가가 하늘에서 거꾸로 쏟아
붓는 것 같았다.  그때 바위 위에는 한 줄의 선명한 글귀가 새겨졌던 것이다.
  <달마신공(達摩神功)>
  <개자일순어천년(開字一巡於千年), 천년에 한 번 열리는 글.>
     
  이어, 일천 년에 한 번씩 열린다는 그 문구는 붉은 자흔(字痕)으로 바위 위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사우는 일순 홀린 듯 바위 위에 나타나는 글귀를 보았다.
글자는 아랫 문구가 나타나면 그 위의 문구는 안개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문구
의 내용은 그가 일찌기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신경지의 첨단 무예였으
니.....
  그러나, 비록 사우는 얼떨결에 그 바위 위의 문구를 모두 보긴 하였으되 그
날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안의 무예를 써 본 적은 없었다. 그는 달마신
공을 다시 생각해 본다는 것은 친구 단목장룡의 죽음을 배신하는 행위라 여겼
었다.   바위 위의 글씨는 이내 사라졌고, 그 안에 친구의 죽음과 자신들이 보
물을 찾아 왔던 모든 행위들이 한꺼번에 묻어 없어지는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헌데, 지하 수백 장, 눈앞으론 저주의 법문이 걸린 탁자와 암기가 난무하고
절대절명의 생사지경에서 갑자기 그 바위 위의 경문이 떠오른 것은 무슨 일일
까?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사우는 무아지경에 빠진 듯 득도한 고승처럼 평온한
얼굴이 되었다.
  햇살처럼 밝은 정기가 은연중 그의 전신에 흐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은 내
공의 조화가 삼화취정(三化聚頂) 오기조원(五氣朝元)의 경지에 올라 몰아지경에
이르면 저절로 현기가 우러나오는 비사현도의 예지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현
상.
  달마신공의 구결은 난해했다. 그것은 금방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기
이한 오리(奧理)였다.
  '이것은 불문의 도리이지만 도가의 일원(一元)을 더불어 담고 있다..... 즉 일
원에서 파생한 태극(太極)의 힘이 양의삼재사상(兩儀三才四相)을 거치지 아니하
고 곧장 오행(五行)으로 파생하는 고차원의 현기조화이다.....
  헌데 음(陰)과 양(陽)의 일원양기가 어째서 느닷없이 오행으로 파생할 수 있
단 말인가?'
  우주(宇宙)는 일원이다. 즉, 아무것도 없었던 무(無)의 실체를 일원이라 규정
한다. 일원에서 우주의 기본정론(基本正論)인 음과 양의 파생을 양의 또는 태극
이라 한다. 이 양의는 다시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로 예지자들은 규정하고
있다.
  삼재는 더욱 발전해 우주의 모든 정신과 물질의 변화를 보이는 생(生), 주
(柱), 이(離), 멸(滅)의 사상(四相)으로 분류되고, 그것이 계속하여 오행(五行), 육
합(六合), 칠교(七巧), 팔괘(八卦), 구궁(九宮)으로 정론되는 것인데.....   이 과정
은 우주가 오늘에 이른 과정을 설명한 체계적인 것이기에 모든 것이 순서에 입
각하는 순리를 따르기 마련이다.   문득, 사우의 두 눈에 한 줄기 광채가 번뜩
피어 올랐다. 그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거문고 현(弦)처럼 단아한 입술새
로 담담한 웃음이 서렸다.
  "용서하게..... 친구여. 그때 널 잃은 것처럼 또 다시 여섯의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을....."
  돌연, 남화룡, 철마린, 석도해, 인상인 중산, 채하는 한 줄기 서광(瑞光)이 시
선을 바늘처럼 찔러오는 것을 느꼈다.  뭘까? 이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듯
한 성스러운 빛은.....? 그녀의 시선이 빛을 향했다.
  순간, 그들은 일제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보라! 구석에 웅크린 그의 몸으로부터 지금 한 줄기 서기가 구름처럼 솟아오
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파파팍--! 주위의 돌가루를 흩날리며 그의 몸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이
러한 광채를 사람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우의 손이 느릿하게 앞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자신의 손에 힘이 충만함을
느꼈다. 이제까지 알 수 없었던 무엇인가 신비로운 것이 그의 영혼을 끌어 당기
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조용히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가라, 힘!"
  악사도인의 발은 작두 끝을 막 밟아 누르는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제
단을 쌓아 올린 전면의 벽이 와르르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보았지만
이 주술의 명인은 자신의 눈을 차마 믿지 못했다.
  '벽! 만년곤철의 벽이?'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깨뜨릴 수 없다는  초극강의 물질이 부서져 나가는
것을 목격한 최초의 사람!  벽은 맥없이 허물어졌다.  와르르-- 쾅--!
  제단이 날려 나가고, 깃대가 부러져 나가고 그 밖에 그의 앞에 있던 모든 것
들이 날아 오르거나 휘말려 부숴지고 있었다. 그 속으로..... 악사도인은 하나의
희고 투명한 손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곧장 뻗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유성 같았다. 불로 지진듯 뜨거운 기운이 악사도인의 가슴을 태웠다.
  허나, 정녕 그런 것들보다도 악사도인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든 것은 자신
의 주술이 무기력하게 깨지고 있다는 아픔이었다.
   퍽--! 그의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악사도인은 그 가슴을
두 손으로 부둥켜 안으며 주춤 물러났다.
  "이제 겨우..... 배교의 재건이 시작..... 되었는데.... 이제 겨우.... 시작할 참이었
는..... 데....."
  눈앞으로, 한 개의 훤칠한 신형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솟구치는 핏
물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악사도인은 피묻은 손으로 그를 가리켜 보았
다.
  "너.... 너는..... 누구..... 냐!"
  사우의 뒤를 따라 벽을 나오던 인상인 중산이 히죽 웃었다. 그는 뒤따르는 철
마린에게 말했다.
  "그는 불행하게도 마지막 순간에 사우를 못 알아 보는군. 이것이먀말로 그가
죽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테지. 이제부터 나는 불경 대신 말해 줄테다. 무림에서
오래 살아남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사우란 두 글자를 좀 더 똑똑히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이야....."
  7. 제7장 악마상의 군무(惡魔像의 群舞)
  높이 십 장, 너비 삼 장, 거대한 악마상(惡魔像)이 서 있었다.   머리는 세 개
요, 그 머리마다 뱀을 머리카락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여덟 개의 팔엔 각기 다
른 무기를 들고 있으며, 아름드리 거목 같은 한쪽 발 아래엔 수천의 승인(僧人)
과 도인(道人)들이 짓밟힌 채 몸부림치고 있고, 다른 쪽 발엔 피로 물든 채 아
우성치고 있는 속세의 군상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끔찍한 악마상이었다.   이 악
마상의 아래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울긋불긋한 얼굴, 숱한 상흔이 지렁이처럼 이 얼굴에서 저 얼굴로 그어져 있
고, 그 이마의 정중간에는 불길 같은 붉은 화인(火人)이 찍혀 있었다.   횟가루
를 뒤집어 쓴 듯 무표정한 얼굴, 한당은 한 잔의 핏빛 술을 든 채 무심히 아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커다란 대전에는 수십 명의 전라소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흐느적이듯 복숭아빛 지체가 꿈틀거릴 때마다 붉고 푸른 불빛이
그녀들의 알몸 위로 번뜩이고 있었다.
  여인의 소중한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춤이요, 자세인데도 조금도 음란
하다거나 음탕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들의 치부가 드러나면 날 록
음울하고 스산한 가운이 대전을 휘몰아치는 듯 싶었다.
  이 나체소녀들의 몸을 율동케 하는 음악은 매우 느리고 단조로왔다. 귓청을
쉴 새 없이 찢고 거슬리는 짧은 피리며, 무겁고 둔중한 북소리, 그리고, 음울한
꾕과리 소리가 중간중간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한당은 묵묵히 아래쪽의 군무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일견 소녀들의 날씬
한 알몸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의 동공은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있
었다. 빈 허공 한쪽에 그 시선은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음악과 춤과 그
리고 한 잔의 술, 그가 앉아있는 단상의 아래에는 몸체부터 다리까지 모두 옥
(玉)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아름다운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탁자 위에는 역시 옥으로 만든 다섯 개의 독수리상이 서 있었는데, 음산한
음악과 춤이 그 절정을 다해갈 무렵, 홀연 첫 번째 독수리상의 목이 뚝 부러져
나갔다.   탁자 앞에 서 있던 한 명의 흑의옥자가 가볍게 안색이 변했다.
  "악사도인이 뚫렸습니다."
  한당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그는 마치 오래 전부터 악사도인이 뚫릴 것
을 알고 있었다는 듯, 또한 그에 대한 대비의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건조
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인기관(全人機關)을 발동하라."
  순간, 흑의옥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불가합니다!"
  "왜?"
  "전인기관이 발동하면 비록 저들을 분산시키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만약
그 관문까지 뚫리게 되면 적은 곧장 이곳까지 오게 됩니다. 그땐 더 이상 발동
할 기관이 없습니다."
  "황연(黃延)."
  한당은 여전히 감정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언제 내가 너보고 맡겨진 일 이외의 것을 간섭하라고 했느냐? 네가 할 일은
적의 관문돌파를 감시하는 일이지, 그 관문을 관장하는 일이 아니다."
  흑의옥자는 안색이 싹 변했다.
  "그러나.... 옥주....."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황연."
  황연의 얼굴이 거듭 변해갔다. 놀람, 당혹, 회의, 그리고 최후에는 탄식,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한 자루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당을 바
라보았다.
  "옥주, 그들은 이곳까지 오고 말 것이오."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검은 자신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파악--!
  자욱한 핏물이 번졌다. 시녀 하나가 다가와 황연의 시체와 바닥에 번진 피를
닦아냈다. 한당은 여전히 표정없는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탁자 건너편에 있는 또
한 명의 흑의옥자를 바라보았다.
  "기관을 눌러라."
  이미 황연의 죽음을 목격한 흑의옥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존명!"
  일순, 그는 우수를 쭉 뻗었다. 악마상, 붉은 야명주가 박힌 그 악마상의 오른
쪽 눈에 그가 쏘아낸 한 줄기 지력(指力)이 맹렬히 부딪쳤다.   순간, 아득한 먼
곳으로부터 느닷없이 한 소리 기이한 굉음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구우웅--
우우웅--  소리, 이 소리는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          *          *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기관의 달인인 색양이 의외의 죽음
을 당했으므로 중인들은 적지않이 당혹하고 있었다.
  "색양의 시신은 임시로 근처에 안치해 두는 것이 좋겠소. 그는 가족이 없으니
일이 끝나 후 묻어주는 것이 도리가 될것이오."
  사우가 침중한 어조로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돌연,  그그긍-- 한쪽의 석벽
이 스르르 밀려 오르더니..... 그곳으로부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쥐떼들이 와
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몇 백.... 몇 천.... 아니 몇 만!
  찍찍찍-- 쥐들은 석벽의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느닷없이 몸이 폭죽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팍--! 팍--!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터지면 터지는 대로!
피! 순식간에 공중에 자욱이 번져오르는 혈막(血幕)! 이 괴사(怪事)가 도대체 어
찌된 영문인지 깨닫기도 전에,
  "크하핫하하하하--"
  어디서 들려오는지 종잡을 수 없는 목소리 하나가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이
광소(狂笑)는 엄청나게 컸다. 중인들이 미간을 찡그리며 주춤 물러날 정도였다.
  바로 그때,
  우우우-- 위이잉--
  돌연, 온 석실 아니 온 세계가 빙글빙글 미친 듯이 돌기 시작했다.
  사우는 크게 놀랐다. 그는 다급히 몸의 중심을 잡으려 했으나.... 몸은 이미 걷
잡을 수 없이 허공에 떠올라 버린 뒤였다.
  돈다, 돈다. 미친 듯이 돈다.
  "사대가--!"
  자신을 부르는 채하의 음성을 언뜻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기관(機關)! 오오.... 이 거대한
지하세계가 바로 하나의 거대한 기관이었단 말인가? 과연 이럴 수도 있단 말인
가? 아득한 암흑, 그 무저의 공간을 향해 사우는 끝없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
다.
  *          *          *
  사우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는 뻑적지근한 오른쪽 다리를 한 차례 주물
러 본 후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어디일까? 사우는 어두운 허공을 한
차례 올려다 보았다. 자신이 떨어져 내린 공간,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는 부
풍요의 경공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한 줌의 핏덩이로 변해 있을 것이다.
  "굉장하군..... 굉장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됐을까?"
  사우는 품 속을 가볍게 더듬었다. 한자루 화린보검이 아직 건재한 것을 확인
하고 난 그는 먹물 같은 어둠이 깔린 앞길을 느릿하게 걸아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를 분산시키는 기관이었던 모양이다. 분산시켜 놓고 각개
격파하겠다는 얘기겠지. 한당, 지겨운 놈이로군. 그러나..... 우리의 뭉친 힘이 두
려워 분산시킬 정도라면 네가 있는 곳이 그리 멀지 않다는 말이 아닐까..... 좋
아! 기다려 주게, 한당. 널 실망시키지 않겠다.'
  이때 문득, 사우는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두 눈에 한 줄기 특이한 광채
가 떠올랐다.
  '이것은 살기.....?'
  살기, 전면의 어둠 속에서 풍겨온다. 그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웅크리고 있었
다. 사람? 아니다. 그런데 또 사람이다. 어둠에 눈을 익혀 그의 모습을 응시하던
사우의 두 눈에 가볍게 놀란 빛이 스쳐 지났다.
  '이건 또 뭔가?'
  사람은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서 있고 싶어도 서 있지 못하는 몸이었다. 
 그의 두 다리는 이미 몸에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왼쪽팔도 없다. 그에게
있는 것은 몸통과 그 몸통 위에 붙은 머리, 그리고 오른손 뿐이었다. 살기는 바
로 이 괴인에게서 풍겨오고 있었다. 괴인은 허리 아래에 한 자루 도를 차고 있
었다. 자세히 보면 유일하게 있는 오른손이 그 도의 자루 반치 위에 올려져 있
음도 알 수 있었다.  문득, 사우의 얼굴에 한 줄기 담담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알았소. 그러보 보니 당신은 바로 사도십병의 서열 네 번째인 무명도(無名
刀)구료."
  사도십병, 이것은 비단 무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사람일 수도
있었고, 때론 한 집단일 수도 있었다. 서열 십의 혈수마시, 서열 구위 사인마창,
서열 팔위 삼월동풍륜, 서열 칠위 사골마부, 서열 육위 혈혈귀망, 그리고 서열
오위 악사도인의 냉환신경을 잇는 서열 네 번째의 무명도, 이것은 온 천하에서
가장 빠른 발도(發刀)라 했다.
즉, 무명도의 뽑히는 순간은 아무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다만 볼 수 있는 것은
한 줄기 차갑게 번뜩이는 도의 광채 뿐이라 했던 것이다.
  '사지 중 유일하게 오른손만 남아 있다는 것은..... 바로 신체의 필요없는 부분
을 없앰으로서 도를 뽑는 발도의 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겠다는 의도.....
그렇다. 무명도는 바로 저 괴인의 오른손이다. 저 오른손에는 상상도 할 수 없
는 힘이 숨어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난 사우는 싱긋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앉아서 무얼하고 있소? 재미있는 이야기 상대라도 기다리고 있단 말
인가?"
  일순, 앉아 있던 무명도의 눈이 번쩍 떠졌다. 떠졌다 싶은 순간, 슈팍--!
  뭘까? 한 줄기 상상도 할 수 없는 광채가 뻗어나온다. 도, 그러나 그 빠르기
는 이미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한계를 뛰어 넘은 극한의 빠름이었다.
  쐐애엑--! 그저 도가 꽂혀 있던 허리춤과 사우의 심장을 일직선으로 뻗어오
는 절대쾌검. 헌데 이때, 사우의 걸어나가던 몸이 그 자리에 뚝 멈추어졌다. 날
아오는 도를 보고도 그는 다만 조용히 웃어보였을 뿐이다.
  순간, 도는 그의 심장과 꼭 반 치의 거리를 두고 뚝 멈추어졌다.
  무명도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반면에, 사우는 담담하게 웃었다.
  "대단한 빠름이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당신은 걸을 수가 없으니 그 도로 더
이상 날 찌를 순 없겠구료."
  거리, 그렇다. 무명도는 한 손 이외에는 몸의 모든 기관이 없으므로 지금 뻗
어낸 것이 그가 뻗어낼 수 있는 가장 긴 거리였다. 애초에 그는 사우가 한 걸음
더 걸어나올 것을 계산하고 도를 펼쳐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사우가 걸음을
멈춤으로 하여 아무 쓸모도 없는 헛손질이 되고 만 것이다.
  사우는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도를 한 걸음 비켜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당신이 발도의 최고수란 것은 나도 인정하겠소.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면 나
는 당신의 도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은 어디까지나 발도의 고수
이지, 이미 펼쳐낸 도를 거두었다가 다시 펼쳐내는 데는 나를 따를 수 없을 것
이오."
  "....."
  "나는 당신이 부디 그렇게 그냥 있어주길 바라오. 그렇지 않고 약간이라도 
도 끝을 까딱한다면 당신의 목숨은 애석하게도 보장할 수 없게 되오."
  사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무명도의 옆을 느릿하게 스쳐 지났다.
  무명도는 도를 내민 자세 그대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어
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도를 한 번 떨쳐냄으로 하여 그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상대는 죽거나 무릎을 꿇었으니까. 하지만, 그 도
가 지금은 아무 위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명도는 치미는 노기
로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순간, 그는 발작적으로 몸을 올리며 수중의 도를 맹
렬하게 쳐냈다. 허나, 그의 동작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목에 검이 박힌 사
람은 사실 도를 휘두르든 뭐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사우는 무명도의 목에 박은 화린보검을 뽑아내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째서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잘 것 없는 용기를 시험해 보길 좋
아 할까..... 안 되는 것인 줄 알 때는 더욱 더 해보고 싶어한단 말이지....."
  검에서 한 줄기 핏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은 마치 투명한 거울 위로 붉
은 물감을 굴러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          *          *
  다섯 개의 옥응상(玉鷹像) 중에 두 번째의 것이 뚝 목을 꺾었다. 그 앞에 꿇
고 있던 흑의옥자가 침중하게 단상의 한당을 향해 외쳤다.
  "무명도가 뚫렸습니다."
  한당의 얼굴에서 담담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한 잔의 술을 소리내어 쭉
들이키고는 무표정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오는군..... 사우, 이 나를 향하여 네가 오고 있군..... 오라..... 나는 너를 기다리
고 있다....."
  춤이 점점 더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의 춤이었다.
  *          *          *
  "헉헉....."
  인상인 중산은 지금 거의 환장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는
지금 오십 명의 아름다운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몸에 실
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런 알몸의 소녀들이었다. 이 소녀들은 인상인 중산
을 둘러싸고 너울너울 알몸의 춤을 추고 있었다.
  이곳은 한 개의 거대한 대전이었는데, 이 안에는 비단 춤추는 알몸의 소년들
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전의 좌측에는 각종의 악기를 품에 안고 있는 이십
여 명의 악녀(樂女)들이 있었고, 다시 그 옆으로는 검을 비껴 든 오십여 명의
소녀들이 우뚝 서 있었다.
  소녀천국, 무려 백이십 명의 소녀들이 도사린 곳이다 보니 대전의 안은 여인
의 체향으로 가득 찬 듯싶었다. 악기를 든 악녀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심
산유곡에 벽수가 소리내어 흐르 ,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그지없이 청아하
고 아름다운 목소리. 그러나, 이 아름다운 목소리들이 토해내는 가락은 차마 맨
정신으론 귀담아 듣지 못할 정도로 음란하고 더러운 것이었다.
  인상인 중산은 비록 이런 것들을 눈으로 볼 순 없었지만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환히 알 수 있었으므로 땀을 흘리며 외쳤다.
  "제발..... 아미타불..... 그런 노래와 발가벗은 여자들을 좋아하는 놈은 따로 있
소. 당신들이 원한다면 소개시켜 드리지. 응? 그는 사우란 사람으로서....."
  이때였다. 검을 한 손에 받쳐든 채 석상처럼 서 있기만 하던 검녀(劍女)들이
돌연 후르르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들이 향하는 곳은 인상인 중산도 아니
오. 그렇다고 텅빈 허공도 아니었다. 검녀들은 제각기 벌거벗고 있는 나녀들의
뒤로 사뿐 내려 앉았다.
  이어, 나녀들과 더불어 몸을 어울리기 시작하니, 오오! 그들은 마치 한 몸이
된 듯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순간 인상인 중산은 보이지 않는 동공을 꿈틀거렸다.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
었다.
  '이것은..... 사도십병의 세 번째 무기 혈혈마무(血血魔舞)?'
  혈혈마무, 백이십 명의 탕녀(蕩女), 그 중 상음(上陰)이 성(盛)한 탕녀에겐 악
기를, 중음(中陰)이 성한 탕녀에겐 검을, 하음(下陰)이 성한 탕녀에겐 춤을 추게
했다.   이것은 하나의 전설이었다. 백이십 명의 탕녀들이 각기 백 명씩의 남자
와 교접을 하여 그 양기를 흡수한 후, 백 일의 어둠 속에서 오독(蜈毒)의 독물
(毒物)과 더불어 접촉하여 탄생한다는 혈혈마무.
  세상의 어떤 것이든 이 마공을 이겨 낼 수 없다 했다. 또한 이 마공과  시선
만 마주쳐도 정욕의 노예가 되어 지닌 정기(精氣)를 다 발산할 때까지 음행(淫
行)을 멈추지 못한다 하였으니.....
  "아아....."
  나녀들이 추는 춤은 갈 수록 관능적이고 음란해졌다. 그녀들은 아예 알몸임을
자랑이라도 하듯 아무 데서나 넙죽넙죽 발을 들고 휘저으며 인상인 중산의 몸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이때 살랑살랑 눈 앞까지 다가온 나녀의 몸 뒤에서 느닷없이 시퍼런 검날 하
나가 쑥 솟구쳐 나왔다.
  슈슉--! 검이 쏘아오는 맹렬한 파공음!
  나녀의 뒤에서 춤추고 있던 검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인상인 중
산은 가슴이 섬뜩하도록 놀라 황급히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러나 순간, 파악
--! 검날에 의해 그가 목에 두르고 있던 염주알이 반으로 쪼개져 날았다.  촤악
-- 그러나, 일검을 피했다고 멈칫거릴 시간도 없었다. 한 명의 무녀가 살랑거리
다가 다리를 쭉 들어 올리는 순간, 그 속에선 마치 치부에서 솟아나오듯 새파란
검날이 또 다시 뻗어 나왔으며, 어떤 무녀는 겨드랑이 옆에서, 어떤 무녀는 합
장한 손 끝에서 와르르 날카로운 검광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인상인 중산은 급히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한 줄기 진기를 끌어 올
리자 마자 인상인 중산은 무섭도록 강렬한 욕정이 가슴을 치밀고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는 검을 피하는 게 아니라 하마터면 검쪽으로 몸을 날릴 뻔했다. 검
의 끝엔 정욕을 갈구하는 여인의 나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찌직-- 파팍--!
  두 자루의 검이 그의 옷을 간일발의 차로 찢고 지났고 또 다시 세 자루의 검
이 그의 양 허벅지와 어깨를 베고 스쳤다.
  "으윽--!"
  인상인 중산은 다급해진 김에 피를 흩뿌리며 몸을 뒹굴었다. 그는 다섯 여 의
 가랑이 사이로 몸을 굴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불문의 제자답게 그는 여인들의 가랑이 사이를 지날 때 눈동자도 없는 퀭한
동공을 예의 바르게 감아 주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는 두 개의 검을 더 맞아
야만 했다. 이번에는 또 흉부어림과 엉덩이였다. 인상인 중산은 온 몸에 피칠을
한 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검에 찔린 전신
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때 몽롱한 코 끝으로 언뜻 한 사람의 냄새가 빠르게 빨려 들어왔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대전의 우아한 기둥에 팔짱을 낀 채 히죽
웃고 있는 사람, 코 끝을 킁킁이던 인상인 중산은 비명 같은 외침을 터뜨려 냈
다. 
  8. 제8장 피의 축제(祝祭)
  사우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또 네가 알몸의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내 이름까지 잊고 있는 줄 알았
구나."
  "그럴 리가 있나, 친구여."
  이때, 다시 또 세 자루의 검이 자신을 노리고 찔러 왔으므로 인상인 중산은
질겁할 듯 몸을 날려 피하고는 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냥 보고만 있기냐, 이 무정한 친구야!"
  사우는 히죽 웃었다.
  "너도 공격을 하면 될 게 아니냐?"
  "공격이라고? 맙소사, 이 안으로 좀 들어와 보게. 이 아름다운 소녀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하단 말이야."
  말을 잇는 동안에 그의 허벅지에는 다시 한 자루의 검이 박혀 들었다. 이번의
일검은 아예 인상인 중산의 허벅지를 앞에서 뒤로 관통해 버렸다.
  "어이쿠!"
  인상인 중산은 참혹한 비명을 토하며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허나, 소녀
들은 그의 말마따나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았다. 쓰러지는 그의 위로 또 다시
무서운 사검이 떨어져 내렸다.   쐐애액--! 사우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중
얼거렸다.
  "하긴..... 네 말도 틀린 것은 아니군. 이 소녀들은 마치 미친 개처럼 사나우니
까."
  중얼거림이 끝나는 순간, 그는 이미 인상인 중산의 몸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는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검 한 자루를끌어올려선 소녀들의 사검을 막아냈다.
  차창-- 창--!
  소녀들은 뜻밖의 침입자가 자신들의 검을 막아대자 동그란 눈을 치떴다.
  "넌 누구냐? 어디로 들어왔지?"
  "구경거리가 있다면 어디든지 마다않는 사람이지."
  선두에 서 있던 두 명의 나녀가 아미를 치켜 올렸다.
  "죽어!"
  순간, 그녀들의 뒤에서 새파란 검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뻗어 나왔다.
   슈욱--!
  사우는 빙글 몸을 돌려 피하며 히죽 웃었다.
  "이거 사람을 차별대우 한단 말이지. 돌팔이 땡중 놈에게는 벌거벗은 황홀한
춤을 구경시키고 나는 구경시켜주지 않는단 말인가?"
  "죽일 놈!"
  선두에 선 나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우
수를 휙 휘둘렀다.  순간 이 인이 일조가 된 일백의 나녀, 검녀들은 후르르 허
공을 날아 사우를 담싸듯 에워싸더니 일대의 공포무, 혈혈마무를 이어가기 시작
했다. 음탕한 노래와 치부가 드러나는 춤, 너울너울 흐느적이는 사지 속에 무서
운 살인의 열락이 숨은 춤, 이 혈혈마무의 무서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보
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일단 보게 되면 눈을 떼지 못하
게 되고 그 짧은 순간 마무의 정기에 취해 이성을 잃게 된다.
  무림인라면 그는 즉시 끌어 올리고 있던 공력을 모조리 흐트러뜨리게 되는
것이었다. 허나 이때, 춤이 시작되자 사우는 소녀들 속을 유유히 걸어 다니며
히죽히죽 웃어댔다.
  "허어, 좋구나 좋아. 음, 그래. 너는 엉덩이가 예쁘군."
  그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웃으며 중얼댔다.
  "너는 종아리가 좀 덜 빠졌는데, 자고로 여자란 종아리가 예뻐야 시선을 끄는
법이니까."
  "허어, 민망스러워라. 숙녀가 그렇게 다리를 벌려도 된단 말인가? 여자란 좀
숨기는 맛이 있어야 돼. 그렇게 대낮에 멋대로 벌려대면 남자들은 곧 식상하게
되지....."
  나녀들은 기가 막혔다. 뭐 이러 괴물 같은 자식이 있단 말인가? 남들은 시선
만 닿아도 즉시 온 몸의 기력을 잃어버리고 죽여줍쇼 목을 내미는 천하의 혈혈
마무 속에서.....
  그것도 싱글싱글 웃어가며, 때론 소녀들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겨 가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녀들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깨물었다.
  이어, 혈혈마무의 공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살벌하게 파동치는 살인의 바
람, 피가 나도록 외쳐지는 죽음의 노래.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춤이 더 강렬해지자 사우는 더욱 신이 나서 소녀들의 나체 속을 헤집고 다녔다.
  "안 됐다, 안 됐어. 너는 젖이 너무 크구나. 젖은 송아지나 큰 법이지, 인간의
자녀들은 젖이 커선 안 되지."
  "살 좀 쪄라, 살 좀 쪄. 너는 마치 삐거덕대는 나무조각 같구나. 너처럼 마른
아이와 자느니 많은 남자들은 철사로 만든 인형을 택할 것이다."
  한쪽에 벌렁 드러누워 있던 인상인 중산은 상처의 고통도 잊고 피식 웃었다.
  "도깨비 같은 놈. 도대체 네 놈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사우야, 사우. 너의
빌어먹을 무예는 어디가 그 끝인가? 이제는 끝났겠지 싶으면 넌 또 다른 모습
을 보이고, 끝이겠지 싶으면 다른 모습을 나타내어 이 돌 중을 어리둥절하게 만
들고 마는구나....."
  중얼거림을 있던 그는 돌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망할 놈아! 그렇게 장난만 치기냐? 나는 그 사나운 계집들에게, 아니.....아
니지..... 아미타불..... 그 사나우신 여시주들에게 십이검이나 찔렸단 말이다. 천하
의 중산이 절름발이가 될지도 모른다는데 그렇게 태평히 웃어댈 거냐?"
  순간, 사우는 껄껄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쁜 놈 같으니, 그런 식으로 남의 좋은 일을 방해한단 말이지."
  말을 잇자마자 돌연, 그의 신형이 질풍처럼 변했다. 그는 마치 한 줄기 표홀
한 바람처럼 소녀들 속을 헤집고 누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라! 그는 다만 손을 슬쩍슬쩍 휘젓고 있을 뿐인데, 그가 지나가는
곳의 소녀들은 무엇에 얼어 붙기라도 하듯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버리는 것
이 아닌가?   손, 그 손이 발휘하는 무예는 신비로울 정도로 정교하고 빠른 점
혈수법(點穴手法)이었다. 이 손은 한치의 어김도 없이 소녀들의 마혈(痲穴)을 점
하고 있었다.
  얼음 속에 갇히듯 굳고 또 굳어 버리는 나체들, 이 시간은 차 반 잔 정도 마
실 시각도 걸리지 않았다.   한 순간, 사우는 허공을 맴돌 듯 솟아 나와선 인상
인 중산의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난 한 가지 사실을 확증했지."
  "뭘 말인가?"
  "우린 이 안에서 벌써 사도십병의 세 가지나 목격했단 말이야. 오면서도 다섯
가지나 목격했지."
  "그렇군."
  "즉, 이 마중뇌옥은 바로 사도십병의 본거지였단 얘기지. 자네는 사도십병의
남은 둘째와 첫째가 무엇인지 아는가?"
  인상인 중산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을 이었다.
  "첫재 무기는 비표이지. 천하에서 가장 빠른 암기, 손을 펼치면 적은 이미 쓰
러지고 있는 혈견휴표리도(血見休飄離刀)가 아닌가?"
  "좋아, 그럼 두 번째는?"
  "검이라고 들었네. 한 자루 환상의 검, 단 일초의 검식 뿐이지만 펼쳐내면 적
이 죽기 전에는 도저히 거둘 수 없는 그런  죽음의 검, 병기지왕(兵器之王) 묵
옥청상(墨玉靑霜)이 아닌가? 하지만 사실 이 두 개의 무기는 거의 우열을 가릴
수 없지....."
  "맞았어."
  사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혈견휴표리도와 묵옥청상, 난 그 두 무기 중 하나의 주인이 바로 한당일 거
라 짐작하네,"
  "한당이라고? 그럼 다른 하나는?"
  "그건 모르지. 아무도 알 수 없을 걸세.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우는 씩 웃었다. 웃으며 그는 말했다.
  "한당은 드디어 우리의 지척에 다가와 있다는 걸세."
  *          *          *
  파악--! 세 개째의 독수리상이 목을 꺾었을 때 한당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
다. 세 번째의 응상은 바로 혈혈마무를 말한다. 응상은 이제 두 개가 남았다. 그
하나는 자신이다. 그럼 남은 하나는? 한당은 손에 든 잔에 남은 술을 쭉 들이키
고는 무표정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오지 않을 것이다.....왜냐하면 이미 대세는 기울었기 때문에, 그녀
자신이 이토록 강한 자들을 보내는 우를 범했기 때문에....."
  그는 등 뒤의 악마상 발톱에 걸어 놓았던 자신의 병기를 내려 들었다.
  검, 그것은 바로 한 자루의 검이었다. 검신에 새겨진 아홉 마리의 검은 묵룡
위로 안개가 어슴푸레 둘러 있는 그런 검은 광채의 검.
  묵옥청상! 사도십병의 서열 두 번째 무기! 한당은 느릿하게 묵옥청상을 뽑아